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생전에 그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본 적도 별로 없고 그의 팬으로 열성적인 반응을 보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의 팬임을 공공연히 밝힌 적 없는 수줍은 팬일지언정 마음속에서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뮤지션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나는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앨범 3집 CD를 자동차에 장착해 놓고 매일 같이 들었다. 지금은 운전을 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난폭한 운전사였다. 나는 그의 노래들 「사계」나 「얼마나」나 「빙고」나 「아지와 양이」같은 곡을 너무 많이 사랑했다.
심지어 나는 그가 세상에 없는 슬픔을 이기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너는 바다로 떠났지”라 문장으로 시작되는 시를 써서 그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아직 발표하지 못했고 시집에 넣지도 않았고 더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시에서 거북이는 선글라스를 끼고 바다로 떠나면서 고개를 돌려 우리들에게 팔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보이며 씩 웃고 있다. 내 상상 속에서 그는 아직도 저 열대의 파란 바닷물 위에 둥둥 떠서 뱃가죽을 드러낸 채 머리에 깍지를 끼고 누워 뜨거운 태양빛을 즐기고 있다. 거북이는 파충류니까 이렇게 뱃가죽을 드러내는 게 위험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또 배가 뜨거워지면 몸을 사뿐히 뒤집어 물속에 잠수해 들어가면 되니까 염려는 붙들어 매도 좋을 것이다.
왜 나는 이렇게 거북이 임성훈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내 기억 속에 세상과 나의 만남의 과정을 반추해 보도록 하는 가수가 세 사람이 있다. 하나는 김현식, 다른 하나는 김광석,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거북이 임성훈이다.
내가 어떤 이상주의에서 절망을 느끼며 빠져나오려 할 때 그 이상의 독에서 얻은 상처와 미련과 슬픔을 반복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였다. 그 무렵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덧없음의 미학이 횡행하는 서울의 밤거리에 울려 퍼지는 그의 짙은 음색에 매료되었다.
그러고 나자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다. 1964년생인 그가 의문의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때는 1996년. 그때도 나는 이상의 패배자로서 독한 전염병에 걸려 추방된 사람의 심정을 곱씹고 있었다. 그런 나와 꼭 같은 세대에 속하는 김광석을 공공연히 추모하는 이들은 오히려 나보다 몇 년쯤 후배 세대에 속하는 `고통 모르는` X세대들이었다. 그들에게 김광석은 낭만적 사랑의 패배자로 이해되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숨어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으면서 이 사랑은 결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광석은 우리들의 큰 사랑이 실현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우울과 슬픔을 충만하게 수용하여 표현해 주었다.
그 후, 이제 세상에 겨우 적응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나에게 임성훈의 노래와 죽음은 전혀 다른 삶의 길이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때 나는 니체를 읽고 그가 말하는 삶에 대해, 삶의 명랑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임성훈은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니체처럼 보였다.
니체의 생각은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대의는 비교적 명쾌하다. 삶은 초월적인 가치에 의해 짓눌려서는 안 되며,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끌려 다녀서도 안 된다. 삶은 그것이 시작될 때부터 삶 자체의 충만한 생명력을 향유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누릴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을 빼앗기지 말라. 이 힘을 자각하고 발산하면서 살라.
거북이 임성훈이 말한다. 기쁠 때는 높이뛰기 선수가 되고 슬플 때는 눈물까지 멜로 배우가 되라. 네가 먼저 세상을 사랑하라. 이민 따윈 생각 마라. 슬픔에 빠지지 말라.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갈 힘이 있음을 알라.
그의 노래 가사에, 그의 리듬에, 이 교리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가난이, 불합리가, 부당함이 우리들의 이 근원적인 생명력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