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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블랙스완의 충격과 회색코뿔소의 돌진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말았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주요 시설과 민간인 시설에 대해 대대적인 합동 공습을 벌이고, 이란이 이에 맞서 반격에 나서면서 중동은 물론 세계질서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는 예견된 위기이면서도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복합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를 ‘블랙스완(Black Swan)’의 돌발성과 ‘회색 코뿔소(Gray Rhino)’의 경고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부해 보아야 한다. 나심 탈레브가 정의한 ‘블랙스완(Black Swan)’은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해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예외적 사건을 말한다. 반면 미셸 부커가 주창한 ‘회색코뿔소(Gray Rhino)’는 개연성이 높고 파급력도 크지만, 사람들이 설마 하며 무시하다가 결국 치명적인 충격을 입게 되는 위기를 상징한다. 지금 지구촌을 엄습한 중동전쟁의 위기는 이 두 동물이 동시에 날뛰는 형국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 행동은 그 자체로 글로벌 물류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넘어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글로벌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 그리고 우리 기업들이 직면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의 폭등은 기업들의 화석연료 의존도를 단기적으로 높이며 탄소중립(Net-Zero) 목표 달성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에너지 수급 불균형은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약화시키고, 고유가로 인한 물류비용 상승은 전 산업군의 탄소 발자국 관리에 비상을 걸게 된다(E).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불안과 단절은 단순한 경제 손실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의 급등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먼저 타격을 입히며(S),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영역 내에서 관리해야 할 ‘인권 및 커뮤니티 리스크’를 증폭시키게 될 것이다(G). 우리 기업들은 이제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경영의 ‘변수’가 아닌 ‘상수’로 보아야 한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의 붕괴에 따른 예측 불가능성과 지정학적 리스크의 현실화 속에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의 대응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이번 사태는 돌발적인‘블랙스완’의 충격처럼 다가오지만, 사실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취약성이라는 오래된‘회색 코뿔소’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온 결과다.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특정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면적이며, 특히 지역경제의 대들보인 철강산업은 그 충격파의 정점에 서 있다. 지역철강업은 에너지 다소비 구조상 전력 생산을 위한 유가와 가스 가격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중동발 에너지 쇼크는 즉각적인 제조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단순한 수익성 악화를 넘어 ESG 경영의 ‘E(환경)’ 지표를 위협하게 된다. 치솟는 에너지 비용은 수소환원제철 등 저탄소 공법으로의 전환에 투입될 재원을 고갈시키게 된다. 고유가 상황에서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더 큰 비용 부담을 안게 된다. 철강 기업들은 이제 ‘탄소중립’이라는 장기 과제와 ‘에너지 수급’이라는 당면 과제 사이에서 거버넌스(G)의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특정 지역에 편중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수급 구조에서 탈피해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등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에너지 자립화 전략(E)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공급망의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 가속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거버넌스(G) 전략이다. 이것이 블랙스완과 회색 코뿔소의 복합충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중동의 위기는 지역산업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거울인 동시에, 더 단단한 지속가능성을 구축하라는 경고다. 역설적으로, 중동의 포성은 우리에게 ESG 경영의 엄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위기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블랙스완의 재앙이 되지만, 철저히 대비한 자에게는 회색 코뿔소를 길들여 앞으로 나아갈 기회가 된다. 이와 함께 글로벌 차원의 협력 강화도 필수적이다. 국제기구와 다자협약을 통해 에너지 시장 안정화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재생에너지 기술 공유 플랫폼을 확대해야 한다. 국내 기업은 공급망 디지털화와 ESG 데이터 투명성 확보에 투자해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하며, 정부는 탄소중립 R&D 지원과 그린 파이낸싱 확대를 서둘러야 한다. 전쟁 리스크 속에서 ESG는 단순한 경영 전략이 아닌 국가적 생존 전략으로 진화해야 할 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뿐인 ESG가 아니라,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리스크 회복력’이다. 블랙스완의 날갯짓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의 뿔을 잡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담대한 ESG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3-04

우리는 ‘SDGs’라는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뤽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철학으로, 현재 전 세계 147개국 교육과정에서 인성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숭고한 문장은, 오늘날 기후 위기와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복합 위기)’ 시대에 가장 강력한 울림을 주는 메시지이다. 과거엔 “지구 종말” 또는“인류 멸망”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예언이나 공상과학 영화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기후변화, AI의 급속한 발전, 세계경제 환경의 불안정 등 수많은 불확실성에 둘러쌓인 2026년 현재, 우리는 이 단어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실존적 경고임을 목격하고 있다. 지구 가열화(Global Warming을 넘어선 Boiling)는 ‘임계점(Tipping Point)‘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생물 다양성의 붕괴와 극심한 불평등은 사회적 회복 탄력성을 갉아먹고 있다. 째깍거리는 지구의 시계가 가르키는 ‘종말’은 이제 은유가 아닌 현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과학자가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 될 것이라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경고해 왔다. 이러한 경고와 절망적인 지표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에 빠지거나‘기후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어차피 끝날 지구라면, 지금의 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절망적 상황에 낙담하여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구 종말의 위기 속에서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그 결연한 의지를 다시 소환해야 한다. 희망이 사라진 절망적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하는 ‘적극적 대처(Active Coping)’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시절 스피노자가 말한 사과나무가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개인의 도덕적 완결성이었다면, 21세기 인류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는 바로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이다. UN(국제연합)에서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된 밀레니엄개발목표(MDGs)를 종료하고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전 인류와 국가가 실천해야 할 국제사회의 공동목표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합의하였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빈곤종식, 질병, 교육, 성평등, 난민, 분쟁 등)와 지구 환경문제(기후변화, 에너지, 환경오염, 물, 생물다양성 등), 경제·사회문제(기술, 주거, 노사, 고용, 생산 소비, 사회구조, 법, 대내외 경제)를 2030년까지 17가지 주요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이행하는 국제사회 최대의 공동목표이며, 2015년 제70차 UN총회 및 UN지속가능개발 정상회의에서 193개국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는 인류라는 종(種)이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어떻게 하면 공멸하지 않고 번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최후의 실천방침이자 생존 매뉴얼이다. SDGs는 단순히 ‘우리 모두 더불어 착하게 살자‘는 캠페인이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가중되는 복합위기 앞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UN 회원국 모두가 합의한 희망의 상징이다. 환경적 사과나무 (목표 13, 14, 15)는 탄소 배출을 줄이고 해양과 육상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실천의 표상이며, 사회적 사과나무 (목표 1, 5, 10)는 빈곤을 퇴치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붕괴를 막는 지지대이다. 또한 경제적 사과나무 (목표 8, 9, 12)는 순환경제와 책임 있는 소비를 통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풍요를 누리는 지혜이다. 종말적 지구의 위기 앞에서 SDGs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당장 내일의 온도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고, 공동체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할 지적, 경제적 동력조차 사라질 것이며,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단기적 이익을 쫓는 시장의 논리로는 ‘종말‘이 예견된 상황에서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이유로 ‘내일’이라는 희망의 나무를 오늘 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모레’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무 심기를 포기하는 순간, 종말은 확정된 미래가 되지만 반대로 우리가 SDGs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그 행위 자체가 위기의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가능성의 창을 열게 될 것이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고, 그 숲이 미세 기후를 조절하듯, 개별 기업과 국가의 SDGs 이행은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변수가 될지 모른다. 우리 모두 오늘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더 나은 가치를 지향해야만 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세대의 미래세대에 대한 마지막 책무이다. 이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고전적 문구는 “SDGs를 달성하겠다”를 넘어 “ESG경영을 실천하겠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겠다”,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겠다”는 현대적 실천으로 구체화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심는 ‘사과나무’가 되어야 한다. 설령 내일 지구가 멈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심은 이 나무들의 뿌리는 인류가 추구했던 지속가능한 지구와 세계를 지키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 나무들이 모여 결국 지구의 종말을 저지하는 거대한 방풍림이 될 것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2-18

“힘의 균형서 인류의 공존” UN이 바꾼 새 패러다임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이기적 욕망을 지닌 인간들의 관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적어도 UN(국제연합)이 설립되기 전까지의 국제질서는 철저하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19세기 빈 체제(Congress of Vienna)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국가 간의 평화는 강력한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균형이 유지될 때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비극 이후, 인류는 처음으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라는 집단 안보 체제를 고안했다. 하지만 국제연맹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연맹의 제안자였던 미국의 불참과 강대국의 탈퇴를 막을 강제력 부재, 그리고 의사결정의 ‘만장일치제’는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독일의 재무장을 방관하게 만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불참과 실질적인 힘의 부재는 곧 국제질서를 유지와 세계를 대표하는 기구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연맹은 명목상으로만 세계를 대표하는 유명무실한 기구나 다름 없었다. 결국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 같은 2차대전의 파국과 절망 속에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통해 출범한 UN(United Nations)은 단순히 국제연맹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법과 규범이 국가의 주권만큼이나 중요하다는‘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국제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 국제연맹의 부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 속에 탄생한 UN은 국제협력을 증진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 간 연합체이자 가장 많은 국가가 모이는 다자 회의 기구이다. UN 설립 이후 국제질서는 예전과 달리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앞선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반면교사 삼아, UN은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실질적인 군사적·경제적 제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이는 전쟁을 ‘국가의 권리’가 아닌 ‘국제법적 범죄’로 규정하는 질서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또한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국가 내부의 문제로만 여겨졌던 인권을 국제적인 감시와 보호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이는 오늘날 중요시되는 ESG에서 ‘Social(사회)’ 영역의 근간이 되었다. UN은 신탁통치와 독립 지원을 통해 수많은 신생 독립국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식민지배에 놓였던 수많은 나라의 독립을 이끌어 내었고, UN 회원국의 참전을 통한 전쟁 억지와 평화 유지 등 과거 강대국의 전유물이었던 국제 정치를 193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주권 평등’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UN의 설립 이후 지구는 비로소 세력균형의 원리가 아닌 다자주의의 국제협약에 의해 지배되는 국제질서가 시작되었지만 순조롭게만 항해한 것은 아니었다. UN체제 초기, 국제질서는 미·소 냉전이라는 거대 양극체제에 의해 한계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UN은 이 시기에도 유니세프(UNICEF), WHO 등 전문기구를 통해 질병, 빈곤, 교육 등 인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며 ‘기능주의적 협력’의 가치를 증명하였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에는 단순한 분쟁 중재를 넘어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0년의 MDGs(새천년개발목표)를 거쳐 2015년 채택된 SDGs(지속가능발전목표)는 국제질서의 중심축을 ‘국가 안보’에서 ‘인간 안보’와 ‘지구의 지속가능성’으로 옮겨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강조하는 ESG 경영이나 탄소중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UN이 80여 년간 구축해 온 국제질서의 산물이다. 과거의 세계 질서가 “어떻게 전쟁을 막을 것인가”의 힘의 균형에 집중했다면, UN 이후의 질서는 “어떻게 함께 공존할 것인가”의 지구와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묻고 있는 새로운 문법이다. 이제 국제질서는 영토를 넓히는 힘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UN이라는 국제기구의 플랫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기후 위기나 팬데믹 같은 글로벌 난제 앞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걷다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UN은 완벽하지 않지만, 인류가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게 붙잡아주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규범의 닻’이 되어왔다. 2차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규범의 닻’이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 납세자의 자금 지원을 끝내고 미국 우선순위보다 세계주의 의제를 우선하는 단체에 대한 관여를 끝내겠다”며 유엔 및 산하 기구에 대한 자금을 대폭 줄이고 분담금을 납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새해 들어 이달 초에는UN산하기관 31개를 비롯한 66개 국제기구의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 미국의 유엔 지원금이 중단되면서 UN이 파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193개 회원국에 보낸 서한에서 “UN의 재정난이 심각해지면서 여러 사업 진행이 중단됐고 재정 붕괴 위험이 커졌다”며 “곧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UN을 중심으로 한 국제법이 강대국에 의해 짓밟히고 국제협력이 약화되고 있다. 국제법 훼손과 국제협력의 붕괴, 다자기구들에 대한 공격의 트럼피즘에 의해 다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원리에 의한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에 뿌리를 둔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 UN을 중심으로 인류 공존의 가치를 지켜내어야 한다. 지구상 모든 국가가 1945년 UN 설립의 초심으로 돌아가 포용적이고 파트너십을 통해 균형을 창출할 수 있는 다극화를 지향해야 한다. 지구와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공유된 책임과 가치에 기반한 강력한 다자간 국제기구의 역할이 더욱 필요하다. 이를 위한 여러 나라와 인류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2-04

다시 울퉁불퉁해지는 세계를 위한 UN의 역할

새해 벽두부터 기대와 희망보다 절망적 소식들이 연이어 들리고 있다. 지난 3일 미국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를 포함한 주요 지역을 공습 현직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부부를 납치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7일 트럼프는 66개의 국제기구에서 탈퇴하고 자금 지원을 전면 중단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하고, 8일에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자신에게 국제법은 필요 없고, 자신을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만의 생각뿐”이라며 그린란드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내었다. 국가 간 협력을 중심으로구축된 국제질서를 무시하고 힘을 내세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국주의로의 회귀 선언이다. MAGA(Make America Great America)와 함께 부활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전 세계는 자국의 국익만을 앞세운 ‘공격적 일방주의’와 ‘양자 협상’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하게 하고 있다. 극단적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어렵게 유지되어 온 전 세계적인 국제협력 체계를 뿌리째 흔들고 다시 세계를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지구는 UN을 중심으로 한 국제기구와 GATT와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주의 무역시스템과 같은 국제 협약을 중심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유지되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기구의 필요성에 따라 1919년 창설된 국제연맹에 이은 제2차대전의 반성 속에, 1945년 탄생한 UN(국제연합)은 전쟁 없는 지구를 위해 실로 많은 일들을 해왔고 질서 있는 국제사회를 지탱해 왔다. 사실 지구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전쟁 없는 지구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실현된 사례는 매우 드물고 제한적이다.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례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80년까지 약 200년간 로마 제국 내에서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로마 평화(Pax Romana) 시기 외에 뚜렷이 기록된 사례가 없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평화 구축, 외교, 국제법 등을 통해 전쟁 억제와 평화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완전한 전쟁 없는 지구 실현은 여전히 이상적 목표이다.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반복되는 다양한 갈등과 위기가 지구상에 늘 존재하지만,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중단과 소련의 해체의 ‘사회주의의 종말’ 이후 미국이‘유일 초강대국’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국제환경에서 짧은 시기이었지만 전쟁 없는 지구의 Pax Americana가 실현되었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미국식‘자유민주주의’와‘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파해 사실상 세계 지배를 실현한 것 같은 위장된 평화의 시기가 그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경제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과 같은 국제기구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GATT), 우루과이 라운드(UR), 세계무역기구(WTO) 등 경제협정을 통한 이른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세계 체제를 뜻한다. 저명한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5년 자신의 저서‘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정보·자본·생각·사람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어 세상은 평평해졌다”고 했다. 즉, 미국 주도의 평평해진 세계화가 국경 이동의 벽을 사라지게 하면서 자유무역과 교류를 통한 자유로워진 인적·물적 왕래와 투자가 궁극적으로 전 세계 이익에 이바지하는 시대를 만든 것이다. 이 같은 평평해진 세계화를 통해 잠시나마 전쟁 없는 지구와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민주주의의 확장을 주도하였던 미국의 변심이 세계를 다시 울퉁불퉁하게 하고 있다. 새해 벽두에 들려온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종언을 고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제 세계는 ‘국제협력의 규범’이 아닌 ‘철저한 자국 이익’이 지배하는 정글로 변하고 있다. 경제·통상 분야에서 시작된 ‘미국 우선주의’ 관철이 이제 국가 간 정치와 외교의 장에서도 강자의 논리대로 마음대로 하겠다는‘미국 우월주의’로 확장되며 정복자의 가치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트럼프 2기의 국가정책은 국제사회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 중대하고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국제기구에 의한 협상·중재·조정의 질서보다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가 우선되는 식민지 시대로 회귀하는 분위기 속에 ‘국제기구 무용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여러 분쟁과 국제 갈등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던 국제기구의 무능함이 트럼프의 일방주의식 힘의 논리 앞에 속수무책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전쟁의 잿더미와 분열로부터 지구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UN 설립을 주도하였던 미국이 국제기구를 불신하고 무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국제협력의 시대’가 지고‘제국주의 시대’의 부활이라는 우려가 높다. 특히 UN 산하 기구를 비롯한 66곳의 국제기구에서 탈퇴는 UN의 역할 축소와‘국제기구 무용론’에 더 힘이 실리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국제기구 역할의 필요성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주의(Trumpism)가 더 강화될수록 UN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해질 것이다. 트럼프주의(Trumpism)가 부른필연적 역설(Paradox)이다. 트럼프의 기행적 조치들에도 여전히 기후 변화 대응, 보건 위기, 인권 보호 등 전 지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주의 체제의 필요성은 상존한다. 다자간 협력의 붕괴는 전 지구적 위기 대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이 빠진 빈자리를 중국이 채우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유럽 등 전통적인 우방국들 또한 미국의 독자 행보에 강한 유감을 표하다 결국 외교적 마찰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석좌교수는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에서 “투키디데스 함정의 중요한 동력은‘계산 착오’이며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을 과소평가하면서 비극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 이후 ‘공격적 일방주의’와‘양자 협상’이 지배하는 세상은 또 다른 전 지구적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다. 다시 세상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협력하여 트럼프의 미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UN을 중심으로 세계인들이 지혜를 나눠야 한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