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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의 비애

영남이공대 교수
등록일 2011-05-26 21:08 게재일 2011-05-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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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角田房子의 `나의조국` 중 우범선가족. 가운데 어린이가 우장춘박사. ② 향원정 뒤로 보이는 건청궁과 북악산. ③ 건청궁 일곽
필자는 가급적이면 비오는 날 궁궐을 찾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나마 담고 싶은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건청궁을 찾았을 때도 비가 내린 탓으로 주변이 정말 조용했다. 이곳만 찾으면 왠지 참았던 격분이 울컥 치밀어 오르곤 한다.

문화재청이 2007년 10월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원으로 건청궁(乾淸宮)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북쪽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다. 궁 안의 궁이라고도 불리는 건청궁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이 사비를 털어 1873년에 지은 건물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이 건물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고 사랑채와 안채 등이 사대부 살림집과 유사한 구조로 돼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향원지를 앞에 두고, 동측엔 수림으로 우거진 녹산이 있는데 녹산에서 우백호 인왕산, 좌청룡 낙산, 남주작·남산의 자연을 조명할 수 있는 빼어난 경관구조를 이루고 있다.

고조 광무제가 건청궁을 짓고 나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서양 문물을 수용해 1887년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ㆍ일본보다 2년 앞선 것이기도 하다. 이 때 중국식 벽돌로 서재로 쓰인 집옥재를 지었고 궁궐 내 최초의 서양식 건축 관문각을 지어 외교관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건청궁내 왕의 거처인 장안당은 반가의 사랑채에 해당하고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은 안채에 해당하는 곳으로 두 건물 사이를 아름다운 복도각으로 연결해 놓았으며 궁 앞의 향원지에는 섬을 만들어 그곳에 향원정을 지어 궁궐 후원의 정취를 한층 더 높여 놓았다.

1990년 일본인 여류작가 쓰노다 후사꼬(角田房子)가 쓴 `나의 조국` 에서 명성왕후 암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이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에 남긴 우범선 가족의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사진 중에 어린이가 바로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박사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가 바로 명성왕후 암살에 가담한 우범선인 것이다. 구중궁궐 속에 왕비가 거처한 곳을 일인들과 내통한 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들이 닥쳐 궁궐 수비대 일행을 살해하고 건청궁으로 곧장 쳐들어가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명성왕후를 시해한 후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협문 밖 나지막한 녹원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던 것이다. 사건 직후 일본 육군참모부에 보고한 극비 전문에 의하면 `왕비를 끌어내 2~3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발가벗겨 국부검사를 했다`고 한다. 일국의 왕비가 괴한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한 치욕의 장소가 바로 이 건청궁이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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