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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하고 우울한 한국소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5-02 23:39 게재일 2011-05-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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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환 작가·`아시아`발행인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이 거의 유일하게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들었다 났다 한다고 알려져 있다. 올해든 내년이든 그가 받으면 한국문학은 드디어 노벨문학상 콤플렉스를 벗을 것이다.

문제는 고은 시인이 그 상을 못 받는 경우다. 과연 한국에는 고은에 필적할 만한 후배 시인들이 몇이나 존재하는가? 시 동네의 사정에 어두운 편이라 뭐라 말하기 어려운데, 소설 동네를 들여다보면 작가들과 독자대중이 손을 잡고 한국소설을 노벨문학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반드시 그 시대의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인 것은 아니다. 수상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나는 노벨문학상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적어도 그 상은 소설의 위엄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위엄이란 무엇인가? 소설이 인간정신의 미학적 총체로서 시대정신을 선도할 때 소설의 위엄은 저절로 빛나며, 그것은 언제나 작가정신에서 탄생한다. 소설이 위엄을 상실했다는 것은 작가정신이 `많이 팔자`는 상업주의와 야합했다는 것이다. 대중소설에서는 시대나 인간에 대한 고뇌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시대나 인간에 대하여 치열하게 탐구하는 작가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기 50년을 통틀어 소설의 위엄이 무엇이며 작가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가장 훌륭히 보여준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2008년 8월에 타계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지명한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로 알려진 소비에트연방 러시아의 대표적 반체제 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솔제니친은 `송아지, 떡갈나무를 들이받다`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자신의 작가정신과 소설과 삶을 `송아지가 떡갈나무를 들이받은 것`에 비유했지만, 실제로 그는 무자비한 스탈린 억압체제에 펜 하나로 맞서서 그것으로 그 급소를 찌른 작가였다. 스탈린 억압체제가 없었다면 솔제니친이라는 작가도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솔제니친의 작가정신과 소설은 자신이 살아가는 러시아의 현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소설들은 대체로 현실 관련성이 약화되거나 역사적인 기억을 망각하고 있으며, 독자대중은 감성적이고 가볍고 성적 자극에 능숙한 소설을 사서 읽는다. 작가정신이 현실을 유기(遺棄)하여 상업주의에 포섭되고, 독자대중은 그것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사회적 구조로서, 작가들과 독자대중이 소설의 위엄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손을 잡은 격이다.

한국 작가나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한 일차적 관문은 어느 작가나 어떤 소설이 한국사회에서 널리 주목을 받는 것이다. 작가나 소설이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존재로 대두하자면 시장질서 속에서 엄청난 승자의 위치에 올라야 한다. 백만 부쯤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가들은 현실과 민족과 인류의 곤혹에 천착하지 않고 독자대중은 그것을 부추기는 구조 속에서 소설의 위엄을 빛내는 소설이 어떻게 널리 주목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한국소설이 무슨 재주로 노벨문학상에 육박해 가겠는가?

얼마 전에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메이저 출판사를 통해 미국 독서시장에 진출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 언론들이 냄비 끓듯이 덤벼들었다. 심지어 작가의 실존 어머니를 인터뷰한 신문도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 그 소설은 소설의 위엄을 회복하는 일과는 무관한 작품이었다. 미국 비평가들에게 그 소설이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이 아니라 `한국에서 엄청나게 팔린 대중소설`로 소개되기를 바랐다.

과연 북한에도 솔제니친과 같은 `지하작가`가 존재할까? 지배자들에게는 반역자이고 같은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위험인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지하작가가 북한에는 없을 것이다. 오랜 우상숭배의 세뇌, 전체주의와 선군(先軍)독재의 억압, 폐쇄적 주체사상의 가치관이라는 삼중 그물망에 갇힌 자기검열의 타성이 반체제적 상상력을 고갈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체제에 대한 소설적 대응도 남한 작가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소설은 현실 대응력을 잃어버려서 많이 팔려보았자 정신적 파장이 사회로 번져나가는 경우를 발견할 수 없다. 한마디로 소설의 위엄을 상실한 것이다.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민족 현실을 미학적 서사세계로 감당해야 하는 당면과제를 생각할 때, 지금 여기의 소설은 한없이 초라하고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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