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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포항 연일 대표숲 ‘연일신읍수(延日新邑藪)’ 복원 가능할까?

한반도의 겨울철 날씨는 서북풍이 매우 차갑고 매섭다. 이러한 기후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집의 입지나 공간 구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을 주거지로 선호하거나, 서북쪽에 산이나 나무가 부족한 경우에는 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았다. 또한, 산이 없는 경우에는 흙으로 언덕을 만들어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주거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좌향론적 측면에서는 겨울철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서남향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또한, 방위에 따라 창과 문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북향인 경우에는 겨울철에 주로 사용하는 남쪽 문을 따로 두기도 했다. 조선시대 영일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기준으로 보면, 현재의 연일·대송·오천·동해·호미곶 대동배·남구 동 지역·북구 두호동에서 중앙동과 용흥동을 경계로 한 남쪽 지역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현별 지도 및 조선 전도 등을 수록한 ‘여지도(보물 제1593호, 편저 및 간행일자 미상-규장각 보관)’와 조선 후기 전국 군현 지도와 그 지방 형세를 수록한 ‘지승(편저, 간행일자 미상, 규장각 보관)’을 살펴보면, 둘 다 지도의 중앙에 남성리 영일읍성(구남성)이 그려져 있고, 동쪽에 성문이 하나만 보이며, 객사와 동헌은 직각 배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주로 읍성 안의 땅이 비좁을 때 쓰는 공간구성 방안이다. 지도 우측면에는 형산강과 칠성천 사이 솔숲이 그려져 있고 ‘북송전(北松田)’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쓰여져 있다. 인공숲이라는 의미로 밭을 의미하는 田(전) 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후기 편찬된 전국 군현 지도집 ‘광여도(1737(영조13)∼1776년(영조52) 간행, 규장각)’와 조선후기 편찬된 경상도 군현 지도집 ‘영남지도(1745∼1767년 제작 추정, 보물 제1585호, 규장각)’에는 둘 다 지도의 중앙에 생지리 영일읍성(고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읍치 뒤편 형산강과 바닷가 쪽으로 산이 그려진 것은 바닷바람과 겨울 서북풍을 막는 비보(裨補) 용도의 인공 숲 북송전으로 추정되지만 글씨가 없다. 경북마을지 상권 282쪽(생지리 마을의 역사,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0)에 북송전의 근거가 될 듯한 내용이 있다. “1866년 현감 南順元 때 길이 7리, 너비 5리에 달하는 지역에 나무를 심어 큰 숲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느티나무와 팽나무 7-8그루만이 남아있다. 이곳을 생마루수(藪), 또는 연일신읍수(藪)라고 부른다.” 포항시사 연일읍 생지리 마을유래에는, “넓은 들판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팽나무와 느티나무를 6-8리로 심어 큰 숲을 이루었다. 이 나무들이 형산강 수로 변경과 도시화 과정에서 농지개발 등으로 훼손되었다”고 적고 있다. 광여도와 영남지도에서 영일현청이 연일읍 생지리 고읍성에 있을 때 연일읍 생지리에 ‘북송전’으로 추정되는 인공숲이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와 지승 지도에서 영일현청이 대송면 남성리 구남성에 있을 때, 이미 생지리에 ‘북송전’이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경북마을지’와 ‘포항시사’의 내용은 기존의 인공 숲에 추가로 숲 길이를 연장하였거나 죽은 나무를 베어내고 보식(補植)을 했던지, 아니면 대체목(代替木)을 심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숲의 길이가 6∼8리라면 2.36km…3.14km 정도의 길이인데, 경북마을지의 폭 5리는 과장된 표현 같고, 길이가 5∼7리로 추정된다.‘포항시사’에서는 폭 언급이 없으나,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조선의 임수’에 따르면, 장기 숲 폭이 393m, 흥해 북천수 폭이 150m 인 것을 보면, 북천수 폭에 가깝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 ‘연일신읍수’로 추정되는 연일읍 생지리를 가보니 다행스럽게도 아직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시계획 도로를 개설하면서 훼손하고 남은 나무들이 일부 도로변에도 남아있고 자동차학원 부지 안에도 남아 있었는데, 연일읍 농업인 상담소 뒤편 도로(연일로 145번길-생지리496) 부지 북측 3그루, 남측 2그루, 자동차 운전학원(생지리136-5) 내 3그루 등 전체 8그루로 보이는데, 수종은 팽나무 7그루, 왕버들 1그루가 훼손의 아픔을 간직한 채 연일 대표 숲 ‘연일신읍수’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2020년 정부는 ‘도시숲 조성법’을 제정했고, 각 지방자치단체는 도시 열섬 완화 숲, 미세먼지 차단 숲 등을 조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숲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기후 환경에 지혜롭게 대응했던 숲을 복원하는 일 역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조상들의 슬기로 조성된 인공 숲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부르고, 시민들의 안식처로 사용되는 사례를 살펴보자. 박상구경주대 대학원 특임교수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 최치원이 위천의 범람을 막고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숲이 상림공원(천연기념물 제154호)이고, 1745년(조선 영조 21) 하동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강바람과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하동 송림공원(천연기념물 제445호)을 만들었으며, 고려말 안동김씨 김자첨이 안동에서 의성 사촌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성한 숲이 사촌마을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다. 이들 숲의 공통점은 인공 숲이고 후대에 성심성의껏 관리해서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이 되어 관광객들이 휴식처로 찾는 최고의 공원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지역민들에게는 건강한 허파와도 같은 최고의 선물이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 연일 대표 숲 ‘연일신읍수’복원의 그림이 해마다 더해져 소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형산강과 영일만의 바람에 힘차게 가지를 부딪기를 소망해 본다.

2024-12-10

포항 발전 모체가 된 대흥산과 대흥골

포항에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을 곳은 어디일까.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단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산명(山名)으로 등장하는 대흥산 기슭과 대흥골을 먼저 꼽고 있다. 이는 중앙동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대흥동 지명유래에서도 일부 내용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을 형성하여 영일현 북면 대흥리로 불리었다. 1694년경 엔 60-70여 호의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700년대 초 이 고장의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浦港倉)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고, 포항장(1일과 6일)을 형성하였다. 대흥동 영일현 북쪽 우물곡동(雨勿谷洞)에 대흥제(大興提)가 있어 18결의 논에 물을 대었다는 기록이 있는 유래 깊은 명칭이다. 해방 후 택지로 변한 대흥못의 옛 자리는 지금의 용흥동 현대타워 아파트 정문 앞 부근이 된다. 오늘날 대안산·대왕산과 대안곡의 명칭은 대흥산과 대흥곡이 변음된 것이다.” 대흥산과 대흥골은 어디 쯤 될까? 포항시사를 살펴 정리해 보면, 1731년 지금의 용흥동과 대흥동이 포함되는 넓은 지역의 대흥리는 포항리로 개칭되면서 지명이 없어졌다가 1910년 포항동 일부와 용당동 일부를 더해서 용흥리가 만들어졌다. 용당동의 용(龍), 대흥동의 흥(興)을 더하여 용흥리(龍興里)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946년 초음정을 개칭하면서 예전 대흥동의 지명이 다시 살아난듯하나 현재 대흥리의 영역은 1731년 이전의 극히 일부만 포함하고 있고, 예전 대흥리 대부분은 현재 용흥동으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대흥동과 용흥동 영역에서 대흥·대왕·대안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대흥동에서는 연관성 있는 지명이 없고, 용흥동에서는 용흥우방아파트단지 뒤편 대흥초등학교와 대흥중학교가 나오고,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서북쪽으로 난 골짜기에 대안지와 소류지, 대흥지 체육공원, 대안길(용흥 현대타워 2차 앞-대안지 지나 용흥동 590번지까지 2.4km 정도), 또다른 대안길(용흥동 378-10번지-성안 교회, 200m 정도), 대안길 16번길(참행복한 교회-성안 교회, 220m 정도) 등이 검색되고 있다. 이 일대가 대흥골이 틀림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지명 확정시 대흥지 소류지, 대흥지 체육공원, 대흥길, 대흥길 16번 등으로 명명되어야 함이 타당하나 고증이 부족해서인지 반영되지 않았다. 대흥못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흥동 지명유래에 “대흥제(大興提)는 용흥동 현대타워 아파트 정문 앞 부근이 된다.”고 적고 있다. 주민센터에서 서북쪽으로 1.7km 지점에 있는 대안소류지로 표기된 곳과 대흥못은 상관성이 없는 듯하다. 대흥산은 지리서 및 옛 지도에서도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상도 영일현의 ‘산천’ 조에는 “대흥산(大興山)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고 적힌 문구가 있다. 조선시대 1리가 449.28m이므로 23리는 10.3km 정도이고, 남성리 영일읍성-칠성천-연일대교-탑산까지가 보행거리 10.3km 쯤 된다. 또한 ‘토산’조에는 “죽전(竹箭) 대흥산에서 난다.”는 부분이 발견된다. 죽전은 대나무 화살을 뜻하는데 대흥산에 이대나 신이대로 불리는 대나무가 많이 난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영일현 관할지역에 포항창을 적고, 뒤편에는 흥해 관할 경계지점에 산을 그리고 대흥산으로 적었다. 같은 ‘조선지도’의 흥해군 관할에는 연일과 경계되는 산을 그려 봉림산으로 적고 있다. 또한 ‘광여도(1737-1776년 간행)’ 흥해 관할에도 포항창으로 보이는 ‘浦’자를 쓰고 그 뒤로 산을 그려 봉림산으로 적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영일현 관할지역에 浦項을 적고, 뒤편에 흥해 관할 경계지점에 산을 그리고 봉림산으로 적고 있으며, 인터넷 두산백과에는 “옛날 용흥동을 죽림산(竹林山) 아래에 있다 하여 죽림동이라고 하였으며, (중략) 조릿대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산 정상에는 전몰학도충혼탑이 있다.”고 적고 있다. 박상구 경주대 대학원 특임교수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봉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심 속의 전통 사찰인 죽림사는 불국사의 말사이며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라고 적혔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영일현의 북쪽 23리에 대흥산이 있고, 산형이 숲에서 서남방을 향해 앉아있는 봉황 형국을 하고 있어서 봉림산으로도 공식적으로 쓰고 부른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에 전몰학도충혼탑을 세운 이후부터는 탑산이 산명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며, 화살대로 쓰는 신이대가 많이 나서 민간에서 죽림산이라 간간이 부른 듯하는데 현재 일부 단체 등은 유래와 어울리지 않게 ‘봉황이 날아오른다’는 봉비산(鳳飛山) 이라는 명칭도 쓰고 있다. 지명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향취와 멋이 담겨져 있는 문화와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바로 알고 잘 보전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백두대간의 큰 기운을 품은 낙동정맥을 지나 포항의 대표 산줄기인 비학지맥을 거쳐 도음산의 분맥으로 내려온 대흥산은 ‘자연이 베풀어 크게 발전 한다’는 산명처럼 오늘날 포항 형성 발전의 모체가 된 포항 제일의 위계를 차지하는 소중한 지명이다. 따라서 탑산·봉비산·대왕골·대안지 등을 정리하고, 대흥산과 봉림산을 병행사용하며, 대흥골·대흥지 소류지·대흥지 체육공원·대흥길 등으로 지명 회복시키는 일이 포항 문화의 뼈대를 충실하게 만들고 가꾸는 일이다.

2024-11-12

포항의 옛 이름은 갯메기

토박이 어르신들은 포항의 옛 이름이 갯메기 또는 갯미기였다고 말씀하신다.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의아해 하겠지만, 한자와 한글 표현에 포항 사투리가 한몫 한 것이다. 포항에서는 청어의 눈을 꿰어 말렸다 녹히기를 반복한 것을 ‘관목’이라고 불렀다가 ‘관메기’로, 다시 ‘과메기’로 정착된 사례가 있다. 포항 지명도 초기에는 ‘갯목’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문맹인이 많았던 시절에 발음하기 편한대로 옮겨지는 말의 특성상 갯목이 자연스럽게 ‘갯메기’ 또는 ‘갯미기’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항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浦(개 포), 項(목 항)이라 쓴다. 포항하면 항구(港口)도시가 각인되어서인지 浦(개 포), 港(항구 항) 이라고 적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다. 수정해 주면 왜 浦項이 됐는지가 궁금하다고들 한다. 浦(개 포), 項(목 항)을 우리말로 풀면 갯목 또는 받침 ㅅ이 탈락되어 개목이 된다. 국어사전에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고, ‘목’은 척추동물의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위라고 설명한다. 고속도로로 진입하거나 빠져나가는 곳을 나들목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들목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도로의 교차부가 입체교차로 되어 있어, 직진하는 자동차나 좌우 회전하는 자동차가 뒤얽히는 일이 없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연결하는 시설로서 ‘인터체인지’를 우리말로 순화한 용어이다.”라고 적고 있다. 포항에는 ‘개’자가 들어간 명칭이 몇몇 남아 있다. 호미곶 구만1리의 솥발이개, 우물개, 큰개와 구만2리 까꾸리개, 부느리개 등의 지명이 대표적이다. 포항시사 제3권(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제1장 마을유래 제1절 남구지역 7. 대보면 601쪽)에는 구만리의 지명 ‘개’ 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구만1리 솥발이개는 보내 북리 갯마을로서 마을지형이 솥 같아 정족(鼎足)으로도 부르고, 우물개는 우물 부근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서 웅글개로도 칭하며, 큰개는 우물개 북쪽 해안마을로서 앞 바다에는 암초(暗礁)가 많고 풍랑이 심하여 해난사고가 잦다’라고 명기 해 놓고 있다. 또한 ‘구만2리 까꾸리개는 큰개 서편에 속하는 갯마을로서 이 지역에 풍파가 심하면 고기들, 특히 청어(靑魚)가 뭍으로 밀려나오는 경우가 허다하여 갈구리로 끌었다는 뜻에서 지어진 지명으로 구포(鉤浦)로도 부르고, 부느리개는 서남단 해안 작은 어촌으로서 영일만(迎日灣) 굽이진 바다에 달빛 자욱한 모습이 가관(可觀)이라 분월개(芬月-)로 불렀다 한다. 지금은 마을이 철거되고 방파제만 남아 있으며, 분월포(芬月浦) 로도 부른다’라고 정리해 놨다. 바닷가 모래땅에 살며 풍을 막고 피를 맑게 해 준다는 ‘갯방풍’, 갯가에 자리 잡고 있는 ‘갯마을’등에서의 접두사 ‘갯’도 갯목의 ‘갯’과 같은 의미이다. 포항시사 제1권(제2편 역사 제5장 근대태동기 4. 포항지명 탄생 425쪽)에는 포항지명 탄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포항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영조7년(1731)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면서다. 창진이 설치된 마을 이름은 원래 영일현 북면 대흥리였으나 이를 포항리로 개칭하고, 창진의 이름을 포항창진으로 명명하였다’ ‘포항이란 향호(鄕號)는 포항의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메기(갯미기, 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개울·개·물가 浦자와 목 項자)로 이루어졌다. 갯목은 구 역전교(1980년대 초에 복개함) 지역이며, ’(이하 생략). 왜 포항을 항구가 있는 지역 즉 포항(浦港)이라 쓰지 않고 포항(浦項)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경상북도의 무역항 및 연안항으로 지정된 항구를 살펴보면, 무역항인 포항항(浦項港), 연안항인 울릉항(鬱陵港)·후포항(厚浦港)·강구항(江口港)·구룡포항(九龍浦港), 그리고 연안항으로 추진 중인 감포항(甘浦港)이 있다. 포항·후포·구룡포·감포의 지명에서 모두가 같은 개 포(浦) 자를 쓰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 강가 또는 수변지역이라는 뜻에서 각자 포(浦)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구경주대 대학원 특임교수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도 포항이나 갯목 또는 개목이라는 지명을 쓰는 곳이 다수 있다. 안동에서는 오랜 세월 시가지를 흐르는 낙동강 물길을 관리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증축한 곳을 포항제(浦項堤)라 부르고, 강변 임청각 앞에는 ‘개목나루’또는‘포항나루’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동해시 구미동에도 북평시장에서 전천과 동해바다가 합류하는 길목에 갯목항이 있다. 홍성군 은하면 장척리에도 포항마을(개목)이 있다. 그 외에도 함경남도 함주군 포항리, 함경남도 신포시 포항동(개목),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등이 있다. 이러한 장소의 특징은 인근에 물이 있고 또 물이 나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포항·갯목·개목 등의 지명은 마을 형국이 바다나 개울 목 또는 물 목에 위치하여 붙여진 지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 사례가 보여주듯 이들 지역과 경북 제1도시 포항의 지명 유래는 매우 닮아 있다. 입지적 측면과 지명이 갖는 상징성 등 상당 부분에서 동일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각 지자체들은 옛 지명을 속속 복원하고 있다. 옛 이름이 놀뫼인 논산은 놀뫼 공소, 놀뫼 새마을금고 등과 같은 장소명을 쓰고 있고, 옛 지명이 서라벌인 경주는 서라벌대로, 서라벌 문화회관 등 자랑스럽게 이름을 명명했다. 의성지역에는 삼한시대 초기 조문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있던 곳이라 조문국 박물관을 개관했고, 김해는 옛 이름은 금관가야 를 되살려 김해가야 테마파크, 김해가야 축제 등 장소명을 부각시켜 나가고 있다. 포항에도 갯목 시티 역사관, 갯목 광장, 갯메기 대로, 갯메기 체육관 등 포항의 정체성이 반영된 장소명이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