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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북의 음식은 법도다

지난 1년간, 연재에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지면을 허락한 경북매일신문과 취재 과정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첫 칼럼에서 “왜 경북의 음식인가?”를 이야기했다. 경북은, 흔히, “음식이 없는 곳, 음식 맛이 없는 곳”으로 못 박는다. 그렇지는 않다. ‘맛’의 기준이 다르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다. 경북 음식은 맛으로 만나는 음식이 아니다. 출발부터 다르다. 경북의 음식은 맛이 아니라 ‘법도(法道)’다. ‘법도’에 맞는 음식’이다.첫 칼럼에서 인용한, 탁청정 김유(1481~1552년)의 ‘수운잡방(需雲雜方)’이 법도에 맞는 음식의 예다. 탁청정은 조선 초기의 문사(文士)다. 벼슬도 구하지 않고 전원생활을 추구했다. 일생을 손님맞이에 힘썼다. ‘수운잡방’은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법을 기술한 책이다. 남성인 유학자가 왜 음식에 관한 책을 기술했을까? 음식이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주요 도구이기 때문이다. 탁청정은 손님맞이 음식과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 장(醬), 지(漬), 초(酢) 술[酒, 주]에 대해서 정리했다.유교적 관점이다.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에 필수적인 도구다. 남자인 유학자가 음식 관련 책을 기술한 이유다.오늘날 경북은 100년 전, 경상좌도와 대부분 겹친다. 갑오경장 이전에는 전국 팔도를 좌와 우로 나누었다. 한양에서 바로 보기에 낙동강 왼쪽은 경상좌도, 오른쪽은 경상우도다. 경북은 대부분 경상좌도 지역이었다.경상좌도는 유교의 중심지다.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포은 정몽주(영일만, 영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삼봉 정도전(영주)은 좌도의 유학자였다. 포은과 삼봉의 스승 목은 이색(영덕), 야은 길재(구미 선산), 도은 이숭인(성주)도 좌도와 연관이 있는 유학자였다.성리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안동)도 좌도의 유학자였다. 경상우도가 ‘남명 조식의 나라’라면, 경상좌도는 ‘퇴계의 나라’였다. 1670년 무렵, 정부인 장계향이 기술한 ‘음식디미방’이 나왔다. 장계향의 친정아버지 경당 장흥효(안동), 남편 석계 이시명(영해, 영덕), 아들 갈암 이현일(영해)은 퇴계의 학통을 이었다.조선 말기 상주에서 ‘시의전서’가 발견되었다.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시의전서’ 등 음식 관련 책이 모두 ‘음식 맛없는’ 경북에서 나왔다. ‘법도’를 지키는 ‘퇴계의 나라’였기 때문이다.경북은 ‘곰탕의 나라’다. 영천에 가면 ‘포항 할매곰탕’이 있고, 포항에는 ‘안동할매곰탕’과 ‘장기식당’이 유명하다. 경북의 웬만한 중소도시, 시골 골목에는 곰탕집이 있다. 시장통에는 30년, 50년을 넘긴 곰탕집이 흔하다. 설렁탕 집은 귀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귀한 곰탕집은 널리고 널렸다. 소머리곰탕이 있는가 하면, 경북 북부에는 사골곰탕도 흔하다.서울에는 설렁탕 집은 많으나 곰탕집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래된 설렁탕 노포도 마찬가지. 메뉴에서 ‘곰탕’을 찾기는 어렵다. 왜 곰탕이 경북 지방에만 흔할까? 곰탕이 ‘봉제사접빈객’의 으뜸 음식이기 때문이다. 곰탕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모든 음식의 기준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이다. 으뜸이고 기준이니 조미도 하지 않는다. “매실과 소금 양념도 하지 않은 국물”이 대갱이다.국물 음식이지만 굳이 국물로 가르지 않는다. 제사상에 밥과 국이 있는데 반드시 곰탕을 올리는 이유다. 양깃살(양짓살)에 다시마, 무를 넣고 푹 곤다. 그뿐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華而不侈, 화이불치] 음식이다.민간에 고기가 흔할 리 없다. 소머리(소대가리)를 삶는다. 고기를 발라 넣고, 뼈 곤 국물에 밥을 만다. 소머리곰탕이다. 고기를 도축하고 나면 뼈가 남는다. 역시 곤다. 소, 돼지는 다리가 네 개다. 사골(四骨)이다. 사골을 곤 국물이 사골곰탕이다. 정육(精肉)이 귀하니 소 대가리와 다리뼈도 사용한다. 갈비뼈, 다른 잡뼈도 넣는다. 내용물은 설렁탕과 닮았으나 경북에서는 굳이 곰탕이다. 곧이 곧 대로의 곰탕은 아니되, 곰탕이다.경북 음식의 또 다른 키워드는 국수다. 곰탕집 못지않게 군데군데 국숫집이 있다. 큰길가, 동네 골목에도 있지만, 시장에서도 30년 이상의 국수 노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국숫집이 많을까? 역시 국수가 ‘봉제사접빈객’의 주요 도구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안동에서는 “국수 없는 제사 없다”고 말한다.대구 시내 시장통에는 ‘합천할매집’이 있고, 칠곡의 국숫집에서는 안동식 건진국시, 제물국시를 내놓는다. 국수 중에도 칼국숫집이 유난히 많다. 경북 만의 국수도 있다. 반드시 콩가루를 ‘쪼매’ 넣는다. 경주 ‘웃장’의 칼국수 미는 사람이나 안동의 건진국시, 제물국시 맛집들도 ‘콩가루 쪼매’에 대해서는 각각 말이 다르다. 수십 번을 물어봐도 아무도 “몇 퍼센트 넣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쪼매’다.‘쪼매’는 한식의 특질이다. 오랜 경험과 연습으로만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레시피대로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쪼매’는 딥러닝(Deep Running)을 거친 AI(Artificial Intelligence)도 따르기 힘들다. 그날의 온도, 습도, 불의 강도와 가족들의 시시각각 바뀌는 식성까지 헤아려야 한다. 우리의 ‘엄마’ ‘할매’들은 이런 어려운, ‘콩가루 쪼매 넣은 칼국수’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쉽게 만들었다. “콩가루를 얼마나 넣느냐?”는 질문에 대한 명답이 있다. “여름철에는 ‘쪼매’ 더 넣고, 겨울에는 ‘쪼매’ 덜 넣니더”.구룡포, 장기 일대에도 재미있는 국수가 있다. ‘깔때기’ 혹은 ‘깔때기 국수’다. 미역국에 밀가루 음식을 넣어 먹는다. 수제비를 넣어서 먹었다는 이도 있고, 같은 지역임에도 새알심을 넣었다는 이도 있다. 요즘은 굵직한 칼국수 형태의 밀가루를 넣는다. 바닷가의 흔한 미역과 밀가루가 만난 경우다. 지금도 경북에서는 “난 하루 세끼 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국수는 일상적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국수, 국수 맛을 기억하고 있다. ‘멸치 쪼매 부숴 넣고, 콩가루 쪼매 넣어서 해 먹었던 칼국수’는 경북 출신들의 ‘소울푸드’다.경북의 모든 음식이 봉제사접빈객의 음식은 아니다. 추어탕은 서민의 일상식이다. 추어탕은 중부식과 남부식으로 나눌 수 있다.중부식은 한양, 서울 방식이다. 국물을 별도로 마련한다. 국물은 소 내장이나 부속물을 우린 것이다. 고명, 육수 모두 화려하다.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사용한다. 붉고 맵다.경상도식 추어탕은 단순, 담백하다. 미꾸라지를 삶은 후, 곱게 간다. 곱게 간 미꾸라지 살로 추어탕을 끓인다. 된장 혹은 간장을 육수 대신 사용한다. 담백하다. 채소도 우거지, 시래기 등이다. 주로 배추 우거지를 곱게 쓴다. 여기에 산초가루를 더한다. 그뿐이다. 맑고 담백하다. 농경 지역 형태다. 청도 일대의 추어탕은 메기를 더했다. 추어탕에 메기를 넣는 이유는 간단하다. 맛이다. 상주, 예천, 문경 등에는 논, 개울에서 직접 미꾸라지를 잡아서 추어탕, 추어전골을 내놓는 집들도 있다.‘갱시기’는 퍽 재미있다. 갱식(羹食), 혹은 갱식(更食)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앞은 ‘국물 음식’이고, 뒤는 ‘다시 끓여 먹는다’는 뜻이다.“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시래기였다”고 떠들었다. 시래기와 갱시기. 나머지 2할은 갱시기였다. 소설가 성석제도 갱시기에 대해서 글을 썼다. 성석제는 고향이 상주 은척이다. ‘상업화’에는 실패했지만, 갱시기는 한식의 특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한식은 ‘탕반(湯飯)음식’이다. 갱시기도 간편한 국물 음식이다. 멸치, 김칫국물에 식은 밥을 더한다. 콩나물, 두부 등을 넣어도 좋다. 남은 음식은 다시 끓여도 된다. 인스턴트 음식이다.한식의 특질은 삭힘이다. 유럽인들이 우유, 고기를 삭힌 유장(乳醬)을 자랑하지만, 좁고 얕다. 한식은 콩 등을 삭힌 두장(豆醬)과 생선을 삭힌 어장(魚醬)을 동시에 사용한다. 겨울이면 포항을 비롯, 동해안 전 지역에서는 ‘밥식해(食醢)’를 먹는다. 가자미, 명태, 횟대, 오징어, 꼴뚜기 등 생선도 가리지 않는다. 액젓 젓갈과 물기 없는 젓갈까지, 다양하다.갱시기의 주재료는 김치다. 그중에서도 김장김치다. 양력 3월이면, 김장김치가 푹 익어 곰삭은 쿰쿰한 맛을 낸다. 갱시기는 삭힌 음식을 조리한 것이다. 갱시기는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다. ‘검이불루(儉而不陋)’의 음식이다.한식은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다”. 경북 음식은 법도에 맞는 음식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황광해 맛칼럼니스트끝

2019-12-30

진화하는 한국 음식 ‘짬뽕’

짬뽕? 중식당에서 내놓는다. 도시 대형 중식당이든 시골 자그마한 화상노포(華商老鋪)든 짬뽕은, 당연히, 중식당이다.짬뽕은 중식(中食)인가? 아니다. 한식(韓食)이다. 뭐라고? ‘중국집 짬뽕’이 한식이라고?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많겠다.한 발짝 더 나간다. 짬뽕의 발전, 진화는 한식의 특질이다. 짬뽕의 출발은 중국 남부지역이다. 중국어 사전에도 짬뽕은 등장한다. 이름은 ‘초마면(炒碼麵)’이다.중국어 사이트 ‘大紀元(www.epochtimes.com)’에서는 ‘초마(炒碼)’를 ‘湖南小吃, 炒碼麵, 韓國(호남소흘, 초마면, 한국)’이라고 설명한다. ‘초마는 (중국)호남지방의 향토음식이자 간식, 초마면, 한국’이라는 뜻이다. 초마면의 시작은 초마로, 중국 호남지방이나 현재는 한국 음식이다. ’小吃[소흘]’은 소박한 지방 음식, 스낵 정도의 의미다.초마면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초마면은 볶음면[炒麪, 초면]과는 다르다. 초마면은 매운 볶음의 해산물 탕면(湯麵)이다”. ‘초(炒)’는 ‘볶는다’이다. ‘초면(炒麪, 챠오미엔)’은 단순 볶음면이다. 초마면(炒碼麪)의 ‘마(碼)’는 식재료다.초면과 초마면은 세 가지가 다르다. 하나는 ‘맵다’는 점이다. 초면은 특별히 맵지 않다. 후추, 산초, 소량의 고추를 사용한다. 두 번째는 해산물이다. 초면은 채소 위주의 볶음면이다. 초마면은 해산물[海鮮, 해선], 돼지고기 위주다. 초마면, 한국식 짬뽕은 여러 종류의 해산물,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굴짬뽕, 홍합짬뽕, 돼지고기 등을 쓴다. 세 번째는 국물이다. 초면은 볶음이다. 초마면은 국물이 있다. 다르다.웹 사이트의 설명은 이어진다. “한국의 화교들이 발전시킨 음식으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중식이다”. 초마면은, ‘원래 중국 음식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 화교들이 발전시켜서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게 초마면의 진화 모델, 짬뽕이다.초마면은 중국 남방, 푸젠성[福建省]음식이다. 호적은 중국이다. 중국의 일상적인 가정식이었다. 푸젠성은 대만과 마주 보는 중국의 바닷가 지역이다. 해산물이 비교적 흔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산물과 채소를 볶는다. 여기에 국수를 넣고 먹는다. 간단한 서민의 음식이다. 길거리 행상에서 팔다가 식당의 메뉴가 되었다. 해산물을 구하기 힘든 내륙에서는 비교적 흔한 돼지고기를 넣었다. 중국의 서쪽, 회교 지역으로 가면 양고기도 넣는다. 양고기, 돼지고기, 해산물을 가리지 않는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간단하게 만들고 편하게 먹는다.초마면은, 19세기 후반 한반도로 들어왔다. 인천, 제물포는 19세기 말, 문을 연다. 초마면은 한반도로 들어온다.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침략한 세력은 둘이다. 일본과 청나라.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한반도에 새롭게 진출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부딪혔다. 임오군란(1882년)과 청일전쟁(1894년), 두 번의 전쟁과 난을 통하여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인천의 개항’은 개항을 빙자한 침략이다.침략의 몸체는 군대다. 청나라, 일본 군대가 한반도로 몰려든다. 군인을 따라서 민간인들도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곤궁했던 중국대륙의 서민들이 군인으로, 상인으로, 민간인으로 한반도에 들어온다.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고리대금업, 수출입 보따리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했다. 힘든 일을 하는 일용노동자[苦力, 쿠리]도 많았다. 상당수는 음식점을 열었다. 청요릿집의 시작이다.음식도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 중국 남부 지방 사람은 초마면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한반도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밀가루가 귀했던 한반도에 중국대륙의 밀이 들어온다.서민 화교들은 짜장면[炸醬麵, 작장면], 짬뽕(炒碼麵)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임오군란, 청일전쟁 시기, 군인, 화교들이 대규모로 들어왔다. 이들을 따라 음식도 들어왔고, 짜장면, 짬뽕은 개항 거리의 서민 음식이었다. 길거리 음식은 곧 음식점의 메뉴가 되었다.‘한국 짬뽕’은 몇 차례의 변신을 거친다. 변형, 발전, 진화한 음식이 등장한다. 이름도 혼란스럽다. 경북의 시골 작은 중식당에는 재미있는 메뉴가 있다. ‘야키우동(焼きうどん)’이다. 희한한 음식이지만, 아무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다. 위키백과에는 “야키우동은 일본의 향토음식의 하나로, 우동을 고기와 채소와 함께 볶아 간장과 우스터 소스 등으로 맛을 낸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이다. 굵은 국수를 볶은 것이다. 일본의 향토음식? 아니다.국수의 시작은 일본이 아니다. 중국이 국수를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도 ‘소수설’이다. 국수는 터키, 중동, 이집트 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수설’이다. 볶음국수, 야키우동이 섬나라 일본의 향토음식? 일본에서 시작했다? 틀렸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의 일종이다. 여느 나라에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야키우동’이다.우스터 소스는, 영국 우스터셔(Worcestersh ire) 시의 이름을 따서 ‘우스터셔 소스’ 혹은 우스터셔 내의 우스터 시 이름을 따서 ‘우스터 소스(Worcester sauce)’라고 부른다는 게 다수설이다. 우스터 소스는 영국 것이다. 우스터 소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야키우동이 없었을까? 영국제 소스를 받아들여 만든 일본의 향토음식? 우스꽝스럽다. 야키우동은 중식인가, 아니면 일본식인가? 경북 산골의 중식당에서 파는 일본 우동? 이상하지 않은가?야키우동은, 초마면이 오늘날 짬뽕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음식이다. 야키우동에 육수를 부으면 짬뽕이 된다. 경북 시골 중식당의 야키우동은 특이하다. 맵다. 태국식 볶음국수, 일본 야키우동, 야키소바, 중국 볶음국수는 맵지 않다. 매운 메뉴도 있지만, 우리의 야키우동처럼 일상적으로 맵지 않다. 경북 칠곡에는 매운 야키우동으로 널리 알려진 집이 있다. 가게 메뉴판에 ‘쿨피스 大’를 넣었다. 매운 것을 먹은 다음, 쿨피스를 마시고 식히라는 뜻이다. 태국의 매운 고추나 사천 고추, 청양고추 매운 맛을 훨씬 넘어선다. 대부분 시골 작은 중식당의 야키우동도 모두 맵다. 매운맛은 한반도 야키우동의 특징이다.한때 ‘중화우동(中華うどん)’도 중식당 메뉴에 있었다. 중화우동은 ‘중국식 일본 우동’이다. 역시 한반도의 중식당에 있었다. 지금도 일본의 중식당 중에는 중화우동을 내놓는 곳이 있다. ‘주카우동’이다. 중화우동은, 한, 중, 일의 합작품이다. 한반도의 식당에서 한국 사람들이 먹었다. 중식당 메뉴인데, 마치 일본 우동 같다. 맵지 않다. 국물이 흥건하다. 일본 우동 같다. 중화우동과 야키우동의 차이는 매운맛, 그리고 국물이다. 중화우동은 맵지 않고, 국물이 있다. 야키우동의 ‘매운맛’과 중화우동의 ‘국물’은 한국 짬뽕의 뿌리다.‘웍(WOK)질’도 주요 포인트다. 일본식 우동은 볶지 않는다. 웍질은 속어다. 중화 냄비인 웍에 넣고 복는다. 초마면과 야키우동은 채소와 면을 볶는다. 웍질한다. 원형 일본 우동은 볶지 않는다. 볶으면 일본식 야키우동이다.중국 초마면, 일본 나가사키 짬뽕은 모두 웍질을 한다. 한국 짬뽕도 마찬가지. 중화요리 웍을 써서 채소, 고기, 해물, 국수를 볶는다. 볶은 채로, 국물 없이 내놓으면 초마면이다. 매운 것은 한반도식 야키우동이다. ‘웍질’ ‘매운맛’ ‘국물’을 더하면 한국 짬뽕이다. 한국 짬뽕은 여러 종류 음식을 거치며 탄생했다.짬뽕은, 초마면, 야키우동, 중화우동과 다르다. 여러 종류 음식의 몇몇 포인트를 받아들였다. 바꾸고, 발전시켰다. 진화하여 한식이 된다. 짬뽕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일본 나가사키 ‘찬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 있는 ‘시카이로[西海褸, 사해루]’가 일본 ‘나가사키 찬폰’의 시작이다. ‘시카이로’는 일본 화교 진평순이 시작한 음식점이다. 가난한 유학생, 나가사키 거주 화교들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 해산물, 돼지고기, 채소 등을 섞어서 볶는다. 이리저리 뒤섞은 ‘챤폰’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찬폰’에서 왔을 것이다. 내용물은 물론 전혀 다르다. 197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는 맵고 붉은색의 짬뽕이 유행한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 짬뽕의 뿌리가 되는 중화우동, 야키우동, 초마면, 우육탕면(牛肉湯麪) 등이 중식당의 메뉴였다. 한식의 특질은 다양함, 끊임없는 변화, 진화다.초마면에서 시작, 우리는 다양한 짬뽕을 만들었다. 해산물 짬뽕도 여러 가지다. 굴짬뽕이 있는가 하면, 홍합짬뽕, 주꾸미 짬뽕도 등장했다. 버섯짬뽕, 돼지고기짬뽕이 있고, 김치짬뽕도 있다. 짬뽕의 종류는 무수하다. 경북 시골의 중식당들은 여전히 야키우동을 내놓는다. 밥도 등장한다. 한반도식 변형이다. 짜장밥, 짬뽕밥이다. 야키우동도 마찬가지. 칠곡의 매운 짬뽕 가게에서는 ‘야키밥’이라는 희한한 음식도 내놓는다. 한식 짬뽕의 끊임없는 진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2-23

포항의 맛? 과메기 받고 가자미

포항 먹거리? 라고 물으면 대부분 과메기와 물회를 대표적인 ‘포항의 맛’으로 손꼽는다. 맞다. 구룡포 과메기는 대표적인 포항의 맛이다. 초겨울, 구룡포 일대에 과메기 덕장이 선다. 바닷가 골목마다 과메기를 말린다. 실내에서 온풍 혹은 냉풍으로 말리는 곳도 있다. 겨울 구룡포는 과메기다.물회도 마찬가지. 포항에 오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물회 한 그릇씩은 먹고 간다. 저마다 ‘포항 물회의 추억’을 가지고 돌아간다. ‘물회 마니아’들은 겨울을 노린다. 겨울에는 물가자미가 등장한다. 영덕, 울진 지역이 물가자미로 유명하지만, 오히려 생산, 소비량은 포항이 앞선다.그러나, 포항을 대표하는 것은 가자미다. 참가자미, 용가자미, 범가자미, 분홍 가자미, 홍가자미, 물가자미 등 가자미 종류도 숱하다. 포항 토박이들은 여러 종류의 가자미를 세심하게 가르고, 먹는다. 봄철에 물회용 가자미가 따로 있고, 구이용, 조림용 가자미를 따로 가른다. 죽도시장, 구룡포 시장에 가면 사시사철 가자미를 볼 수 있다. 싱싱한 생물 가자미, 말린 가자미, 반건조 가자미가 지천이다.웬만한 밥상에는 가자미구이 한 마리가 나온다. 찜이나 조림으로, 때로는 구이로 내놓는다. 제법 큼직한 가자미를 내놓으면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당황한다. “가자미구이는 주문하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한다. 반찬 중 하나다.포항 사람들은, 가자미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가자미는 늘, 곁에 있다. 시장에서, 바닷가에서, 골목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가정의 밥상에서 만난다. 수시로 만나는 흔한 생선이니, 포항 사는 이들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 골목마다 가자미를 말리거나, 팔거나, 음식으로 내놓는 곳은 포항밖에 없다고 믿는 이는 없다. 전 국민이 가자미를 흔하게 대한다고 믿는다.아귀도 재미있다. 아귀는 마산에서 처음으로 ‘식용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설이다. 지금도 ‘마산 아귀’는 고유명사다. 그동안 아귀가 ‘이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포항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생선 중 하나가 아귀다. 아귀가 남해안에서 동해안으로 거슬러 오면서, 포항에 아귀가 흔해졌다.아귀 간을 일본인들은 ‘안키모(ankimo)’라 부른다. 귀하게 여긴다. 일본인 중에는 아귀 간이 프랑스의 푸아그라(foie gras)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푸아(foie)’는 간이다. ‘그라(gras)’는 지방이다. 푸아그라는 지방 덩어리다. 아귀 간도 상당 부분이 지방질이다. 만지기 까다롭다. 열기가 강하면 물처럼 흘러내린다. 덜 익은 것은 날생선의 비린 맛이 느껴진다.신선한 아귀 수육과 더불어 아귀 간 찜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아귀는 옮기는 과정에서 쉬 신선도가 떨어진다. 마산, 부산 그리고 포항에서 손질한 아귀를 대도시에 공급한다.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포항에서 버스 편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손질 아귀’의 양은 만만치 않다.포항 구룡포 일대에서 질 좋은 자연산 미역이 난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외지 사람들은 “포항에서 질 좋은 자연산 미역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외지인뿐만 아니라 포항에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죽도 시장에 가면 ‘완도 미역’이라고 표기한 마른미역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미역은 양식 미역과 자연산이다. 한때 동해안 울산, 부산 언저리에서도 미역을 양식, 재배했다. 없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공장 지대가 들어섰다. 울산 이진, 당월, 온산 미역도 사라졌다. 동해안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차가운 물에서는 미역 성장 속도가 느리다. 물이 따뜻한 남해안을 따르지 못한다. 겉모양도 남해안 것이 낫다. 먹어보면 다르지만, 소비자들이 그 내용을 알 리는 없다. 전국 어디서나 완도 미역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제 대도시 소비자들도 완도 미역을 최상품으로 여긴다. 그렇지는 않다.자연산 미역은 돌미역, 산모 미역, 해녀 채취 미역이라고 부른다. ‘돌’은 자연산, 거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거친 자연산 미역이라서 돌미역이라고 부른다. 미역 줄기나 잎이 두껍고 거칠다. 웬만큼 삶아도 풀어지지 않는다. 푹 고면 뽀얀 국물이 우러난다. 산모를 위하여 사용하는 질 좋은 미역이 산모 미역이다. 해녀 채취 미역은 해녀가 한 올, 한 올 채취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마치 밭에서 채소를 채취하듯이, 바다의 미역밭에서 미역을 채취한다. 소량이다.식재료 가격은 인건비다. 해녀가 일일이 따 모은 미역은 비싸다. 구룡포에서 양포항 일대까지 자연산 미역을 채취한다. 생산 물량은 적지만, 품질은 수준급이다.포항 구룡포, 양포, 흥해, 칠포 일대의 깔떼기국, 깔떼기국수, 깔떼기도 특이한 음식이다. ‘미역국+곡물’ 형태다. 곡물은 수제비, 칼국수, 새알심 등이다. 수제비 미역국, 칼국수 미역국, 새알심 미역국이다.포항에는 여러 종류의 추어탕이 있다. 고등어추어탕, 꽁치추어탕 등이다. 추어탕의 ‘추어(鰌魚)’는 미꾸라지다. ‘고등어 미꾸라지탕’은 어색하다. 고등어를 재료로, 마치 추어탕처럼 끓인다. 포항 흥해에는 고등어추어탕 집이 몇몇 있다. 50년의 업력을 자랑하는 노포도 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추어탕에 미꾸라지 대신 고등어’를 넣은 집이 있다. 손님들은 질색한다. 포항의 고등어추어탕은 다르다. 포항 것은 고등어로 만든다. 대도시의 고등어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넣었다고 거짓말하고, 고등어를 넣은 것”이다. 고등어추어탕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은 미꾸라지 대신 고등어를 넣은 ‘엉터리 추어탕’을 보았기 때문이다. 포항의 고등어추어탕은 죄가 없다. 떳떳하다. 처음부터 고등어를 넣는다고 밝힌다. 국산, 신선한 고등어를 넣은 고등어추어탕은 비린내도 거의 없다. 담백, 고소하다. 추어탕 산초가루는 고등어추어탕에도 유효하다.‘당구국’ ‘꽁치다대기추어탕’도 희한한 음식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꽁치를 재료로 추어탕처럼 끓인 것이다. ‘꽁치국’을 ‘당구국’이라 부른다. ‘꽁치다대기추어탕’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고등어추어탕과 꽁치추어탕은 큰 차이가 있다. 고등어추어탕은 신선한 고등어 살을 잘 발라서 여러 채소를 넣고 국을 끓인다. 꽁치추어탕은, 꽁치를 잘게 다진 다음 ‘꽁치 완자’를 만들어 넣는 방식이다. 잘 다지면 꽁치살은 점도가 높아진다. 전분, 밀가루 등을 조금만 넣어도 완자 만들기는 가능하다.포항에는 ‘숨어있는 음식’이 많다. 포항은 맛의 고장이다. 포항 사람들도 포항 음식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장기 ‘창바우마을’의칼국수 미역국, 꽁치추어탕,그리고 성게덮밥‘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동해안로 3404번길 55’는 신창리의 공식적인 주소다. 지역주민들은 ‘신창리’ 혹은 ‘창바우마을’이라고 부른다. 작은 자갈이 많은 해안선과 인근 경치가 좋다. 다산 정약용 유배 유적지와 일출암이 지척 간이다. 다산은 1801년 장기로 유배 와서 약 10개월간 있었다. ‘장기농가 10수’를 남겼다. 일출암은,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 중 하나라고 손꼽은 곳이다.경치도 좋지만, 앞바다가 보물이다. 질 좋은 자연산 미역, 각종 성게가 풍성하다. 인근 항구에서는 대왕문어, 아귀, 꽁치 등을 비롯한 신선한 생선이 흔하다.‘어업회사법인_창바우마을(대표 김태섭)’은 2012년 설립, 그동안 후릿그물, 고둥잡기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체험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예약하면 이 지역의 특산물을 이용한 음식도 맛볼 수 있다.‘성게덮밥’은 성게 알, 해조류, 채소를 가득 올린 후, 가마솥밥을 새로 지은 것이다. 정성이 많이 든 음식이다. 동해안 일대에서는 성게를 ‘앙장구’라고 부른다. 보라성게와 말똥성게가 흔한데, 앙장구는 말똥성게다. ‘창바우마을’에서는 계절별로 생산되는 성게를 이용하여 ‘성게덮밥’을 만든다. 성게덮밥보다는 ‘성게 가마솥밥’이 어울린다.‘깔떼기’ 혹은 ‘깔떼기국수’는 식당이 아니라 ‘창바우마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앞바다에서 동네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에 들깻가루 등을 넣고 국을 끓인다. 한소끔 끓은 다음, 준비한 칼국수를 넣고 다시 끓인다. 칼국수는 직접 반죽한 것을 널찍하게 썰어서 사용한다. 오래전에는 칼국수 대신 수제비나 새알심을 넣기도 했다. 자연산 미역의 독특한 식감과 칼국수의 푸짐한 식감이 잘 어울린다.‘당구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치 장구 치듯이 꽁치를 잘게 두드리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꽁치를 마치 장구 치듯이 다진 다음 끓인 국’이라는 설명이다. 어색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설명밖에는 뚜렷한 설명이 없다.‘당구국’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신선한 꽁치를 손질한 다음, 잘 다진다. 손으로 주물러 완자 형태를 만든다. 육수에, 준비한 우거지, 시래기, 각종 채소와 꽁치 완자를 넣는다. 꽁치 완자는 모양이 일정치 않다. 고소하면서도 꽁치 특유의 쌉싸래한 맛을 살린 꽁치국이다. 꽁치국인 ‘당구국’은 꽁치의 신선도가 생명이다. 신선하지 않은 꽁치는 쓴맛을 낸다./황광해 맛칼럼니스트

2019-12-16

‘어만자’는 ‘물 일하는 벌레 같은 인간’

긴 세월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이야기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억울하지만 해결방법도 없다.오징어가 사라졌다. 수온, 조류의 변화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국 중국어선 때문이다. 명태가 사라졌다. 마찬가지다. 중국어선 때문이다. 서해안의 불법조업과 동해안 불법조업은 방식이 다르다. 결과는 같다. 서해안의 불법조업은 우리 해역까지 중국 배가 들어와서, 작업하는 것이다. 동해안은 얼마간 다르다. 북한 해역에서 버젓이 조업한다. 중국어선들이 북한 해역의 입어권(入漁權)을 샀다는 흉흉한 소문만 돈다. 눈 감고 아웅 한다. 크기가 작은 치어(稚魚)도 마구잡이로 잡는다. 산란기, 금어기를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자기들끼리 ‘입어권’을 사고팔았으니 확인도 불가능하다.근래 일도 아니다. 이미 수백 년 이어졌다. 달라진 것은 없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중국 배들과 숱한 마찰이 있었다. 불행히도, ‘마찰’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우리가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없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62권_서해여언(西海旅言)’의 일부다. 제목은 ‘11일, 바람이 불고 조니진에 머물다’이다. 조니진은 황해도 장연의 바닷가 포구다. 지금도 ‘중국 배의 서해 불법조업’ 지역이다.(전략) 4월에 바람이 화창할 때면 황당선(荒唐船)이 와서 육지에서는 방풍(防風 한약재)을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海蔘)을 따다가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가기 시작한다. 8~9척에서 10여 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배 1척에는 70~80명에서 큰 배는 1백여 명까지 타고 와 초도(椒島), 조니진, 오차포, 백령도(白翎島) 사이에서 출몰한다고 한다. (후략)북학파 실학자인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는 18세기 후반 사람이다. 중국은 청나라였다. 인조는,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 불과 100년 남짓 전의 일이다. 만주족에 대한 두려움, 분함이 살아 있었다.중국 배들이 우리 해안을 노략질한다.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단속할 수도 없다. 외교 분쟁(?)이 일어날 판이다. 청나라와 조선.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조공 관계다. 형식이든, 실제 내용이든 신하의 나라다. 억울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외국에 가서 한반도를 설명하면서 “예전 우리 조공국”이라고 말한다. 조선 시대와 지금.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숙종대왕 시절이다. 살림살이도 썩 좋지는 않았다. 참혹스러운 상황에서 막 벗어났을 때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년)을 막 지났다. 경신대기근은, “왜란과 호란보다 더 무서웠다”고 한다. 겨우 숨을 쉴 만한 시절이다. 중국 배들이 우리 서해안을 마구 침범한다.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노략질을 한다.조선 초기 기록부터 황당선은 꾸준히 나타난다. 이덕무가 말하는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의 ‘황당선’ ‘중국 막가파, 어만자’ 이야기를 들어보자.(전략) ‘황당선(荒唐船)’이란 무슨 말이냐 하면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혹 의선(疑船)이라고도 하는데, 다 등주(登州), 내주(萊州)의 섬 백성들로서 표독하고 날쌘데다 고기로 식량을 삼고 배로 집을 삼는 자들이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어만자(魚蠻子)’라는 것들이고 (중략) 배들이 다 완전 치밀하여, 멎었을 때는 반드시 네 군데에 닻을 내리고 석회(石灰)로 배 틈을 발랐다. 밀랍 덩어리 같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안주에 독한 술을 마시고 머리를 흔들며 노래하면 용감하여 당하기가 어려운데, 4월에 오는 놈은 ‘망인(網人)’으로 그렇게까지 날쌔지는 않으나, 5월에 오는 놈들은 ‘수인(囚人 헤엄을 치며 해물을 채취하는 사람)’으로 뺨은 깎은 쇠붙이 같고 살결은 옻칠을 한 듯하며, 발을 위로 하고 이마를 거꾸로 한 채 발랄(潑剌)하게 파도를 가르기도 하며, 도끼를 들고 뭍에 나와서는 소나무를 진흙 쪼개듯 하고서는 어깨에다 도끼를 매고 힐끗힐끗하며 걸어가며, 남과(南瓜 호박)건 서과(西瓜, 수박)건 제멋대로 따먹고 반드시 뿌리까지 망쳐버리며, (후략)이 글을 쓴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다. 무자년, 1768년이다. 이해 10월(음력) 이덕무는 황해도 서해안 일대를 여행한다. ‘서해여언’은 ‘서해를 보고 남긴 여행 에세이’다.등주, 내주는 중국 산동성의 해안 도시다. 예나 지금이나 불법조업의 출발지다. ‘중국식 막가파 배’들은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년)때 심했다. 이덕무가 ‘서해여언’을 작성한 시기보다 50-100년 앞 시기다. 중국 배의 노략질은 꾸준했다.‘어만자’는 ‘물 일하는 벌레 같은 인간’이다. 해적, 수적 중에서도 하층을 뜻한다. 인간 이하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 측 표현도 아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오늘날, 단속하는 우리 측 해양경찰들에게 흉기를 들고 덤비는 중국 불법 어선의 선원이 바로 당시의 ‘어만자’다.‘어만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망인의 ‘망(網)’은 그물이다. 추측컨대, 망인은 그물로 생선을 잡는 이다. 수인은, 맨몸으로, 바다 밑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이들이다. 수인이 망인보다 훨씬 거칠다고 했다. 오랫동안 당했으니 그들의 습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 역시 지금과 다를 것 없다. 아무리 단속해도 때가 되면 불법조업에 나선다.이들은 내륙에 상륙하여 호박, 수박 등을 마음대로 따먹고, 뿌리까지 망친다. 나물(약초)을 캐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 심지어 부녀자를 희롱, 겁간했다.황당선은 의심스러운 배, 의선(疑船)이다. 황당선은 조선 초기 기록에도 나타난다. 꼭 집어, 중국 배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중종 35년(1540년) 1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제목은 ‘황당선 한 척이 황해도 부근에 나타나 처리할 것을 예조에 이르다’이다.“황해도 관찰사 공서린의 서장을 보니 ‘도내 풍천부(豊川府) 침방포(沈方浦)에 황당선(荒唐船) 1척이 (중략) 실로 도둑들의 선박은 아니고 필시 중국 사람들일 것이다. (중략) 만약 이 사람들이 벌목(代木)이나 물고기를 잡을 목적으로 여기에 왔다면 나머지 선박들도 꼭 찾아내야 한다. 그들을 수색할 때는 대항해서 싸울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한학 통사(漢學通事) 2명을 속히 보내도록 하라. 첫째, 수색할 때는 대화로 설득하여 대항해 싸우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 군졸들로 하여금 가벼이 사격하지 못하도록 할 것과 둘째, 중국인을 호송해 올 때에는 잘 구호(救護)하여 올라오도록 할 것을 예조에 이르라.”이 글에 나오는 황당선은 불법조업 어선은 아니다. 내용으로 봐서는 단순 표류한 배다. 글 중간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이들이 벌목이나 물고기를 잡을 목적으로 여기 왔다면, 나머지 선박들도 꼭 찾아내야 한다”라고 한 부분이다. 불법적으로 나무를 베거나 불법조업하는 배들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의심스러운 황당선이라고 했다가, ‘중국인이면’이란 단서로 도적은 아닐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대처도 애매하다. 불법 선박이 있다면 찾으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역사를 보내서 충돌하지 말고, 대화로 설득하라고 명령한다. 우리 병사들이 가벼이 사격하지 못하도록 하라, 만약 호송한다면 잘 보살펴 한양으로 보내라고 말한다.이때 중국은 명나라다. 이미 중국 배의 노략질은 있었다.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약한 나라의 서러움이다.중국의 약탈은 조선 시대 내내 이어졌다. 중종 때는 서해에서 우리 배의 소금을 약탈했다. 서해안 일대에서 해삼을 따고, 해안가의 약재를 채취했다. 조선 후기에는 황해도 앞바다에서 집중적으로 청어를 잡았다.숙종 43년(1717년)의 기록에는 “황당선이 오늘날같이 많이 나타난 적이 없다. 한꺼번에 32척이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 정부는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조처를 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그 사이, 동해의 오징어와 명태가 사라졌다. 우리 배들은 아예 출항도 하지 못한다. 출항해도 고기가 없다. 서해안 꽃게, 조기, 남해안 멸치도 마찬가지다.‘막가파 중국어선’. 어떻게 할 것인가?/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2-09

한국인에게 시래기는 가난이자 고향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한다. 우거지와 시래기는 전혀 다르다. 시인이자 정치인 도종환의 시가 있다. 제목은 ‘시래기’다.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중략)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중략)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후략)이 시에서도 우거지와 시래기는 혼란스럽다. 우거지와 시래기를 뒤섞었다.우거지는 ‘웃걷이’ ‘웃거지’에서 시작된 말이다. ‘윗부분에 있었던 것’이 우거지다. 식물의 바깥 혹은 웃자란 부분이 바로 우거지다. 배추를 벗기면 겉껍질이 생긴다. 우거지다. 배추의 바깥 부분, 낡아서 버리는 부분이다. 정확하게는 ‘배추 우거지’다. 갓의 바깥 부분, 윗부분도 덜어내면 ‘갓 우거지’다. 다른 식재료도 마찬가지. 무청의 윗동은 무청 우거지다. 말리면 ‘무청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무청 시래기’라 부른다.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가장 오래 낡아간 것,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것이 바로 우거지다. 우거지를 기억하는 손에 의해서 거두어져, 서리 맞고, 눈 맞으며, 겨울을 지나면, 시래기가 된다. 우거지를 말린 시래기다. 우거지 시래기다. 정확하게는,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우거지는 생물(生物)이다. 시래기는 겨울을 나면서, 말리고 발효시킨 것이다.한국인에게, 시래기는, 가난이자 고향이다. 시래기를 보면, 누구나 가난한 시절과 떠나온 고향을 떠올린다.나물과 말린 나물은 한식의 특질 중 하나다. 수도 헤아릴 수없이 많은 들나물, 산나물을 두루 먹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여러 종류의 나물을 말려서 이듬해 햇나물이 나올 때까지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겨울이면 무청, 배추 우거지를 말리고, 주요한 식재료로 사용하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나물, 묵나물, 시래기, 우거지는 한국의 주요한 식재료이자 음식 문화의 특질이다.한국만 묵나물을 먹지는 않았다. 냉장, 냉동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건조, 염장, 발효 등이 식재료 보관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나물을 간장, 된장, 소금 등으로 절인다. 된장이나 김치 등은 발효를 통한 보관 방법이다. 말리는 것도 마찬가지. 주요한 보관 방법이었다.중국도, 오래전에는, 말린 나물, 묵나물을 사용했다.‘BAIDU[百度]’는 중국 검색 엔진이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 바이두 사전[百度百科, 백도백과]라고 부른다. 바이두에서 ‘旨蓄(지축)’을 설명한다. “旨蓄: 貯藏的美好食品(저장적 미호식품)”. “지축: 저장한 맛있는 식품”이라는 뜻이다. 건조식품 중 특별히 ‘채소, 푸성귀[菜]’ 말린 것을 이른다. 넓은 의미에서 시래기다.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고, 또 지금도 있지만, 우리처럼 무청 시래기, 배추 우거지 시래기를 널리 먹지 않았다.‘성호전집_권 53_가포정기(稼圃亭記)’에 ‘지축’이 있다.농사일하는 자가 채소밭 일하는 자에게 묻기를, “밭일에도 도가 있는가?” 하니, 밭일하는 자가 말하기를, “있다. 곡식이 있으면 채소가 있으니, 농사가 있으면 밭이 있는 법이다. 품종을 가려서 모종하고 시기를 기다려서 물을 주고, 뿌리가 있는 것은 흙을 북돋아 주고 덩굴을 뻗는 것은 뻗을 길을 내주며, 잎이 자라는 것은 물을 듬뿍 주고 열매가 있는 것은 길러 준다. 앞에는 가천(嘉薦)이 있고 뒤에는 지축(旨蓄)이 있으며, 크든 작든 빠르든 느리든 각각 그 능력대로 올려서 제향을 올리는데, 채마밭이 아니면 그 제수할 물건을 채울 수 없고 맛난 고기라 할지라도 채마밭이 아니면 그 맛을 더할 수 없으니, 이로써 말하자면 오직 밭일이 공이 있다.” 하였다.좋은 것과 부족한 것을 두루 설명한다. 농사일은 채소밭 일보다 앞선다. 채소 기르는 농사로 여기지 않았다. 곡식이 채소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가천(嘉薦)은 제품(祭品)이다. 제사에 쓰는 음식, 식재료다. 고기는 늘 채소보다 앞선다. 채소는 보완재다. 고기보다 뒤처지지만, 소중하다. 채소가 없으면 고기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지축은 고기보다 뒤처지고, 채소 중에서도 뒷자리지만, 소중하다.조선 전기 문신 허백당 성현(1439~1504년)의 시에도 ‘지축’이 있다. ‘허백당집_신춘 2수’의 내용이다. 새봄이니 묵은 나물, 시래기, 지축과 더불어 햇나물을 이야기한다.(전략)//겨울 넘긴 묵은 나물[旨蓄] 먹기가 괴로우니/병든 입에 깔끄러워 뱉으려다 삼키누나/봄이 오자 연한 햇나물 먹고파서/묵은 땅을 일구어서 순무 뿌리 심어 보네겨울을 넘긴 묵나물은 아무래도 햇나물보다 맛이 덜하다. 겨우 내내 묵나물을 먹었으니 이젠 몸이 햇나물을 원한다. 몸보다 입이다. 입이 햇나물을 원하니 순무 뿌리라도 심는다. 묵나물, 시래기는 예전에도 가난의 대명사였다.조선 중기 문신 오음 윤두수(1533~1601년)의 ‘오음잡설’에서는 ‘산나물 시래기’를 상세하게 설명한다.기고봉의 서실(書室)이 호현방(好賢坊) 골목에 있었는데, 일찍이 봄철에 종을 보내어 용문산의 산나물을 뜯어다가 뜰에서 말려 월동 준비를 하였으니, 즉 ‘시경’에 이른바, ‘내 아름다운 나물을 저축한다[我有旨蓄, 아유지축]’는 뜻이니,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다.호현방은 회현방으로, 지금의 서울 회현동이 있는 충무로 일대다. 기고봉은 기대승(1527~1572년)이다. 고봉은 호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 ‘이기 논쟁’을 벌인 조선 중기의 큰 성리학자다. 그의 서실이 호현방에 있었다. 고봉은, 한양에 살면서 봄철이면 사람을 보내 용문산의 산나물을 채취하고 말렸다.“我有旨蓄(아유지축)”은 중국 고전에서 비롯된 문장이다. “나에게 맛있는 묵나물이 있다”는 뜻이다. ‘지(旨)’는 아름다운 음식, 맛있는 음식이다. ‘축(蓄)’은 모은다, 비축한다, 저축한다는 뜻이다. 잘 모아둔 맛있는 음식, 결국 말려서 겨울을 나는 산나물, 들나물 등이다. 용문산에서 뜯어말렸으니, 고봉의 지축은 산나물 시래기다.위의 시는 고봉의 검약한 삶을 잘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으로 여겼다.‘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1487년) 9월11일’의 기사다. 음력 9월이니 10월, 11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제목은 ‘양양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대략 이르기를,“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중략)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후략)강원도는 곡식이 귀하다. 가을이면 지축, 도토리 등을 모으고 준비해야 한다. 강무는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강무가 있으면, 인근 주민들은 행사에 동원된다. 길을 닦고, 식사 준비, 말 먹이 등도 챙겨야 한다. 가을에 강무가 있으면 백성들이 겨울 준비를 하지 못한다. 강원도 양양도호부사 유자한은 강무 연기를 말하고 있다.가난한 이들이 주로 먹던 지축을 우리는 꾸준히 발전시켰다. 오늘날 산나물 시래기, 즉 묵나물이 바로 지축이다.중국인들은, 지금도 ‘지축’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만 정작 시래기 음식은 버렸다. 우리도 시래기는 가난의 대명사로 여겼지만 늦가을, 초겨울이면 집집마다 시래기를 챙긴다. 사시사철 나물이 흔하니, 필요할 때마다 슈퍼나 마트에서 매번 챙긴다. 특정 지방에서는 시래기를 지역 특산물로 홍보한다. 아름다운 우리의 지축, 시래기 문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2-02

‘닭고기+두부’ 조선 후기 화려한 연포탕

두부는 진화한다. 딱딱한 두부에서 부드러운 두부로, 순두부 넣고 끓여 먹던 단순한 두붓국에서 닭고기나 해물이 들어가는 프리미엄 두붓국으로. 조선 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두부는 진화한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시다. 제목은 ‘새벽에 한 수를 읊다’이다,기름에 두부 튀겨 잘게 썰어 국을 끓이고/여기에 다시 총백(蔥白)을 넣어서 향미를 도와라/(후략)기름에 두부를 튀긴 뒤, 잘게 썬다. 두부가 어느 정도 딱딱하지 않으면 힘들다. 목은 시대의 두부는 딱딱했다. 가늘게 썬, 튀긴 두부로 국을 끓인다. 부재료는 총백이다. 다른 부재료는 없다. ‘총백’은 파 혹은 파의 뿌리 부분이다. 대파가 없던 시절이다. 지금의 쪽파 정도였을 것이다. 파 뿌리를 익히면 단맛과 특유의 향이 살아난다. 왜 날두부를 썰어 넣지 않고, 튀긴 두부를 사용했을까? 아마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두부보다는 튀긴 두부로 끓인 국물이 맛있다. 기름을 가열하면 맛이 도드라진다. 튀기면 썰기도 한결 편하다.목은은 고려 말기, 조선 초기를 살았다. 고려 말에는 목은의 튀긴 두붓국 정도가 최고의 두부 요리였을 것이다.조선 초기까지도 별다른 두부 요리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세종이 받아든 중국의 국서도 “두부를 정교하게 만드는 여인을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성종 때, 도깨비 같은 존재가 먹었다는 음식도 단순한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조선 초기 두붓국은, 두부만 넣은 단순한 것이었다. 부재료는 쪽파 정도다.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의 ‘사가시집_권40_윤상인(允上人)이 두부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에 실린 두붓국이다.보내오신 두부, 서리보다 더 하얀데/잘게 썰어 국 끓이니 연하고도 향기롭네/부처 숭상한 만년엔 고기를 끊기로 했으니/소순이나 많이 먹어 가냘픈 창자 보하려네소순(蔬筍)은, 푸성귀와 나물의 새싹, 대궁이다. 두부는 “잘게 썰어 국 끓였다”고 했다. 역시 평범한 두붓국이다. ‘부처’ ‘고기를 끊는다’고 했으니 채식이다. 소박하다.두부, 두붓국은 끊임없이 진화한다.서거정의 시대를 지나 200여 년 뒤다. 유암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는 소 백과사전이다. 여기에 ‘자연포법(煮軟泡法)’ 즉, 연포탕 끓이는 법이 나온다. 유암의 두부, 연포탕은 17세기 모델이다. 그 이전의 단순한 ‘두붓국[豆腐羹]’이나 그 후의 연포탕과도 다르다. ‘산림경제_2권_치선’ 중 일부다.자연포법(煮軟泡法). 두부를 만들 때 꼭 누르지 않으면 연하다. 작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씩 꽂는다. 흰 새우젓국[白蝦醢汁, 백하해즙]을 물에 타서 그릇에 넣고 끓인다.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스며 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 꼬치를 거꾸로 담근다. 슬쩍 익혀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는다. 극히 보드랍고, 맛이 아주 좋다._속방(俗方)서거정의 순수 채식 두붓국이 20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진화한다. 새우젓국과 굴이 들어가는, 제법 화려한 연포탕이다.재미있는 것은 이 내용의 끝부분에 있는 ‘속방’이란 단어다, 조선 시대 상당수 책은 근거를 밝힌다. 원나라 서적인 ‘거가필용’이나 우리 책 ‘향약집성방’에서 따왔다는 식이다. 속방은 ‘민간에서 취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는, 그래서 유례가 없는 순수 우리식 방법’이다.연포탕은 화려하게 변신한다. ‘산림경제’의 ‘자연포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다. 숙종 7년(1681년) 6월 3일, 조정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영의정 김수항이 여러 어사의 비리를 고발한다. 국왕 대신 지방의 실정을 조사하던 어사가 ‘비리, 적폐’로 몰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날의 기사 제목은 ‘김수항이 비리 어사들의 처벌을 아뢰고(후략)’이다.(전략) 영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중략) (어사) 목임일은 역마를 바꿔 탈 때 형장이 낭자하였으며, 또 본도(本道)의 찰방(察訪), 적객(謫客)과 어울려 산사(山寺)로 돌아다니며 놀았으며, 연포회(軟泡會)를 베풀기까지 하였습니다.”목임일은 숙종 7년(1681년) 평안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암행어사는 말 그대로, 암행이 원칙이다. 어사 목임일이 ‘찰방, 적객과 어울려 산사에서 놀면서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했다. 찰방은 조선 시대 역원의 관리 책임자다. 종6품으로 그리 낮지 않다. 이들은 지역의 도로를 관리하고 역이나 원의 시설, 인원도 관리했다. 암행어사는 암행이니,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마패를 보여주고 말을 구하고, 역원에 머물면 될 일이다.연포회는 연포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모임이다. 적객은 귀양살이하는 이다. 죄인이다. 암행어사가 현직 관리, 죄인과 연포회를 베풀었다. 터무니없다. 신분도 다 드러났을 것이다. 어사 목임일이 먹었던 연포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저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적었다. ‘산림경제’의 연포탕인지, 그 후 화려하게 변신하는 연포탕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연포회는 상당히 널리 퍼졌다.남인이었던 목임일은 나중에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다. 이때의 ‘연포회 사건’이 이력에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약 150년 후쯤에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가 있다. ‘다산시문집_제7권’의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이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다섯 집에서 닭 한 마리씩을 추렴하고/콩 갈아 두부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라/주사위처럼 두부 끊으니 네모가 반듯한데/띠 싹을 꿰어라, 긴 손가락 길이만 하게/뽕나무버섯 소나무버섯을 섞어 넣고/호초와 석이를 넣어 향기롭게 무치어라/(중략) 연포(軟炮)라는 이름은 우리 풍속을 따르더라도/빈한한 선비의 풍류로 이름을 높여 부르니/(중략) 철마산은 골짝 얕고 강물은 넓기도 해라/속히 그대 따라 이곳에 은거하고 싶네이 시에는 두부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다산은, “세속에서 두붓국을 연포(軟泡)라고 하는데 포(泡) 자가 너무 속되므로 지금 포(炮) 자로 고쳤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포(泡)’는 거품이다. 본질이 아니다. 쓸데없는 부분,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한낱 거품이니 ‘너무 속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이 시를 쓴 시기는 19세기 초반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 마재[馬峴, 마현]로 돌아왔다. 다산의 강진 유배는 1801년 11월부터 1818년까지다. 다산은 1836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고향에서 노년을 보낸 1818∼1836년 사이에 쓴 것이다.철마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와 수동면 수산리에 걸쳐 있다. 다산의 고향이자 노년을 보낸 마재와 멀지 않다.다산의 두부는 19세기 초반, 우리 선조들이 먹었던 두부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 두부는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하게 잘랐다. 네모난 두부를 띠 싹에 꿴다. 국물에는 여러 버섯을 넣었다. 후추와 석이버섯도 넣었다. 국물의 바탕은 닭고기다. 인근의 여러 젊은 선비들과 푸짐한 야외 파티를 했던 모양이다. 닭을 다섯 마리나 준비하고 절 밑에서 놀았다. 시회(詩會)도 베풀었을 것이다.다산의 연포탕은, 조금 뒤에 나온 책, ‘동국세시기’의 연포탕과 비슷하다. “10월 두부, (중략)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닭고기+두부’의 연포탕이다. 다산의 연포탕이 바로 조선 후기 화려한 연포탕이다. 부드러운 두부, 연포로 끓였으니 연포탕이다. 낙지는 없다.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을 준비해서 마치 오늘날의 전골 혹은 샤부샤부 같이 데쳐서 먹었다.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두부는 장의문(藏義門)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고 했다. 두부는 흔하지만 연한, 잘 만든 두부는 귀하다. 두부를 많이 먹지만, 새우젓국, 굴이나 닭고기 국물과 끓인 부드럽고, 맛있는 연포탕은 사라졌다. /맛칼럼니스트

2019-11-25

연포탕은 낙지탕이 아니다

‘연포탕(軟泡湯)’이라는 음식이 있다. 누구나 알만한 음식, 연포탕을 거창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연포탕을, 흔히, 낙지와 무 등 채소를 넣고 끓인 음식으로 여긴다. 낙지가 비교적 흔한 서해안 일대의 고유 음식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틀렸다.연포탕은 연포로 끓인 탕, 국물 음식이다. ‘軟泡(연포)’는 ‘연한 두부’다. 연포탕은 부드러운 두부로 끓인 탕이다. 낙지탕이 아니다. 무슨 그런 억지를 피우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필요가 없다. 원형 연포탕은 연한 두부에 닭고기, 닭고기 국물을 더한 음식이다.‘동국세시기’ 10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두부 연포탕요즈음 반찬 중에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다.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 여기서 포라는 것은 두부를 말하며 한 나라 무제 때 신하 회남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고하면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이르기를 솥을 닦고 여기(黎祁)를 지진다는 글 뜻의 주(註)에 촉인(蜀人)은 두부를 ‘여기’라고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지금의 연포가 곧 이것인 것이다.명확하게 두부 탕이 연포탕임을 설명한다. 지금의 두부 탕과는 얼마간 다르다. 두부를 가늘게 썰어 꼬챙이에 꿴다. 두부 꼬치다. 날두부를 넣지 않는다. 꼬치 두부를 한번 지진다. 국물은 닭고기로 만든다. 닭고기를 섞어서 국을 끓인다.두부는 ‘포’다. 연한 두부면 연두부 탕, 곧 연포탕이다.‘동국세시기’는 1849년(헌종 15년)에 완성되었다. 19세기 중반이다. 저자 홍석모(1781∼1857년)는 18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9세기 중반에 죽었다. ‘동국세시기’의 내용은 19세기 초중반, 조선사람들이 생각하고 겪은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두부나 연포탕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부터 19세기 중반까지도 연포탕은 연두부 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포탕에 낙지가 들어가고, 연포탕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육방옹은 이름이 육유(1125∼1210년), 호가 방옹. 지금의 절강성 소흥 출신이다. 육방옹의 시대는 12세기 후반, 13세기 초반이다. 육방옹이 이야기하는 ‘촉나라 사람들의 여기가 두부’라는 이야기도 13세기 남송 사람들의 시각이다.한나라 무제 때 회남왕 유안(기원전 165~122년)이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유안이 만든 두부가 좋았다고 하지만 ‘유안 두부’는 한나라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한나라 무제의 전한(前漢)은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사이에 있었던 나라다. 두부는 이보다 뒤 시대에 중국 대륙에 나타난다는 기록이 오히려 많다. 육방옹의 두부 이야기도 남송 시대, 12세기 말의 내용이다. ‘두부’가 중국 측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당나라 때다. 당(618~907년)은, 7세기 초반에서 10세기 후반의 나라다. 우리의 통일신라 시대와 겹친다.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두부와 왕’의 상관관계다. 예나 지금이나 두부 만드는 일은 육체적으로 고되다. 유안은 회남왕이다. 황족이고, 작은 지역 회남의 왕 노릇을 했던 이다. 정치적으로 힘든 시기를 살았다. 유안은 결국 마흔넷의 나이로 자결했다. 역모와 반란 혐의였다. 정치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황족이 두부를 만들었다? “유안의 시대에”라고 하면 이해가 된다. “유안이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황족이 두부를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콩도 문제다. 두부를 만드는 콩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만주 일대가 원산지다. 콩은 북방 기마민족의 것이다. 기마민족은 일찍부터 우유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버터, 치즈 류다. 치즈, 버터와 두부는 만드는 원리는 비슷하다. 치즈, 버터는 동물단백질을 굳힌 것이다. 두부는 식물 단백질을 굳혀서 만든다. 북방 기마민족은 이미 우유를 굳혀서 버터, 치즈를 만들었다. 두부는 북방 기마민족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우리도 일찍부터 두부를 먹었다. 여말선초의 목은 이색(1328~1396년)은 ‘먹보 영감’이다. 음식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먹보 영감 목은이 두부를 빠트렸을 리 없다. ‘목은시고_권 33_시’의 내용이다. 제목은 ‘대사(大舍, 승려)가 두부를 구해 와 먹이다’이다. ‘大舍(대사)’는 ‘大師(대사)’와는 다르지만, 승려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채솟국 맛이 없어진 지 오래니/깔끔하고 뽀얀 두부 맛이 새롭네/성긴 치아로도 먹기 좋으니/진실로 나이 든 몸을 보양한다네/생선, 순채[魚蓴, 어순]를 보면 월나라 사람이 떠오르고/양락(羊酪)을 보면 북방 사람들이 생각난다네/우리나라 땅에서는 이걸 맛있는 음식으로 꼽으니/하늘이 백성들을 잘 보살핀다네목은 이색은 14세기 사람이다. 중국의 육방옹과는 불과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목은의 두부에 대한 설명은 천연덕스럽다. 목은에게 두부는 새롭게 들어온, 신기한 음식이 아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맛있는 음식’이다.시의 내용 중에 월나라의 어순(생선, 순채)과 북방민족(胡人, 호인, 만주족)의 양락이 있다. 어순의 ‘순’은 ‘순채(蓴菜)’다.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에 나오는 바로 그 음식이다. ‘양락’은 양젖 혹은 양 등의 젖으로 만든 음식이다. 월나라 사람들에게는 순채, 북방 만주족에게는 양락이 있듯이, 우리 땅에서는 두부가 난다고 말한다. 두부는 목은의 시대에 전래된 것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음식이다. 늦어도 몽골의 원나라 시절 한반도에 전래되지 않았을까, 라고 추정한다.우리는 두부를 잘 만들었다. 목은보다 약 100년 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_세종 16년(1434년) 12월’의 기록이다.“(전략) 왕이 먼젓번에 보내온 반찬과 음식을 만드는 부녀자들이 모두 음식을 조화(調和)하는 것이 정하고 아름답고, 제조하는 것이 빠르고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더욱 정묘하다[而作豆腐尤精妙]. 다음번에 보내온 사람은 잘하기는 하나 전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이 다시 공교하고 영리한 여자 10여 인을 뽑아서, 반찬·음식·두부 등류[造豆腐之類]를 만드는 것을 익히게 하여, 모두 다 정하고 숙달하기를 전번에 보낸 사람들과 같게 하였다가, 뒤에 중관을 보내어 국중에 이르거든 경사(京師)로 딸려 보내도록 하라. (후략)”이때 중국을 다녀온 이는 천추사(千秋使) 박신생(생몰년 미상)이다. 박신생은 중국 황제의 칙서 세 통을 가지고 왔다. 두 번째 편지가 바로 위 문장이다. 음식에 관한 내용이다. 콕 집어서 조선 여인들이 반찬과 두부를 잘 만든다고 했고, 두부를 만들 여인들을 연습시켜 다시 보내 달라고 했다. 방법까지 구체적이다. 첫 번째 팀은 두부, 반찬을 잘 만들었다. 두 번째 팀은 잘 만들기는 하나 첫 번째에 못 미친다. 이번엔 미리 훈련 시켜 첫 번째 팀과 같은 수준으로 준비했다가, ‘경사(京師, 수도, 북경)’로 딸려 보내라고 했다.두부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발전한다. 연포탕은 조선 초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두붓국인 두부갱(豆腐羹) 정도가 조선 초기 음식이다.조선 초기인 성종 1년(1470년) 5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제목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민간에 떠도는 요사한 말의 근원을 캐어 의혹을 풀게 하라고 명하다’이다.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고태필(高台弼)에게 글을 내리기를, 윤필상(尹弼商)의 반인(伴人) 임효생(林孝生)이 고하기를, 함평(咸平) 사람 김내은만(金內隱萬)의 아내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입이 셋, 머리가 하나인 귀신이 하늘로부터 능성(綾城) 부잣집에 내려와서 한 번에 밥 한 동이[盆], 두붓국[豆腐羹] 반 동이를 먹었는데 (후략)”두붓국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없다. 일상의 음식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에는 두붓국이 일상적이었다. 성종 초기는 조선 시대 유일하게 원상회의가 있었다. 국왕은 나이가 어렸고, 원로대신들은 성종을 추대한 사람들이었다. 허약한 국왕이었다. 민간에는 여러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전라도 함평의 ‘한꺼번에 밥 한 동이, 두붓국 반 동이를 먹는 귀신’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단순한 두붓국이, 화려한 ‘연포탕’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다음 회에 계속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1-18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된 과메기는 구룡포 과메기

‘과메기’는 관목(貫目), 관목어(貫目魚)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수설’이다. 관목은 ‘눈을 꿰뚫었다’는 뜻이다.‘정설’이 아니라 다수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관목어에서 과메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몇몇 기록에서는 ‘관목’ ‘관목어’를 다르게 설명한다. 빙허각 이 씨(1759~1824년)의 ‘규합총서’에서는 “청어 두 눈이 말갛게 서로 비칠 정도가 되는, 신선한 것을 관목이라고 한다. 청어 2천마리에서 관목 한 마리를 얻을 정도로 귀하다”고 했다. 빙허각 이 씨의 ‘관목’은 싱싱한, 그래서 눈이 맑고 투명한 청어다. 우리가 아는, 말린 청어, 혹은 꽁치가 아니다. 과메기가 관목어는 아니다.오주 이규경(1788~1856년)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관목’은 빙허각 이 씨와 또 다르다.“청어(靑魚)는 비늘 있는 물고기 중 가장 개체 수가 많다. (중략) 정조 무오, 기미년 간(정조 22~23년, 1798~1799년)에 다시 쏟아져 나오니 천해졌다. 조기[石首魚, 석수어] 정도로 크기가 작다. (동해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관동 바다를 따라 내려온다. 한겨울에 영남 울산, 장기(長耆) 등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한양으로 나른다. (중략)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연창(煙窓, 연기가 빠져나가는 창틀)에 매달아 훈제한다. 하여, 이름이 연관목(煙貫目)이다. [관목은 건청어의 속명(俗名)이다.](후략)”‘만물편_충어류_어_용어’관목, 과메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관목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라고 못 박았다. 연관목은 재미있다. 연기 쐰 관목, 훈제 과메기다.오주와 빙허각의 이야기는 명백하게 다르다. 한 사람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 관목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싱싱한 청어를 관목이라고 부른다.두 사람 모두 18, 19세기를 살았던 실학자다. 오주는 물론이거니와 빙허각 이 씨 역시 실학자로는 명문 집안 출신이다. 빙허각은 친정, 시가 모두 실학자 집안이었다. 빙허각은 어린 시동생 풍석 서유구(1764∼1845년)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학풍도 비슷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청어와 꽁치, 어느 것이 과메기인가?청어, 꽁치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부터 “원래 과메기는 청어 말린 것이었는데, 최근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청어 대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청어 과메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는 청어 과메기도 선보이고 있다.청어 과메기가 원조? 일부 사실이나, 이 역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청어 과메기가 원형’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다. 원래 청어나 꽁치 모두 과메기로 만들었다. 날생선 유통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냉장, 냉동 설비가 없었다. 생선을 말리거나 염장(鹽藏)이 보관, 유통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기도 마찬가지. 날 것으로 옮기지 못하고, 말렸다. 굴비다. 명태도 그러하다. 겨울에 많이 잡히니, 추운 바람에 말려서 북어로 만들어 운반했다. 말리는 과정에서 발효, 숙성된다. 곰삭은, 좋은 맛은 덤이다.등 푸른 생선은 쉬 상한다. 말리거나 염장을 해야 한다. 과메기나 젓갈 등이다.청어가 많이 잡힌다. 공물 혹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날것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려서 대도시로 옮겨야 한다. 말린 생선, 곧 과메기다.꽁치도 마찬가지. 과메기로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 청어가 사라지니, 청어 과메기도 사라졌다. 꽁치 과메기만 남았다.꽁치는 일제강점기 이후 많이 잡았다. 일본인들은 꽁치를 ‘추도어(秋刀魚)’ 혹은 ‘삼마(サンマ)’라 하고 귀하게 여긴다. 조선 시대에는 꽁치보다 청어가 대세였다. 청어는 구룡포, 장기 일대에서도 많이 잡았다.왜 구룡포 과메기인가?‘청어관목’ ‘구룡포 과메기’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비슷한 시기, 두 종류의 문서다. 두 문서 모두 1798년(정조 22년) 10월에 작성했다. 200여 년 전이다. 지역도 비슷하다. 영일현(迎日縣)과 경주부(慶州府)다. 영일현(포항 남구 구룡포, 장기 일대)과 경주는 바다와 땅으로 맞닿아 있다. 같은 지역임에도 ‘과메기’에 대한 서술은 전혀 다르다.먼저 ‘일성록’에 남아있는 경주 부윤(慶州 府尹) 오정원(吳鼎源)의 상소다.정조 22년(1798년)10월 11일(전략) 상소의 대략에, (중략) 연읍(沿邑)에 있는 해호(海戶)의 폐단은 교남(嶠南)이 가장 심합니다. 본주(경주)의 경우에는 진상하는 청어관목(靑魚貫目)과 건대구(乾大口) 등의 종류는 본래 토산(土産)이 아니기에 이전부터 인근 고을에서 사서 옮겨 왔고, 전복(全鰒)은 토산으로 채취하여 바쳤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는 몸집이 작고 색깔이 변질되었다는 이유로 감영으로부터 퇴짜를 맞아서, 다른 곳에서 사다가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오며 가며 사들이는 과정에서 해민(海民)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는데, 각종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호마다 수렴하는 돈이 도합 1800냥 남짓이나 됩니다. (후략)교남은 영남이다. 경주부 ‘연읍’ 바닷가면 지금의 감포다. 청어관목과 건대구는 이 지역의 산물이 아니다. 인근 고을에서 사서 공납한다. 전복은 생산된다. 공납하는 곳은 경상좌도 감영이다. 퇴짜를 맞으면 다른 곳 생산품을 구해야 한다. 별도로 드는 돈이 엄청나다. 해민, 바닷가 사람들에게 큰 폐단이다. 생선 종류가 많지 않다.같은 시기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일 현감(迎日縣監) 정만석(鄭晩錫)의 상소다.정조 22년(1798년)10월 13일(전략) 영일현으로 말씀드리자면, 봉진하는 물선(物膳)으로 건광어(乾廣魚), 건대구(乾大口), 반건대구(半乾大口), 전복, 건문어(乾文魚), 관목청어(貫目靑魚), 분곽 등의 종류가 있으나 유독 본현에서 생산되는 전복은 크기가 작고 색이 거칠기 때문에 반드시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 옵니다. 그런데 그 본가(本價)와 노비(路費)를 계산하면 첩(貼)당 소요되는 비용이 33냥이나 되는데, (중략) 좌도 연안의 여러 읍의 상황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분곽은 미역이다. 생선 여러 종류가 토산품이다. 그중 구룡포나 장기 일대를 포함한 영일현의 산물로 관목청어를 든다. 오히려 이 지역은 전복이 말썽이다. 제주에서 생산된 것을 사 온다. 전복 1첩당, 전복값과 경비로 33냥이 든다.같은 시기에 올린 상소문이다. 지금도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의 해산물이 다른 것이 흥미롭다.울산부터 북쪽의 바다까지 청어는 잡혔다. 왜 청어 관목, 과메기는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포항 바닷가에서만 생산되었을까? 경주 부윤 오정원이 밝힌, 과메기를 사 오는 ‘인근 고을’은 울산 혹은 포항 구룡포, 장기 일대였을 것이다.과메기, ‘바람’이 만든다‘구룡포 과메기 생산’은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일 현감 정만석이 밝힌 ‘영일현 생산 해산물’은 건광어, 건대구, 반건대구, 전복, 건문어, 관목청어, 분곽(미역) 등이다. 7가지 중, 전복을 제외하면 모두 말린 해산물이다. 전복은, 생전복도 공물(세금)로 사용했다. 색깔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했다. 모양, 색깔을 따지는 것은 생전복이다. 대구는 건대구와 반건대구로 상세히 나눴다. 굳이 ‘건복(乾鰒)’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생전복이다.경주 부윤 오정원의 상소문 내용은 정반대다. 전복은 생산되는데, 청어관목과 건대구가 문제다. 관목, 과메기와 건대구는 모두 말린 것이다.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 해산물은 전혀 다르다. ‘바람’ 차이다. 구룡포 과메기의 바탕은 ‘바람’이다.과메기의 역사는 깊다. 고려 말, 목은 이색 (1328~1396년)은 “쌀 한 말에 청어가 스무 마리 남짓으로 비싸다”라고 했다. 청어 스무 마리는 한 두름이다. ‘두름’은 ‘冬音(동음)’ 혹은 ‘冬乙音(동을음)으로 표기했다. 조선 중기 무신 정충신(1575~1636년)의 ’만운집‘에는 “곶감 1첩, 관목 4두름[貫目四冬音, 관목사동음]을 보낸다”는 표현이 있다. 곶감 100개와 과메기 80마리다. 과메기는 400년 전에,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귀하게, 그러나 한꺼번에 80마리를 보낼 정도로 흔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28

일제강점기·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됐다

소금 ‘SALT’에서 월급 ‘SALARY’가 파생되었다는 말은 정설이다. 소금을 빼고 인류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노동자에게 반드시 소금과 마늘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에이, 설마?”라고 하겠지만 한반도는 만성적인 소금 부족 지역이었다.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초기에 늘 소금이 부족했다. 1960년대까지 소금은 정부의 전매품(專賣品)이었다. 전매품은, 전매청 등 전매기관이 생산, 유통, 판매를 관리한다. 민간의 사사로운 소금 생산, 판매는 불법이었다.소금이 부족하니 정부가 직접 소금을 관리했다. 담배, 인삼, 소금 등이 예전에는 모두 전매품이었다. 1950년대, 천일염 주요 생산지인 목포시청에는 염업과(鹽業課)가 있었다. 염업과에서는 불법적인 소금의 유통을 철저히 막았다. 소금 불법 유통이 드러나면, 불법 유통 소금 몰수, 벌금 때로는 형사 처분도 했다.동아일보 1962년 3월13일자 2면의 기사 내용이다. 제목은 ‘상인 소금 사지 말라’다.상인 소금 사지말라/전매청서 요망전매청에서는 12일 鹽指定小賣所(염지정소매소)에서 배급하고 있는 소금 이외는 상인들로부터는 소금을 사지 말라고 전국의 수요자에게 요망하였다. 전국 소매소에 나가고 있는 소금은 118만여 가마니에 달하고 있다. 鹽田(염전)은 금년 5월부터 민영화되며 그때까지는 民間保有鹽(민간보유염)이 있을 수 없다.앞서 밝혔듯이, 소금은 전매품이었다. 전매청이 관리했다. 전매청에서 전국의 ‘염지정소매소’를 관리했다. 염지정관리소는, 소금을 취급하는 각 지역의 합법적인 소매점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소금을 공급받아 소비자들에게 골고루 판매했다. 소금이 부족하니, 철저하게 관리하여, 골고루 나눠야 했다. 문제는 탈법적인 사설 판매상들이다. 생산지에서 관리가 되지 않으니 결국 소비지역으로 이런 불법, 탈법 소금들이 흘러 다닌다. ‘사설 소금 판매상’이다.내용 중에 ‘국가, 전매청’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국가가 전매청, 염지정소매소 등을 통하여 118만여 가마니의 소금을 넉넉하게 공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합법적인 소금이 넉넉하니 불법 소금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이해 5월 소금이 민영화된다. 민영화 직전이니 소금 전매 제도가 어수선하게 무너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매청이 나서서, 민영화는 5월부터, 그 이전에는 일체 “민간 보유 소금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소금 부족은 고질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409년) 11월의 기사다.전지(傳旨)를 내려 구언(求言)하기를, (중략) 관중(管仲)은 소금을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그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유안(劉晏)은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에게 무역하여 그 이익이 농사를 권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소금의 이익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염장관(鹽場官)을 설치하여 소금을 구워 무역하니, 예전의 유법(遺法)입니다. 그러나, 포(布)라는 물건은 굶주린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외방의 관염(官鹽)을 모두 쌀로 무역하여 군량(軍糧)을 보충하소서.중국도 만성적인 소금 부족국가였다.윗글에서, 소금과 관련하여 예로 든 사람이 2명이다. 관중(기원전 725?~기원전 645년)은 제나라 관리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이었다. 그가 취한 정책이 ‘소금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나라를 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가 소금을 관리했다. 소금을 팔거나 염세(鹽稅)를 지혜롭게 거두었다.유안(716~780년)은 당나라 현종 등 4명의 황제를 모신 관리. 소금과 쇠를 관리하여 당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유안은 “백성들에게 소금을 팔아서(무역) 그 이익을 크게 취했는데 (그 이익이) 농사의 배나 되었다”고 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지만, 그보다는 소금을 통한 이익이 훨씬 컸다. 글에는 ‘염장관(鹽場官)’이라는 직업도 등장한다. 염전을 관리하는 이다. ‘관염(官鹽)’은 관에 속한 ‘염전(鹽田)’에서 ‘구운’ 소금 혹은 관청에서 관리하는 소금이다. 이때도 민간에서 관리하는 소금 혹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사고파는 소금이 있었다. 사염(私鹽)이다. 사염은 불법 혹은 탈법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소금은 국가, 관청에서 관리했다.소금을 사고파는데 포, 옷감을 사용하지 말고, 쌀을 사용하자고 말한다. 쌀은 먹을 수 있지만, 옷감을 먹고 살 수는 없다. 물물교환이 흔했던 시절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먹지 못하는 옷감보다는 바로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쌀을 원했을 것이다. 쌀이면 군량미로도 가능하다.소금 거래를 두고 많은 일이 벌어진다. 소금값으로 미리 옷감이나 쌀을 주었는데 미처 소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지금으로 치자면, 사기에 해당하는 일이다.한때, “천일염(天日鹽)은 우리 고유의 소금이 아니다”는 주장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고려, 조선 시대 소금은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煮鹽)이었다. 윗글에서 “소금을 굽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의 소금이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이었음을 의미한다. 자염의 ‘자(煮)’는 삶고 끓이는 것이다. 자염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고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와서 농도를 높인 다음, 큰 솥에 넣는다. 장작불을 피워서 솥 안의 소금물을 끓인다. 오랫동안 소금물을 끓이면 수분이 증발, 소금 결정체가 나타난다. 자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선 시대 말까지도 우리는 자염을 먹었다.자염은 만들기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오고, 장작을 구해야 한다. 바닷물을 퍼오는 일도 힘들고, 장작을 구하고 운반하는 일도 힘들었다. 바닷물은 힘만 들이면 퍼올 수 있지만, 장작은 나무를 베고, 쪼개야 한다. 자염을 만드는 과정에 장작이 많이 들어간다. 나무를 구하는 일도 힘들었다.소금물, 장작을 구하면 소금을 구워야 한다.온종일, 장작불을 지펴야 한다. 이 과정도 힘들다. 여름이면 불가에 가기도 힘들다. 소금을 만든 다음, 운반, 관리하는 인원도 필요하다. 소금은 무겁다. 소금을 만든 다음, 배로 옮기고, 배를 운반하고, 다시 창고에 옮기는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특히 한여름, 한겨울에는 더 힘들었다.소금 굽는 일을 하는 이는 염부(鹽夫)다. 염부 일이 힘드니 이 일을 하려는 이들이 드물었다. 사염이 아닌 관염의 경우, 적은 급료를 받고 염부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 드물었다. 계급상으로 하층민인 승려, 관노(官奴)들을 동원한 이유다.자염이 지금의 천일염보다 편리한 점은 단 한 가지다. 지역과 관계없이 한반도의 모든 해안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바닷물, 장작, 가마솥, 염부만 있으면 자염을 만들 수 있었다.다산 정약용도 소금 세금, 염세에 대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남겼다. ‘경세유표 제14권_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_염세’의 영남 부분이다. “영남 해안에서 소금을 만들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영남 남해안 일대에서 많은 자염을 만들었고, 상당수를 영남 내륙에서 운반, 소비했다. 통영에서 김해 앞바다에 이르는 섬, 바닷가에서 많은 소금을 만들었다.영남/“(전략) 동해(東海) 소금은 미치지 못하므로 황수(潢水, 낙동강) 좌우 연변 여러 고을은 모두 남쪽 소금을 먹는다./(중략) 나라 안 소금의 이익은 영남 같은 데가 없다. 명지도(鳴旨島,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만 매년 소금 여러 천만 섬을 구우며, 드디어 낙동포변(洛東浦邊, 경북 상주)에다 별도로 염창(鹽倉)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가 해마다 천만으로 계산하고 해평 고현(海平古縣, 구미시 선산군 해평면)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利]가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영남 감사의 녹봉은 팔도에 첫째이다. 내 생각에는 영남 여러 해변에 관염전(官鹽田) 수십 곳을 두어서(후략)자염은 1907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천일염이 바뀐다. 일제가 일본과 대만에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소금 생산 공장을 세운다. 한반도에는 대만, 중국의 천일염 방식을 들여왔다. 인천의 주안염전이 시작이다. 주안염전의 천일염 제조 방법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충청도 안면도, 전남 무안, 신안, 목포 일대의 염전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되었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21

세종 임금이 서민과 함께 고깃국을 먹었다?

설렁탕에는 근거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늘 따라 다닌다. ‘선농단(先農壇)’에서 ‘설렁탕’이란 이름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이 ‘전설’은 다수설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믿고 있다. 근거는 전혀 없다. ‘주장’도 아닌 ‘전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와전되었다고 믿는다. 왜 일제강점기일까? 그 이전의 기록에는 ‘설렁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설렁탕이 나타난다.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선농단=설렁탕’이 시작되었다.세종대왕과 설렁탕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세종대왕은 예나 지금이나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다. 내용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인데 이야기 얼개는 제법 그럴듯하다.설렁탕은 조선 말기 주막과 더불어 시작된다“세종 임금이 선농단에 제사 모시고, 행사하러 갔다. 하필이면 행사가 끝날 무렵 비가 억수로 왔다. 세종대왕은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큰 가마솥에 끓이게 한 다음, 행사에 참석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선농단에서 먹었기 때문에 설렁탕이라고 한다.”대략 이런 내용이다. 세종대왕이 흉허물 없이 일반 서민들과 고깃국물을 나눠 먹었다는 동화다. 물론, 터무니없다.지금도 마찬가지. 최고 통치자가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최우선으로 취하는 행동은 ‘정위치’다. 대통령이 외부 행사에 참석했는데, 대형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빨리 청와대로 돌아간 다음, 상황을 살피고 조처를 해야 한다.비가 많이 와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면 국왕은 먼저 환궁(還宮)한다.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동행하고, 그중에는 국왕의 안위를 챙기는 군인, 궁중의 인력들도 있었을 터이다. 선농단이 있었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궁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선농단 행사는, 우리가 지금 그리는 것 같이, 소박하고 작은 행사가 아니다. 조선은 농본국가다. 농사가 국가의 바탕이다. 풍년은 ‘국왕의 선정’이다. 풍년이 들면 ‘성군(聖君)’이 된다.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으로 농사가 순조롭지 않으면 국왕은 멍석, 거적을 깔고 하늘에 죄를 고했다. 죄인이다.선농단은 한양도성의 동쪽에 있다, ‘동(東)쪽’은 생명, 생산,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는 ‘동궁(東宮)’이다. 국왕은 궁궐 동쪽의 선농단에서 모든 물산이 풍부해지기를 기원한다. 나라와 백성의 삶이 ‘농업 생산’에 달려 있다. 국왕은 ‘생산의 기본인 농사’를 직접 시범한다. 친경(親耕)이다. 국왕은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준비한다. 술잔을 따르고, 제사상에 드나드는 모든 절차까지 미리 준비한다. 제사상에 드나드는 사람에 맞춰 음악도 꼼꼼히 챙긴다. 이토록 꼼꼼하게 준비하는 행사에 비상 매뉴얼이 없을 리 없다.두 번째는 고깃국물과 설렁탕의 차이에 대한 오해다. 궁중이나 지방 관청에서는 정육(精肉)을 공급받는다. 오늘날 정육점에서는 고기와 더불어 사골 등 뼈도 판매하지만, 원래 정육은 ‘기름이나 뼈를 제거한 고깃덩어리’를 이른다.선농단의 제사다. 날고기라도 정육을 올렸다. 정육을 고면 대갱(大羹), 곰탕이 되고 고기 부산물을 고거나 끓이면 설렁탕이다. 부산물은 뼈와 사골, 잡뼈, 대가리, 기름 부위 등이다. 세종대왕이 촌노, 마을 주민들과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끓여서 나눠 먹었다면 설렁탕이 아니라 곰탕을 먹은 것이다.덧붙일 이야기가 또 있다. 지금과 같이 불, 주방 도구 사용이 자유롭던 시절이 아니다. 백 명 정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대단한 일거리다. 고기를 끓일 가마솥, 장작, 그릇, 수저, 음식을 장만하고 내놓는 인원 등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던 시절이다.예나 지금이나 최고 통치자의 동선에 돌발적인 일이 끼어드는 것은 최악이다. 비 온다고 국왕이 세민(細民)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 그야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다.쇠고기는 있되, 설렁탕은 없었다?왜 조선 초, 중기에는 설렁탕이 없었을까? 왜 조선 후기까지도 설렁탕이 없었을까? 양이 많든 적든 ‘소의 도축’은 있었다. 제사, 손님맞이에 고기는 필요하다. 종묘, 성균관을 비롯한 각종 제사, 외국에서 오는 손님맞이 등이다.조선 초기에도 소의 공식적인 도축은 있었다. 문제는 양이다. 조선 후기에 비하면 양이 적었고 더더욱 불법 도축은 엄히 금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1425년) 2월의 기사다. 제목은 ‘한성부에게 우마를 도살하는 자를 수색 체포하여 엄히 금단하게 하다’이다.(전략) 우마(牛馬)를 도살(盜殺)하는 자는 오로지 이 신백정(新白丁)이기 때문에, 영락(永樂) 9년에 신백정을 조사 색출하여 도성으로부터 3사(舍) 밖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금지법이 무너져, 드디어 성안과 성 밑으로 모두 돌아와 살면서, 한가로운 잡인과 더불어 같이 우마를 훔쳐내어 도살(屠殺)을 자행하니, 그 간악(奸惡)함이 막심하옵니다. 위에 말씀드린 백정과 그 처사를 모두 조사 탐색하여 아울러 해변 각 고을로 옮겨,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수시로 핵문(覈問)하여 원주지로 도망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우마의 고기를 먹는 자에게 다만 태형(笞刑) 50대를 가하니, 사람들이 이를 모두 가볍게 여기고, 〈그 고기가〉 나온 곳을 묻지 않고 공공연하게 사서 먹으므로 도살이 근절되지 않고 있사오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금후부터는 (중략)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이를 수색 체포하여 엄중히 금단(禁斷)을 가하도록 하소서. (후략)같은 시대임에도 글의 ‘신백정’은 다른 글에서는 ‘양척’ ‘화수척’ 등으로 더 험하게 표현했다. ‘새롭다’라는 ‘신’은 이들이 아직 조선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백정은 ‘일반적인 백성’을 의미한다. ‘신백정’은 새로운 백성이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 농사를 짓지 않고 고기를 만지는 이들이다. 도축은 이들의 손에 달렸다.신백정은 ‘3사 밖으로’ 쫓겨냈다. 1사는 30리, 3사는 90리다. 도성 바깥으로 쫓아낸 다음, 철저하게 관리했다. 벌이 너무 약하다. 아예 바닷가 마을로 쫓아내자고 말한다. 조선 시대 내내 바닷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 왜구들의 침략이 잦으니 바닷가 사람들은 전부 내륙으로 옮겼다. 이런 곳에 살게 하자는 것이다. 온전한 국민으로 여기지 않았다.불법 도축한 고기를 사 먹는 이에 대한 벌도 낮지 않다. 태형 50대다. 이것도 법이 너무 무르니 더 심하게 하자는 상소다.민간의 고기 수요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제사나 손님맞이 등에 고기가 필요하면 관청에 신고하고 특정 시기, 특정 양을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불법 도축은 좀 더 많은 고기를, 좀 더 편하게 구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편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도축하고 그 부산물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렁탕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시중(市中), 난전(亂廛)에서 특정 음식을 내놓으려면 음식 재료가 꾸준히, 일정 물량 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조선 전기에는 모든 면에서 설렁탕이 나올 수 없었다.설혹 부산물을 구할 수 있다 해도 ‘시장’ ‘식당’이랄 수 있는 ‘주막’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다. 조선 초기,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시전(市廛) 이외에는 시장이 아예 없었다. 대부분 민간은 물물교환 경제였다.관리들은 역원(驛院)을 이용했고, 사설의 주막은 조선 후기의 이야기다. 고기 부산물도 없고, 주막도 없다. 더더욱 주민들의 이동이 드무니 설렁탕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 먹을 사람이 없었다.개장국[狗醬, 구장]이 흔하던 시절이다. 조선 후기까지 주막의 주요메뉴는 개장국이었다.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설렁탕이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이유다. 조선 후기부터 소의 생산이 늘어난다. 금육이 풀리고 주막이 활발해진다. 청나라 영향으로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여전히 정육, 살코기는 비싸다. 소 부산물로 끓이는 설렁탕이 급작스럽게 시작된다.한 가지 의문. 조선 초, 중기, 쇠고기 부산물은 먹지 않고 버렸을까? 그렇진 않다.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각종 뼈, 소 대가리, 기름 등도 백정 혹은 인근 주민들이 먹었을 것이다. 다만 상업적으로, 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없었다.세종의 선농단, 설렁탕은 전설이자 아름다운 동화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14

소머리곰탕...이미 진한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설렁탕은 서울 지방 음식이다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경성 종로경찰서’에 설렁탕 배달꾼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사건은 ‘외상 설렁탕값’에서 시작되었다. 단골집에 설렁탕 배달을 갔다. 외상값이 밀려 있었다. 수금은 배달꾼 책임이다. 밀린 외상값을 달라고 했다. 설렁탕을 배달 시킨 이는 “나는 이 집 객이다. 지금 주인이 없으니 설렁탕값은 나중에 주인에게 받아라”고 했다. 이 말끝에 배달꾼과 객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시비 끝에 주먹다짐이 오갔다. 둘 다 경찰서 행.조서에 배달꾼의 말이 남아 있다. “내 뒤에는 설렁탕 배달꾼 300명이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 큰 조직이야!”라고 엄포를 놓은 셈이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냉면, 설렁탕 배달이 성했다. 음식 배달꾼들의 노동조합도 있었다. 300명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다. 주로 종로통 부근에 있었으니 설렁탕 배달꾼이 집집이 서너 명은 있었다는 뜻이다.당시 경성에는 설렁탕 집들이 유달리 많았다. 협객 김두한의 회고에도 숱한 설렁탕집들이 등장한다. ‘원 씨 성’을 가진 이는 경남 진주 형평사(衡平社) 간부 출신이다. 형평사는 1920년대 백정을 중심으로,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 운동’ 단체다. 사회주의 조직이다. 신분제도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백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원 씨는 진주에서 형평사 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이주, 종로통에서 설렁탕 집을 열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취학이다. 대부분 학부모가 자신들의 아이가 백정의 아이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을 반대한다. 원 씨는 “신분제도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백정에 대한 인식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항의한다.설렁탕 집은 서울(경성)에서 널리 유행했고, 진주에도 있었다. 설렁탕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하루 소 500마리를 도축했다일제강점기 ‘소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설렁탕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농, 축산물 생산이 늘어났다. 소의 소비가 늘어났고, 쇠고기 소비도 증가한다. 이때 소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 등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는 않다. 일부 맞지만 틀린 표현이다.조선 후기에 이미 소, 쇠고기의 소비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쇠고기 소비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설렁탕의 등장은 오히려 ‘느슨해진 금육(禁肉) 정책’ 덕분이다.조선은, 삼금(三禁)의 나라다. 금육(禁肉), 금송(禁松), 금주(禁酒)다. “쇠고기 먹지 마라, 소나무 베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가 국가의 주요 정책이다.모두 농사, 식량 확보와 연관이 깊다. 소나무를 베면 홍수가 난다. 술을 많이 마시면 결국 곡식이 허비된다. 곡식은 농본 국가의 주요 어젠다다. 소도 마찬가지. 우역(牛疫)이 돌면 정부는 “성한 소를 사고 지역으로 보내서 농사에 지장이 없게” 했다. 함경도의 멀쩡한 소를 수백, 수천 마리 삼남지역으로 보낸다. 심한 경우,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다. 쇠고기를 먹는 일은 농사를 망치는 일이었다. 쇠고기 낭비를 철저하게 막았다. 문제는 민간이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쇠고기 먹는 일을 즐겼다. 정부에서는 강력하게 막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쇠고기를 즐겼다. 민간이, 반가(班家) 혹은 권력 계급이니 막기가 힘들었다.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_호전6조_권농’의 기사다. 제목은 ‘농사는 소로 짓는 것이니 진실로 농사를 권장하려 한다면 마땅히 도살을 경계하고 목축을 권해야 할 것이다’이다.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중략) 중국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한다. 북경 안에는 돼지고기 푸줏간이 72개소, 양고기 푸줏간이 70개소가 있어서 (중략) 고기를 이같이 많이 먹는데도 쇠고기 푸줏간은 오직 2개소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잡는 소를 계산하면 500마리가 된다. 나라의 제향(祭享) 때나 호상(犒賞) 때에 잡는 것, 또는 반촌(泮村)과 서울 5부(五部) 안 24개소의 푸줏간에서 잡는 것, 게다가 전국 300여 고을마다 관에서 반드시 푸줏간을 열게 한다. 작은 고을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지는 않으나 큰 고을에서 겹쳐 잡는 것으로 상쇄되고, 또 서울과 지방에서는 혼례와 잔치, 장례, 향사(鄕射) 때 그리고 법을 어기고 밀도살하는 것을 대강 헤아려 보아도 그 수가 이미 500마리 정도가 된다. (후략)하루 500마리를 도축한다. 셈법도 정확하다. 전국 300개의 지방 관청마다 푸줏간(懸房, 현방)이 있다. 합법적인 도축 기관이다. 작은 곳에서는 소를 잡지 않는 날도 있지만, 큰 곳에서는 하루 몇 마리도 도축한다. 어림잡아 하루 한 마리씩 도축한다고 셈했다.서울이 문제다. 서울은 5부로 나누었다. 도성 안이다. 이곳에 푸줏간이 24개소. 여기서 200마리쯤 도축한다. 합계 500마리. 박제가나 정약용 모두 한양에 살았으니 한양의 도축 숫자는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루 500마리 도축’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일이다. 망국의 시기보다 100년쯤 앞선다. 망국 100년 전에 이미 쇠고기 생산, 소비는 상당했다. 일제강점기 쇠고기 생산, 소비가 늘었고 설렁탕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틀렸다.금육이 무너지니, 설렁탕이 생겼다?쇠고기 생산, 소비가 늘고 설렁탕이 유행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나라가 무너지면서, ‘금육’ 정책도 무너졌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면서 금육 정책도 무너졌다. 정조 사후(1800년)부터 조선이 공식적으로 망하는 1910년의 ‘한일늑약(韓日勒約)까지 110년 동안 조선의 사회 체재는 서서히 허물어진다. 쇠고기 식육을 강하게 막던 정부 정책도 힘을 잃는다.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민간의 쇠고기 소비가 얼마간 늘어났다.서울 ‘이문설렁탕’은 1904년 무렵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1897-1910년) 시기다. 금육 정책은 완전히 무너졌다. 민간의 쇠고기 소비가 자유로워지고, 더불어 상업행위도 활발해진다. 국가의 공식적인 시전(市廛)도 무너졌다. 길거리 사설 식당은 주막이다. 주막에서는 주로 개장국을 내놓았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근대화된 식당들이 나타난다. 일제는 세금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가게 창업 신고’를 장려했다.조선 말기에도 쇠고기 소비가 있었다. 소의 부산물인 뼈, 대가리, 꼬리 등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탕, 국[羹, 갱]으로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음식을 이르는 정식 이름이 없었을 뿐이다. 1776년(정조 1년)의 기록물인 ‘명의록’에는 개장국 집이 등장한다.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음식’이 아니다. 쇠고기 소비가 비공식적이면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음식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공공연히 팔기는 힘들다. 정조 시절에도 개장국이 최선이었다. 설혹 쇠고기 부산물로 음식을 만들더라도 ‘구장(狗醬, 개장국)’같은 이름을 쓰지 않았다.금육 정책과 공식적인 시장, 시전이 무너진다. 주막과 사설 식당이 활성화된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한양도성에서 설렁탕은 개장국을 대신하는 음식으로 등장한다.설렁탕과 육개장서울 ‘이문설렁탕’이 생기고 경북의 중심도시 대구에서 육개장이 시작된다. 모두 개장국 대용품들이다. 서울의 경우, 주막의 개장국이 식당의 설렁탕으로 대체된 된 것이다.해방 후에는 변형된 설렁탕도 나타난다.포항 죽도시장에는 ‘곰탕집 골목’이 있다. 소머리곰탕이다. 영천 공설시장 안에는 몇몇 곰탕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기 곤 전통 곰탕도 있지만, 내장, 소머리 등을 곤 변형 곰탕도 많다. 경북, 대구에는 설렁탕 전문점은 귀하다. 지방도시인 전남 나주에도 곰탕 노포들이 많다. 나주의 곰탕은 서울 ‘하동관’ 곰탕과 닮았다. 맑은, 고기 곤 국물이다. 포항 죽도시장 ‘장기식당’의 곰탕은 소머리 곰탕이다. 정확하게 짚자면, 곰탕이 아니라 설렁탕이다. 언론인 고 홍승면 씨는 수필 ‘백미백상’에서 “설렁탕 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장기식당’의 곰탕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 대가리 중심의 설렁탕이다. 소 대가리 뼈나 사골, 잡골 등으로 국물을 내고, 머릿고기 등을 넣은 것은 설렁탕이다.서울을 제외한 지방 특히 경북 지방에는 설렁탕 전문점이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머리곰탕 등의 이름으로 이미 진한 설렁탕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07

배고픈 시대 호박은 양식이 되어 주었다

호박, 억울하다. 호박은 좋은 농작물이자 식재료다. 가난한 농가의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 지금도 호박죽은 ‘비교적 귀한’ 대접을 받는다. 정작, 호박의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못생긴 사람을, 특히 여자의 경우, 호박에 비교한다. ‘호박’이라고 부르는데 좋아하는 이는 없다.호박은 수박과 경쟁한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박은 끼닛거리가 아니나, 호박은 양식이 된다. 덜 익은 수박은 먹을 수 없지만, 애호박은 식량이 된다. 전, 된장찌개에 쓴다. 우리도 수박을 귀하게 여긴다. ‘그까짓 호박’이라고, 호박은 낮춘다.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1801년 봄, 장기현(지금의 경북 포항 장기마을)으로 유배를 왔다. 220일. 다산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봄, 여름, 가을을 겪었다. 일곱 달 동안 장기의 바닷가 살림살이를 봤다. 글을 남겼다.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에 호박과 수박이 나타난다(다산시문집 제4권_시).(전략) 부슬부슬 새벽 비가 담배 심기 알맞기에/담배 모종 옮겨다가 울 밑에 심는다네/올봄에는 영양에서 가꾸는 법 따로 배워(今春別學英陽法)/금사처럼 만들어 팔아 그로 일 년 지내야지(要販金絲度一年)/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밤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평생토록 수박[西瓜]을 심지 않는 까닭은/아전놈[官奴]들 트집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후략).몇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박은 심되, 수박은 심지 않는다. 왜 그럴까? 호박은 트집을 잡지 않는다. 심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수박은 관(官)에서 시비를 건다. 수박은 과세대상이다. 관에서 트집을 잡는 이유는 간단하다. 호박은 농가 자체 소비지만, 수박은 환금작물이다. 내다 판다. 돈을 버는 작물은 세금을 내야 한다.시의 앞부분에 ‘담배 농사’ 이야기가 있다. 영양현(경북 영양)이 담배 농사를 잘 짓는다. 영양의 담배 농사 비법을 배워서 좋은 담배(금사)를 만든 다음, 그걸 내다 팔고 싶다. 요량대로라면, 일 년 동안 쓸 돈을 마련할 수 있다. 담배나 수박 모두 환금작물이었다. 1801년 이전부터 이미 수박은 호박보다 귀하신 몸이었다.1654년을 시작으로 대동법이 각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쌀이 세금의 기준이 되었다. 복잡했던 세금이 비교적 간편하게 정리되었다. 1791년(정조 15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시행되었다. 민간의 상행위가 상당히 자유로워졌다.다산이 장기현으로 귀양을 온 시기는 신해통공 10년 후다. 여전히 세민(細民)들은 관청의 세금과 탐학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다산 정약용은 다른 시에서도 호박의 유용함을 이야기한다. ‘다산시문집_제1권_시’의 내용. 제목은 ‘호박을 넋두리한다[南瓜歎, 남과탄]’이다, 남과(南瓜)는 호박이다.궂은비 열흘 만에 여기저기 길 끊기고/성 안에도 시골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져/태학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와/문 안에 들어서자 시끌시끌 야단법석/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닛거리 떨어져서/호박으로 죽을 쑤어 허기진 배 채웠는데/어린 호박 다 땄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늦게 핀 꽃 지지 않아 열매 아직 안 맺었네/항아리만큼 커다란 옆집 밭의 호박 보고/계집종이 남몰래 그걸 훔쳐 가져와서/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누가 네게 훔치랬냐 회초리 꾸중 호되네/어허 죄 없는 아이, 이제 그만 화를 푸소/이 호박 나 먹을 테니 더는 말을 말고/밭 주인에게 떳떳이 사실대로 얘기하소(후략)마치 그림 같다. 다산은 1784~1789년 사이,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이 시의 시기는 1785년 무렵이다. 다산은 ‘학생’ 신분이었다. 봉급을 받는 벼슬아치가 아니다. 성안이나 성 밖 시골 모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졌다. 굶는다. 다산의 집도 마찬가지다. 끼닛거리가 없으니 호박죽을 먹는다. 아마 늦여름,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애호박도 다 따버렸고, 늦게 핀 꽃은 아직 지지 않아 열매가 달리지 않았다. 계집종이 옆집 호박을 훔쳐 왔다. 호박은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호박, 흔하다, 그래서 천하다?창강 김택영(1850~1927년)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학자, 우국지사다. ‘소호당시집_제3권_을유고’에 호박을 소재로 한 시가 남아있다. 제목은, 공교롭게도, 다산의 시와 같다. ‘남과탄(南瓜歎)’, 1885년(고종 22년) 지은 작품이다. 다산의 ‘남과탄’과는 딱 100년의 차이가 난다. 100년 뒤에도 호박은 여전히 구황작물이었다.(전략) 올해 심은 호박은 씨가 좋지 못하여/헛되게도 많은 꽃들, 벌들만 길렀네/아침 내내 따고 따도 광주리 못 채우고/돌아와 처자식 대하니 면목이 없네/산중이라 고기라곤 맛볼 수 없고/어린 이들이나 먹을 호박뿐/온 가족의 실망 이미 매우 탄식스러운데/좋은 손님 방문하면 장차 어쩌랴 (후략)호박은 언제 한반도에 전래되었을까?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년)은 호박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성호는 스스로 호박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 성호는, “호박은 1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대략 17세기 전반쯤이다. ‘성호사설_제6권_만물문’ 중의 내용이다.호남 지방에는 소마(蘇麻)가 없고 다만 수유(茱萸)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게 된다. 남과(南瓜)라는 호박이 난 지도 또한 거의 백 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호남 지방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후략)소마(蘇摩)는 들깨, 수유(茱萸)는 산수유 열매다.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 등으로 사용했다. ‘남과라는 호박이 난 지도 1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다. 호박은 임진왜란 이후 들여온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당시 호남에는 호박 농사가 드물었다.호박, 16세기에도 있었다호박의 전래는, 성호의 주장보다는, 조금 빠를 가능성도 있다. 교산 허균(1569~1618년)의 ‘성소부부고_한정록_제16권_치농’에 호박 기르는 법이 등장한다. ‘한정록’은 1610년에 썼다가, 교산이 역모죄로 죽던 해인 1618년 재편집한 것이다. 17세기 초반이다.동과(東瓜), 남과(南瓜)먼저 젖은 볏짚재[稻草灰]를 부드러운 진흙과 뒤섞어 땅 위에 깔고 호미로 둑을 짓고서 3월에 하종하되, 그 씨앗의 거리는 서로 1치쯤 떨어지게 심은 다음 젖은 재[灰]를 체로 쳐서 덮어주고는 물을 주고 또 거름물을 주기도 한다. (중략) 덩굴이 길게 뻗으면 시렁을 매어 끌어올린다. 이는 오이 심는 법과 모두 같다.동과(東瓜)는 동과(冬瓜)로 ‘동아’다. 크고 긴 열매로 껍질은 박 같다. 지금은 보기 힘들다. 동아나 남과(호박)을 기르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호박은 북쪽으로는 중국, 남방으로는 일본 큐슈, 오키나와, 동남아, 아라비아 등 다양한 루트로 들어왔을 것이다. 성호 이익의 또 다른 기록이다(성호사설 제5권_만물문_남과).채소 중에 호과(胡瓜)란 것이 있는데 빛은 푸르고 생긴 모양은 둥글며 무르익으면 빛이 누르게 된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고 잎은 박[瓠]과 같으며 꽃은 누르고 맛은 약간 달콤하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중략)/요즘은 사대부(士大夫)들에도 이 호과를 심는 이가 많은데, 어떤 이는 이르기를, “‘본초강목’에 남과(南瓜)라고 했다” 한다/(중략) 남과라는 것도 있고 또 왜과(矮瓜)라는 따위도 있는데, 이 왜과란 것도 남과와 흡사하다. 빛깔은 한껏 누르고 생긴 모양은 둥그스름하고 길며 맛은 단 편이다. 지금 시골에 혹 심는 이가 있는데 이름을 당호과(唐胡瓜)라고도 한다. 남과에 비교하면 조금 잘기 때문에 심는 자가 많지 않으니, 이는 대개 서북 지방에서 들어온 것인 듯하다.호박(남과)은 호과와 닮았다. 남과와 비슷한 왜과도 있다. 왜과는 ‘왜호과’라고도 한다. ‘호(胡)’는 아라비아, 중동이다. 당(唐)은 중국이다. 당호과는 아라비아,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호박은, 호박죽처럼 뒤섞여 들어왔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30

곰탕은 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것이 원칙이다

깊고 무겁다. 곰탕 이야기다.곰탕은 ‘大羹(대갱)’이다. ‘큰 국물’ ‘바탕이 되는 국물’이다. 제사상에 올랐다. 지금도 ‘탕국’으로 제사상에 오른다. 역사도 깊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음식이고 이름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제사상에 올렸고 지금도 곰탕은 저잣거리 인기 아이템 중 하나다. 정작 중국에서는 사라졌다.‘조선왕조실록_세종실록_세종오례_길례_찬실도설’에서 전하는 ‘대갱’에 대한 설명이다.(전략) “대갱(大羹)은 육즙(肉汁)뿐이요, 양념[鹽梅]이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저민 날고기뿐이니, 다만 그 고기를 삶아서 그 즙만 마시고, 양념을 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뒤 세상 사람이 제사 지낼 적에는 이미 옛날의 제도를 존중하는 까닭으로, 다만 육즙만 담아 놓고 이를 대갱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후략)양념[鹽梅, 염매]은 소금과 매실이다. “염매가 없다”는 것은 양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양념하지 않은 고깃국물이 바로 대갱이고 오늘날 곰탕이다. 양념은 음식 맛을 도드라지게 한다. 왜 양념하지 않은 것을 최고로 쳤을까? 왜 대갱, 곰탕을 으뜸으로 여겼을까?‘예기 교특생(禮記_郊特牲)’에 “대갱을 조미하지 않는 것은, 그 바탕[質, 질]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고기를 곤 국물 맛이 바로 대갱의 바탕이다. 바탕 맛, 기본 맛이다. 고깃국물의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하여 조미하지 않았다. ‘본(本)’은 기본이다. ‘질(質)’은 사물의 근본이다. 질박(質朴), 소박함이다. 본질을 지키는 음식이 바로 곰탕, 대갱이다.고기는, 상상 이상으로, 귀했다.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도축하면, 고기를 연기로 훈연하거나, 삶아서 보관했다. 육포(肉脯) 혹은 수육[熟肉]이다. 삶으면 국물이 생긴다. 이 국물이 대갱이다.조선 시대 기록에는 ‘육즙(肉汁)’이 자주 등장한다. 대갱, 육즙, 곰탕은 같다. 굳이 육즙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대갱은 무겁고 깊다. 국왕이라 해도 ‘대갱을 먹는다’고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대갱 대신 육즙이라고 표현했다.세종 4년(1422년), 상왕 태종이 돌아가셨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 11월의 기록이다. 제목은 “임금이 허손병이 있어 대신들이 육선 들기를 청하다”이다.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중략)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이원,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중략) 옛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써 구미(口味)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후략)허손병은 오늘날의 당뇨다. 이해 태종이 돌아가셨다. 아버지, 스승이며 권력을 승계해준 이다. 당연히 소박한 음식, 소선(素膳)이다. 고기, 대갱(곰탕), 육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게다가 효자다. 거의 곡기를 끊다시피 한다.세종은 고기 마니아다. 육선(肉膳),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던 이다. 몸이 수척해지고, 드디어 당뇨까지 나타난다. 육조에서 고기반찬을 권하지만, 세종은 움직이지 않는다. 육조의 당상관들과 대간까지 나서서 국왕에게 음식을 권한다. 그중 ‘육즙’이 나타난다. 신하들은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는 옛 가르침을 꺼낸다. 그까짓 고깃국물이라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고기 대신 고깃국물[육즙]이라도 중하게 여겼다.고기와 육즙을 피했던 세종이 거꾸로 신하의 육즙을 챙긴 경우도 잦았다.세종 22년(1440년) 1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제목은 “최칠 중에 있는 전 참판 권맹손에게 육식을 권하다”이다. ‘최질’은 상중에 입는 옷으로, ‘최질 중’은 상중이다.(전략) 경상도 관찰사에게 전지하기를, “이제 들으니, 전 참판 권맹손이 최질(衰絰) 중에 있는데 오랜 병으로 몸이 수척하여서 소식(素食)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경솔하게 권육(勸肉)할 수는 없다. 이제 의원 조흥주의 말을 들으니, 만약 과연 몸이 수척하다면 반드시 육즙(肉汁)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경이 전지(傳旨)라고 칭하고 육식하도록 권유해 보라.”역시 상중이고, 소식(素食)이다. 권육은 고기를 권하는 것이다. 아무리 몸이 수척해도 고기를 함부로 권할 수는 없다. ‘의원의 의견을 참고하여’ 육즙을 권한다. 육즙도 육식이다. 국왕이나 신하 모두 고기 먹는 일, 육즙 마시는 일이 이토록 자유롭지 않았다.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은 죄인이다. 삼베옷은 죄인의 옷이다. 음식도 마찬가지. 소식이다. 고기는 죄인의 음식이 아니다. 먼저 금하는 것이 고기, 육즙, 대갱, 곰탕이다.곰탕, 저잣거리로 나오다일제강점기, 대갱, 곰탕은 크게 바뀐다.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곰탕집은 서울 명동의 ‘하동관’이다. 곰탕, 대갱이 저잣거리의 음식으로 나온 것이다. 수하동에 ‘하동관’을 세운 이는 고 김용택 씨다. 김 씨는 1938년 무렵, 청계천에서 인쇄소를 경영했다. 인쇄소는 당시 ‘문화 사업’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시작으로, 중국 대륙을 침략하던 시기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김 씨는, 먹고 살고 자식 공부시키기 위하여 곰탕집을 차린다. 가족들 특히 아들, 딸의 반대가 극심했다. 양과자 점이나 빵집이라면 모를까, 곰탕집은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는 것이 아들, 딸들의 반대 이유였다. 김용택 씨는 “아들, 딸들이 등교한 후 오전 11시부터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인 오후 3시까지 곰탕집 문을 연다” 그리고, “자녀들이 학업을 마친 후에는 가게를 접는다”고 약속한 후, ‘하동관’을 열었다. 약속대로, 자녀들의 학업이 끝난 1963년 문을 닫았고, 곧 친구에게 ‘하동관’을 물려줬다. 곰탕은 반가의 음식, 설렁탕은 저잣거리의 음식이다. 인쇄업을 했던 김용택 씨가 곰탕집을 선택한 이유다.‘하동관’의 홈페이지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전략) 서울 북촌 할머니 3대가 탄생시킨 한국 전통 탕반(湯飯) 문화의 절정 (중략) 하동관 1대 손맛 류창희 할머니(1939년~1963년) (중략) 북촌마을의 반갓집 딸로 태어나 북촌 양반집과 궁중음식에 해박하고 (중략) 하동관 2대 손맛 홍창록 할머니(1964년~1967년) (중략) 류창희 할머니의 뒤를 이어 1964년부터 하동관을 이어받은 홍창록 할머니 또한 북촌 토박이.키워드는 ‘북촌’ ‘반가’ ‘양반’ ‘궁중’ 등이다. 북촌은 경복궁 옆, 오늘날의 삼청동, 가회동 일대다. 고위직 반가, 양반들의 거처였다. 곰탕이 어떤 음식인지 보여준다. 곰탕은, 반가의 음식이다. 오랫동안 제사상에, 손님맞이에 사용했던 음식이다. 제사상에는 대갱으로, 일상에서는 육즙으로 먹었던 음식이다. 이 음식이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대갱, 곰탕은 정육(精肉)에서 시작된다. 정육은 뼈나 기름 등을 덜어낸 살코기다. 도축 후, 궁궐과 반가에 공납(貢納)한 것이다. 지방도 마찬가지. 관청, 현직관리, 지역 반가에서 정육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법도에 따라 고기, 육즙, 대갱을 먹었다. 오늘날 중소도시인 전남 나주에 곰탕 전문점이 발달한 이유다. 나주는 목사(牧使)가 근무한 대도시였다.곰탕의 ‘곰’은 ‘고음’이다. 동사 ‘고다’의 명사형이다. ‘푹 곤 것’이 곰, 고음이다. 고음은 ‘膏飮’으로도 표기한다. 곰탕은, 푹 고아서 진액을 뽑아낸 것이다. ‘고(膏)’는 ‘살찐’ ‘기름진’이라는 뜻과 식물, 과일을 곤, 진액이라는 뜻도 있다.곰탕은 진화한다.소 대가리를 푹 곤다. ‘소머리곰탕’이다. 고기는 정육이 아니다. 소 대가리의 살코기다. 소 대가리는 곰탕의 재료가 아니다. 설렁탕의 재료다. ‘사골(四骨)’은 소, 돼지 등의 네 다리다. 사골곰탕은, 소의 네 다리를 푹 고았다는 뜻이다. 고기는 다리 살과 연골조직 등이다. 사골 역시 곰탕의 재료는 아니다. 설렁탕 재료다.대갱, 육즙, 곰탕은 맑다. 소머리곰탕이나 사골곰탕은 유백색이다. 곰탕은 설렁탕 재료와 뒤섞인다.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곰탕의 변화, 진화다.포항 죽도시장의 ‘장기식당’ 곰탕도 유백색이다. 맛있다. 고기도 푸짐하다. 소머리곰탕이다. 곰탕이든 설렁탕이든 따질 바는 아니다. 맛있고, 푸짐한, 변화, 진화한 곰탕이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23

우리가 알고 있는 주막은 근래 100년 사이의 일이다

주막은 사라졌다. 바쁜 세상이다. 사라진 것은, 아름답지만, 잊힌다.사극 드라마에는 늘 주막이 등장한다. 주막은 생생하다. 초가집 마당 한가운데 평상(平床)이 있다. 건장한 사내 몇몇이 술잔을 기울인다. 장국밥을 먹는다. 멀찌막이 떨어진 곳에 수상한 남자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인다. 포졸도 고정배역이다. 활극도 펼쳐진다. 미행도 한다. 주모는 트레머리다. 주모를 흠모하는 중노미도 있다. 가끔 봉놋방의 나그네들도 등장한다.불행하게도 엉터리다. 드라마의 주막은 드라마일 뿐이다.주막은 ‘酒幕’이다. 주점(酒店)과 다르다. ‘술 파는 막(幕)’이다. ‘막’은 집이 아니다. 천막 등으로 덮은 ‘임시 가 건물’이다. 건물이라고 부르기 옹색하다. 비를 긋거나 햇빛을 가릴 정도의 천 쪼가리를 덮었다. ‘임시’다. 드라마의 주막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이후의 모습이다. 초가집, 주모, 평상, 봉놋방, 포졸은 상상이다.잠도 자는 공간을 왜 ‘술 파는’ 주막이라고 불렀을까? 주막의 시작이 ‘간단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임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막은, 간단하게 목을 축이는 임시 공간이었다. ‘임시, 탈법, 불법적으로’ 세운 것이다. 주막은, 끊임없이 변했다. 허술한, 겨우 하늘을 가린 ‘가 건물’ 형태에서 잠도 자고, 술과 밥을 내놓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술, 밥, 잠이 모두 가능한, 우리가 그리는, 주막은 근래 100년 사이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역원(驛院), 역참(驛站), 참(站), 점(店) 주점(酒店), 탄막(炭幕), 주막(酒幕)이 뒤섞여 있었다.역원, 역참, 참, 주점은 공식 합법의 공간이다. 탄막, 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조선은 역원(驛院)의 나라다조선 시대, 움직이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관리들이다. 이들을 위한 장소가 역과 원, 역원이다. 각 지역 도로에 촘촘히 역과 원을 만들고, 공식적인 이동 시에는 반드시 역원을 이용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이동 인구가 한정적이었다. 공무로 출장을 가는 관리, 지방으로 부임하거나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관리 정도가 이동 인구의 대부분이었다. 농경사회다. 상업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인근 동리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더러 움직이는 사람들도 ‘아는 집’에서 하룻밤 기식(寄食)했다.민간의 여행자는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수험생 정도였다. ‘과거 수험생’들도 민간의 집에서 유숙했다. 동문수학한 이들도 있었고, 혈연, 지연으로 얽힌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동리에서 가장 번듯한 반가나 더러는 깊은 산속 외딴집에서 묵기도 했다. 드라마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는 깊은 산속에서 아리따운 처녀로 변신한 여우를 만나기도 했다.‘역’은 잠을 자지 않는 곳이다. 전해야 할 문서를 챙기거나 물을 마시고,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다. 파발마로 급하게 달리는 관리들이 이용했다. 서울 ‘양재역’은 전철역에서 시작된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이미 ‘양재역’이 있었다. ‘역원제도’의 ‘역’이다. 양재역 부근에 말죽거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말은 기차가 아니다. 때때로 갈아야 한다. 양재역은 말을 갈아탔던 ‘역’이다.1795년(정조 19년) 가을, 다산 정약용은 외직인 ‘금정찰방’으로 부임한다. 찰방은 역에 근무하는 종6품이었다. 역에는 9품직의 역승도 있었고, 역을 운영하는 역원(驛員)들도 있었다. 국가는 역원(驛院)에 농사지을 땅[驛田, 역전]과 노비 등을 제공했다. 역원의 책임자는 땅, 노비, 책임 구역의 도로 등을 관리했다. 역원에 들르는 관리들에게 음식, 잠자리, 말 등을 제공했다. 마패는 역원에서 말을 제공받을 때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관리, 암행어사는 역원에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구했다.조선 후기, 주막이 역원을 대신하다‘원’은 숙박, 식사가 가능한 공간이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잠을 재웠다. ‘원’은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다. 근무자는 주모가 아니다. 관리들이 정식으로 운영했다. 한때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원이 있었다. 원은 30리마다 하나씩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조치원’ ‘이태원’ ‘사리원’ ‘인덕원’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역원제도의 ‘원’이다.공식적인 역원과 달리 민간에서는 탄막(炭幕), 주막(酒幕) 등이 발달한다. 숙종 조 이후 잉여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한다. 잉여생산물은 민간의 ‘탈법적인’ 상업행위로 이어진다. 움직이는 사람, 상인들이 생긴다. 이들이 주막을 이용한다. 민간의 ‘탈법적인 주막’도 늘어난다.‘조선왕조실록’ 영조 4년(1728년) 4월 2일의 기사다.“경기감사(京畿監司) 이정제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중략) 지금의 이른바 주막[今之所謂酒幕]은 곧 옛날의 관정[卽古之關亭也]으로서, 적도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賊徒夜宿酒幕]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형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략)”영조 4년 3월 15일(음력),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소론 준론계(강경파)의 반란이다. 청주 이인좌를 중심으로 반란이 시작되었고 영남과 호남 일부까지 난에 합세했다.반란 초기, 한양으로 건너오는 배도 철저하게 검문하고 긴요하지 않은 경우가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글 중에 “적도들이 밤에는 주막에서 잠을 잔다”라는 표현이 있다. 18세기 초반, 이미 ‘잠자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을 ‘예전의 관정’이라고 설명한 것은, 주막이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잠자는 곳’의 역사는 짧지 않다. 미암 유희춘(1513~1577년)의 ‘미암집’은 선조 7년(1574년) 무렵에도 잠자는 곳, ‘탄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막이 아니다.“(전략) (유희춘이) 또 진술하기를, “근래에 도둑이 점점 불어나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하고, 서울 안에도 저녁이나 밤사이에 노략질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후략)”이글에서 ‘나그네들이 숙박하는 곳’은 탄막이다. 탄막은 숯이나 건초, 나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에 이미 탄막은 주막이 된다. 주모, 평상, 국밥은 없어도 잠자는 곳이었다.탄막은 오랫동안 나타난다. 200여 년 후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 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관의 주장은 다르다. 남편 이귀복이 범인 두 명을 탄막에 재우면서, 숨겨주었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도 탄막이 있었다. 탄막에서는 아침밥을 팔았고, 잠도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주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조이는 주모와 닮았다.주막과 탄막은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주막과 탄막,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의 ‘청장관전서_62권_서해여언’의 내용이다.(전략) 점(店)은 주막(酒幕)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그대로 탄막(炭幕)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관문(官文)까지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후략)‘관문’은 관청 문서다. 청장관의 주장은, 주막이 술막으로 그리고 발음이 비슷한 숯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숯’은 곧 ‘탄(炭)’이니 탄막이 되고 결국 주막이 탄막이다.‘점’이 주막은 아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이 생겼다. 공식적인 주점이다. 사설 주막과는 다르다. 중국에도 한나라 이후, 독점, 공식적인 술 파는 제도가 있었다. 술을 전매하는 ‘각고(榷酤)’다. 주막은 사설, 탈법적 존재다. 공식적으로 금주령이 잦았던 조선이다. 민간의 주막에서 술을 내놓고 팔기는 힘들었다.조선 시대 기록에는 주점, 주막, 탄막, 참, 역원, 역참 등이 어수선하게 나타난다. 조선 말기, 국가 관리의 역원은 서서히 무너진다. 부패와 재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주막, 주막의 변형이 역원을 대신한다. 가볍게 목을 축이던 탈법 공간이 잠, 밥, 술이 모두 가능한 주막으로 발전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16

송이를 귀히 여겼지만다른 버섯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일 능이, 이 표고, 삼 송이”라는 표현이 있다. 능이버섯, 표고버섯, 송이버섯 순서라는 뜻이다. 엉터리다. 근거는 없다. 언제 누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 기록에도 이런 문구는 없다. 표고버섯, 석이, 목이버섯, 싸리버섯[鳥足茸, 오족이]은 기록에 있지만, 능이버섯은 없다. 능이는 2000년 이후 나타난다.능이나 표고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순서매김은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버섯뿐만 아니라 음식물, 식재료의 순서를 정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식은 진귀한 식재료를 구하지 않는다. 모든 식재료를 귀하게 여긴다. 이파리부터 뿌리까지 모두 귀하게 여긴다. 한식의 길이다. 생선의 부위를 세밀하게 가르고 그 부위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은 일본 음식의 방식이다. 버섯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은 송이버섯을 귀하게 여기긴 했지만 다른 버섯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버섯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터무니가 없다.조선 시대 문신 계곡 장유의 시 ‘적상산의 승려에게 지어준 시’에 버섯이 나타난다.부처님 귀 모양의 향긋한 버섯/고목나무 등걸에서 커 나왔는데/따다가 솥에 넣고 우려낸 그 맛/연하고 부드럽기 고기보다 훨씬 낫네(계곡 선생집_25권)‘부처님 귀 모양의 향긋한 버섯’이 정확히 어떤 버섯인지는 알 수가 없다. 송이버섯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고목 등걸에서 컸다고 했다. 송이버섯은 나뭇등걸에서 자라지 않는다. ‘적상산 승려에게 주는 시’라고 했다. 적상산은 전북 무주의 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송이버섯의 대량 산지는 아니다. 계곡은 ‘연하고 부드럽기가 고기보다 낫다’고 추켜세웠다. 송이버섯 향이 좋긴 하지만, 가장 으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른 버섯도 좋다. 다만 송이버섯은 점잖은 솔 향기가 나니 좋다는 정도였다.송이버섯을 귀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향’ 때문이었다. ‘송이(松茸)’는 ‘소나무 버섯’이다. 소나무의 향기를 지닌다.한반도에 가장 흔한 나무는 소나무다. 소나무는 한겨울에도 ‘독야청청’한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민족 기개다. ‘송(松)’은 ‘목(木)+공(公)’이다. 나무 중의 귀족이요, 으뜸이다. 한반도에는 흔하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의 향과 친숙하다. 유럽인들은 송이버섯을 피한다. ‘테라핀 냄새’가 난다. 소나무의 독특한 향을 싫어한다. 송이버섯도 피한다. 우리는 다르다. 귀하지만 흔한 나무, 소나무 아래서 자라고, 소나무 향을 고스란히 지녔다. 송이버섯은 귀하다. 송이버섯은 죽은 나무, 썩은 나무에 기생하지 않는다. 대부분 버섯은 죽은 나무에 기생하거나, 부패한 흙에서 자란다. 더러 생나무에서 자라는 버섯도 있지만, 송이버섯처럼 아예 맑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버섯은 귀하다. 송이버섯은 거름이 강한 땅에서도 자라지 않는다. 송이버섯을 귀하게 여긴 또 다른 이유다.음식, 식재료는 대부분 맛으로 가른다. ‘맛있다’ ‘맛없다’로 가른다. 송이버섯은 맛이 아니라 향이다. 고려의 문신 이규보(1168~1241년)가 송이버섯에 대해 남긴 시가 있다. 송이버섯을 정확히 설명한다. 제목은 ‘송이버섯을 먹다’이다.버섯은 썩은 땅에서 나거나/아니면 나무에서 나기도 한다/모두가 썩은 데서 나기에/흔히들 중독이 많았다 하네/이 버섯만은 소나무 아래에서 나/늘 솔잎에 덮였었다네/소나무 훈기에서 나왔기에/맑은 향기 어찌 그리도 많은지/향기 따라 처음 얻으니/두어 개만 해도 한 웅큼일세/내 듣거니, 솔 진액 먹는 사람/가장 빨리 신선 된단다/송이도 솔 기운이리니/어찌 약 종류가 아니랴이규보는 약 800년 전, 고려 후기 사람이다. 오래전부터 송이버섯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송이버섯 식용의 역사는 길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702~737년) 때 왕에게 송이버섯을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송이버섯 이야기다. 무려 1,300년 전의 기록이다. 송이버섯이 성덕왕 때 갑자기 나타났을 리 없으니 식용의 역사는 그보다 앞선다고 추정한다.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시대에도 송이버섯에 관한 내용은 꾸준히 나타난다. 고려 말기 문신 근재 안축(1282~1348년)의 시는 제목이 ‘송이버섯[松菌, 송균]’이다.서늘한 가을 지팡이 짚고 소나무 사이 걷다가/손으로 따서 새로 난 것 먹어 보니 맛이 좋구나/관가의 좋은 반찬[粱肉, 양육]도 향이 이만 못하여/구름 보고 젓가락 던지며 청산에 부끄러워하네(근재집 제1권)예나 지금이나 송이버섯은 소나무 숲에서 자란다. 맛은 어떠했을까? 근재는 송이버섯의 ‘맛’을 ‘향’으로 설명한다. ‘양육(粱肉)’은 좋은 음식 혹은 ‘쌀밥과 고기’다. ‘양(粱)’은 기장(혹은 수수)이다. 중국에서는 손님이 오면 기장밥을 내놓았다. 기장밥이 일상 최고의 음식이었다. ‘양육’이라고 표기하고, ‘쌀밥과 고기’라고 해석하는 이유다. ‘양육’은 최고의 음식이다. 송이버섯의 향은 ‘관가의 양육’을 넘어선다. 조선 시대의 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송이버섯을 설명한다. 조선 중기의 문인, 관료 고산 윤선도(1587∼1671년)의 칠언절구다. 시의 끝부분에 “이 시는 송이버섯을 보내준 것을 사례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솔 사이에 자란 식물 맛[嘉味]이 좋아서/쓰지도 시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이파리, 줄기 없어도 제대로 몸을 갖췄고/싱그런 향기에 정신이 벌써 상쾌해라/오랜 벗이 성중의 객에게 선물을 보냈나니/부엌 아낙 도마 먼지 닦느라 바쁘다/만약 장공에게 한 젓가락 맛보게 한다면/오회 강의 가득한 순채를 어찌 말하리오송이버섯은 ‘가미(嘉味)’다. 좋은 맛, 진미다. ‘프리미엄 향’이다. “이파리, 줄기 없이 제대로 몸을 갖췄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잎도 줄기도 없지만 여느 식물을 앞서는 향이 있다.‘장공’ ‘오회 강의 가득한 순채’는 설명이 필요하다. 장공은 진[西晉, 서진]나라 제왕(齊王) 시절, 동조연(東曹掾)으로 벼슬생활을 하던 장한(張翰)이다. 어느 날,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문득, 고향 강동(江東) 오중(吳中)의 순채 국과 농어회를 떠올린다. 장한은 그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다. 순갱노회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로망이었다. 고산은 송이버섯이 ‘순갱노회’를 앞지른다고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송이버섯의 주산지는 소나무가 흔한 곳이다. 소나무나 그 지역의 토질, 바람, 습도, 온도, 강우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송이버섯의 생산량과 품질을 정한다. 송이버섯은 자연산이다. 실험실에서 ‘일부’ 양식에 성공한 적도 있지만 ‘실험실의 성공’에 불과하다. 일본과 한국 모두 ‘양식 재배’는 여전히 힘들다.생산량, 품질로는 경북이 가장 앞선다. 전국 생산량의 40-50%가 경북 영덕 몫이다. 봉화, 청송 역시 송이버섯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송이버섯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생산된다. 경북 울진, 영덕, 봉화, 영양, 문경, 영주 그리고 태백산맥의 끝자락인 영천 등에서 송이버섯을 생산한다. 경북 생산량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송이버섯은 4단계로 분류한다. 상품 1, 2, 3등급이 있다. 등외품도 있다. 1등품 기준으로 한때 1Kg, 100만 원을 넘긴 적도 있지만 대략 30-40만 원 선이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송로버섯(트러플)에 비하면 낮은 가격이라지만 여전히 비싸다. 2등품은 크기가 작고, 갓이 일부 핀 것이다. 3등품은 생장을 멈춘 생장정지품 혹은 갓이 1/3 이상 핀 것이다.가격은 한결 싸지만, 실제 식탁에서 느끼는 향은 1등품과 큰 차이가 없다. 다행히, 냉장 보관의 경우 향도 큰 차이가 없다. 봉화, 영덕에서는 ‘송이라면’을 내놓는 집들도 있다. 송이라면, 송이버섯 덮밥의 경우, 굳이 1등품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소비자도 마찬가지. 선물용이 아니라면 굳이 가격이 높은 1등품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09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柿)’는 처음부터 없었다

제사는 어떻게 모시는 것이 좋은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정성으로,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제사를 모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무 평범한, 꼰대 같은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이런 표현은 오래전에도 있었다.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년)의 글이다. 제목은 ‘갈암집 제23권_학암처사 정달중의 묘표’.(전략) 또 말하기를, “상례와 제례는 형식을 갖추어 잘 치르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낫고,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하고, 털끝만큼도 남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는 일이 없었다.(후략)갈암은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영덕이다. 남인계의 사대부다. 성리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의 적통. 위 문장은, 갈암이 인척 관계였던 정달중의 묘표에 적어넣은 ‘정달중의 말’이다. ‘형식보다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고,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하게’다. ‘털끝만큼도 남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지 마라’고 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가 전하는, 제사 잘 모시는 방식이다.제사 모시는 방식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가 너무 많다. 추석이다. 제사 잘 모시는 방식, ‘제사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를 더불어 살펴보자.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엉터리다펄쩍 뛸 사람들이 많겠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오랫동안 제사 모시는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홍동백서(紅東白西)’는 이른바, 제사 모실 때, 과일을 놓는 순서다. 제사 모시는 이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다. ‘홍동백서’는,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불행히도 엉터리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 밤, 배, 감(곶감)의 순서대로 제사상에 놓는다는 뜻이다. 역시 엉터리다.일제강점기 이전 어떤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맞다, 틀렸다고 이야기하기도 모호하다. 부디, ‘홍동백서’를 이야기하는 분을 만나면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여쭤보기 바란다. “옛날부터” “오래된 책에” “우리 집안에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예전의 오래된 책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제사상 차리는 법을 그린 그림은 진설도(陳設圖)다. 진설도 어디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어동육서(魚東肉西)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말하는 어동육서의 유래는 엉뚱하다. 중국 기준으로 동쪽은 바다, 서쪽은 내륙이다. ‘어동육서’는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다. 우암도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고기는 서쪽에 놓고, 생선은 동쪽에 놓습니까?”라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는 없다. 역시 예전부터 내려오는, 옛날 자료에, 라는 엉뚱한 대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우암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있다는 정도다.세종대왕의 시대는 조선 초기다. 건국 직후, 법률을 비롯하여 사회 규범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다. ‘세종오례의’가 나온 이유다. 우선 급하게 법령을 만든다. 이 문서에 제사상 차림이 있다. 중국 측 자료를 참고하고, 조선에 맞는 ‘공식 제사상 차림’을 만들었다.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 과줄, 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나타난다.‘조율이시’는 어디에도 없다. 조율이시는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다. ‘세종오례의’에는 밤, 배, 감, 대추의 순서다. ‘조율이시’는 대추[棗, 조]가 가장 먼저다. ‘세종오례의’에는 대추가 가장 나중이다. 언제 변할 걸까?또 다른 의문점도 있다. 왜 대추, 밤, 배, 감만 순서를 정했을까? 밤은 있는데 같은 견과류인 호두는 순서에 없다. ‘세종오례의’에는 호두도 있다. 마찬가지로 순서에서 빠진 잣, 은행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배는 있는데 사과도 순서에서 빠졌다.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조선 시대 제사상에는 수박도 없다. 과일 진설 순서를 정하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니다. 1778년 궁중 장례원의 진설도에는 과일 이름이 아예 없다. 모든 과일을 ‘實果(실과, 과일)’라고 적었다. 종류나 순서는 없다.‘홍동백서’ ‘조율이시’는 허망하다.추석, 설날의 ‘차례’도 뒤틀렸다추석과 설날의 ‘차례’도 엉뚱하다. 내용과 형식 모두 뒤틀렸다.차례[茶禮]는 ‘차 한잔 올리는’ 정도로 간소한 의례다. 오늘날의 추석, 설날은 이것저것 뒤섞은 ‘짬뽕’이다.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다. 한가위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한다. 2019년은 ‘이른 추석’이다. 양력 9월 13일이다. 오곡백과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벼는 들판에 서 있고, 과일은 익지 않았다. 늦은 추석이라도 10월 초, 중순 정도다, 한반도의 추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것은 11월이다. 음력 8월 15일은, 농사일이 바쁜 계절이지 오순도순 모여 앉아 한담할 때가 아니다.한반도의 현대화는 ‘이농(離農)’이다.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바뀐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한다. 노동자, 학생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제사를 모셔도 도시로 간 아들, 딸들이 매번 농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1년에 두 차례 설날, 추석이 고작이다. ‘한가위, 오곡백과’의 신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추석날 온 가족이 모이는 ‘아름다운 풍습’이 생긴 이유다.설날,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되었다. 추석, 설날의 제사상은 기제사 상을 따른다. 기제사와 차례상이 섞였다. 차례(茶禮)와 제사는 같다. 차례상은 사라졌다.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정확한 제사의 방식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1960년대, 이들이 대부분 제주(祭主)가 되었다. 진설 방식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이런저런 이론들이 나타난다. 공무원이나 민간 모두 예전 자료를 뒤졌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자료였다. 허둥지둥 한국 방식으로 바꿨다. 뒤섞인다.‘홍동백서’는 일본식이다?‘홍동백서’도 이 무렵 어물쩍 끼어들었을 것이다.우리는 ‘홍백(紅白)’이 아니다. 우리는 ‘홍청’이다. 신랑, 신부는 ‘홍실, 청실’이다. 신혼부부의 베개는 홍실, 청실로 꾸민다. 태극기도 홍과 청이다. 위는 홍, 아래는 청이다.‘위키트리’의 어린 시절의 운동회, ‘청백전’에 대한 설명이다. ‘홍백’은 한반도로 건너온 뒤 ‘청백’으로 바뀐다.“(청백은) 푸른색[靑]과 하얀색[白]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戰]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의 겐페이 전쟁에서 유래한 ‘홍백전’ 문화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에 넘어온 뒤 대한민국 정부의 왜색 척결 및 반공사상 강화 차원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일본인들의 ‘홍백’은 뿌리가 깊다.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은 1180년, 원씨(源氏) 가문(흰 깃발)과 평씨(平氏) 가문(붉은 깃발) 사이의 내전이다. 이때부터 홍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은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다.우리는 홍백을 청백으로 바꾸었지만 ‘홍동백서’는 일본식이라 여기지 않았다. 조선 시대 어느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언제, 누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다. 근거가 없다. 일본 방식이라는 게 오히려 근거가 있다.반드시 전통을 따라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불가능하다. 따를 필요도 없다. 되새겨야 할 것은 제사를 모시는 정성이다. 제물(祭物)이나 형식이 전통은 아니다. 조선 시대 제사에는 반드시 생선 젓갈[醢, 해]을 사용했다. 지금 제사에 생선 젓갈을 사용해야 할까? 그렇진 않다. 형식은 변한다. 시대를 따른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정성이다.제사를 잘 모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갈암 이현일의 글에 답이 있다. “형식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 사치스럽지 않게, 검소하게, 정성스럽게”다.그까짓 과일 어디에 놓으나 무슨 허물이랴?/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02

태종은 윤돈을 파직했다 김문에게 소주를 많이 권하여 죽게 한 때문이다

주량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일. 우리는 과음(過飮)에 대해서 관대하다. 요즘 현상이라고? 아니다. 뿌리가 깊다. 술은 두 종류다. 발효주(醱酵酒)와 증류주(蒸溜酒)다. 과일, 곡물을 발효시킨 것이 발효주다. 자연생태계에서도 생긴다. 알코올 도수는 19도 미만이다. 한국 막걸리, 일본 청주(사케), 유럽의 와인 등이 발효주다. 중국 고량주(高粱酒, 수수), 일본 고구마 소주(고구마), 프랑스 코냑(포도), 유럽의 각종 위스키(보리 등), 한국 안동소주(쌀)는 증류주다. 인위적으로 증류해야 얻을 수 있다. 도수가 높다. 대부분 40도 이상이다.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稀釋式) 소주는 주정(酒精)에 물을 더한 것이다. 주정은 에탄올(ethanol)이다. 증류주는 발효주보다 고급술, 비싼 술로 친다. 발효주를 만든 다음, 증류 과정을 한 번 더 거치기 때문이다. 곡물, 과일로 발효주를 만든 다음, 증류한다. 곡물 소비도 심하고 술의 양도 줄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증류주는 비싼 고급술이다.술을 마시고 사람이 죽는다. 설마? 설마가 여러 사람 잡았다.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퍽, 자주 ‘음주 사망사고’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1417년) 윤 5월 4일의 기사다. 제목은 ‘박강생, 윤돈을 파직하다. 김문에게 소주를 많이 권하여 죽게 한 때문이다’이다.수원 부사 박강생, 봉례랑(奉禮郞) 윤돈을 파직(罷職)하였다. 이 앞서 윤돈이 과천 현감에서 교대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박강생과 금천 현감 김문 등이 윤돈을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하였더니, 김문이 소주(燒酒)에 상(傷)하여 갑자기 죽었다. (중략) 헌부(憲府)에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인관(隣官)을 전별함도 또한 상사(常事)인 것이다.” 하고, 명하여 다른 일은 제외하고 파직하게 하였다.윤돈이 과천 현감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전근한다. 인근 수령인 수원 부사 박강생과 금천 현감 김문이 전별연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문은 소주를 많이 마시고 상해서 죽는다. 이 죽음에 대해 사헌부에서 문제 삼는다. 태종의 대답이 재미있다.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술을 많이 권했겠느냐? 벼슬아치들이 전별연을 여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큰 잘못이 아니니 파직만 시키라”이다.태종도 호주(豪酒) 꾼이었다. 조선 초기 왕실은 술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했다. 술 때문에 희생된 이들도 많았지만, 음주를 엄하게 금하거나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모두 호주 꾼이었다. 술맛을 아니, 과다 음주에도 관대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진안대군 이방우(1354~1393년)는 조선 건국 이듬해 죽었다. 일설에는, 고려의 신하였던 진안대군이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했고, 1392년 조선 건국 후 황해도 해주와 고향 함흥에서 술을 마시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죽었을 때 나이 마흔 살. 불과 5년 전인 1388년, 별 탈 없이 사신단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조선을 건국했고, 자신은 왕자가 되었다. 죽을 이유가 없다. 조선 건국 반대, 시대에 대한 불만으로 통음(痛飮), 술병으로 사망?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안군이 술을 좋아했다. 날마다 마시더니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다. 태종의 아들이자 진안대군에게는 조카인 양녕대군도 술에 대해서는 뒤처지지 않는다.세종 4년(1422년) 11월14일, 대사헌이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죄목이 엉뚱하다. ‘소주를 마시게 해 사람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이제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계시온데, 일찍이 슬퍼하지 않고, 살림을 차리고자 하여(중략) 함부로 마을 사람을 불러서 돌을 실어다가 집을 꾸미었는데, 소주(燒酒)를 지나치게 먹여서 인명(人命)을 상하게 하니, (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특히 유사(攸司)에 내리시어, 그 뜻에 있는 바를 국문(鞫問)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이해 5월10일(음력)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11월이면 아직 탈상도 하지 않았을 때다.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으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근신해야 한다. 그런데 함부로 마을 사람을 불러 집을 지었다. 큰 죄다. 하물며 일하는 이에게 소주를 많이 권해서 죽게 했다.세종의 태도도 재미있다. 국문해야 한다고 탄핵하자 “윤허(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듬해인 세종 5년, 이번에는 대사헌 혼자가 아니라 문무관 2품 이상의 고위직들이 연대하여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이 탄핵에서도 “소주로 사람을 죽게 했다”고 명기했다. 여전히 세종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인 세종 14년(1432년) 7월의 기록에는, 세종이 양녕대군에게 “좋은 안주와 소주[宣醞, 선온]를 내렸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세종 15년 3월의 기록에는 세종대왕의 술에 대한 ‘속마음’이 나온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로 목숨을 잃는 이도 흔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지 못하게 법을 세우자”고 건의한다. 세종이 대답한다. “비록(소주 마시는 일을) 굳게 금하더라도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조도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법을 세우자”고 하니 세종이 마지못해 대답한다.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를 내리겠다”. 그뿐이었다.관대한 분위기 때문인지, 벼슬아치들은 꾸준히 음주 사고를 일으킨다.‘경차관(敬差官)’은 특정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파견되는 임시직 관리다. 태종 4년 7월, 경차관 김단이 옥주(沃州,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사인은 ‘과다 음주’다. 한양을 출발, 경상도로 향하던 김단은 청주를 지나면서 소주를 과다하게 마셨다. 지방 관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공식적인 ‘지응(支應)’이다. 아마 지응 자리였을 것이다. 김단은 청주에서 과음, 멀지 않은 옥주에서 죽는다.소주 때문에 패가망신을 당한 이는 고려 시대 김진(생몰년 미상)이다. 조선 후기 문인 낙하생 이학규(1770~1835년)의 ‘낙하생집_권20_동사일지’에 기록된 김진의 이야기다.“소주(燒酒)는 노주(露酒)다. 원나라 때 처음 들어왔다. 고려 신우 원년,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소주를) 아낄 줄 모른다. 많이 마시면 재물을 잃는다. 앞으로는 소주를 비단, 금이나 옥같이 여겨 일절 금한다. 최영 전에 이르기를, 김진을 경상도원수로 삼았더니, 경상도 기생을 많이 모아, 무리와 밤낮으로 소주를 마셨다. 김진이 소주를 좋아하니 군중(軍中)에서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 마침내 왜구가 합포(마산)를 쳐서 불태우는데, 사람들이 소주도를 앞세워 왜구를 공격하라며 움직이지 않았다.(후략)”노주는, 소주가 마치 이슬같이 맑아서 붙인 이름이다. ‘신우(辛禑)’는 우왕을 이른다. 조선의 선비들은 우왕이 고려 왕통이 아니라 승려 신돈의 아들이라고 여겼다.우왕 원년에 이미 소주에 대한 경계문이 나온다. 몸을 상하기 전 재물을 먼저 잃는다고 했다. 소주를 금은보화같이 귀하게 여기고 앞으로는 금한다고 했다. 소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김진이 경상도원수가 된 것은 불과 2년 후인 우왕 2년(1376년)이다.‘음주 도원수’ 김진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그 벌로 서민으로 강등된다. 김진은 창녕, 가덕도에서 귀양살이했다. 조정에서 다시 부르려 했지만, 직속 상관인 최영이 끝까지 반대한다. 이글에는 “소주가 몽골의 원나라에서 한반도에 전래하였다”고 했다. 조선 중기 문신, 유학자 이수광(1563~1629년)도 ‘지봉유설’에서 “소주는 원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했다. ‘원나라 전래설’은 다수설이다.소주는 아랍권에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몽골의 원나라가 아랍의 ‘아라크’(Araq)를 배워서 고려에 전한 것이다. 소주는 한반도 개성, 안동, 제주도 등에서 처음 시작된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다. 원나라와의 교류가 잦았으니 소주 양조장도 많았다. 제주도는 말을 기르는 몽골 주둔지였다. 안동은 원나라의 일본 침략 시, 군수기지, 내륙집결지였다. 몽골은 개성-안동을 거쳐 마산 지역에서 일본 침략에 나섰다. 지금도 ‘안동소주’는 유명하다. ‘아라크’는 아랍어로 ‘땀’을 의미한다. 소줏고리로 소주를 내리면 마치 땀 같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지금도 안동 지방의 노인들은 소주를 ‘아래기’라고 부른다. 아랍어 ‘아라크’나 우리의 ‘아락주’와 비슷하다.재미있는 것은 소주 기원, 전래에 대한 ‘이설’이다.조선 후기 실학자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는 ‘청장관전서’에서 “소주가 원나라 때 전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송나라 사람 전석이 이미 ‘섬라주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내리는 환소주가 있으니 섬라(暹羅)주와 같다. 오키나와와 (일본) 사츠마[薩摩] 의 소주는 포성주(泡盛酒)라 한다”고 했다.‘섬라’는 태국(SIAM)이다. ‘포성주’는 지금도 남아 있다. 소주는 기원전 3천 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원나라보다 훨씬 오래전이다. 청장관의 주장은 간단하다. 소주의 한반도 전래는 원나라 때인 12~13세기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는 것이다. ‘원나라 전래설’이 다수설이지만 청장관의 주장도 무시할 바는 아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8-19

고려 말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시대 국립대학 ‘학식(學食)’으로 말복때 수박 하나씩 하사

늦여름이다. 수박 철이다. 이른 수박들이 흔하고, 한겨울에도 수박이 나온다. 수박이 제철을 잃었다. 수박 제철은 늦여름이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남긴 시가 있다. 제목은 ‘수박을 먹다’이다. “마지막 여름이 곧 다해 가니/이제 수박[西瓜]을 먹을 때가 되었다/(중략)/하얀 속살은 마치 얼음 같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다”(목은시고). 수박은 고려 말, 한반도에 전래 된 후,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재배했다. 여름의 끝자락, 수박으로 마지막 더위를 보낸다.다산 정약용의 귀양살이는 모두 세 번이다. 전남 강진의 귀양살이는 세 번째로 마지막이다. 첫 번째는 서산 해미, 두 번째는 장기였다. 장기는 지금 포항시 남구 장기면이다. 강진 귀양살이 중, 다산은 필생의 역작을 대부분 완성한다. 앞서 두 번의 귀양살이에서는 몇몇 시를 남겼다. 그 시에 수박이 등장한다. ‘다산시문집_제1권_시’의 ‘온천에서 느낌을 쓰다’다.경진년 과거사를 또렷하게도/유민들이 이제껏 얘기를 하네/복성이 세자 행차 따라왔는데/한밤중 높고 맑은 노래 들렸네/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조세 감면 장마의 피해 위문해/내린 분부 사신이 따르지 않아/울분에 찬 백성들 마음 보겠네온천은 온양이다. 시에는 ‘수박’이 등장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하다. 다산의 첫 번째 유배는 ‘정치적 쇼’다. 1790년 2월, 다산 스물아홉 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9품의 소박한 자리지만 청요직(淸要職)이다. 반대파가 모함하고, ‘절대 불가’를 외친다. 정조는 ‘임명 강행’이다. 다산이 엉뚱하게 사직을 고집한다. 다툼은 임명권자 정조와 피 임명자 다산 사이로 번진다. 정조는 다산의 ‘사직 상소’를 ‘명령 불복종’으로 몰아붙인다. 서산 해미로 귀양. 1790년 3월 10일, 다산이 귀양지로 출발, 3월 13일 귀양지인 해미 도착, 3월 22일 해배. 겨우 열흘 정도의 유배. ‘정치쇼’라고 여기는 이유다.위 시는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러 남긴 것이다. 경진년은 1760년(영조 36년)이다. ‘경진년 과거사’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들렀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다산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렀고, 이때, 30년 전 장헌세자가 온양에 왔던 일, 당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현지 노인에게 듣는다. 그중 하나가 ‘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라는 부분이다. 상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장헌세자를 호위하던 금군(禁軍)의 말[馬]이 동네 주민들의 수박밭을 짓밟았다. 수박과 수박 넝쿨이 엉망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헌세자가 밭 주인에게 ‘쌀’로 배상하고, 밭의 성한 수박들은 금군에게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백성들의 우레같은 함성이 뒤따랐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다산은 온양에서 사도세자의 발자취를 말끔히 정리정돈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정조 어필 ‘영괴대(靈槐臺)’는 당시 다산이 주관, 세운 것이다. 장헌세자는 정조에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장헌세자의 자취를 다산이 끄집어내어 결국 정조 어필의 비석까지 세우게 했다. 정치적이다. 짧은 귀양을 ‘정치 쇼’라고 보는 이유다.포항 ‘장기의 수박’은 슬프다. ‘다산시문집_제4권_시’의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 중 일부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기간은 220일이다. 그때 지은 시의 일부다.(전략)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밤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평생토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平生不種西瓜子)/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후략)‘장기농가’는 ‘장기 농촌 노래’쯤 된다. 다산은, 당시 장기에 살던 농민, 어민들의 삶을 마치 그림처럼 상세히 그렸다.‘온양 수박’은 1760년이다. ‘장기 수박’은 1801년이다. 40년을 두고 두 지역에 모두 수박 재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장기의 농민들이 수박을 기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세금 때문이다. 수박 역시 먹으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다. 내다 팔려니 세금 문제가 걸린다. ‘장기 수박’은 명백하게 환금작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미 수박은 널리 퍼져 있었다.다산은 시에서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수박을 이렇게 부른다. ‘서(西)’는 어느 지역의 서쪽일까? 중국의 서부 지역인 우루무치 일대다. 정확히는 중국인들의 ‘과일창고’라고 불리는 우루무치, 투루판 일대다. 포도의 당도가 세계 제일이고, 살구, 수박 등이 아주 좋다. 중국인들에게 우루무치 일대는 서역(西域)이다. 수박은 이 지역에서 전래 되었다. 수박을 서과,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우리는 중국을 통해서 수박을 받아들였다. 그까짓 수박, 어디서 온들 무슨 이야깃거리랴, 싶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진 않았다. 모든 과일, 채소 등이 어디서 왔는지 관심이 깊었다.수박의 전래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그러나 혼란스럽게 기록한 이는 교산 허균(1569~1618년)이다. 교산은 ‘성소부부고_26권_설부’에서 수박의 한반도 전래를 명확하게(?) 밝힌다.수박[西瓜] :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開城)에다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原州) 것이 그 다음이다.제법 정확하게 보이지만 아리송하다.홍다구가 홍호보다 빠르다고 했다. 틀렸다. 홍호(1088~1155년)는 중국 남송 시대 관리다. 홍다구(1244~1291년)는 고려 원종, 충렬왕 때 원나라의 고려 침략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다. 홍호는 홍다구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다구가 먼저 수박을 전래했을 리가 없다.홍호의 이력을 보면, 그가 수박을 봤을 리도 없다. 수박은 열대성 과일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15년 후 남송으로 돌아왔다. 금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의 국가다.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왔다? 믿기 어렵다.수박은 12세기경 서역에서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정한다. 고려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홍다구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모양이 동과처럼 생겼다고 했다. ‘동과’는 오늘날의 동아다. 겉껍질은 박처럼 생겼고 크고 길쭉하다. 수박 중 둥근 것이 있고 긴 것이 있다. 길쭉하게 생긴 것이 좋다고 했다.수박의 모양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일치한다. 교산 허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수박을 두고, “서역에서 온 특이한 품종/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녹색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둥근 몸은 부처의 머리와 같다”라고 했다(옥담사집). 부처의 머리 모양은 동그랗지 않고 길쭉하다. 교산의 말과 일치한다.한치윤(1765~1814년)의 ‘해동역사’에서는 ‘고려도경’을 인용, “고려에는 능금, 복숭아, 배, 대추 등과 더불어 ‘과(瓜)’가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근거로, “고려 시대에도 수박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는 않다. ‘고려도경’의 ‘과’가 서과 즉, 수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년)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이다. 홍다구보다 앞선다.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부르지만, 오이[瓜, 과]와는 아주 다르다. ‘고려도경’의 ‘과’는 수박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너무 이르다.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1814~1888년)의 말이 믿을 만하다. ‘임하필기_제32권_순일편_서과’의 내용이다.어떤 사람이 서과는 원나라 세조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초기에 절강의 순안 사람 방기는 이미 시를 짓기를, “줄줄이 이어진 꽃무늬는 침에 젖어 푸르고, 가닥가닥 붉은 속살은 멍이 들어 붉구나.[縷縷花衫粘唾碧 痕痕丹血搯膚紅]”라고 하였으니, 이때 절강에 이미 서과가 있었던 것이다. (중략) 송나라 말기 방회의 시에도, “서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옥같이 푸른 껍질을 자르네.[西瓜足解渴 割裂靑瑤膚]”라고 하였고,(중략) 호교의 “함로기”에, “내가 회흘(回紇)에서 서과 종자를 얻었는데 말[斗]같이 큰 열매가 달려 서과라 불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서과는 호교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회흘은 위구르 카칸국이다. 위구르, 우루무치, 투르크, 돌궐 등은 동의어거나 연관이 깊다. 즉, 중국의 수박(서과)은 오늘날의 우루무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한반도 전래는 그보다 뒤인 고려 말기다. 홍다구의 개성 수박 시험 재배(?)가 믿을 만하다.수박이 희귀한 과일은 아니었다. 다만 수박은 귀하게 사용되었다. 여름철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앵두, 보리, 수박[西瓜], 참외 등이 등장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여름철에는 특별히 수박을 지급했다. 조선 후기 문신 무명자 윤기(1741~1826년)는 ‘무명자집’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초복에는 개고기 한 접시, 중복에는 참외 두 개, 말복에는 수박 한 개를 준다”고 했다. 조선 시대 ‘국립대학의 학식(學食)’이다.당뇨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박을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은 “10년 묵은 소갈병이 수박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약재보다 수박이 오히려 낫다”고 했다.(사가시집)/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8-12

귀한 얼음은 옥살이 하는 죄인들에게도 일정량 나누어졌다

얼음은 뜨거웠다. 시쳇말로 ‘핫 아이템’이었다.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겨울철에 얼음 준비해서 창고에 넣고 보관한다. 여름이 시작되면 얼음 창고를 열어서 얼음을 사용했다. 얼음은 필수품이었다. 얼음을 구하고, 보관, 사용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얼음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다.겨울에 얼음을 마련하는 이들은 빙부(氷夫)다. 빙정(氷丁)이라고도 한다. 얼음 일하는 장정이다. 빙부는 계급이 아니다. 직업이다. 승려, 관노(官奴) 등 하층민이나 임금을 받고 얼음 일을 하는 서민들도 있었다. 군역에 동원된 사람들이 겨울철을 맞아 얼음 ‘자르는’ 일로 병역을 대신하기도 했다. 빙부는 늘 부족했다. 일이 고되니 한강 변에서 얼음 일을 하던 이들이 다른 지역으로 ‘불법 이주’하는 일도 있었다. 국가, 관청에서는 이런 불법 이주를 강력하게 단속했다.얼음 자르는 일은 벌빙(伐氷)이다. 12월 초순 무렵, 한강의 얼음이 4촌(12센티 정도) 되면 빙부들은 강으로 간다. 20센티 정도의 얼음이면 상품으로 치고, 더 두꺼운 30㎝쯤 되는 얼음은 보기 힘들었다. 겨울이 춥지 않아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으면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기도 했다.얼음을 깨고, 자른다. 적절한 크기로 자른 얼음은 빙고로 들어간다. 운반과 창고에 넣는 것도 모두 빙부의 일이다.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는 빙고(氷庫) 혹은 장빙고(藏氷庫)다. 대부분 나무에 이엉을 인 형태인데 돌로 만들면 비교적 견고하다. 석빙고(石氷庫)다.얼음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가 있다. 조선 중기 문신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의 ‘농암집’에 나오는 ‘얼음 깨는 노래’이다. 얼음 관련 일, 빙부의 일과를 잘 보여준다. 긴 시지만, 전문을 소개한다.늦겨울 한강에 얼음 꽁꽁 어니/천인만인 우글우글 강 위로 나왔다네/도끼로 쿵쿵 얼음을 찍어 대니/아래로 소리 울려 용궁까지 들리겠네/찍어 낸 얼음 쌓으니 하얀 설산 같고/쌓인 음기는 사람을 엄습하네/매일 아침 얼음 등짐 빙고에 져 나르고/밤이면 밤마다 강바닥으로 얼음 파 들어가네/낮은 짧고 밤은 긴데 밤늦도록 일을 하니/강바닥에는 온통 노동요만 들린다네/정강이 못 가리는 짧은 옷, 걸친 것 없는 발/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지네/고대광실 한여름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아리따운 여인 하얀 손 맑은 얼음 내어오네/큰 칼로 얼음 깨서 자리마다 두루 돌리니/맑은 대낮에도 흰 안개 흐른다네/자리에 앉은 이들 한여름 더위를 모르니/그 누가 얼음 뜨는 고생을 알아주겠는가/길가에 더위로 죽은 백성 못 보았던가/강 위에서 얼음 뜨던 바로 그 사람이라네얼음을 깨고, 자르는 일이 마치 노예 부리듯이 한 일이었을까? 위 김창협의 시에서는 얼음 관련 일이 가장 힘든 일이며 마치 노예처럼 부리면서 얼음을 구했다고 표현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지만 어차피 궁중, 관청 등에서는 매년 여름 얼음이 필요했다. 노예 노동처럼 관리해서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조선왕조실록’ 인조 2년(1624년) 12월 22일의 기사다. 제목이 특이하다. ‘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를 불태우다’이다. 이른바 ‘서빙고 방화사건’이다.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西氷庫)를 불태웠으므로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적간(摘奸)하였다. 강가의 주민들은 폐조 때부터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기화로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어 왔는데, 이제 간사하게 외람한 짓 하는 것을 금단하자, 이득을 놓치게 된 것을 원망하여 밤을 틈타 불을 지른 것이다.사건은 간단하다. 한강 가 서빙고 주변 사람들이 서빙고에 불을 질러서 태웠다. 궁궐에서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다. 중한 정부 부처는 아니지만, 종 6품 빙고별좌(氷庫別坐)가 책임자다. 일을 관리, 감독하는 감역부장과 빙고를 지키는 벌빙군관(伐氷軍官)도 있었을 것이다. 관리관과 군인이 엄하게 지키는 곳에 인근 민간인이 불을 질렀다.일은 점점 더 이상하게 전개된다. 국가 공식기관인 얼음 창고에 불을 질렀으면 포도청이나 중앙의 형조 등에서 수사를 해야 한다. “중사(中使)와 사관을 보내서 적간(摘奸)했다”라고 했다. ‘중사’는 내시다. 사관은 국왕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이다. ‘수사관’으로 나선 사람이 내시와 사관이다. ‘적간(摘奸)’은 수사가 아니다. 오늘날의 내사(內査) 정도다. 일의 속사정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얼음 창고에 불을 질렀으면 방화다. 내사가 아니라 엄한 수사를 해야 옳다. 결론은 더 이상하다. 폐조가 등장한다. 폐조는 광해군이다. 강가의 주민들은 광해군 시절,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했다. 고역은 ‘힘든 일’이 아니라 ‘돈 받고 일했다’라는 뜻이다.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먹었다”라고 했다. 믿지 못할 부분이다. 광해군 시절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나라의 왕 노릇을 했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왕족의 사저인, 훗날 덕수궁에서 머물렀다. 대단한 임금을 주었거나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데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인조는, 서빙고, 인근 주민들을 광해군 시절의 ‘적폐’로 여겼을 것이다.한양 도성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다. 오늘날의 용산구 서빙고동, 성동구 옥수동 부근인 두뭇개[豆毛浦, 두모포] 일대다. 동빙고는 종묘 제사 등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는 궁중과 각급 기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8배쯤 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개인적으로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도 있었다. 사빙고(私氷庫)다. 조선 시대 전에도 사빙고는 있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30년(1243년) 12월의 기록이다.(전략) 12월에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私伐氷藏之, 사벌빙장지]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후략)최이(崔怡, ?~1249년)는 고려 무신 최충헌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최우, 당대의 실세였다. 최이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서 자신의 빙고를 채웠다. 조선 후기 사빙고는 성격이 다르다. 개인 사유의 빙고다. ‘사설 얼음 창고’이다. 업자들이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얼음을 판다. 주로 생선 보관 등에 사용했다. 국가에서도 사빙고를 이용했다.순조 8년(1808년), 서영보(1759~1818년), 심상규(1766~1838년) 등이 편찬한 ‘만기요람’에는, “영조대왕 당시, 부역으로 궁중에 바치는 얼음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민간의 얼음을 사게 했다. 당시 1년간 필요한 얼음이 4만 여 정이고 백성들의 부역을 통하여 구하는 얼음이 3만 여 정이었다. 나머지는 사빙고에서 사들인 것이었다”라고 했다.동, 서빙고나 한강 변 등에 있는 빙고는 외빙고(外氷庫)다. 얼음은 쉬 녹는다. 바깥에서 궁궐 안으로 얼음을 가져오면 궁궐 안의 ‘내빙고(內氷庫)’에 보관했다.지방에도 빙고가 있었다.경북 안동의 ‘안동석빙고제’는 2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지방에도 빙고, 석빙고가 있었고 벌빙(伐氷), 얼음을 옮기는 일, 장빙(藏氷)의 일을 모두 해냈다. ‘경북매일’ 2004년 1월 28일의 기사다.조선 시대 장빙제 재연식이 30일 안동시 남후면 암산보트장과 안동댐 석빙고에서 재연된다./올해 3번째 열리는 안동 석빙고제는 (중략)/안동시 성곡동 안동댐 석빙고는 보물 제305호로 조선 영조 때 겨울철에 낙동강에서 잡아 올린 은어를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하기 위해 돌로 만든 얼음 저장고이다./이번에 재현하는 장빙제는 낙동강에서 얼음을 채빙하는 모습과 채빙된 얼음을 석빙고에 장빙하는 과거의 모습을 재연하고 장빙행사에 (중략) 과거 채빙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연된다.‘지방의 얼음’은 향교의 제사(봉제사), 관청의 손님맞이(접빈객) 등에 사용했다. 현지의 현직 관리, 퇴직 관리들에게도 내주었다. ‘영조 은어 진상’은 오해가 있다. 궁중으로 올라가는 세금, 공물용 생선은 건어물이 원칙이다. 냉장 상태로 한양 도성에 은어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달 이상 상하지 않는 냉장은 없다. 지방 빙고의 용도는 ‘한양 진상’이 아니라 현지 ‘봉제사 접빈객’을 위한 것이었다.지금도 남아 있는 지방의 석빙고는 안동 석빙고(안동시 민속촌길 13 박은숙초가), 경주 석빙고(경주시 인왕동 449-1), 청도 석빙고(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285), 현풍 석빙고(대구 달성 현풍읍 상리1길 36), 창녕 석빙고(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영산 석빙고(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등이다. 목빙고(木氷庫)가 아니라 석빙고이기 때문에 남았을 것이다. 더하여 이 지역은 유교 전통이 강한 곳이다. 역시 향교 제사가 큰 목적이다.한반도의 얼음 창고는 신라 지증왕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년)은 ‘동사강목’에서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3대 왕인 유리왕(?~57년) 때 이미 장빙고를 만들었다고 하나,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설’을 믿는다”라고 했다.귀한 얼음은 귀하게 사용했다. 중앙에서는 궁궐 내부와 각 부처, 관리들에게 얼음을 나눠 주었고, 전옥서(典獄署)에서 옥살이하는 죄인들에게도 일정량의 얼음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얼음을 나누어 주는 ‘반빙(頒氷)’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8-05

태종, 군역의 회피 수단인 수유치(酥油赤)를 폐지하다

‘한반도 우유’는 뒤죽박죽이다. 도무지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두 편의 글로 ‘뒤죽박죽 우유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용주 조경(1586~1669년)의 ‘용주유고 제1권 칠언절구’의 내용이다.양공 집의 행락(杏酪)은 우유보다 맛있는데/옥그릇에 담아 오니 눈처럼 하얗구나/만약 신선이 대약(大藥)을 만든다고 하면/향긋한 이것 두고 무엇을 다시 구하랴‘행락(杏酪)’은 ‘은행나무(열매)+우유 성분’이다. 은행나무 열매와 우유를 넣고 끓인 죽쯤으로 짐작한다. 우유, 은행의 비율? 어떻게? 정확지 않다. ‘대약(大藥)’은 신선이 만들 법한, 대단한 효력의 약을 의미한다. 불로장생약이나 숨 넣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약쯤으로 짐작한다.행락은 신선이 대약을 만들 때 사용할 법한 재료보다 더 좋은 것이다. 행락의 비교 대상은 우유다. 행락이 우유보다 더 맛있다 했다. 거꾸로 우유가 대단한 식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조경은 16세기 후반인 선조 조에 태어나서 현종 조 때 죽었다. 조선 중기가 지나며 후기를 시작할 때다. 이때도 우유는 귀했다. ‘낙(락, 酪)’을 한정하지 않고 ‘우유 성분쯤’이라고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유암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 중 한 구절이다.우유가 낙(酪)이 되고, 낙이 소(酥)가 되고, 소가 제호(醍醐)가 되니, 제호는 소(酥)의 정액(精液)이다. (증류본초)우유는 연유, 분유, 요구르트, 버터, 치즈 등으로 변화한다. 건조 과정을 거칠 때도 있고, 발효, 숙성 과정을 거칠 때도 있다. 냉장, 냉동이 시원치 않았을 때는 장기 보관을 위하여 건조하거나 끓이기도 했다.조선 시대 기록에서는 이 모든 ‘유제품’에 대한 구분이 명확지 않다. 낙, 소, 제호가 모두 불분명하다. 조선 상황에 맞춘, 조선의 창의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중국 ‘증류본초(證類本草)’가 원본이다. ‘증류본초’의 내용을 그대로 따왔다. ‘증류본초’는 중국 송나라 휘종 때 편찬한 책이다. 11세기 말. ‘산림경제’보다 약 600년 전의 내용이다. 6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국 책을 고스란히 옮기고 있다. 한반도의 ‘우유 연구’가 있었다면 600년 전 중국 ‘증류본초’을 어렵게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왜 이렇게 우유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별다른 연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_제13권_서(序)’에 그 대답이 있다. 제목은 ‘금성방략 서(金城方略序) 내각에서 교지에 응하여 지음’이다. 정조가 방책을 물으니, 궁중의 관계부처에서 대답을 올린다는 뜻이다. 내용은 ‘대 북방 군사전략’이다.(전략) 대체로 둔전법(屯田法)이란 군량 수송을 줄이고 집을 지키면서, 도로에 오래도록 있음으로써 적이 저절로 지치게 하는 방책이다. (중략) 손무(孫武)가 말하기를, “적에게서 양식을 얻으면 군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중국으로써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 오랑캐들의 성질은 살육을 농사로 삼고 있으므로, 날마다 목축에 적합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주하면서 우유, 양유 같은 것이나 먹고 살며 창고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없으니, 싸워서 그들을 이기더라도 내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데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빼앗아 이용할 수는 없다. 양식이 떨어지면 멀리 실어날라야 하고, 실어나르는 길이 멀면 군사는 주리고 백성은 고달파서, 오랑캐가 기회를 타서 침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오랑캐에 누차 패하게 된 까닭이요, 둔전의 법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후략)한반도 북방에는 유목, 기마민족들이 산다. 끊임없이 국경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군사 정벌이 필요하다. 문제는 병참이다. 손자는 “적에게서 양식을 얻으면 군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주식(主食)이 같을 경우나 가능하다. 중국 내의 전쟁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북방민족의 주식은 고기와 우유, 양유 등이다. 정벌은 쉽지만, 이들의 본거지를 점령하더라도 양식은 얻을 수 없다. 먹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농사지으며 머문다. 둔전이다.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우유를 그리 편하게 여기지 못했다. 양은 자라지 않으니 양유는 불가능하다. 쇠고기는 금육(禁肉)이다. 소는 농사의 필수품이다. 사사로운 도축은 엄하게 금했다. 소가 귀하니 우유도 구하기 힘들었다. 젖소가 없던 시절이다. 우유는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의 젖을 통해서 구했다. 송아지의 입을 막고 젖을 못 먹게 한 다음, 어미 소의 젖을 빼앗았다. 차마 할 짓이 아니다.우유에 쌀 혹은 찹쌀을 넣고 끓인 것이 타락죽이다. 귀하게 여겼다. 궁중에서도 한정적으로 사용했다. 비교적 살림살이가 좋았던 영조 시절에도 타락죽은 귀하게 여겼다.영조 29년(1753년) 7월9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제목은 ‘은여결, 타락죽, 통영의 일을 하문하다’이다.(전략) 또, 하문하기를, “(중략) 낙우(酪牛)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예전부터 봄갈이를 위하여 봉진(封進)을 멈추었으므로 낙우가 이토록 많지 않았는데, 이제 책자(冊子)를 보니 열여덟 마리나 되어 그 송아지를 아울러 서른여섯 마리이다. (중략) 이제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중략) 그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후략)”선정을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다. 영조는 젖 짜는 소, 낙우(酪牛)의 숫자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젖 짜는 소가 열여덟 마리면 젖 굶는 송아지도 열여덟 마리다. 모두 36두의 소가 고통을 겪는다. 낙우는 농사에 동원하지 못한다. 민폐다. 고작 다섯 그릇의 타락죽을 위하여 서른여섯 마리의 소를 고통스럽게 하고 민폐를 끼칠 일은 아니다. 어진 정치, 인정(仁政)이 아니다.우유 문화 역시 몽골의 고려 침략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 문화는 쉬 바뀌지 않는다. 곡식이 주식인 민족이 어느 순간 고기, 우유를 주식으로 삼기는 힘들다. 몽골의 원나라가 우유, 양유를 먹더라도 고려인들이 주식으로 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치즈로 유추하는 수유(酥油)와 수유치[酥油赤]는, 몽골 침략기와 가까운 조선 초기 기록에 나타나고 곧 사라진다. 조선 중기, 후기로 가면서 타락죽은 남지만, 우유의 핵심 생산물인 치즈는 오히려 사라진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년) 11월 28일의 기록에 ‘치즈는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다. 제목는 ‘군역의 회피 수단인 수유치를 폐지하다’이다.수유치(酥油赤)을 폐지하였다. 황해도, 평안도에 수유치가 있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 매 호(戶)에 해마다 수유(酥油) 한 정(丁)을 사옹방(司饔房)에 바치고는 집에 부역(賦役)이 없으니, 군역(軍役)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그러나, 수유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중략) 국가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안 되는데도 주현(州縣)의 폐해(弊害)가 되는 것은 실제로 많았다. 서흥군(瑞興郡)에 한 호(戶)에 건장한 남자가 21명이 있으면서 부역(賦役)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태상왕이 병조에 명하여 각도의 수유치(酥油赤)의 호수(戶數)를 두루 살펴서, 있는 곳의 고을에서 군역(軍役)에 충당(充當)하게 하니, 참의 윤회가 아뢰기를, “수유는 어용(御用)의 약(藥)에 소용되며, 또 때때로 늙어 병든 여러 신하들에게도 내리기도 하니, 이를 폐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그대의 알 바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드디어 이를 다 폐지하니, 모두 수백 호(戶)나 되었다.조선의 치즈는 왜 사라졌는가? 치즈 만드는 일이 힘들었다. 전문 기술자가 아니다. 상당수는 병역을 피해서 숨어든 조선의 장정이다. 비 전문가가 치즈 만들기는 힘들다. 짐승의 고기, 우유 등 부산물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것은 농경민족화 된 조선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색했다.병역제도가 어그러진다. 태종은 살아 있으면서 왕권을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병권과 외교 문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쥐고 있었다. 문관 출신이지만 군사에도 밝았다. 아들 세종이 문약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힘든 일은 자신이 짊어졌다. 태종은 국가의 정상적인 부역, 군역을 위해 수유치를 폐지했다.치즈를 ‘불요불급한 것’으로 여겼다. 참의 윤회의 말도 정당하다. “치즈는 임금이 드시는 약에도 필요하고 병든 노대신들에게 선물로 내려 주는 것으로도 요긴하다”고 하지만 태종은 단칼에 자른다. 태종의 수유, 수유치 폐지는 정확했다. 이후, 조선의 어느 임금도 치즈를 먹거나 수유치 제도를 부활시키지 않았다. 타락죽은 있지만, 치즈, 수유는 없다. 치즈가 우유의 정수라면 타락죽은 ‘곡물+우유’다. 타락죽은 16세기 초반 탁청정 김유(1491∼1555년)의 ‘수운잡방’에도 나타난다. 16세기 초중반에 이미 경북 안동, 예안에서도 타락죽은 만들고 먹었다. 대중적이었다. 치즈는 없다. 우유를 깊이 알지 못한 이유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