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상한 짐승처럼 혼자 앉아 보는저 영화 슬픈 영화슬픔의 직시야말로 슬픔을 이기는 것슬픔의 농축액 초대권 한 장으로 쉽게 맛볼 때마다이 삶 슬픔은 희석되고다시 속아본다영화관 밖 휘황한 밤 이렇게 살아 산책할 수 있다고믿어본다 휘황한 세상 저 겁나는 세상슬픈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 바깥의 휘황찬란하고 유쾌한 거리를 활보하며 시인은 영화 속 슬픔에 함몰되지 않으려 애씀을 본다. 슬픈 영화는 가슴 속의 상처를 자극하여 더 깊은 슬픔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인은 슬픔을 직시하며 슬픔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펴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7-01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하루종일 그 비린내로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시인은 갓 태어난 자기 아이의 냄새를 통해 새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부성애(父性愛)를 표출하고 있다. 아기냄새, 바닷가 냄새, 양수 냄새, 이런 냄새들은 아이와 시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매체이다. 이 냄새는 세상 모든 아빠들이 이 냄새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로 서기 시작하는 생명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시인
2019-06-30
하루를 살아도온 세상이 평화롭게이틀을 살더라도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그런 날들이그날들이영원토록 평화롭게….평화는 대립과 분쟁의 중단이나 종식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어우러져 한 소리를 내는 것이리라. 함께 행복으로 나아가는 상태를 일컫는 적극적 의미의 평화를 시인은 추구하면서 그런 날들이 그치지 말고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염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6-27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빗소리 속엔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사산(死産)된 채로 드러나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빗소리는 그러나침묵을 연다숨어서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시인은 빗소리와 침묵을 대립 관계로 설정하고 시를 전개하지만 ‘빗소리는 침묵을 연다’는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는 밀접한 상관관계로 얽혀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이런 대립, 상반관계에 있는 듯하지만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도처에 많은 것이다. 시인
2019-06-26
영화감독이 메가폰으로 컷을 선언하고 배우들이 방금 전 연기했던 영화 스토리를까마득하게 지우는 순간이 왔다죽음이 사형 집행인처럼 도끼를 들어 거울의 목을 쳤다거울 공간이 깨지고 어둠의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거울 시간이 깨지고 암흑물질이 노아 홍수처럼 세상을 가라앉혔다거울이 비추었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풍경이 캄캄하게 지워졌다하늘 아래 모든 풍경을 기호 인드라망으로 엮은중중무한(重重無限)꿈이라는 거울구중궁궐 꿈이라는 거울우리 시대는 거울의 시대가 아닐까. 어쩌면 거울에 반사되고 복제된 이미지에 얽매여 사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성이나 진실을 거울 뒤에 숨겨져 있고 거울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서 소위 ‘기호 인드라망’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거울을 깨고 거울 뒤로 사라진 진실한 언어, 영혼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9-06-25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로 숨겼을까요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인 고양이를 제재로 쓴 동화적인 상상의 작품이다. 문명에 길들여진 고양이가 시인의 방에 있는 소품들과 열쇠까지를 증발시켰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명에 기들여진 것들이 문명을, 더 나아가 인류까지 농락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무서운 상상력을 활용해 문명을 비판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6-24
내 안에 오래 잠든 씨알들이 비 후줄근 맞고 눈 떠초록 혀로 앙증맞게 자라나옹알이 옹알이를 시작하다가푸르러 푸르러져서는몇 마디 금강의 말을 읽혀천둥 번개에도 오롯할저 구름 위의 노래 한 곡 이루어어느 밤 별빛 스쳐 불러 준다면억년 잠든 저 너럭바위들도불끈불끈 일어나 더덩실 춤추지 않으랴1억년 잠든 너럭바위들도 불끈불끈 일어나 덩실 춤추게 하고 몇 마디 금강의 말을 읽혀 천둥 번개에도 오롯한 노래를 부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 봄비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강한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봄비는 엄동을 견딘 만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일렁이게 만든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6-23
빼지 않은 칼은빼어든 칼보다더 날카로운 법빼어든 칼은원수를 두려워하지만빼지 않은 칼은원수보다 강한저를 더 두려워한다빼어든 칼은이 어두운 밤이슬에이윽고 녹슬고 말지만빼어들지 않은 칼은저를 지킨다이 어둠의 눈물이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빼어든 칼보다 빼지 않은 칼, 칼집 속에 있는 칼이 더 날카롭고 두렵다고 말하는 시인은 실제의 칼을 들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본다. 침묵의 힘이 웅변의 힘을 제압한다고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하며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며 내적 충실을 기하는 사람은 빼지 않은 칼처럼 더 날카롭고 견고하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6-20
가진 것 다 나눠주고 비운 뒤에야그대 흥겨운 듯 소리를 낸다따뜻한 봄날에는 가만히 있다가도바람 부는 겨울이 오면 더 크게 소리 낸다언덕이나 빈 들판에서는 소리를 더 잘 낸다무표정, 무욕의 연주라도 되는걸까내가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불 때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휘파람같이 소리를 내준다그때도 병은 속을 다 비우고 있었다소리를 낼 때면 언제나 빈 몸이었다빈병은 비워져 있으므로 채울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고 속이 비었기에 바람에 소리를 담고 내놓을 수 있다는 시인의 말은 사람을 생각하게 해준다. 나눔과 베풂의 미덕을 빈병을 활용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빈 콜라병 속에는 빈 콜라가 가득 차 있다고 쓴 신동집 시인의‘빈 콜라병’이라는 시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시인
2019-06-19
그 여자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그녀의 머리털은 내머리털 속에 있다그 여자는 내 두 손의 형상그 여자는 내 두 눈의 색깔하늘 위의 돌 한 개처럼그 여자는 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든다그 여자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서나를 잠들게 두지 않는다빛이 가득한 그녀의 꿈은태양을 증발시키고나를 웃고 울고 또 웃게 하고아무 할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인이다. 이 시는 그의 사랑노래에 든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빛이 넘치고 모든 색깔이 사랑의 색깔로 변한다. 가슴 속에 사랑의 말이 넘치고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랑하는 일을 예찬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6-18
고니가 둥지 밖으로 날아오른다먹이를 찾아고니는 오늘도 들판을 헤매다 돌아왔다들판이 저리 넓은데(…)어둔 밤에 돌아온 고니가날개를 접고둥지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연봉 1400만원 계약직 일자리를 찾아파닥이다 돌아온어린 고니의 발바닥이 새까맣다시인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하루 종일 고생하고 돌아와 잠든 어린 계약직 근로자의 피곤한 모습을 보며 먹이를 구하려 넓은 들판을 헤매다 둥지에 돌아와 잠든 어린 고니의 까만 발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까만 맨발의 고니들이 도처에 허다한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6-17
터미널을 나선 네 시 버스가읍내를 벗어나나 했더니갑자기 멈춰 선다‘고장이라도 난 걸까?’ 궁금해지는데‘보소 기사 양반 안 가고 뭐 하는교?’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다둘레둘레 고개를 돌리니보따리 인 할매가저만치서 죽으라 달려오는데어린아이 걸음보다 더디다‘누고?’‘뭘 이고 오노?’할매가 간신히 버스에 오르자그제야 움직이는 버스‘요새 버스 기사가존 사람이 많더라고’어느 할배 목소리에이내 차 안이 환하다시골 버스를 모티프로 쓴 따스하고 정겨운 풍경 하나를 본다. 출발과 도착 시간을 엄격히 지켜야하는 도시와 다른, 여유롭고 넉넉한 시골 버스 기사의 마음에서 훈훈하고 따사로운 인정을 시인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듯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6-16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여기까지 왔다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골짝마다 난장 쳤다손목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뼈가 패었다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생을 패대기쳤다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렸나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 같다핏발 가신 눈 끔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쉿!잠들라 운명.오랜 세월 동안 시인이 고삐를 부여잡고 온 소는 무엇일까. 시인이 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꿈과 욕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실현을 위해 애쓰며 건너온 세월은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사나운 소를 몰고 인생이라는 골짝을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19-06-13
눈이 온다먼 북국 하늘로부터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우뚱거리던눈송이가 살풋이 내려앉는다마당이 부푼다둥그렇게, 둥그렇게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작은 새가 내려앉는다저 죽지에뺨을 대고 싶다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먼 북국에서 시인의 집 마당까지 찾아온 하얀 눈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눈이 내린 마당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고 표현하는 시인의 마음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본다. 내려앉는 작은 새처럼 내리는 하얀 눈에 가만히 뺨을, 아니 가슴 속의 고운 꿈을 살포시 얹어보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19-06-12
긴 겨울방학도속절 없이 끝나는구나내일 모레가 개학날인데해 놓은 숙제는 아무것도 없다입춘(立春) 되어학교에 모인 나무들은화사한 꽃잎, 싱싱한 잎새달콤한 꿀,제각기 해 온 과제물들 펼쳐놓고자랑이지만등교를 하루 앞둔 나는 비로소책상 앞에 앉아 본다사랑의 일기장은 텅 비었다베풂의 학습장은 낙서투성이개학해서 선생님을 뵙게 되면무어라고 할까방학도 다 끝나가는 날이것 저것 궁색한 변명을찾아보는 노경(老境)어느 오후대학의 교단에서 정년을 맞이하면서 시인은 어린 학창시절의 개학날의 풍경을 떠올리고 있다. 이제 나이들어 인생이라는 학교를 염두에 두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살아오면서 무얼하고 살았는지, 꼭 해야할 일들을 결행하지도 못하고 개학을 맞이한 학생처럼 한 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며 안타까운 소회를 밝히는 시인의 겸허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6-11
다홍 천 턱까지 끌어올리고장작더미에 누운 여자기척도 없다불길 잦아들도록 끝끝내 이글거리던가슴뼈와 골반회(灰)가 되어 허물어진다 한때소행성과 대행성이 생성되고해와 달과 별이 맞물려빛을 놓친 적 없던여자의 집감쪽같이 철거당했다한 우주가 사라졌다인도 기행 중 시인은 갠지스 강가에서 행해진 다비식을 보고 있다. 생명이 깃들었던 한 여인의 육체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똑같이 육체를 허물어뜨리고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숙명적 한계를 느끼며 생의 덧없음과 허망함에 젖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06-10
맞은편의 몇은 책을 읽고몇은 가방들이 경기에 대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또 몇은 거대한 가방 속처럼 어두워지는 밖을 보고 있다가방장사를 때려치우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전철은긴 자루 같은 터널로 들어간다그는 생각한다이곳은 꼭 누군가의 자루 모양 숄더백 속 같아!이 시에 나오는 가방, 전철, 터널, 자루 모양의 숄더백은 모두 현대사회가 양산해 내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갑갑함이랄까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소재들이다. 가방 속 같은 일정한 공간 속에서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음을 본다. 이게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시인
2019-06-09
돼지 눈에는부처님도 돼지로 보이는 것이라고노스님 말씀에그야 그렇겠지요무심코 머리 끄덕였는데그때 나이 곱절 가까운40이 넘은 오늘에하늘의 별을 세듯 곰곰 생각해보니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한 말씀만 같아밤낮없이 후회롭다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개도 돼지도그네 새끼들까지도다 안쓰럽고 가련해사람같이만 보이나니어제의 나같이만 보이나니마흔은 만만치 않은 나이다. 삶의 열정과 패기가 넘치고 여러 상승욕구가 충일한 나이가 아닐까. 시인은 오래전 큰 스님이 던져준 화두(話頭)를 떠올리며 생의 자세를 다잡고 있음을 본다.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묵시의 교훈을 떠올린 것이리라. 앞만 보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성찰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눔의 손을 펴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야한다는 메시지를 세상 속으로 던져넣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6-06
그러나꽃씨를 마저 흩뿌리듯봄빛은 기어코 어김없이 쏟아져와서바람에 잎 틔우는 새가지 떨켜마다사람의 숨통을 틀어막는고요가책하는 마음들멀어질수록저 나무의 죄는상처를 몸으로 만든 것이니이 시는 상처를 모티브로 죄는 상처를 만들지만 그 상처는 결국 축복이 된다는 모순을 펴 보이고 있다. 봄빛은 나무의 생육을 도와 새순이 나고 왕성한 생명의 시간들을 생성시키지만 그것이 상처가 되어 다시 새로운 몸이라는 축복에 이른다는 모순의 순환논리를 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6-04
밤하늘엔달무리가 졌다보름달이 슬립을 걸쳤나풍만한 달은자극적이어서 좋다이봐요, 어서 들어와요보름달 속에 손을 밀어 넣으니따뜻한 강물이 만져진다물어뜯은 이빨자국할퀸 손톱물결도 보인다달도 나이가 차면누군가 몹시 그리워지나 보다한 달에 꼭 한 번강물 위로 내려와흠뻑 젖는 걸 보면시인의 우주적 상상력이 매우 감각적으로 형상화된 시다. 시 전체를 흐르는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달도 나이가 차면 누군가 몹시 그리워 지나보다’라고 표현한 시행에서 시인의 감정이 달에 이입됨을 본다. 생명이 있든 없든 삼라만상이 다 소멸의 시간이 다가오면 그리움에 젖기 마련일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 시인
2019-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