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유모차에 접은 박스를 싣고 사내신호를 기다리고 있다크게 혹은 작게 접혀진 무게를유모차 어린 힘이 기우뚱 받치고성급히 건너려는 철없는 바퀴 애써누르고 있는 손등이 위태롭다허리 곧추 세우고꽉 채운 박스 속같이 당당했던 시절속의 것을 다 비워 낸 채 거리로내몰리기 전까지세상은 언제나 거뜬히 들어 올릴 수있는 박스처럼 만만했을 것이다석간신문 한 귀퉁이어깨 처진 실직 가장들과 함께그의 이름 새겨진 빛나는 자개명패도 날짜 지난 신문처럼 폐기처분되었으리라유모차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간아이들이 밀고 가는푸른 신호등 건너 세상굽은 허리 펴고 오래 바라보는사내우리 시대의 서글픈 풍속도 한 장을 본다. 시인은 횡단보도에 서서 낡은 유모차에 접은 박스를 싣고 가는 사내를 보고 한 때는 빛나는 자개명패 앞의 당당하던 사내를 떠올리다가, 이제는 지난 신문처럼 폐기된 사내의 서글픈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거뜬히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의 의욕과 패기와 힘은 사라지고 결핍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실직자와 빈민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서글픈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슬프고 안타까운 눈을 본다. 시인
2018-12-06
1내 말고도 던져놓은 한(恨)이 있구나다리 밑 빤히 보이는 속내가 먼저시퍼렇게 멍들어져 있으니2길이 난 길을 그저 가는아직 끝나지 않은 한이 쓰여지고있구나팔백리 쓰고도 다하지 못한긴 하나의 획굽어 휘어내 속까지 들며저물녘저물녘젖어흐르고서예가 솔뫼 정현식의 서정성 높은 작품이다. 민족의 한이 서린 지리산과 남도의 골골을 적시며 흘러내려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강이 긴 하나의 획이라는 느낌을 받음을 본다. 역사의 아픔과 한이 풀어져나와 흐르는 섬진강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고 한 많은 땅을 적시며 시퍼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8-12-05
내고향 갈대섬 도요새의 나라강 건너 물새들 따라 다녔네물새알 배암 천국인 갈대섬자맥질로 건너가면새들은 날아오르고소리만 남아 둥그런 새알이 되었네아 가버린 섬들이여 너를 부른다그 아름답던 바다와 하늘이여훠어이 훠어이 너를 부른다내고향 강하구 도요새의 나라강 건너 물새들 따라 다녔네친구들 어디로 다 가고 갈대섬이름만 남아 송도죽도해도대도상도자취없이 나는 쓸쓸히 떠도네아 가버린 섬들이여 너를 부른다그 아름답던 바다와 하늘이여훠어이 훠어이 너를 부른다생명의 모체인 형산강가에서 태어나 그 강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추억 하나를 빌려와 형산강 하구 도요새의 나라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쓸쓸한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 아름다운 생명의 근원 혹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깔려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2-04
슬픔을 참으면 시가 되고눈물을 참으면 노래가 되느니조국의 시가 되고국토의 노래가 되는그대, 우리의 섬이여그대 더 이상 조국의 막내가 아니라잠들지 않는 첨병이려니국토의 끝이아니라새로운 위정척사려니내 눈을 뽑아 너에게 주마내 심장을 꺼내 너에게 주마오늘은 시가 되지 말고뜨겁게 분노하라오늘은 노래가 되지 말고활화산처럼 포효하라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며 그들의 초중고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땅이라는 교육을 심화시켜나가는 망동을 하고 있다. 시인은 눈을 뽑아주고 심장을 꺼내 주며 분노하라고 절규하고 있다. 우리 땅 독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시행마다 푸르게 일렁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8-12-03
구정물 먹고살았다고 다 더러운 건아니야 내 평생 각다귀 파리떼시달리고 먹을 것만 탐하는사나운 팔자 타고 났지만 세상마감하는 날 모든 것 버리고 훌훌떠나는 걸 나보다 못한 인간들수두룩해 죽기까지 버리지 못하는질긴 욕심 고래등 같은 무덤 치장똥 빛으로 눈부신 송덕비 우글거려살아생전 갖은 허욕 그대로 베껴다논 걸 난 그래도 족이든 발이든마지막 솟구치는 뜨거운 피 한 대접까지아낌없이 베풀고 가는 걸 오히려무욕한 뱃속 뒤집어 삶은 내장 그대소주보다 쓰다는 고역스런 세상살이훌륭한 위로 되는 걸 게다가 보살 같은미소 끝까지 흔들리지 않아 날랜동작으로 귀때기 살 베어 가는너희들 보고도돼지는 탐욕의 대명사다. 그런 돼지의 생태를 들어 인간의 허영과 탐욕을 비판하고 있다. 돼지는 죽어가면서 온몸을 인간을 위해 바치고 간다. 자기희생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사실이지.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존재인지를, 그리고 자본의 탐욕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돼지를 들어 우회적으로 질타하는 시인의 따가운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1-30
눈보라 멈춘 산 묻혀진 길 헤치며걷는다 마른 솔잎처럼 흩어져쌓인 눈 위에 고꾸라진다돌아보지 말일이다 삶의 궤적처럼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흔적들맨 뒤 점이 된 발자국 하나동엽령에서 이쪽을 향해 손흔들고 있다이제 곧 향적봉인데,길은 어디에도 없다새로 만든 점 하나에서 나는걸음을 멈춘다서러운 것이, 살아온 삶만큼이나무겁게산등성이를 누르고 있다거칠게 헤쳐온 지난 생애처럼살아온 내 역사들이 골짜기마다타고 오른다야유와 환호의 저 메아리들,알 수 없는 무게로덕유평전에 갈앉는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났을까수런대는 이야기들이전설처럼 일어선다길 따라 걸어서 산마랑에 이르면눈길 헤치며 나는 다시걷는다눈 덮인 덕유평전을 건너며 시인은 한 평생 자신이 남기고 온 삶의 자국들과 그 부침(浮沈)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있음을 본다. 길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눈밭을 헤매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길을 떠올리고 있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지를, 가야하는지를 묻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게 인생이 아닐까. 시인
2018-11-29
벽이 깨어지며 파편들이 확 꽂힌다 비명을 지르며 자신들이 낸 생채기를 먹고 조금씩 부풀어 오르다 창을 내고 있다들여다보아도 안이 보이지 않는, 창 속으로 거대한 입들이 흘러 들어오고 추억처럼 젖은 눈도 밀려 들어온다들어온 모든 것들은 서로를 밀쳐내며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한다새로운 왕국을 꿈꾼다영혼을 내어주고 찢어진 벽 속으로 질주한다벽 속에 있는 창들에게 뼈가 되는 몸들 기형의 조각, 조각들이 터진 입과 짓무른 눈을 쌓아 올린다상처난 조각들이 숨을 쉰다 새로운 몸들이 일어서고 있다느리게, 그러나 빠르게 세상을 축조하고 있다상처와 잔해를 모아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발상이 이채롭기 그지없다. 상처가 상처로 깊어져 범람하지 않도록 생기를 불어넣고 치유되고 복원되어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왕국이 이뤄지도록 하는 시인의 건축술은 경이롭다. 시인
2018-11-28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제복에 묻혀 아침 저녁자전거 페달을 밝으며강마을 강둑을 달리며소리없이 깊이깊이 흐르는강물을 보네온통 매캐한 냄새와거대한 굴뚝마다 쿨럭쿨럭제철공장 하늘을 덮는 구름덩이자맥질로 하루해를 보내며겨울 때 씻던 강은 아니지만바람이 봄을 몰고 오는 강둑에는강바람에 강버들 눈이 트고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징용 나가 소식 없는큰아들 생각만 하시던 할머니저 강물에 한 줌 재가 되어 흐르고아버진 허허로이 삼촌 이름을부르셨지 이 강가에서공장살이 십여 년꽃다운 젊음 다 바치고 김 형은또, 강물 되어 흐르네이렇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자전거 페달을 밟으며강바람 마시고봄을 몰고 오는 강바람에버드나무 물이 오르는 것을 보네시인이 태어난 대잠언덕을 끼고 흐르는 포항의 젖줄 형산강을 그리고 있다. 감각적 사유와 미학적 감성이 잘 드러난 이 시에서 일제에 강제 징용된 삼촌의 가슴아픈 서사와 1970년대 산업현장 노동자들 애환을 절절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간절히 녹아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1-27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부서져 흙으로 돌아갈나뭇잎들에게는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소리의 아름다움과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덮힐 때쯤한 곳에 숨죽이고 웅크려나는 나를 묻는다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올라온다어쩌면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의 아름답고 섬세한 감수성이 인상적이다. 생성과 조락이라는 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순리지만 시인은 그 순간 순간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희망을 예견하고 꿈꾸고 있어 매우 희망적인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1-26
ㄱ문고 화장실에 앉아여자의 아랫배 탁본을 본다화장실 문짝의 배꼽 아래, 사타구니에, 허벅지에꾹꾹 찍힌 화인(火印)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항변이 거셀수록여자의 배꼽 아래가 더 뜨거워졌던것은 아닐까좌우로 비벼 누른 자국이 지문처럼선명하다손잡이 하나만은 말끔하게 남아 있다담뱃불끼리 묵언의 약속이 있었을게다저 문을 열어야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여자의 아랫배 앞에서 주춤주춤바지를 꿰는 동안손잡이가 두려워진다화장실 문 밖에 나서면 무수히흉터가 찍힌 내 아랫배를누군가 탁본하여 옷 속에숨기고 다닐 것만 같다화장실은 극도의 폐쇄성이 머무는 공간이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에 대해 우리는 이러한 폐쇄성을 순환하며 자기의 상처를 탁본해서 숨기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논쟁보다는 불균형의 욕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8-11-23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우리들 사이에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푸른 곰팡이라는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고 의미가 깊다. 푸른 곰팡이는 발효라는 시간을 거쳐 생기는 것이다. 발효는 진지하게 자신을 삭힐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편지는 출발부터 배달되어 도착할 때까지 사나흘 시간이 걸리는데 시인은 그 기간을 사랑이 아름답게 발효되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주 감작적이고 미학적인 시인의 사물인식의 틀을 본다. 시인
2018-11-22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한 때 교육현장의 교사였던 시인은 아이들과 가을날 시드는 꽃잎 속 꽃씨를 거두며 생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책임지는 일이라고 깨닫고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단단히 견디며 함께하는 것이라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일러주는 시인의 목소리가 깊고 그윽하기 그지없다. 시인
2018-11-21
고통은 여물었다, 송두리째 내가 빠져 나갔다열매 속의 저 유수한 결, 우리가취하고나누었던 바람의 길말을 걸면 단물이 곧 터질 것 같다청춘이 저렇게 눈물겹게 왔다 간길이었겠다너를 벗겨내면 여름을 질러온 활주로같은 서슬이 있어그것이 마침내 징검돌 씨앗으로단단히 박혔을 때그러나 당기면 끌려나오는 그 시고떫은 것누구나 홀로 여무는 이맘 때뼈에 매어둔 길이, 돌아보면다 제각각 고통인 것들손잡아 주지 못했다한 번도시인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문제일지라도 그것을 철저히 객관화시켜 시로 형상화해낸다. 이 시도 일정한 거리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깊은 눈과 섬세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1-20
어머니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나는 처음으로서녘 하늘 노을을 보았습니다바람에 부대끼는 강가의 갈꽃들을한 줌 햇살처럼 뿌려진신모롱이의 별꽃 앵초꽃들을나는 처음으로 보았습니다어머니당신이 떠난 빈 자리에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계절따라 소리없이 돌아가는별자리도 저리 많다는 것을나는 비로소 알았습니다어머니당신이 지어놓은 이 세상의온갖 만물들의 이름을이제 나 혼자가만히 하나씩 불러봅니다당신의 뜻을 따라 불러봅니다돌아가신 어머니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의 자리가 간절히 인식되지 않았으나 어머니 가시고 빈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고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길, 손길이 미친 자연 속에, 우주 속에 아니,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8-11-19
뻗친 길을 달리는 마음달려도 뛰어도 떨어지지 않는발길 쓰러지는 마음낯선 유리창 안의 낯선나의 그림자그리고 또 낯선 나의 그림자찾아올 사람도 없는 밤아무도 없는 외국 공항 대합실바람을 기다리는가죽음을 기다리는가아무리 허우적대도 깨어나지 않는나는 나비의 꿈‘장자’의 나비의 꿈을 떠오르게 하는 시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길을 찾는 나비의 삶에 비유하고 있다, 학자로서 시인으로의 한 생이 끊임없이 의문과 추구와 기다림의 삶이었다고 성찰하며 고백하고 있음을 본다. 끝내는 죽음에 이를 인생이고 찾은 것이 허상일지라도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피력하고 있다.시인
2018-11-16
일생독한 그리움에 취한 나는이내 드렁드렁 코를 골 것이고그러면 바람은 바람대로봄볕은 또 봄볕대로내 젖무덤 이쪽과저쪽으로 넘나들며 지분대겠지더러는내 무릎과 무릎 사이 분주히 들락이겠지아, 늙은 복숭아나무 아래서의 한낮어느새 내 꿈은 깊고 달콤하게 숙성해낡은 술통 같은 내 몸을 향기롭게 채워주겠지그리하여 ….그 마흔 그늘 아래 뿌리내린 저 나무이 한 몸 벌컥벌컥 다 비우고취한 듯 불콰히 꽃 피우겠지잠시, 등 굽은 세월일랑 잊고왁자히! 술 냄새 풍기며흥청망청 꽃 피우겠지시 전체가 에로티시즘 경향을 띠고 있다. 복숭아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는 동안 봄볕도 바람도 자신의 몸을 들락거리고 자연과의 충만한 관계가 이뤄지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결국은 에로티시즘을 활용해서 자연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며 정신적 육체적 충족감을 얻으려 하는 시인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시인
2018-11-15
바다 속에는 화채봉(華彩峯)이 있다바다를 들면 같이 늙어가는 소년을 만난다. 비가 오다가 금색 노을이 가득한 화채봉, 밀랍향기 아득히 해가 진다.바다 속에는 해가 지는 집이 있다.산호 숲을 지나서 어머님 고운 관의 물결무늬 그리는 그 곳에도 파도치는 아침, 고향이 있다.바람을 따라 너의 마음 풀어 줄 수 있다면 서쪽으로 가거라.선정사 곱게 단청 날고 단풍지는 가을로 5, 60년 떠나면, 같은 세월이 날아갈 듯 흐른다중국의 고전 ‘장자’에서 유추된 바다를 그리고 있다. 심오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고전이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바다는 닮아 있는 것이 많다. 넉넉한 삶의 지헤와 덕을 품고 있는 ‘장자’만큼 늘 푸르고 넉넉하게 일렁이며 우리 곁에 다가서는 바다는 무한한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시인
2018-11-14
영원이란 늘 저렇게파도처럼 철썩이다조용히 물러나기도포구에 뿌려놓은슬픈 포말의 숨소리잠시 잠깐 머문다고어찌 누구를 하찮은일생이었다고 할까철썩이며 다가와 하얗게 부서져버리는 파도는 최선을 다하는 순간을 살다 간다.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끝나버리는 걸까. 영원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평생을 빛나는 감성과 감관을 열어 글을 놓지 않고 살아온 시인은 한 생을 성찰하며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진지하고 겸허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8-11-13
너는 투구와 갑옷으로방패와 곤봉으로중세의 기사처럼 우스꽝스럽게 서 있구나동생아그대로 장난감 병정처럼 서 있어다오누가 네 팔목에 잔인의 고춧가루를 뿌리더라도납처럼 있어다오우린 형제니까 미워하지 않으니까싸움닭으로 거리와 광장에서몇 평 닭장에서 푸드덕거리지만우리는 아프다털 뽑히는 싸움보다는 어울려 노래하고 싶다가슴에 안기어새와 바람의 자유 햇빛과 그리움따뜻한 사랑에 젖고 싶다1980년 광주의 아픔을 겪은 시인은 그 쓰라린 시대의 비극을 화해와 치유의 시 정신으로 쓰다듬고 있음을 본다. 방패와 곤봉을 든 형제도 싸움닭으로 비유되는 민중들도 모두 한 민족이고 형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간절한 화해와 평화지향의 목소리를 듣는다. 서로의 가슴에 안기어 새와 바람과 햇빛의 자유를 꿈꾸는 시인의 빛나는 메시지가 감동적이다.시인
2018-11-12
공사판, 자갈에 깨지고 흙에 뒹군하루를 등에 진, 사내가 방에 들어선다장화에 곤죽이 되어 들러붙은 허기진 저녁도그를 따라 들어선다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나날의 노동에 겨워 자신의 몸이 늪이 되는 밤하얀 꽃망울 터올린 가로등이탈진한 육신의 향기 진동하는 방에무단 침입해 있다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장마 곰팡이들은 꿈속까지 번져든다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잡고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그이 몸이 맑게 개여 다시 깰 때를 기다려구절초 수북하게 차려져 있다이 땅의 노동하는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시 같은 느낌을 주는 감동적인 시다. 힘겨운 노동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버린 이 땅의 아버지들을 구절초에 비유하고 있다. 가족들의 밥을 위해 피땀 흘리며 산화하는 아버지들은 구절초처럼 쓸쓸한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