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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본을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4-07 23:32 게재일 2011-04-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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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크게 보면 한국은 아직 한참 멀었지만 작게 보면 작다. 어떻게 보아도 그 차이가 절대적이지 않고 불확정적이며 언제나 역전 가능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간사이공항을 통해서 고베까지 승용차를 타고 직행하면서 본 공장들, 주택들의 밀집도는 일본의 현대 산업화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가는 아직 얼마나 한적하기만 하던가.

도시마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절과 신사들, 지극히 낮은 기독교 인구 비율은 이 나라가 서양의 침탈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라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최근에 어떤 서양 사람이 서울의 야경을 평가하면서 네온 십자가만 너무 많다고 했던가. 온갖 상점이 들어서 있는 상가건물에 교회가 입주해서 `손님`을 유치하고 있는 서울의 도시풍경은 한국에서 종교가 어떤 수준에서 통용되고 있는지 웅변해 준다.

그러나 지진,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비상의 제 국면에 나타난 일본의 현재 모습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지진은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니 뭐랄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피시설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가는 노인들은 뭐란 말인가? 더디고 더딘 당국의 구호 활동은 일본 정부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텔레비전에 비친 일본 사람들의 행색은 그들이 소박, 검소할 뿐만 아니라 실생활 면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의 소비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와테 현이나 미야기현 같이 지진, 쓰나미가 일어난 지역들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 인구가 비대화하면서 각 가정 안에 이들의 삶의 문제가 은폐, 방치되는 측면이 있음을 텔레비전 화면들은 보여주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노인연금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죽은 노인을 집안에 방치해 두고 그가 받아야 할 연금을 아들이나 그 밖의 가족이 대신해서 몇 년씩 수령해온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났던 것이다. 지진과 쓰나미는 이러한 노인 문제의 실상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먼저 쓰러져간 것은 당연히 노인들이었고 당국은 이런 노인들을 구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 간의 생활의 격차라는 것도 한국만큼 심각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난지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둘러싼 발전소 당국과 일본 정부의 행태는 그것이 신뢰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발전소 당국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은폐, 축소하기에 바쁘다. 정부는 자존심만 내세우다 사건을 조기에 해결할 기회를 놓친 채 이제야 외국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하면, 바닷물을 길어다 채워 넣은 원자로의 오염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무작정 바다로 방류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아무리 다른 대책이 없다고 해도 이런 일은 분명 인접국인 한국이나 중국에 사전에 알려 양해를 얻어야 하는 일인데 멀리 떨어진 미국에만 사전에 알렸을 뿐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도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에서 자국 영토로 편입해 넣으려다 실패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기록한 교과서를 통과시키는 등의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한국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일본을 모델로 삼아 따라가는데 급급해 왔지만 지금 일본의 모습은 이 나라가 따라가야 할 모범만은 아님을 대변해주고 있다. 시민들의 삶의 수준에서부터 정부가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일본의 상황을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또한 일본 정부가 벌이는 일에 따질 것은 제대로 따지는 날카로움을 가져야 한다. 오염수 방류 문제나 독도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이 따라가야 할 무서운 모델만은 아니다. 한국은 한국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것은 때로 일본을 괄호치고 더 보편적이고 더 공통적인 삶의 기준을 찾는 일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은 더 많이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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