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주인공 팬더 포가 셴 선생과 대결하는 장면이다. 셴은 쿵푸를 멸절시키고 온 나라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비밀병기를 만들어 쿵푸 사부들을 하나 둘씩 제거하고 있었다. 그 무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에서 팬더 포는 대포알을 손으로 받아 되던지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수의 모습이다. 사부인 시푸가 이슬방울을 받아 옮기는 수련을 하면서 `내면의 평화`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 전부였다.
팬더 포는 사실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분노와 원망, 미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 안에 있었던 나쁜 추억, 아픈 기억, 상처를 내면의 평화로 승화함으로써 결국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됐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내면의 평안을 잃어버리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정확한 상황판단이 이뤄지지 않고, 넓게 보지 못한다. 분노는 급한 결정을 이끌고,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막는다. 분노와 용서하지 못함은 다른 사람을 괴롭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말라”(에베소서 4:26-27)고 권면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쓴 뿌리들이 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픈 기억, 용서하지 못하는 사건과 사람들. 그것들이 오늘 나의 삶에도 영향을 주어 작은 화를 큰 분노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별것 아닌 일인데 괜히 크게 소리치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분을 발하게 되고, 평정심을 잃어 실수하게 된다.
용서는 용서 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용서는 용서한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이다. 자신 안의 화가 녹아내리고, 상처와 모욕이 씻긴다. 평안이 찾아온다. 따라서 용서의 최고 수혜자는 상대방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 된다.
용서의 문제는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반응의 문제이다. 과거에 경험한 사건, 다툼, 싸움, 모욕당함, 학대받음, 기분 나쁜 말은 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반응인 원한, 분노, 증오, 상처, 격분은 변할 수 있다. 용서는 바로 이러한 부정적 반응을 바꾸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쓴 뿌리를 제거하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수련이 내적 평안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내면의 평안(inner peace)은 영적인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선포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14:27)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편안(便安)은 주지만, 평안(平安)은 주지 못한다. 세탁기, 자동차, 핸드폰 등 현대과학이 생활의 편안함을 주었지만, 예전보다 우리 삶이 더 평안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평안은 다른 차원, 용서와 화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우리는 어디서 맛볼 수 있는가. 예수님을 통한 사랑과 용서야 말로 내적 평안의 원동력이다.
내면의 평안이 주는 힘은 영화에서처럼 실로 엄청나다. 분노와 상처의 기억을 제거하고 참 내면의 평안을 얻음으로 행복하고 보다 활기찬 삶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