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밑에 서 있으면은행나무가 되고 싶고소나무와 함께 서 있으면소나무가 되고 싶고감나무에 기대어 서 있으면감나무가 되고 싶고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시인은 은행나무, 소나무, 감나무 아래 서서 그 나무가 되고 싶다는, 그 나무들처럼 푸르고 아름답고 소담스런 열매를 맺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대책 없이 욕심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나무들처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무욕의 시인정신을 내비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25
비 오시는 소리 들린다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아, 푸욱 잠들고 싶다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빗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번잡스러운 삶의 시간을 벗고 한가롭고 평안이 흐르는 자기 내면의 시간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마음의 고향으로 찾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꿈이 마르는 나이가 되면서 그런 마음은 더욱 절실해져서 촉촉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사나흘 고요히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리라. 시인
2019-11-24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푸드덕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이슬을 털고빛 무리에 싸여 눈뜬내 이마 서늘하다산사(山寺)에서나 깨달음직한 순간의 깨끗한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그대로 시가 되어 시인에게 다가오는 새벽을 시인은 가슴 벅차게 맞고 있음을 본다. 대체로 밤에 찾아오는 무상감(無常感)이랄까 욕망의 순간들이 깨끗하게 정화되어 시는 새벽의 이슬방울처럼 투명하고 정결하게 시인의 가슴 속으로 굴러드는 것이다. 시인
2019-11-21
왜 벌레들의 몸은 딱정벌레의 몸은 뼈가 밖에 있고각질(角質)이고 살이 속에 들어 있고 감춘 살이고사람들의 몸은, 날쌔게 들판을 달리는한 마리 아프리카 표범은힘센 것들의 몸은 털과 살 속에 뼈를 감추고 있을까연질(軟質)일까 들킨 살일까사랑아 나도 그렇게 되어 있다 힘세지고 있다힘이 약한 벌레는 뼈가 밖에 있고 살이 속에 있으며, 사람을 비롯한 힘이 센 동물들은 뼈가 속에 있고 살과 털이 밖에 있다는 시인의 언급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사랑아 나도 그렇게 되어 있다 힘 세지고 있다’는 마지막 시구에서 시인은 사랑의 힘을 한 궤에 엮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20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꼭 비스듬히 서 있다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몸 가누지 못하는 척허공에 진분홍 풀어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안 속는다, 안 속아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두고왜 서 있나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왔나도화길 밖으로 꽃잎 다 흘리고안 속는다, 안 속아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질 듯이 비스듬히 서 있는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시인은 안 속는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되뇌이고 있다. 그것은 역설(逆說)이다. 경계에 몸을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복숭아나무의 특이한 생존에 매력을 깊이 느끼고 있는 시안을 본다. 시인
2019-11-19
우리나라의 기운이서해로부터 시작하여대관령에서 불끈 솟았다가동해로 내리닫는 곳봄은 아련함이 아니다노곤함도 아니다바람이다청록색 바다이빨 드러낸 파도다힘과 힘의 부딪힘이다대관령과 동해가 온 몸으로 부딪혀미친 듯이솟구치는 것이다겨울의 거센 모습과 바다의 힘찬 포효를 들어 물밀듯이 번져오는 봄의 도래를 예찬하고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에 새 생명들이 희망차게 차오르고 회생되는 것을 시인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1-18
새는 그 내부가투명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마치 물거품처럼, 부서짐으로써 스스로의나타남을 증거하는새는한없이 깊고고요한,지저귐이 샘솟는 연못과 같다새의 비상은 무게를 털어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덜어내어 가볍게 해서 날아오르는 것이다. 물거품처럼 부서짐으로써 한없이 깊고 고요한 창공에 들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새의 이러한 지고지순한 애씀을 흠모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땅 위에 묶인 우리 모든 인간들의 꿈과 바람이 아닐까. 시인
2019-11-17
무금선원에 앉아내가 나를 바라보니기는 벌레 한 마리가몸을 폈다 오그렸다가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배설하고알을 슬기도 한다시인은 설악산 백담사 큰스님이며 시인이다. 평생을 청정한 무욕의 삶을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한 생이 벌레처럼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를 반복하며 살았다고 고백한 목소리를 듣는다.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말이 서늘한 슬픔으로 스며듦을 느낀다. 소유와 욕심·욕망의 아집에 사로잡혀 하찮고 부질없는 것에 목숨 걸고 끝없이 반복하며 살다 죽는 것이 우리네 한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시인
2019-11-14
달밤이면 야수로 변하는 사내가 있었지 빈 들판 서늘한 나뭇가지 끝둥글고 빛나는 보름달 차오르면 깊고 어두운 늪 갇혀 있던 그의 살갗엔 하나 둘 길고 뾰족한 가시 돋아났지벌거벗은 흰 달빛 아래 꿈속처럼 아득한 전설가시를 꽃처럼 품어줄 처녀의 자궁 바라의 씨 뿌리는 거야야성의 내력 감추고 끝끝내 살아남아 달의 아이 잉태하는 거야 선명한 아침 햇살 떠오르면 붉디붉은 목숨 거듭나기 위해시인은 벌거벗은 흰 달빛 아래 꿈속처럼 아득한 전설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철갑을 두른 듯 거친 대궁에서 고운 보라색 꽃을 피워 올리는 가시연은 끝끝내 살아남아 달의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붉디붉은 목숨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강한 의지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변절과 변덕이 다반사인 경박한 사랑이 만연한 이 세상 속으로 진정한 사랑의 서사를 건네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11-13
오래된 서랍속황금빛 마흔 여덟 개들창이 있었네화들짝 불을 당기는 감청(紺靑)의 그리움아 그 애 청수는내가 잊고 있었던 세월동안신기루처럼 내 아이 서랍 속에 와 있었네연두 순 틔우고낙엽지고참 오랜 세월을행성처럼 나를 돌던 그 소리오늘도 아이의 방문 앞에 서면녹슨 손잡이까지 와 묻은아릿한 기억서랍 속 그 비밀스런 창들이 모두 열려주술을 왼다시인의 오래된 서랍 속에는 바람 칸이 마흔 여덟 개인 낡은 하모니카가 있다. 그 마흔 여덟 개의 창에는 먼저 보내버린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골싹하게 담겨져 있다. 어찌 잊혀지겠는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오늘 같이 서랍 속 하모니카의 바람 칸 속에는 너무도 그리운 아이의 모습이, 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머물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의 가슴 뜨거운 호명 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12
키가 크려는지아내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꿈을 대신 꾸어줄 수는 없는 일하지만 아내는 내가 곁에 없어 그런다고팔을 당긴다그러면철없는 기러기처럼행장만 꾸리는 남편도 머쓱해져다시 짐을 풀기도 하는 것인데선잠 든 아내의 숨결이 고를 때까지내 숨결도 고르다 보면이 세상꿈까지 동행할 수 있는 길이란참으로 드문 길이라아내의 고른 숨결 속으로내 고단한 숨결도가만가만 보태어보는 것이다오랜 세월 절집에서 은거하던 시인이 집으로 돌아와 오래 비워둔 방에 내린 어둠을 걷어내고 아내와 자신의 숨결로 채우려 하고 있다. 가만히 아내의 꿈결에 들어 아내의 숨결과 함께 가고자 하는 시인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19-11-11
한 장씩 더듬으며 너를 떠올리는 것은내가 이 풍경을 대충 읽어버린 까닭이다.어두워지더라도 저녁 가까이창문을 달아두면검은 새들이 날아와 시커멓게강심(江心)을 끌고 간다.마음의 오랜 퇴적으로 이제 나는이 지층이 그다지 초라하지 않다.그 창 가까이 서 있노라면오늘은 더 빨리 시간의 전초(前硝)가무너지는지,골짜기를 타고어느새 핏빛 파발이 번져 오른다.곧 어둠의 주인이 찾아들겠지만내가 왜 옹색하게 여기몇 가을째 세들어 사는지헤아리지 않아서 이미 잊어버렸다어떤 저녁에는 병색 완연한 새 한 마리가내 사는 일 기웃거리다 돌아가면나도 아주 하릴없어져 어스름 속에쭈그리고 앉아 불붙는 아궁일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정 심심해지면땅거미 가로질러하구 저쪽 갯벌 끝 끝까지 걸어가곤 한다.거기에는 소금을 모두 비운 한 채소금 막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시간의 무딘 칼날에 베여도 이제 더는아프지 않도록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불꽃을 훨씬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평온한 저물녘의 풍경을 나열하며 노을 따라 스미는 내면의 평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힘들게 하던 시련과 고통, 상처의 시간을 극복하고 희망차고 안정된 새로운 시간을 마련해가겠다는 의욕에 찬 시인의 마음 자락을 읽는다. 시인
2019-11-10
언제부턴가오른손 검지에티눈이라는 놈이칩거하기 시작했네틴은액을 바르고 덧발라놈들을 박멸시키려 해도새순처럼 번져갔네그들이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때면마취주사 맞는 것처럼손끝에서 늑골까지 쩌릿하네살다 보면작은 상처 하나가온몸을 아리게 하는 날이 있다네그런 날이 있다네손에 난 작은 티눈이 온통 온몸을 뒤흔들어놓기도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소한 일에서 받은 작은 상처가 얼마나 생의 균형을 흔들어 놓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삶을 힘들게 하는지를 토로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07
늦가을 바람녘비 맞은 감이 지네남정들 썩은 삭신을 덮고허옇게 허옇게 지리산 청마루도 흐려지는데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치고 있는가된똥 누다 누다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감씨 퉤퉤 뱉다 기러기떼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한반도 근대사 속을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감꽃 폭풍지리산 늦가을 땡감 나무 맨 윗가지에 매달린 감을 보며 시인은 이 땅 근대사의 아픔을 떠올리고 있다. 해방공간의 지리산은 이념으로 뜨거운 남정네들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름 없이 숨져간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시인은 붉은 감을 보며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파르티잔들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06
산 허벅지가 안개에 가려 있었습니다밑동이 튼튼한 나무들도 예사로웠습니다따라 오르는 길은 여전하였으나마루턱 아래 바로 거기샛길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담홍색 수줍은 길바람이 스치자11월 마른 덤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두둑에 서서나는 얼마나 숨을 헐떡거렸던지산길 오르다 만난 산마루턱 바로 아래에 난 작은 샛길 하나를 발견한 시인은 숨가쁜 희열을 느끼고 있다. 산길 오르다 보면 샛길을 만나는 것은 예사스러운 일이지만 힘겨운 산행에서 문득 만나는 샛길은 뜻밖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 느끼는 감정을 잔잔한 어조로 풀어내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05
찔레꽃 핀 강굽이따라 돌면 연화리라네앵두나무 두 그루 꽃등 켠 공동 우물가상추 씻던 아낙네들 땅 안 파다삿대질 쓰라리네마을 이음 고와서 나그네 발걸음 붙드는데객지인이면 무조건 땅 사러 온 줄만 알아돌처럼 굳은 인심 욕설만 무성하네마루 위에 놓인 고물 라디오에선소련 대통령 한번 만나기 위해몇 십억 불 차관 준다는 소리 어처구니없는데그 돈이면 등짝 휜 농가 부채 지우고도 남을 텐데피땀 흘려 우리가 번 돈 왜 남의 나라 주는지골재 채취장에 나간 남편은대낮부터 술 취해 찔레덤불에 눕고일당 만 원, 파헤쳐진 강바닥 어디에마을 이름 닮은 연꽃 한 송이 피지 않고지난 시절 소련에 경제 원조를 하면서 피폐해진 우리 농촌을 돌아보지 않는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자연에 대한 원망을 통해 현실에 대한 원망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려는 시인의 역설적이고 강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04
누군가 이 육체의 삶,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 오른 내 몸을뜯어먹고 있다!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평생 누군가를 뜯어먹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머니를, 부모님을 퍼먹고 뜯어먹고 자랐다. 다 자라서는 밥과 빵을 얻기 위해 또 다른 빵을 뜯어 먹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시인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03
눈 그쳐 햇빛 좋은 날격포의 등대 끝에 나와 보아라너무 오래된 이름 하나 지우고 싶어섬들은 순백의 알들로 깨어나 한목소리 내어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어느 할미새가 날아오다 잃어버린 전설인지희고 둥근 다섯 개의 알들은 물 위에 떠서한 목소리 내어 저렇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위도는 북극에서 온 고슴도치의 알여도는 너의 자궁 속에서 흘러나온 알형제도는 물 위를 건너던 쌍봉낙타의 알비안도는 허공을 미끄러져 날던 기러기의 알우도는 백제승 마라난타가 서해를 건너다잃어버린 하얀 망아지의 알아이스크림처럼 혀끝에서 잘도 녹는 섬들저렇게 깨끗이 오래된 이름 하나씩 지우고 싶어한 목소리 내어 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부안 격포 주위에 떠 있는 위도, 여도, 형제도, 비안도, 우도라는 섬의 이름은 인간의 관념이 반영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시인은 그 섬들의 오래된 이름을 지우고 ‘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붙이고 있음을 본다. 눈 내려 하얗게 덮인 섬들을 순백의 알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의 서정성 깊은 그윽한 혜안을 본다. 시인
2019-10-31
총각냄새 물씬 풍기는 무밭 곁에웃음소리 소란스런 배추밭아낙들 머리에 쓴 흰 수건처럼 환한달빛웃음 밤새워 참느라고배추 고갱이 노랗게 속이 밸 때무들은 흙 속에서수음하며 몸집을 불린다신병 훈련소 같은 무밭신참 이등병 일개 소대 출소 준비 끝무밭에서 총각 냄새를, 배추밭에서 아낙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는 시인의 말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종횡대로 사열해 있는 무밭의 무들을 신참 이등병들에 비유하고 궁합이 맞아서 무밭과 배추밭이 나란히 있는 것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이 재밌기 그지없다. 시인
2019-10-30
바다는 언제나 정면인 것이어서이름 모를 해안하고도 작은 갯벌비껴서 가는 것들의 슬픔을 나는 알고 있지언제나 바다는 정면으로 오는 것이어서작은 갯벌하고도힘없는 모래 그늘밀물이 밀려들면 갯벌의 게들은 옆으로 옆으로 이동하며 물을 피하는데 이 광경을 바라보며 시인은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바닷물을 정면 돌파하지 못하고 비껴서는 갯벌의 게처럼 우리도 정면으로 다가오는 어떤 상황을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피하고 비겁하게 비껴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성찰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