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위덕대 일본어학과 교수
책의 날을 맞이해 책에 관련된 문화행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시(詩) 낭송회에서부터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개봉에 이르기 까지 다채로운 행사로 인해 자연히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 살던 집은 한옥 기와집으로 안방 아랫목으로 해서 올라가는 다락방이 딸려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다락방이 내 공부방이 되어버렸다.
조용한 곳을 찾아 책을 읽다 보니 다락방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집에 있던 세계소년소녀명작선집에서부터 한국단편문학전집에 이르기 까지 다락방에 틀어박혀 책에 빠져 살았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보고 “그렇게 책만 읽지 말고 밖에 나가서 놀아라” 할 정도였다.
지금 같으면 책만 읽고 있어도 칭찬을 받았을 텐데, 당시로는 지금의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책에 빠지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구입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책은 빌려서 읽는 것 보다 역시 책을 사서 소장하는 게 마음 뿌듯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밑줄 처가면서 읽는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 매달 일정금액의 책을 사곤 했다. 조금이라도 책값을 아끼려고 서울 청계천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고서점가를 돌며 책을 구입했다. 시인 랭보는 책 살 돈이 없어서 서점에서 몰래 책을 훔쳐다가 읽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서점에 돌려주었는데, 몰래 가지고 나올 때 보다 다시 몰래 갖다 놓을 때가 더 떨렸다고 한다.
대학시절 청계천 고서점가에서 구입한 일본 소설 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모래의 여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책이다. 어딘가 카프카나 카뮈의 작품 세계와 닮은 ‘모래의 여자’ 내용 그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곤충채집을 떠난 남자 주인공이 모래 사구의 어느 한집에 갇혀 살게 된다. 남자는 그곳에 사는 여자와 함께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내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탈출하려고 온갖 방안을 모색하지만 결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그는 모래 속에서 물이 생성되는 저수장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희망에 차서 탈출할 생각을 접어둔다는 이야기다.
분명히 ‘모래의 여자’는 도시로부터의 일탈, 모래사구로부터의 소외라는 실존주의 성격이 강한 소설로 실존주의 철학자인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지만, 그 당시 어딘가 모르게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 작가 아베 고보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어, 대학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아베 고보 작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이 작가 주변을 맴돌며 연구하고 소설 번역서까지 출간했으니, 이 한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꾸어놓은 셈이다.
책을 읽다 보면, 특히 시집인 경우는 자연스럽게 시가 저절로 외워진다. 노래를 잘 못하는 나는 시를 읊는 것을 좋아했다. 노래 부를 상황이 주어지면 노래 대신 시 한편을 온갖 폼을 잡고 감정을 넣어 암송하면 주변의 친구들은 배를 잡고 깔깔 넘어간다.
노래를 잘 못해서 가장 곤경에 처한 것은 딸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때였다. 아이가 잘 잠들 수 있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이란 내겐 큰 고역이었다. 그래서 자장가 대신 고안해 낸 것이 시를 외워서 읊어주고, 이야기 책을 통째로 외워 들려주고, 그리고 천자문을 외워서 읊는 것이다.
일명 천자문 자장가는 새롭게 천자문 공부하는 셈치고 매일매일 16글자씩 외워서 들려주었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지금도 딸아이는 한자를 곧잘 한다.
딸아이가 목을 가누고 혼자 앉아 있을 수 있을 때부터는 책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에 가면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2살 때부터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워서 읽나 보다 했더니, 이미 글자를 그림으로 인식해서 익혀버린 것이다. 그 이후 딸아이에게 책읽어주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특히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으레 책을 골라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한다.
올해로 딸아이가 7살이 되었는데 지금도 잘 때는 꼭 책을 읽어준다. 딸아이의 말에 의하면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온다고 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책을 읽어줘서 그런지 딸아이는 또래들보다도 많은 어휘를 구사할 줄 알고 표현력 또한 풍부하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는 엄마, 같이 방바닥에 엎드려 책 읽어주는 엄마, 함께 누워서 책을 높이 쳐들고 책 읽어주는 엄마, 이보다 더 갚진 추억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