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근대화 산업화의 물결이 농어촌에 몰아친 60, 70년대를 생각한다. 농촌 어촌을 떠나 돈 벌러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잡지 못하고 도시빈민으로 표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달동네에 사는 곤궁한 그들이 바라보는 반달은 시들고 찌든 갈구렁달로 보였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 도시빈민들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23
그가 깔대기에 플라스틱 가루를 쏟아 붓고 있다깔때기에 달린 사출기는 그것들을 천천히녹이고 있다. 기찻길 옆 가건물 공장기차는 오지 않는다사출기에 달린 기계의 문이 철컥, 열리고열두 개의 푸른 칫솔 대들이 보조가지에달려 있다. 언제나 참을 수 없는 건끝없이 재생되는 플라스틱 잔해들이다잔해들은 분쇄기에 달려 들어가다시 가루가 되고 곧 사출기 속에서녹아 새로운 금형을 기다린다샴푸 뚜껑들이 하얗게 쏟아졌다이 뚜껑들엔 자연, 이라는 구호를 내건세제회사가 담길 것이다사출기 옆엔 그가 달려 있다사출기의 장점은 기계를거의 쉬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죠교대가 올 때까지 하루 열 시간 그는그렇게 서 있다그는 그렇게 서서 인생을 생각한다사출기라는 기계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인상적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속성과 함께 그 기계 옆에 달려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시인은 우울한 내면을 내보이고 있다. 우리네 한 생도 저 기계와 별반 다를 게 없이 기계처럼 쉼 없이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시인의 인식에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번지는 아침이다.시인
2019-12-22
다 팽개치고 넉장거리로 눕고 싶다면꽃 핀 산벚나무의 솔개그늘로 가라빗줄기가 먼저 꽂히겠지만마음 구부리면 빈틈이 생기리라어딘들 곱밉든 군식구가 없겠니그곳에도 두 가닥 기차 레일 같은 운명을 종일 햇빛이 달구어 내지먼저 온 사람은 나무둥치에 파묻혀 편지를 읽는다풍경(風磬)이 소리 내는 건 산벚나무도 속삭일 수 있다네달빛이나 바람이 도와주지만올해 더욱 가난해진 산벚나무가(家)울어라 울어라, 꽃 핀 산벚나무가 씻어내는 아우성봄비가 준비된 밤이다겨울을 견딘 봄 산의 나무들에 새순이 돋기 전 산 중턱에는 환하게 산벚나무 꽃등이 켜진다. 시인은 정갈하고 단아한 목소리를 이 깨끗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산벚꽃이 피고 봄비가 내리면 온 산하는 새봄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시인의 미학적 인식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봄 시를 읽는다. 시인
2019-12-19
내 속에 둥지 틀고 싶어하는저 날짐승들나는 왜 나뭇가지 하나바위 틈새 한 곳비워주지 못하나나는 왜 잡풀에게 파 먹히는길에게 몸 한 번 내어주지 못하나나는 왜,내가 없는 곳에 번성한생물들의 생기길도 집도 아무 이름도 되지 못한나를 때린다미치면, 나그 무엇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내 속의 둥지’는 무엇일까. 시인이 상상하는 여성성의 공간이 아닐까. 시의 제목 역시 여성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 시는 여성이 살아온 세월, 그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유혹과 시련 많은 한 시절에 대한 회한이 절절한 목소리로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18
초록은 초록만으로 이 세상을 적시고 싶어한다작은 것들은 아름다워서비어 있는 세상 한 켠에 등불로 걸린다아침보다 더 겸허해지려고 낯을 씻는 풀잎순결에는 아직도 눈물의 체온이 배어 있다배춧값이 폭등해도 풀들은 제 키를 줄이지 않는다그것이 풀들의 희망이고 생애이다들 가운데 사과가 익고 있을 떼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이끌고어는 불켜진 집에 도착했을까하늘에서 별똥별 떨어질 때땅에서는 풀잎 하나와 초록 숨 쉬는갓난아기 하나 태어난다밤새 아픈 꿈 꾸고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내 이웃들그러나 누가 저 풀잎 앞에서 짐짓슬픈 내일을 말할 수 있는가사람들이 따뜻한 방을 그리워할 때풀들은 따뜻한 흙을 그리워한다풀잎에서 생명을, 생명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희망을 보는 시인의 깊은 시안을 본다. 풀잎에서 순결함과 겸허함을, 치유와 구원을 느끼는 섬세한 시인의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정결하고 투명한 시심을 발견할 수 있다. 시인
2019-12-17
무덤은 크고 둥글고 푸르다가끔 무덤 안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린다그곳이 입구인지 알고길을 제 몸속으로 빨아들이며 날아온 새들이발을 내려놓는다새들에게도 지구는 미끄럽고 둥글다어쩌면 지구는 거대한 무덤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시인은 지구와 무덤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구라는 거대한 무덤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운명적 존재 양식을 상상력과 참신한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2-16
함께 이루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상주시 부원도 석운도예공방토끼랑 닭이랑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드는 앞마당 한쪽 늙은 호박 한 덩이생을 이어주던 넝쿨넝쿨 다 어디가고무거운 육신 밤새 내린 하얀 눈 속에 묻혀노을빛 속살 덜어내는 중이다검붉은 깃털 윤기 잘잘 흐르는장닭 다가와누비 눈으로 감싸인 어깨부리로 쪼는 순간덩덩, 북소리가 난다해진 앙가슴에 달라붙은 토끼 두 마리고개 갸웃거리며 갉아댈 때샤샤샥 일렁이는 중심의 물결생의 소리가 저 늙은 호박에다 들어앉아 있나감나무 아래 백구도 어느새 담장을 타고허공을 향해 컹, 컹, 후렴을 한다소리가 소리를 키우는 눈부신 고요석운도예공방의 앞마당에 잘 익은 늙은 호박이 있는 풍경을 그려내면서 시인은 호박과 토끼와 장닭, 백구라는 자연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뤄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2019-12-15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나무와 풀잎과 이슬과 바람황무지 흙먼지 별빛의 언어대지와 지평선 새들의 말물결은 뭍으로만 치지 않지만바다에 출렁이는 물결같이기슭에 휩쓸리는 파도같이세계는 그대 앞에 펼쳐졌건만부서진 파도는 되밀려가네허공에 입 맞춘 타는 그 입술메마른 입술이 입 맞춘 허공병사들, 병사들 모든 병사들언제나 무거운 물음같이원방(遠方)의 어두운 그림자처럼언제나 다가서는 질문같이어제도 오늘도 모든 병사들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연에게 친근한 대화의 창을 열지만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병사들이란 누구일까. 그것은 갈등과 분쟁, 전쟁의 희생자들을 일컫는데 시인은 그들을 구원하려는 간절한 염원의 마음을 펴 보이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불화들이 양산해 내는 비극들의 치유와 구원을 염원하는 시인 정신이 선명하게 읽혀지는 작품이다. 시인
2019-12-12
아플수록 몸은 눈이 밝아진다열에 들린 몸이제 속을 날아가는 흰나비를 본다꼼지락거리는 나무의 발가락을 본다넋이야, 넋이야 출렁이는 피(…)어디서 사과 익는 냄새신 살구 냄새물소리물소리달구나 거렁뱅이 바람에도진한 살 냄새아아 뜨거운 몸이한 발만 내디디면그대로 춤이 될 것 같은데허공에 피어갖은 빛낄러흐드러질 것만 같은데그리 길지 않은 생을 노동운동과 노동문학에 바치며 뜨겁게 살다간 시인의 삶을 향한 깊은 통찰의 목소리를 듣는다. 삶과 죽음,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무너질 듯 무너질듯하면서 다시 일어서는 시인 의식을 본다. 그를 사로잡는 고통과 허망함과 절망감을 춤으로 승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는 시인의 뜨거운 몸짓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12-11
궁벽한 삶의 비탈에추수 끝난 옥수수 대처럼 서서마른 마음 펄럭인다밭뙈기 아래 수척한 그늘이강물에 비쳐 환하다저건 누구의 상처이지?강가에 흩어진 자갈들이 많이 으깨어져 있다큰물 지나간 어수선한 자리푸른 수심(水深)의 생각만으로두리번거리는 사이상처에 붙인 반창고처럼 풀들 우거진아픈 자리마다 핀 가을꽃눈부시게 수면에 얼굴 비춰본다거기, 나를따로 갓 쪽으로만 미는 물모든 걸 비추면서 날 적시는 물물음같이 울음같이 아픈물, 그 오래된 동강이길다랗게 내 몸 감돌아 흐른다.시인이 써온 동강이라는 연작시 중의 한 편이다. 추수 끝난 쓸쓸한 늦가을 동강의 풍경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삶의 상처투성이를 안고 동강 가에 선 시인의 얼굴을 적시며 물음 같이 울음 같이 가슴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삶의 질곡을 차오르는 서러움을 차가운 강물 속에 던져넣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10
자정 근처 생각은맑은 기름 같다불면의 접시 위를조금씩 채워 가서꺼질 듯피어나는 빛 속사리(舍利) 하나앉힌다자정 무렵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시인은 맑은 기름 같이 떠오르는 생각에 더욱 선명해지는 의식을 가다듬고 있음을 본다. 불면의 접시 위에 조금씩 채워나가 그 위에 이뤄지는 사리(舍利)라고 지칭하며 구원의 빛을 앉히는 한 밤의 정결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2-09
치자향 흐드러진 계단 아래 반달이랑 앉아하염없이 마을만 내려다본다몇 달 후면 철거될 십여 호 외정 마을오늘은 홀로 사는 누구의 칠순잔친가이장 집 스피커로 들려오는홍탁에 술 넘어가는 소리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지만보지 않아도 보이고듣지 않아도 들리는그리운 것들은 다 산 아래 있어서마음은 아래로만 흐른다도대체 누구 가슴에 스며들려고저 바람은 속절없이 산을 타고 오르느냐마을 개 짖는 소리에반달이는 몸을 꼬며 안달을 하는데나는 어느 착한 사람을 떠나흐르고 흐르다가제비집 같은 산 중턱에 홀로 맺혀 있는가곡진한 유행가 가락에 귀 쫑긋 세운 채반달이 보다 내가 더 길게 목을 뽑아 늘인다박규리 시인이 미소사라는 절집에서 공양주 보살로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세속적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 보이는 이 시는 사찰이라는 계율과 법문의 엄격한 굴레들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히 벗겨 내지 못한 세속의 무늬들이 스며 듦을 인식하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깨달음의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12-08
집을 등에 이고 사는 것들은모두 달로 가야 한다나뭇잎 위에 앉아 있는 달팽이를 본 적이 있는가배경으로 언제나 달이 뜬다집이 아니야 짐이야그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어머니가 손톱을 깎으신다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어머니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꿈속에서 나는 자주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다제발 나타나지 마세요 아버지 자꾸 죽어요내 집이 피로 붉어요애야 노을이 져야 달로 간다나는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달이 창백한 건 일찍 나왔기 때문이 아니야달은 출혈의 산물이야내가 얼마나 피 흘리고서야 잔잔히 떠오르겠습니까나뭇잎 위에 앉은 달팽이를 바라보며 시인은 삶의 등짐을 가득 지고 가는 가족들을 떠올리고 있다. 각자의 집을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제 길을 가는 가족 구성원들이 삶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굴곡진 생의 길을 달팽이처럼 짐을 지고 가는 가족들에게 격려와 함께 초월을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시인
2019-12-05
새의 나라에 왔다새소리가 들리는 곳은 새의 나라다새는 사랑하겠다고 운다지그래서 울음이 노래가 된다지새의 나라에 와서 노래를 배운다울어 노래가 되는 울음을 배운다서울을 내가 울어 노래가 된다면그곳은 나의 영토카불을 내가 울어 노래가 된다면그곳은 나의 나라새의 나라에서는 대통령도 뽑지 않는다사랑을 누가 대신 울어줄 것인가사랑하겠다고 우는 노래를 향해누가 명령할 것인가사랑하겠다고 우는 노래가 왕이다나의 나라에서는 노래가 통치한다새가 날아가며 운다나 또한 달리며 운다내 노래가 들리면 그곳은나의 나라인 줄 알아라.시인이 말하는 새의 나라는 시인이 꿈꾸는 비상(飛上)과 꿈의 실현이 있는 나라다. 새의 나라는 영역의 단절이나 불통이 없다. 무한히 열려 있어 꿈이 있고 자유와 소통이 존재하는 나라다. 언제든지 날아오르고 떠날 수 있는 새는 부질없는 소유로 육신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 그런 새의 나라 같은 초월을 꿈꾸는 시인 정신을 본다. 시인
2019-12-04
토요일 저녁이면 그는 홀로 쌀을 씻고 나는 홀로 차를 마신다 어김이 없다 그는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그는 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고 있으며 나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그 까닭을 여기 밝혀 적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쌀 씻는 소리가 차 마시는 소리가 우리들의 암호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암호는 암호가 된다 하지만 그와 나의 암호의 한 모서리가 조금씩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음을 오늘 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미구에 모든 것이 탄로되리라)시인이 차 마시는 소리, 쌀 씻는 소리를 암호라고 말하는 것은 은밀한 소통의 방식을 말하는데 그 속엔 비밀스러움이 숨어 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에서 그 암호의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그 은밀한 소통의 꿈이 닳고 노출되어가는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염려하며 닥쳐올 건조하고 우울한 시간들을 예감하며 경계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03
갓 지어낼 적엔서로가 서로에게끈적이던 사랑이더니평등이더니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제 몸만 불리는구나갓 지어낸 밥은 차져서 밥알들이 서로 끈끈히 붙어 있지만 찬밥이 되었을 땐 밥알 알갱이들은 끈기를 잃어버리고 서로 흩어져 나뒹군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랑이랄까 혁명이랄까 세상사의 속성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사랑도 혁명도 우리네 인생살이도 시작될 때는 말랑말랑하고 연대와 결속도 끈끈하고 의욕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속력은 떨어지고 열정도 식어 흩어지고 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사랑, 혁명, 세상사를 경계하는 시인의 마음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시인
2019-12-02
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이웃 절집 부연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경지정리가 잘된 수백 만평 평야를흰 눈이 표백하여 한 장 원고지를 만들었다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 밖에 두고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문장을 생각했다강가에 나가 갈대 수천 그루를 깎아 펜을 만들어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 했으나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저 벌판의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그만두기로 결심하였다발목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 가던 저녁 눈길에백양나무 가지를 꺾어 쓰고 싶은 너라는 문장을시인은 눈 내린 들판이라는 원고지에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다 단념하고 만다. 무슨 까닭일까. 그 고요하고 완벽한 평화경을 어떤 표현으로도 쓸 수 없다는 외경감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시인
2019-12-01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미당 서정주의 고향은 선운사가 있는 전북 고창이다. 시인은 선운사로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개화시기를 잘못 알았는지 핏빛으로 타오르는 동백꽃을 못 보고 선운사 동구의 주막집에서 주모의 육자배기만 듣고 왔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 서러운 가락 속에서 무정하고 허망한 세월을 느끼고 막걸리 몇 사발을 마시고 돌아온 시인의 허허로운 마음 자락을 읽는다. 시인
2019-11-28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부서져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아주 부드럽고 미세한 시멘트 가루는 물과 만나서 엄청나게 강한 물질로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들어 삶의 원리 하나를 역설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강해지는 것과 가루처럼 철저하게 부서지고 실패를 거듭했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고 우뚝 일어설 수 있다는 시인정신을 읽는다. 시인
2019-11-27
사랑도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다아지랑이아지랑이길게 손을 내밀어햇빛 속 가장 깊은 속살을만지니그 물컹거림으로나는 할 말을 다 했어라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7번 국도변의 등명이라는 곳을 지나며 시인은 등불을 비추어 밝힌다는 등명(燈明)이라는 지명에 주목하면서 사랑의 원리 하나를 깨닫는다. 사랑은 밝히고 만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7번 국도변 등명이라는 곳에서 만져본 아지랑이 속살이 바로 사랑의 속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201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