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 시간의 부드러운 손(문학과지성사·2007)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쓴 김광규 시인이 한양대학교 정년퇴임에 맞춰 새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상재했다. 우리 시대의 소시민적인 속물근성과 현대 물질문명의 반생명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온 기존 그의 다른 시집들과는 이번 시집의 빛깔은 좀 다른 듯하다. 새 시집에는 자신의 내면과 인생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시편들이 여럿 눈에 띈다. 시집 맨 첫머리에 놓여 있는 ‘춘추’도 그렇다. 봄과 가을이라는 춘추(春秋)는 또 세월, 연륜이 높은 어른의 나이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위 시에는 이런 여러 가지의 뜻이 복합적으로 함께 사용된 듯하다. 봄, 여름, 가을이라는 세 계절의 오랜 시간에 걸쳐 씌어진 김광규의 시 ‘춘추’는 참 짧고 간결하다. 시는 단 두 행으로 이루어져있다. 봄과 가을을 노래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와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가 그것이다. 그 중간 11행으로 된 2연의 내용으로 봄과 가을 사이에 일어난 일과 시작(詩作)의 과정을 보태고 있다. 무척이나 재미있고 소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이 무심한 시종(始終) 두 행의 시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시인의 시작(詩作) 고뇌와 아내의 시큰둥하는 대꾸, 그리고 신산(辛酸)한 우리네 세상살이의 이야기까지. 서로 같이 자리를 해야 생명의 빛을 발하는 그런 관계다. 시 ‘춘추’는 김광규 시인의 무르익은 시의 행차(行次)가 아닐 수 없다. 연단(鍊鍛)의 과정을 어느 만큼이나 거쳐야만 이런 말씀을 펼쳐놓을 수가 있을까? 필사(筆寫)해 놓은 공책만 자꾸 뒤적이며 입만 벌리고 있을 일이 아니다. 공부를 해야겠다.
해설<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