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막연히 한국은 미국 비자가 면제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있자 비자가 있던가, 없던가. 그러다 생각해 보니 미국 비자가 부착되어 있는 여권은 유효 기간이 만료되는 바람에 새 여권을 만들었는데, 이 새 여권에는 비자가 없다. 그러면 구 여권과 새 여권을 같이 들고 가야 하는데, 나는 지금 새 여권이 없지 않은가. 아뿔싸. 혹시 미국은 비자가 면제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비자 면제 한다는 소리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런데 아니란다. 비자가 전적으로 면제된 게 아니라 비자가 없는 사람을 위한 전자 여행 증명(ESTA)을 떼서 그것으로 단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비자는 구 여권에 있어서 지금은 없고, 전자 여행 증명서를 떼려면 새 여권이 전자여권이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출국 시간까지 세 시간.
집에 가서 구 여권을 찾으려고 난리 법석을 피웠지만 결국 여권은 찾지 못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아시아나 오전 8시20분발 비행기표도 수수료를 25%나 떼이고 그만 날리고 말았다.
한밤에 멍해서 더 이상 여권 찾을 기력도 없이 어떻게 하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나 같은 머리 나쁘고 정신 없는 사람들 어떻게 하나 뒤져보니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비자를 발급 받으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침부터 미국대사관에 가서 기다리는 방법. 그런데 이 방법은 예약 날짜를 제때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러면 지금 여권을 무효로 만들고 긴급한 용무를 인정 받아서 전자여권을 발급 받는 방법이 남아 있기는 한데….
이 실낱같은 가능성 하나만을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여권 사진도 새로 찍고, 재직 증명서도 떼고, 학술 발표를 위한 일정표며 초청 서류 같은 것을 전부 구비해서 관계 기관으로 달려가니 오후 네 시에 여권이 나올 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기다려 보란다.
그런데 외교통상부가 요즘 우환이 심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담당자 분이 아주 친절하다. 정부 기관의 문턱이 그렇게 높았던 것이 어저께 같은데 많이 낮아진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미국이란 나라로 태평양을 건너가는 일은 너무 어렵다. 여비가 많이 축난 탓에 이번에는 홍콩을 경유해서 미국 가는 우회 항공편을 당일치기로 예약해서 간신히 티켓을 사고 여권을 발급 받고 ESTA를 신청해서 받고 하니 시간은 벌써 저녁. 인천 공항으로 서둘러 오니 이게 웬일, 캐세이퍼시픽 홍콩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연착이라 이번에는 아시아나로 바꿔 타게 해주겠단다.
결국 공항 탑승구 35번을 향해 있는 네이버 인터넷 라운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참이다. 작고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기를, 의식에서 생겨난 문제는 의식으로부터 풀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참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웠다.
우리는 지금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면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에 와 있다. 문화적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문제는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을 바라볼 것이냐. 중국을 바라볼 것이냐. 이것이다. 북한 문제, 일본 문제가 매우 어려운 만큼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미국이 지리적으로 멀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는 너무나 짧다. 내게 있어 미국 여행은 늘 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바다 건너 저 미국에서 우리 한국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 저 대 작가 최인훈이 `화두`에서 말했듯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인식해 보고 싶다. 이 나라의 존재감이 출국을 코앞에 둔 지금 너무나 크게 부각되고 있다.
지금 시간 오후 7시23분. 홍콩으로 가는 아시아나는 7시50분발이다. 벌써 7시20분으로 되어 있는 보딩 시간을 넘어선 시각이다. 자, 일어나자. 몸을 옮겨 새 눈을 얻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