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후 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다 풀린 맑은 날씨에 화려한 꽃잎들이 백설이 온 세상을 감싼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추운겨울 호호불며 즐기는 설경이 아니라, 얼굴을 감싸드는 감미로운 봄바람에 꽃잎들이 휘날려 내 머리위로, 옷으로 날아드는 가운데 느껴보는 또 하나의 설경이다.
15~16년전 1~2m 남짓의 가느다란 벚나무들을 캠퍼스 이곳저곳에 줄지어 심었었다. 벚나무만이 아니라 느티나무도 줄지어 심었었다. 교문밖 진입도로 500미터에는 느티나무를, 교정 뒤편 한적한 길가 100m에는 벚나무를, 지금은 90이 넘으신 아버지께서 아들인 나를 찾아 오셨다가, 그때 겨우 몇 개씩 꽃봉오리를 보이던 어린 벚나무들을 보시고, 좀 얹잖아 하시던 기억이 난다. 벚꽃이 일본국화가 아니냐? 가로수로는 저 느티나무를 심었어야지….
지난 일제시대를 겪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나도 일본의 끊임없는 독도문제 제기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들은 지진과 쓰나미의 와중에도 독도문제를 꼭 집어내고 있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다. 일본의 무사인 사무라이들은 그들 인생관의 상징으로 벚꽃을 골랐었다.
그런데 누군가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니 벚꽃의 기원은 일본이 아니고 한반도로서, 우리 한국에는 아직도 그 조상격인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벚나무는 장미목 장미과의 식물로서 학명은 Prunus serrulata var. spontanea이며, 원산지는 한국의 제주도이다”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벚나무는 해발 500미터 정도에서 자라는데, 좀 더 높은 곳에서 자라던 산벚나무와 더 낮은 곳에서 자라던 올벚나무가 자연잡종으로 생긴 것이 왕벚나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렇지, 저 꽃들은 왕벚꽃일거야. 난 교문밖의 느티나무도 좋아하지만 저 왕벚나무도 아주 좋아해.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본다.
벚나무의 자태를 느티나무에 비교하기는 힘들다. 날씬하고 완강하게 뻗어있는 느티나무에 비해 벚나무는 곧지도 못하며 줄기에도 상처가 많다. 바람에 잘 꺾이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봄 한철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피어 내는 것이다.
지척인 사무실에서 책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해 볼 때는 느티나무든 벚나무든 각자의 특색이 있기 마련이라 여겨지는데, 손을 털고 밖으로 나가보면, 아, 이 향기, 벚꽃의 내음이다. 나도 꽃이 다 지기 전에 기념사진 한 장 남겨 놓아야지. 건물 앞 내 명찰이 달려 있던 저 벚꽃나무 아래서….
지금은 세월 지나 각 나무에 달아 놓았던 교직원들의 명찰이 다 없어졌지만, 나는 한두차례 나무들을 옮겨 심는 과정에서도 내 이름표를 달았던 그 벚나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보다 더욱 튼튼하고 화려하게 꽃을 피워내는 것 같다. 이 나무도 내가 자기에게 신경씀을 알아보고 있는 것인지.
이제 다 자란 이 벚나무들은 매년 4월이면 아름다운 꽃더미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매우 행복할 것이고. 저 벚나무가 분명 왕벚꽃일테니까. 아니 왕벚꽃이 아니더라도 그 인자를 가진 우리 벚나무일테니까. 길가 한무데기의 꽃들이 우리를 며칠씩이나 들뜨게 해주다니…. 가로수며 도심정원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들임을 다시금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