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 반에 떠나는 티웨이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내려 처음 찾아간 곳은 동문시장의 순대국밥집. 제주도 출신 사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있었다는 그 집은 50년 전통을 자랑한다. 돼지고기로 유명한 제주도 음식. 담백하면서도 국물맛이 깊다.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차귀도라는 곳으로 간다. 이 섬은 제주도에 딸린 무인도로서는 가장 크다. 우리는 낚싯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적당한 곳에 닻을 내린다. 선장이 시키는 대로 낚싯대를 드리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수확이 많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장모 선생님은 손바닥보다도 큰 쥐치를 끌어올리기도 하고 잡학의 귀재로 알려진 김모 선생님은 일곱 마리씩이나 끌어올린다. 그 사이에 제주도행 전부터 장염 증세를 앓고 있던 필자는 뱃머리에 걸터앉아 배멀미를 하고 있었을 뿐. 선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가 일행들이 잡은 물고기를 회로, 매운탕으로 요리해 준다. 잡은 물고기들을 다 살려주고 싶었다는 장모 선생님은 스스로 살생을 지은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풍림 리조트로 가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찾아간 곳은 영실. 이곳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둔내코 쪽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50대 후반에 들어선 장모, 김모 두 선생님은 그런 날씨에도 산행을 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방수 등산복에 등에 짊어진 배낭을 덮을 방수포에 우산까지. 제주도 출신 사내와 나는 아무 것도 없다. 총도 안 들고 전쟁터에 나온 볼썽사나움이란. 우비를 산다, 우산을 산다, 소란을 피우고 산으로 들어가자 가파른 경사가 계속된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힘이 부치는 바람에 절벽, 바위가 일품인 영실기암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층층이 수종이 다양하다는 한라산 평판답게 이곳의 나무와 풀들은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이곳저곳 무더기를 이루면서 피어 있는 산철쭉들은 산 아래 철쭉과는 모양도, 빛깔도 다르다. 서울의 철쭉들은 분홍빛이라기엔 너무 빨갛고 꽃송이도 커서 귀한 맛이 없는 반면, 이곳 철쭉들은 한결 정제된 빛깔에 꽃송이도 작아 한데 뭉쳐 있어도 귀해 보인다. 갑자기 넓고 평평한 지형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윗세오름으로 가는 산들판 길에는 노루가 살고 그네들이 물을 먹으러 오는 노루샘이 있다. 노루샘 물은 우리 네 마리 목마른 노루들에게 달고 달다. 시간을 지체한 까닭에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엔 한 폭 수묵화 같은 풍경. 비가 적당히 그치고 안개도 조금 더 걷혔다. 하지만 한라산 할망은 자신이 빚은 풍경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날, 우리는 쇠소깍에서 외돌개로 이어지는 제주 올레길 6코스, 14.4㎞에 도전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다. 그러나 쇠소깍이나 외돌개 모두 풍경 좋기로 유명한 곳. 이곳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포기할 수는 없다. 독특한 지명만큼이나 아름다운 쇠소깍에서 외돌개까지는 바닷길의 연속이다. 바다를 따라 나 있는 올레길은 오르락내리락 평화롭고도 한적하다. 때로는 툭 트여, 때로는 수풀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세찬 비바람 속에서 우산도 버리고 우비에 붙어 있는 모자도 벗어버리고 그냥 걷는다. 비가 신발을 적셔 철벅철벅 소리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아무 거리낌이 없다. 산딸기, 엉겅퀴, 나팔꽃, 토끼풀, 유도화, 귤꽃…. 마침내 외돌개가 건너다보이는 절벽 위에 당도한다. 우리는 저마다 고독한 사내들이 되어 바다를 바라본다. 비바람 속에서, 이 자연의 지극한 아름다움 속에서 잠시나마 속세의 풍진을 잊을 수 있었음을 고마워한다.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떠나는 건 기쁜 일이다. 더 때가 늦기 전에 여행자가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