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뿐 아니다. 공원 벤치에서 소년의 넙적다리 위에 앉아서 진한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 세대들을 보는 것이 더 이상 낯선 풍경은 아니다. 한번은 보는 사람이 오히려 민망해 할 즈음 성미 급한 노인네가 이들을 보고 “야, 너 몇 살이냐?” 하며 핀잔을 주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춘향이 이몽룡과 사랑 놀음을 하던 당시 그들의 나이는 방년 십육세였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중학 3학년이나 고교 1학년쯤 된다. 지금 세상에 비하면 그 시절은 보는 것 없고 듣는 것 없던 때였다. 그래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집 장가가서 아들 딸 낳고 살았다. 정신적 육체적 성장이 훨씬 빨라진 세상이다. 인터넷을 열면 19금 음란물과 포르노가 지천이고 휴대폰으로도 온갖 성인물이 제공되며 초등학생들도 다 보는 야동만도 넘치고 밟힌다. 지금 젊은이들을 어린 것들이 버릇없다고, 철없다고 나무랄 수만도 없는 이유다.
법적으로도 만 19세면 성년이다. 사법상 행위의 주체가 되며 선거권을 갖게 되니 독자적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나이가 어려서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고 장소가 있다. 춘향이가 이도령과 사랑 놀음을 한 곳은 춘향이 집 안방이었고 바바리맨이 처벌받는 것은 그 행위를 남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서나 음란물 상영하듯 사랑 놀음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평화로운 시선 처리를 방해하고 시신경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년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이 찼으니 어른일까. 쓴 소주를 마시면서 `크, 달다` 하고 뜨거운 탕 속에 몸을 집어넣으면서 `아, 시원하다` 하면 성년이 되는 것인가. 결혼했으니 어른이 된 듯도 하고, 자식을 낳았으니 어른이 된 듯도 하다. 옛 사람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들 혼사를 치러야 하며, 부모상을 당해봐야 하고, 집을 지어봐야 한다고도 했다.
개인이 이전 지위에서 단절돼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을 통과의례라고 한다면 미성년의 신분에서 새로운 성인의 세계에 들어오는 데도 나름의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미성년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도 그런 통과의례는 시대와 대륙이 달라도 문화마다 존재해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성인으로 인정받는 길은 혹독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중에는 등의 살을 화살로 꿰어 거기에 통나무를 묶어 언덕을 오르게 했다고 `세계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장영진)는 기록해 놓고 있다. 미국 산타페에 있는 뉴멕시코 박물관에 인디언 풍속화도 같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우리 선조들도 혹독한 성인식을 거쳤음을 위지 동이전 같은 역사서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외줄에 매달아놓고 한참을 돌려댄 다음 땅에 내려서게 해놓고 비틀거리지 않고 바로서거나 또는 마을 앞 공터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돌을 들어 올림으로써 힘을 과시함으로써 인정받기도 했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삼각산 백운대 정상의 틈이 벌어진 바위산을 뛰어 넘는 담력을 보여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를 거쳤던 일화는 유명하다.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통과의례를 거쳐서 인정을 받아야 제대로 성인 몫의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반삯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혹독한 성인식 없이 일회성 성년식만으로 성인이 되어서일까.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초보 성년들에게 성인이 되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 문화가 수용하는 우리 나름의 성년 통과의례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오늘이 바로 성년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