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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농촌진흥청장

김진호기자
등록일 2009-04-27 19:19 게재일 200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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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출신의 김재수 농촌진흥청장은 명실상부한 ‘농정전문가’로서 행정고시 합격후 30년 넘게 농림수산식품부에서만 근무했다. 중앙부처에서만 근무해 지방행정의 경험은 없지만, 늘 고향마을 산천을 가슴에 담고 일하는 김 청장의 고향에 얽힌 추억과 최근 근황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인 경북 영양에 얽힌 추억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자란 동네는 수비면 송하동으로, 마을 앞에는 큰 절벽이 하나 있고, 절벽사이를 구비구비 흐르는 맑은 하천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꾸면서 일어났습니다. 어린시절 아름다운 마을 풍경과 그 속에서 스릴 넘치는 모습으로 가파른 절벽을 끝없이 뛰어내리던 꿈 속의 추억이 지금까지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초등학교 3학년)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산좋고 물맑은 내고향 영양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수구초심이라 할까요?



-대구의 학창시절은 어땠습니까.


▲경상중학교 시절(18회 졸업생)은 철부지 시절이고 또 국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시대입니다. 경상중학교는 야구도 잘해서 많은 훌륭한 선수를 배출했는데, 학교를 오가면서 야구선수들의 연습과 시합을 보는 재미가 참 좋았습니다. 당시 추억으로는 평화봉사단으로 와서 활동하시던 미국인 처녀 영어선생님이 계셨는데, 성함이 ‘데몬비’였습니다. 선생님을 많이 따랐던 저는 덕분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소년들이 할 수 있는 짖궂은 장난을 곧잘 했던 기억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수십년 지나 2003년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데몬비 선생님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당시에 한국에서 활동했었던 평화봉사단원들을 찾아 모임을 했고, 이분들이 지난 해 단체로 한국을 방문해서 과거의 추억을 되새겨보기도 했습니다.



-경북대를 졸업하는 해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최연소 합격자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했나요.


▲1974년 경북대 입시에서 전체 차석이자 단과대학에선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늘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부담감도 있었죠. 그 당시 기억으로는 ‘SHC’라는 대구지역 대학생 서클활동을 했는데, 그때의 ‘SHC’ 출신들이 지금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지역사회나 국가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다가와 공무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행정고시는 3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경제학과 출신이라 학과목도 비슷하고, 시험운도 좋아서 졸업하던 4학년 때인 1977년도에 제21회 행시에 최연소 합격을 했습니다.



-공직입문한 뒤 농림수산부에서 오래 근무했다고 들었습니다.


▲1979년 교육을 마치고 발령을 국세청으로 받았습니다. 당시 부가가치세가 도입돼 국세청분야에 행정고시 합격자가 많이 배치됐습니다. 저는 초임 발령을 서부산 세무서로 받고 1개월도 안돼, 군에 입대하게 됐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는 농림수산식품부로 전입, 지난 2009년 1월 23일까지 농식품부에서 30년을 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미국 농무관시절 한미 FTA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던데요.


▲한미간에 이슈가 많아 힘든 시기였습니다. 오렌지 수입문제, 광우병쇠고기 수입문제, 한미 FTA, WTO/DDA 협상 등 주요한 농업현안이 한미간에 제기돼 양국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어려웠고, 농무관도 많이 바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힘든 만큼 일도 많이 했고, 보람도 컸던 것 같습니다. 경북도의 축산농가와 도의 축산관계자가 미국의 축산현황과 소비실태를 보고 가는 기회도 마련했습니다. 이 때 2년에 걸쳐서 우수외교관으로 선발돼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농업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21세기는 농업이 주도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업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육성하고, 농촌을 녹색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쾌적한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농진청이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생활공감 녹색기술’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는데, 그 이유는 우수한 농업기술과 농작물 등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녹색기술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녹색기술을 잘 다듬고 세계적 녹색기술로 승화시킨다면 우리의 농산업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녹색성장의 핵심 축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구체적으로 농업을 살리기 위한 정책이나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먼저 농업 연구개발의 방향도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실용연구와 대학과 산업체, 지자체와 연계해 교류 협력하는 열린 연구를 통해 국민이나 농업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생활공감형 연구가 되도록 추진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후변화에 따른 기회 요인을 적극 살려 망고, 아티쵸크 등 새로운 아열대 작물연구를 강화하고, 고유가에 대비한 농업에너지 절감기술 개발과 친환경 바이오 에너지 생산기술 개발 등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친환경 자연순환 농업모델을 개발해 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천연 신소재 및 실크 인공뼈, 바이오신약 개발 등 농식품의 새로운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농업이 녹색성장을 견인하는 산업으로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다른 공직자들에 비해 저서가 많던데, 소개한다면.


▲평소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과 조상의 슬기가 배어 있는 우리 전통식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 농무부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할 당시에 미국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우리 한식을 먹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식의 세계화 가능성을 생각해 봤고, 우리 식품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게 보람이 있겠구나 싶어 책을 쓰게 됐습니다. 2006년에 낸 ‘한국음식 세계인의 식탁으로’란 책과 이듬해인 12월에 낸 ‘식품산업의 현재와 미래’란 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밖에 ‘미국 농업정책과 한국의 미래’, ‘식품산업에서 희망을 찾는다’, ‘채소종자산업이 한국 농업을 살린다’, ‘우리 식품 미국시장 공략하기’, ‘Korean Agriculture and Trade’ 등 책을 집필해 우리 농업과 식품을 독자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끝으로 농도인 경북지역민들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경북은 대한민국 농·어촌의 본고장이며 농산물 생산량, 소비, 유통, 수출입 등 모든 측면에서 경북 농업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경북 농업은 과거 새마을 운동에서처럼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를 만드는 지역 농업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새마을 운동과 같은 경북 농업인의 제 2의 농촌 정신문화살리기 운동이 필요합니다. 지역마다 고을마다 다양한 향토음식이 있고, 제례음식, 특산물이 있습니다. 이를 품질향상과 고급화를 통해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농촌경제 활성화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경북도민의 젓줄인 낙동강을 살리고, 이를 지역주민의 소득과 문화창출, 농촌경관과 자연생태를 보전시키는 방향으로 개발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농촌진흥청에서도 강 주변의 자생식물이나 자연생태계를 활용한 소득작목을 재배하고,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여 자연, 환경,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경북도민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김재수 농촌진흥청장


김재수 청장은 1955년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태어났다. 대구 경상중학교와 경북고(55회)를 거쳐 경북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석사학위, 중앙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 4학년 졸업때 행정고시 21회에 최연소로 합격해 1978년부터 30여년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근무해 농정전문가로 꼽힌다. 농식품부에서는 특히 국제협력과장, 유통정책과장, 식량정책과장, 농업정책과장 등 소위 주무과장이라 일컫는 4개과를 거쳤으며, 국장으로 종자관리소장, 농업정보통계관, 농산물유통국장, 미국대사관 참사관, 농업연수원장, 농산물품질관리원장 등을 역임한 뒤 올해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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