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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가을을 지나다 ①...김영아

슈퍼관리자
등록일 2009-10-02 17:04 게재일 2009-10-0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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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지나면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다.

이번 한가위 명절은 연휴가 짧고 신종플루 때문에 고향에 오가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한가위 연휴, 포항 청하 현감을 지낸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사랑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놓은 김영아 작가의 `내연산, 가을을 지나다`를 펼쳐보자.

소설은 내연산과 12폭포와 진경산수가 병풍처럼 펼쳐져 `가을 풍경화`를 음미하듯 따뜻한 감동이 전해진다.

포항문인협회가 주최한 `포항시 승격 60주년 기념 포항소재문학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는데 포항 소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포항의 진면목을 드러낸 수작이다.

절집에 들어설 즈음 이미 날이 어두웠다. 아침부터 두텁게 누르고 있던 구름은 끝내 점심참을 지나서 비를 뿌리고야 말았는데 그걸 피하느라 월포리 주막에서 지체한 게 시간을 늦추었다. 비는 제법 당찬 꼴이었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 뱃길을 열어주었던 모양이다.

울진에서 출발한 뱃길은 길지 않았지만 겸재에게 유독 버거운 길이었다. 간밤에 날씨가 심상치 않아 뱃길이 어렵겠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하 낙담을 하자 그 모습이 오죽했으면 사공이 되레 왠만하면 가보도록 하자며 안심을 시켰다. 일단 그 산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자 한 순간이 급했고 산길보다는 바닷길이 먼저였다.

다행히 새벽에는 파도가 높지 않고 바람이 순해 출항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순조롭게 불어줄 것 같은 바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끓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는 구름과 함께 바다도 저 깊은 속에서부터 몸을 웅크리며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까지 온 것만도 용하다며 부산포로 멸치를 실러 가는 사공은 기어이 여기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겸재는 좀체 없던 멀미기운에 뱃속의 노란물까지 게워내고서야 기진맥진 뭍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환갑을 넘기고도 세 해가 지났으니 나이 탓인가... 겸재는 허우룩해진 자신의 몰골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진에서는 길값을 치르느라 열흘을 앓아눕기까지 했는데 아직 그 추렴을 하는 건지 몸은 마음을 비웃듯 자꾸 처지고 있었다.

주막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 잠시 몸을 가누고 걸음을 나섰지만, 월포 바다에서 절집에 이르는 평평한 들길에도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늘 내로 내처 계곡을 올라 암자까지 가려던 계획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자꾸 채이는 퍽퍽한 발걸음에 오늘밤은 산 아래 큰 절집에 몸을 맡겨야겠다고 마음을 눅였다. 그러자 며칠 전부터 솟구치던 알 수 없는 조급증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푸시시 한 귀퉁이 바람이 꺼지고 말았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에 얼마동안을 떠밀려 다녔던가. 어디로 자신을 떠밀고 있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이상한 열기, 달포 전에 서울을 나서 관동지방으로 내쳐 방향을 정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다 그림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머님 탈상 동안 소홀했던 그림공부가 그 열기를 식혀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강릉 경포대에서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는데도 막막함은 삭혀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망망대해에 나앉은 듯 아득함은 커져만 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강릉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울진으로 걸음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나그네의 노독이 병을 부르고 말았다. 온몸이 불덩어리로 타오르고 뼈마디마디는 제각기 녹아 흩어져 갔다.

 

 

 

몸을 버리니 정신은 도리어 가뿐해지듯 명료한 기운이 들면서 그제야 이 산이 떠올랐다. 이 계곡 물소리가 타는 듯한 갈증을 적시며 귓가를 울렸다. 내연산, 내연산 계곡으로 가자. 정신은 몸을 떠났다가 이윽고 돌아와 채근하듯 얼른 함께 가자 졸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둘러 뱃길을 알아본 건 어쩌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며 에돌아온 시간이 너무 멀었던 게 아닐까. 겸재는 이토록 진이 빠진 게 멀미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절집에 이르는 긴 오솔길 앞에 서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인가, 그토록 몸이 달게 쫓아온, 아니 쫓겨 온 곳이 이곳이란 말인가.

솔바람 한 줄기가 반가운 인사인 냥 겸재를 훑고 갔다.

아, 이 향기… 고작 길어야 사 년인데도 그 세월은 한 겁을 돌아온 듯 아득하기만 하다.

겸재는 시간 속으로 잠기듯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천천히 절집 불빛을 향해 걸었다. 저녁 예불도 끝난 절집 마당에는 기척이라곤 없었다. 요사채로 건너가 인기척을 내자 벌써 자리에라도 들었던가, 옷매무새를 다시 하며 불목하니 여자가 내다보았다. 여자는 어두운 마당에 후줄근히 서 있는 사내 몰골에 흠칫 놀라던 기색이더니 경계하는 눈빛을 바꾸지 않은 채 주섬주섬 방안의 불빛을 뒤로 하고 문밖으로 나왔다.

“뭔 일인교?”

“하룻밤 신세를 좀 질까 하는데…”

도포갓에 청려장을 짚은 겸재를 어떻게 대해야할 지 몰라 애매한 목소리와는 달리 여자의 눈빛은 어둠을 핑계로 과감하게 겸재의 위아래를 훑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는 피로한 기색에도 당당했고 행색은 소박했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품이 엿보였다.

여자는 결정을 내렸는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마당을 질러가더니 잠시 뒤 나타나 겸재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내일 아침 예불 후에 스님을 찾아뵈라는 전갈을 하며 여자는 휑하니 가버렸다.

서넛 사람이 족히 누울 방 안은 이부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이 휑했다. 저녁끼니 안부라도 좀 물어줄 것이지, 야박하단 생각에 혀를 차면서도 겸재는 방바닥에 녹아들듯 몸이 먼저 풀어졌다. 뱃멀미 후라 주막에서 먹은 점심은 한두 술 뜨는 둥 마는 둥 영 부실했더니 공복감이 심하게 밀려왔다. 쓰라린 공복감 위로 문득 그리운 냄새가 났다.

목을 따라 넘어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 죽을 떠 넣어주는 조용한 손놀림, 그 손동작을 따라 일었다 잦았다 밀려오는 맑은 향내, 산과 물과 초목이 녹아든 것 같은 깊은 향내, 겸재는 한 겁의 시간을 돌아 그 향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인 듯 빛인 듯 모든 형체는 자취를 감추고 색도 없이, 사위는 사라지고 말았다. 내 몸 조차도 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씨앗 하나 싹을 틔우듯이 가슴 저 안에서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터졌다. 얼음처럼 꽁꽁 굳어있는 몸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작고 여린 것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혈관들이 꿈틀대기 시작하고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툭, 하고 끊길지 모를 위태로운 것이었지만 분명 땅을 뚫고 나오는 작은 생명의 시작이 그렇듯 그것이 몸을 살릴 불씨라는 걸 겸재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씨는 자신의 몸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후후, 숨을 불어넣어 살리고 있는 불씨, 이제라도 그 숨을 멈춘다면 하릴없이 꺼져버릴 불씨, 겸재는 불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모을 뿐이었다.

간절함이 통했던가. 불씨는 조금씩 힘을 얻어 불꽃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스스로 온기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안정을 찾았다. 겸재는 세상의 문턱으로 다시 돌아온 자신을 느끼며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온 몸이 따뜻하게 부풀면서 꽃이 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겸재는 빛보다 먼저 소리를 들었다.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자신이 누워있는 사방으로 뽀얀 연기가 자욱하니 들어차 있었다. 겸재는 저도 모르게 으컥으컥. 잦은 기침을 뱉고 말았다.

기침소리가 일자 나뭇가지 터지는 소리가 멈칫, 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임이 일렁이듯 연기가 구석구석으로 몰리더니 낮게 지어낸 기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린 건 또 한참을 지나서였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기가 뭉클뭉클 방으로 몰려들었다. 연기 너머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린 개울 물소리처럼 떨리면서도 곧게 떨어지는 폭포줄기처럼 숨김이 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으컥으컥”

이곳이 어디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무엇보다 겸재는 바위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던 자신이, 그러다 어둠과 함께 살을 에는 추위에 점점 정신을 놓았던 자신이, 어떻게 지금 이렇게 세상의 문턱으로 돌아와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아니 이곳이 정녕 아직도 세상인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여인은 그 와중에도 방안으로 몰려드는 연기를 어떻게든 막아볼 요량으로 부지런히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이곳은 여름 암자로 겨울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으리의 상태가 하도 위중해서 이곳으로 모셨는데… 생솔가지를 태우다보니 연기가 많습니다.”

말끝에 여인도 낮은 기침을 뱉고 있었다. 그제야 연기 틈새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이 많지는 않지만 둥그스름한 얼굴은 순해 보였고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얼핏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마 여인의 옷차림 때문일 것이다. 여인은 치마저고리 대신 사내들이 입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매무새도 뒤로 질끈 동여맨 수건차림이었다.

“우선 방을 데워야 하오니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으셔요. 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됩니다. 불을 지펴 더운 물이라도 준비할테니 잠시만 기다리셔요.”

여인은 마지막으로 연기를 끌어 모아 문 밖으로 내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겸재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흙으로 발려진 벽과 바닥은 군데군데 금이 가있고 한둘 제법 큰 구멍이 나있기도 했다.

일어서면 머리라도 부딪힐 낮은 천장엔 대들보 역할의 나무 기둥이 얼기설기 얽어져 있었고, 기둥에는 마른 나무뿌리와 푸성귀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흙으로 다져진 바닥엔 갈대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겸재는 바로 그 위에 누워있었다. 이불이라고는 얇게 솜을 넣은 누비이불 한 채가 반은 깔리고 반은 덮은 채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 한 겹 한 겹 옷조각들이 포개져 얇은 이불의 온기를 보태고 있었다. 제일 위에 걸쳐진 건 제법 두둑해 보이는 솜외투는 겸재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 겸재는 이불 속에 가려진 자신의 몸이 어딘가 낯선 느낌에 황급히 손으로 더듬었다. 웃옷은 속옷조차 벗겨진 채로 맨살이 닿았다.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몸을 일으키니 왼쪽 다리 무릎 아래로 칼날 같은 통증이 지나가면서 겸재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물고 말았다.

“으윽!”

조심성 없이 터져 나온 신음소리에 또다시 문 밖에선 멈칫, 정적이 지나갔다.

“괜찮으시옵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여름날 그득하게 물을 채운 저수지처럼 넉넉하니 일렁였다.

“괜찮소…”

“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리고 의관은… 젖어서 지금 불기운에 말리고 있사옵니다.”

여인은 마치 보고 있는 것 마냥 겸재의 속을 꿰뚫었다. 겸재는 머쓱하니 자신의 맨몸을 쓸었다. 아직 불기운이 올라오지 않은 방바닥의 냉기가 새삼 몸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조금 전 분명 나를 끌어올린 그 온기, 그 온기의 정체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던 그 온기, 겸재는 이불을 더욱 당기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상한 평온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겸재를 깨운 건 빛이 아니라 소리였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계곡 얼음장 아래로 얼어붙지 않고 흘러가는 물소리, 마침내 얼음을 녹이고 봄을 부르는 물소리, 그런 물소리를 닮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일어나셔요. 잠시 눈을 떠보셔요.”

목소리는 겸재를 녹이고 겸재를 일으켰다. 눈을 뜨고 목소리를 먼저 보고서야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행색은 남자였으나 살짝 외로 꼬고 있는 자태는 영락없는 여인의 것이었다. 한결 밝아진 방 안은 그새 연기도 빠져나가고 없었다. 여인은 나무숟가락이 걸쳐진 사발을 겸재 곁으로 한 뼘 더 밀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 곡기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곡식알을 있는 대로 모으고 부족한 대로 말린 푸성귀를 넣어 끓인 것이온데 얼른 허기를 달래도록 하십시오.”

사발에서 솔솔 김이 올랐고 김이 퍼지자 구수한 냄새도 따라 퍼졌다. 겸재는 미처 몸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사발과 여인을 번갈아보았다.

“오늘이 몇 일이나 됐소?”

“열이레이옵니다.”

열이레라… 보름달이 비치는 내연산 계곡을 보기 위해 들어왔으니 그새 이틀이 지났다.

겨울에 들어서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올 겨울 유난히 잦았다. 내연산 계곡의 암벽들이 눈을 얹은 채 달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 동헌에 나앉으면 고을의 정사를 맡은 현감이었지만 동헌을 나서면 그림에 평생을 바친 환쟁이에게 그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나서는 시동마저 물리치고 기어이 혼자 걸음을 한 것은 오랜만에 한가한 틈을 타 마음껏 화폭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었다. 절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계곡으로 들어온 것도 괜스레 현감 신분을 내세워 주위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어두운 밤길이다, 얼어붙은 눈길이다, 염려하는 주위의 만류를 벗어나 내키는 대로 풍광을 흠씬 맛보려는 자신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다 밤이 어두워지면 잠자리를 얻어 들어가도 늦지 않으리란 계산이 있었고 마침 달은 밝고 눈이 그친 뒤의 밤공기는 포근하기까지 했다.

두껍게 쌓인 눈길을 밟으며 올라가는 계곡길은 더뎠지만 결코 더디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어붙지 않은 포실포실한 눈은 미끄럽지 않았고 발이 닿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맑은 소리를 내는 발자국을 만들었다. 한참 오르다보면 어디선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뭉치가 텅텅 화답하곤 하는 것이 마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욕심도 잊고 절제도 잊었다. 그저 환하게 열린 길을 따라 무작정 들어갔다. 가다가 사무치면 화폭을 열어 붓을 들고 불같은 마음을 담았고, 그렇게 덜어낸 마음의 불덩이는 조금 가다보면 다시 뜨거워지곤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소.”

겸재는 다시 떠올려도 사무치는 광경에 탄식하고 말았다. 뜬금없는 겸재의 탄식에 여인은 잠시 의아한 눈빛이었으나 이내 겸재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골짜기의 아름다움은 천하명산 금강산을 옮겨놓은 것과 같다고 하옵니다.” 겸재는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흠칫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겸재는 서른 중반에 두 번 금강산을 다녀왔다. 처음엔 스승을 모신 길이었는데 그때 본 금강산의 아름다움이란, 말로도 그림으로도 다 할 수 없어, 그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에 그만 환쟁이의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 번 본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 기회를 찾던 중에 이듬해 다시 친구의 배려로 두 번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세상은 그때 남긴 몇 장의 그림으로 단박에 겸재에게 당대 최고의 화가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정작 겸재는 그 그림만으로는 그 산을 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더 컸다. 언제 다시고 그 산을 볼 수 있다면 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텐데, 하지만 녹록치 않은 세상사의 인연은 좀체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금강산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겸재가 한평생 소망하는 일이거늘 세월은 무심하니 흘렀고 벌써 환갑이 코앞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 어지러운 세상사 따라 흘러오다 보니 이를 수 없는 절망으로 가로막힐 때가 더 많았던 금강산.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자태를 돌이킬 때마다 머리엔 가슴엔 벌겋게 달군 인두 자국이 찍혔다. 내게는 아직도 이리 뜨거운 이름이거늘, 이리 아픈 이름이거늘 여인의 입에서는 저리 무심하게 나오다니…

“금강산을 아시오?”

겸재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벗고 있는 자신의 몸보다 더 깊은 곳까지 송두리째 여인 앞에 드러내고 만 것 같았다. 그런 한편에는 여인 앞에서 무람없는 아이처럼 보채고 싶다는 간절함이 솟았다.

“예, 일전에 한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의 목소리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뭉치마냥 텅텅 무심하니 거침없었다. <계속>

※ 이철진화가 프로필

△영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개인전 22회(뉴욕, 서울, 부산 등)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4국초청 작가전(일본/중국)

△영남대학교, 동국대학교, 대구대학교 강사 역임

△대구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앙비숑패션쇼 공동참여

△현재)대구시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협포항지부 한국화분과위원장, 포항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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