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라톤을 할 때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개념보다는 극기(克己)라는 마라톤만의 특수성에 비중을 더 두었다. 중국어로는 마라송(馬松)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말이 소나무를 끌고 가는 것 같이 힘이 드는 운동`이라는 뜻인 것 같다.
마라톤은 가장 평범한 서민적인 운동이다. 큰돈도 필요 없고 운동화만 있으면 된다. 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할 수가 있다. 마라톤은 인간을 순화시킨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권모술수를 모른다. 땀을 흘리며 고통을 인내로서 극기해 나가는 사람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인생을 단순하게 본다. 운동장도 필요 없고 길만 있으면 달릴 수가 있다.
마라톤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데 있다. 사회에서 제 잘났다고 교만하게 어슬렁거려 봤자 35km지점쯤 가면, 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필요한 건 자기 완주에 대한 희망뿐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기서 부터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모두 똑 같은 인간이 된다. 이 지점부터는 인간이 가진 능력은 누구나 평등하며, 오직 자비로운 신의 손길만이 존재한다. 얼마나 간절하게 신의 손길을 잡고 갈구하느냐에 따라 완주 여부가 결정이 된다. 결승점에 도달하면 마라토너들은 극한 고통 속에서 이뤄 냈다는 쾌감을 느낀다. 인간 한계를 극복하고 고통 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환희, 그 자체다.
올림픽 때 1위를 한 선수는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경기도중 부상을 당해 5시간 만에 결승점에, 절면서 도달한 마라톤선수도 관중들의 환호 속에 기립 박수를 받으면서 골인을 한 적이 있다. 달리기 경기에서 뒤쳐진 선수가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것은 오직 마라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절뚝이면서 뒤쳐진 질주로 고통을 참고, 완주 선을 넘는 것은 감동 그 자체다. 마라톤 경기에서 1등은 한 사람 뿐이다. 그러나 마라톤 경기는 참가자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승리자이다. 마라토너들은 순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경기에 참가했다는 것이 곧 승리를 의미한다.
마라토너들 중에는 체력의 한계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경기 중에 포기를 해도 그들은 패배자가 아니고, 오히려 승리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육체가 더 이상 가동이 불가능해 질 정도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도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멈출 때 까지 해 낸 것에 대해 똑같은 승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스포츠는 더 이상 운동이 아니고 과학이다. 신발 끈 하나에도 과학이 들어있다. 채소잎에서도 마라톤을 위한 특수한 성분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마라토너들은 풀잎 하나하나에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제 평생 동안 달려온 마라톤 풀코스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만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 돈을 얼마 받기로 했더라면 나는 41회나 완주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금이 탐이 나서 완주했다면, 그것은 대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백리 길을 뛰면, 그것은 고생이 아닌 삶의 지혜를 배우는 일이 된다. 지혜란 쉽게 얻거나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극기와 고난 속에서 서서히 움트는 것이다. 나는 마라톤 경기에 참가 할 때마다, 생활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일들과 주위의 자연 현상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겸손을 배운다. 완주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 용기가 점점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더 간절하게 신의 사랑을 갈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