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 김일성의 한국전쟁을 승인한 스탈린이 죽었다. 그의 권좌를 받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치며 미소(美蘇) 평화공존 노선으로 나섰다. 중국이 분개하여 그를 `수정주의자`로 난타했다. 1963년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격렬한 중소(中蘇)논쟁이 벌어졌다. 흐루쇼프의 실각으로 1965년 브레즈네프가 크렘린의 주인으로 등극하고, 마오쩌둥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의 길로 치달았다. 중·소의 반목과 대립은 1969년 3월 우수리강변 무력충돌을 시작으로 몇 차례 국경선의 국지전을 야기했다. 국경선을 따라 200만여 명의 양국 군대가 대치했다. 그 일촉즉발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적(소련)의 적(미국)은 친구다`라는 전략으로 치밀하고 대담하게 미국에 다가갔다. 중국 홍군의 대장정 시기에 자신의 숙소까지 불러들여 저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최고 르포 저서를 쓰게 만들었던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까지 베이징으로 초대하더니, 드디어 `죽의 장막`은 1972년 2월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베이징 방문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주에 한국 언론은 날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소식을 크게 다루었다.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한 사실 보도에서부터 누구를 만날 것이며 노림수는 무엇인가에 대한 온갖 추측들을 쏟아냈다. 원자바오 총리는 도쿄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북한이 중국의 발전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자신들의 발전에 활용하기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했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은 외교적 수사(修辭)로 눙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수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양정권을 개혁과 개방으로 끌어내고 싶다는 진심도 담았을 것이다.
중국에게 북한은 부담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친구다. 한국에게 북한은 반드시 친구로 만들어야 하는 동포다. 중국에게 미국은 경쟁해야 하는 친구다. 한국에게 미국은 반드시 필요한 친구다. 북한에게 한국과 미국은 어떡하든 친구로 만들어야 하는 상대다. 결국 `친구의 친구는 친구다`
한국에서 정권은 짧고 남북관계는 길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전략은 길게 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삼는다. 핵포기니 세습이니 시끄럽지만 동북아의 안정을 추구하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은 북한을 개혁개방체제에 연착륙시켜야 하는 시대적 공동과제를 슬기롭게 풀고 도와야 한다. 북한이 개혁개방체제의 연착륙에 성공해야만 그때 비로소 남북의 휴전체제는 평화제제에 안착할 수 있고 진정한 교류와 협력의 길을 열 수 있다. 그에 따라 북한 인권문제를 개선할 환경도 조성된다. 한국도 배고플 때는 인권문제를 후순위로 미뤄두지 않았었나. 또한 통일을 생각해도 북한이 어느 수준으로 올라와야만 하는데, 북한이 개혁개방체제에 연착륙하지 못하면 한국이 북한을 감당할 능력은 몹시 모자란다.
분단의 회갑을 넘긴 남북관계는 그 동안에 쓰라린 우여곡절을 숱하게 겪었다. 그래도 남북관계에서 언어와 문화와 역사의 동질성은 어떤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한국의 외교적 역량은 `북한의 개혁개방체제 연착륙 성공`에 집중돼야 한다. 현재의 조건에서 그 일의 선두에 설 적격자는 중국이고, 한국은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을 적극 거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은 중국의 편이 아니라 민족의 편`이라는 긴 안목이 없으면 착상할 수 없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