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있는자`들이 저축은행을 인수하고 몸집불리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위장 설립한 부동산 관련 시행사에 부실대출을 하고 부실을 속이기 위해 은행의 분식회계와 은행감독원 직원을 뇌물 매수한 사실은 외환위기 당시 부실대출-은행부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쁜 것은 저축은행의 대주주들이 은행업무 정지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엄청난 예금을 인출한 것과 이같은 은행 비리를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의 직원들이 이들과 한통속이 되어 은행을 총체적 비리의 온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실대출과 예금의 부당인출도 모자라 분식회계로 BIS비율을 속이고 거액의 주식배당마저 받아간 사실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은행갱단보다 더 무서운 범죄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한두 푼 평생을 모은 서민들의 전 재산을 몽땅 들어먹은 그들의 도덕적 악행에 단순히 분노만 터뜨릴 단계는 넘어선 것 같다. 지난 금융위기 당시 부실은행의 감시감독을 위해 재편한 금융감독기구의 개혁이 이번 사태에서 무용지물로 드러난 것은 이같은 은행부실의 진행정도가 어느 수준인지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금융감독기구의 투명한 혁신을 요구하는 한편 전 저축은행은 물론 금융기관의 총체적 감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금 스페인의 금융위기와 한국의 금융부실 사태가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과 함께 이번 사태로 한국 금융기관의 신인도에 금이 가지 않을지 걱정들이다.
이번 저축은행 사태에서 국민들이 황당해지는 것은 저축은행 비리에 대한 책임문제를 가리는 정부의 자세다. 물론 비리의 일차적 책임은 비리의 당사자인 은행이다. 은행을 감시 감독할 1차적 책임기관인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책임을 묻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금융부실이 국민의 혈세로 수습된다면 감사원과 검찰 등 사정기관의 책임도 금융감독기관 못지않다. 이들이 엄청난 피해가 일어난 후에야 후다닥 사정에 나서는 모습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엄청난 금융위기 앞에 대통령이 금감원을 깜짝 방문해서 직원들을 나무라는 모습은 마치 정부에게는 책임이 없는듯한 자세로 보인다.
금감원과 금감위의 구성원들이 질책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국가적 위기를 방치한 금융감독기구 이상의 책임있는 정부기관이 국민 앞에 사죄하는 모습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놓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해도 은행이 이렇게 부실하게 운영된다면 우리 경제가 언제 나락에 굴러 떨어질지 모른다. 더욱이 미국이 아직 금융위기를 벗어나지 못했고, 남유럽이 금융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세계경제의 현실을 본다면 결코 한국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저축은행 사태가 한 잎의 낙옆이 천하의 가을을 예고하듯이 또 한번 우리 경제가 망하는 꼴을 연출하는 서곡이 아닐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자유자본주의의 기본 틀이 흔들린다는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