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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뱀장어의 번식과정을 부분적이나마 알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장어(長魚)는 미끄럽다. 맨손으로 잡으면 미끈거리며 빠져나간다. 정체를 알기도 힘들다. 장어의 정체를 비교적 정확하게 이야기한 것은 손암 정약전(1758~1816년)의 ‘자산어보(玆山魚譜)’다. 장어를 ‘해만리’라고 표기했다. 정확하게는 뱀장어, 민물장어다.“큰놈은 길이가 1장(丈)에 이르며, 모양은 뱀을 닮았다. 덩치는 크지만, 몸이 작달막한 편이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다. 대체로 물고기는 물에서 나오면 달리지 못하지만, 해만리만은 유독 뱀과 같이 잘 달린다.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맛이 달콤하고 짙으며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물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낫는다.”해만리는 바닷장어 혹은 민물장어다. 일본인들이 ‘우나기(UNAGI)’라고 부른다. 뱀장어는 이름도 혼란스럽다. 뱀같이 생겼다고 뱀장어 혹은 ‘배암장어’다. 몸이 길다. 장어(長魚)다. 뱀장어의 준말이다. 바다에 나타나니 바닷장어다. 강이나 개울 등 민물에서도 발견되니 민물장어다. 같은 녀석이다. 뱀장어가 바다, 민물에서 동시에 발견되니 어쩔 수 없다.장어는 크게 세 종류다. 민물장어, 갯장어, 붕장어다. 여기에 먹장어(꼼장어, 곰장어)를 더하면 모두 넷이다. 모두 장어 혹은 뱀장어라고 부르기도 한다.갯장어는 견아리에서 비롯되었다. ‘견’은 개, ‘아’는 이빨, ‘리’는 장어다. 개 이빨을 가진 장어다. 개 이빨 장어, 개장어, 갯장어다. ‘자산어보’에서는 “입이 툭 튀어나온 것이 돼지와 같다. 또 이는 개와 같아서 고르지 못하다. 가시가 매우 단단하며 사람을 잘 문다”라고 했다. 갯장어 명산지인 여수 일대에서 갯장어를 만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손에 갯장어에게 물린 자국이 있다. 갯장어를 이르는 ‘하모’는 일본어 ‘hamu(‘물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모 유비키’는 갯장어 샤브샤브의 일본어 표기다.‘자산어보’에서는 붕장어를 해대리라고 했다. 설명도 사실적이고 정확하다. “눈이 크고 배 안이 먹빛이다. 맛이 매우 좋다.” 붕장어는 일본인들이 ‘아나고(ANAGO)’라고 부른다. 가격이 오르면서 회와 더불어 구이용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일본인들의 ‘우나기동(장어 덮밥)’은 ‘우나기’가 아니라 붕장어(아나고)로 만든다. 민물장어(우나기)의 가격을 생각하면 민물장어로 ‘우나기동’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헛갈리는 녀석은 먹장어다. 먹장어는 이름은 장어지만 장어는 아니다. 흔히 ‘꼼장어’ ‘곰장어’라고 부른다. 먹장어 목, 먹장어 과의 동물로 연골어류다. 장어치고는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가격이 싸서 한때 포장마차의 주력 메뉴였다. 곰장어 인기가 높으니 붕장어(아나고)를 내놓으며 ‘곰장어’라고 소개하는 일도 더러 있다. ‘꼼장어 숯불구이’는 먹장어다.장어를 상세하게 나눈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손암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시기는 19세기 초반(1814년)이다. ‘자산어보’에서도 민간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전한다. “뱀장어는 그믐밤에 자신의 그림자를 가물치의 지느러미에 비추고 그곳에 알을 낳는다. 뱀장어는 가물치와 교미하여 알을 낳고 수정한다.” 손암은,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으나 믿을 수 없다”라고 적었다.동시대,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 중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장어에 대한 서정적인 기록을 남겼다. ‘다산시문집_제4권_시’의 일부인 ‘탐진어가(耽津漁歌)’다. 탐진은 전남 강진의 옛 이름이다.“계량(桂浪)에 봄이 들면 뱀장어 물때 좋아/그를 잡으러 활배가 푸른 물결 헤쳐간다/높새바람 불어오면 일제히 나갔다가/마파람 세게 불면 그때가 올 때라네(후략)”활배는 궁선(弓船)이다. 배에 그물을 설치한 배를 이른다. 형 손암은 흑산도에서, 동생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었다. 형 손암이 ‘자산어보’를 기록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뱀장어에 대한 시를 남겼다. 이 뱀장어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다.조선 시대, 뱀장어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 이유가 있다. 뱀장어의 산란, 수정, 성장을 꼼꼼히 볼 수가 없었다. 산란 현장을 보지 못했다. “가물치와 교미하여 알을 낳고 수정한다”는 엉뚱한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만 뱀장어의 정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뱀장어의 번식 과정을 부분적이나마 알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27년 2월 발행한 잡지 ‘동광’ 제10호의 기사다. 제목은 ‘뱀장어와 잉어’.“(전략)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지하면 남아메리까에 살(居)는 뱀장어는 알을 쓸을 때가 되면 대서양을 건느어서 스코틀랜드나 혹은 알프스산 꼭닥이에 오아서 새끼를 깐다고 한다. 그 까지 찾아가는 동안에 세월이 걸닌다거나 사납은 짐승, 넘끼 힘 장애가 있다거나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아니 가고는 말지 않는다는 맘으로 (후략)”제법 과학적으로(?) 기술했지만, 이 내용도 틀렸다. 1920년대, 덴마크를 비롯하여 유럽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뱀장어는 무려 6,000㎞를 헤엄쳐서 깊은 바다의 산란지에 간 다음, 알을 낳고 죽는다”. 뱀장어는 민물에서 바다로 가서 알을 낳는다. 윗글에는 바다의 뱀장어들이 민물로 온 다음, 엉뚱하게도 알프스 꼭대기에서 알을 낳고 번식한다고 말한다. 거꾸로다. 연어는 깊은 바다에서 살다가 민물로 올라와서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회귀성 생선들이 그러하다. 뱀장어는 정반대다. 민물에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서 산란하고 죽는다.아시아에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뱀장어의 대체적인 삶’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밝혔다. 동북아시아의 민물장어들은 먹이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3,000㎞를 헤엄쳐서 산란지에 도착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산란 후 삶을 마감한다. 산란지역은 필리핀 마리아나 해구 부근이다. 알에서 깨어난 뱀장어는 ‘댓잎장어’다. 생긴 모습이 대나무 잎 혹은 버들잎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확한 명칭은 렙토세팔루스(leptocephalus). 댓잎장어는 실뱀장어로 바뀌면서 어미가 왔던 길을 되돌아, 육지로 향한다. 이때 어부들이 실뱀장어(실치)를 잡아서 양식장에서 기른다. 실뱀장어는 ‘유리뱀장어(glass eel)’로 부른다. 몸이 투명하기 때문이다.대부분 민물장어는 양식이다. 실뱀장어를 잡아서 기른다. 일본도 알 채취, 수정, 양식의 전 과정을 ‘산업적’으로 해내지 못했다. 뱀장어와 뱀장어 인공양식에 대해서 일본이 한걸음 앞선 이유가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뱀장어를 즐겨 먹었다. 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1628∼1692년)은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문견별록’에서 일본인들이 뱀장어구이를 귀하게 여긴다고 기록했다.“(전략) 회는 아주 굵고 굳은데 감귤을 조각조각 끊어 섞었고, 구이[炙]는 생선이나 새[鳥]로 하는데 뱀장어[蛇長魚 사장어]를 제일로 친다. 먹는 대로 가반(加飯)하고 잇따라 반찬이 나와, 많을 때는 열 두어 그릇이나 되고 반드시 즐기는 물건을 물어보아 더 내오며, (후략)”‘사장어(蛇長魚)’는 뱀장어다. 남용익이 기술한 뱀장어가 과연 어떤 장어인지는 알 수가 없다. 뱀장어(민물장어), 붕장어, 갯장어 중 어느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일본인들이 이미 17세기 중반에 뱀장어구이를 즐겨 먹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우리도 뱀장어를 먹었다. 매천 황현(1855∼1910년) ‘매천속집’의 ‘밀양 효자 박기재’ 이야기다. 박기재의 할머니가 풍진을 앓았는데 의원이 뱀장어가 좋다고 했다. 한겨울에 뱀장어를 구할 도리가 없어 박기재가 얼음을 손으로 긁고 있는데 갑자기 얼음이 갈라져 뱀장어가 나타났다. 그 뱀장어를 올리니 할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밀양 효자 박기재’의 뱀장어는 민물장어다. 겨울철, 손으로 긁어야 할 정도의 얼음은 개울이나 강이다. 박기재의 장어는 민물장어다. 무태장어, 갯벌장어 등도 있다. 무태장어는 제주도 산 민물장어(뱀장어)다. 갯벌장어는 양식한 뱀장어를 갯벌에 일정 기간 풀어둔 것을 말한다. 양식 뱀장어와 큰 차이는 없다.영일만검은돌장어영어조합법인 김영운 회장.포항 검은돌장어 축제26~28일까지 개최도구해수욕장 일원돌장어는 포항 구룡포(포항시 동해면 흥환리) ‘검은 돌장어 마을’의 특미다. ‘돌장어’는 구룡포 언저리 검은 바위, 돌이 많은 곳에서 자란다. 이 지역은 물이 차고, 물살이 세다. ‘검은 돌장어’의 색깔이 검고, 맛이 찰진 이유다. ‘영일만검은돌장어영어조합법인(회장 김영운)’은 매년 ‘검은돌장어 축제’를 연다.올해는 도구해수욕장 일대에서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린다. ‘검은돌장어 축제’에서는 여러 종류의 돌장어 음식을 시식할 수 있고, 전문가들이 개발한 레시피도 배울 수 있다. 특히 후릿그물을 당기며 ‘맨손으로 검은 돌장어 잡기’는 짜릿한 손맛을 만끽하는 축제의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영일만검은돌장어축제/마을: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회장: 김영운(영일만검은돌장어영어조합법인)/행사일시: 7월26일(금)~7월28일(일)/장소: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해수욕장/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7-10

꽃다발처럼 향기롭고 보자기처럼 풍성하다 입 안 가득, 그 천가지의 맛

상추쌈을 좋아한다. 돼지 불고기 얹은 상추쌈, 마늘, 된장과 더불어 먹는 고등어구이 상추쌈, 맨밥에 강된장만 얹은 상추쌈도 좋다. 세상의 모든 상추쌈을 좋아한다.상추쌈은 슬프다. 아린다. 쓰라리다. ‘경북매일’ 2015년 6월 8일 기사다. 제목은 ‘6월의 울림, 명예로운 보훈을 기대하며(필자 이칠구 전 포항시의회 의장)’다.“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고 이우근 학도병.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재학 중. 편지를 다시 쓰지 못했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 전사한 학도병의 상의 윗주머니에 남아 있었던, 부치지 못한 편지. 책으로 소개되었고, 영화 ‘포화 속으로’의 소재가 되었다.궁금했다. 별 것 아닌 상추쌈. 전쟁터 학도병의 마지막 편지에서 콕 집어 이야기했다. 왜 수많은 음식을 두고 하필이면 상추쌈일까? 의문을 풀 수 없었다.“그까짓 상추쌈”이라고 가볍게 내칠 것은 아니다. 상추는 ‘싸서’ 먹는다. ‘넣어서’ 먹지 않는다.‘싸서’는 열린 문화다. 넓게 펼친 상추 위에 무엇이든 얹는다. 돼지고기, 고등어, 마늘, 쪽파, 된장, 강된장, 고추장, 된장찌개…. 쇠고기를 얹어도 되고, 닭볶음을 얹어도 된다. 모양도 양도 정해지지 않았다. ‘열려 있는 상추’에 아무것을 얹더라도 탓하는 이는 없다. 상추쌈은 한식을 제대로 보여준다.석학 이어령 선생의 ‘보자기 인문학’을 소개하는 서평의 한 부분이다. 긴 내용을 인용한다. 제목은 ‘보자기로 쌀 것인가, 가방에 넣을 것인가!’이다.“(전략) 일상의 소재들 가운데 ‘보자기’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점을 읽어냈다. (중략) 전통문화 속의 보자기를 무엇이든 감쌀 수 있는 융통성 있고 포용적인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시킨 것이다./저자는 어린 시절 책보로 사용하던 보자기와 네모난 책가방을, 또 한복과 양복을 비교한다. 전자는 물체(사람)를 ‘싸는’ 반면, 후자는 미리 모양이 잡혀 있어 물체(사람)를 ‘넣는’ 특성을 갖고 있다. (중략) 한국인은 ‘싸는’ 민족으로 ‘보자기형’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인데, 저자는 이런 특성이 현대의 양극적 사고 체계와 사회 시스템을 극복할 문화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중략) 아이를 요람과 같은 상자가 아니라 포대기로 감싸 업어주는 한국의 보자기 형 문화를 통해 싸고 통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도시 역시 획이 나뉜 계획도시가 아닌, 모든 것을 감싸는 도시가 미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모든 정형성을 넘어서 융통성을 주어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때 비로소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후략)”상추쌈은 보자기 문화다. 베트남, 중국 등의 춘권(춘취안, 春卷)이 우리 상추쌈과 비슷하지 않으냐고 묻는 이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춘권은, 얇은 피에 여러 채소를 넣고 싸서 먹는다. 땅콩가루 등이 들어간 소스도 정형화되어 있다. 내용물을 선택할 수 있는 상추쌈의 유연성을 흉내내지 못한다.한국인의 상추쌈은 삼겹살 구이에서도 빛을 발한다. 상추를 홑겹으로 먹는 이도 있고, 반드시 두 장을 겹치는 이도 있다. 들깻잎, 쪽파, 마늘, 쑥갓 등은 필수 식재료지만 선택사항이다. 3명이 앉으면 3종류의 상추쌈이, 4명이 모이면 4종류의 상추쌈이 있다. 정형화된 춘권은 상추쌈의 다양함을 따르지 못한다.남자든 여자든 상추쌈을 만나면 자연스레 입을 가능한 한 크게, 한껏 벌린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상추쌈 먹는 법을 따로 배웠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 시대에만 그렇게 먹는다고? 그렇지도 않다.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왕족 출신으로 경기도 안산 수리산 기슭에서 서민으로 살았다. 옥담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시도 많이 남겼다. ‘옥담사집_만물편_어물류’ 중 밴댕이[蘇魚, 소어]에 대한 내용 중 상추쌈, 보리밥이 등장한다.“(전략) 밴댕이가 어시장에 가득 나와/은빛 모습이 촌락에 깔렸네/상추쌈으로 먹으면 맛이 으뜸이고/보리밥에 먹어도 맛이 좋아라 (후략)”밴댕이, 상추쌈, 보리밥의 세 박자가 잘 맞는다. 오늘날 상추쌈에 고등어구이 얹는 걸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옥담이 살았던 17세기 초반에 이미 보리밥, 밴댕이를 얹는 상추쌈이 흔했다.갈암 이현일(1627∼1704년)은 조선 후기 거유(巨儒)다. 퇴계 학통을 이었다. 외조부는 경당 장흥효, 아버지는 석계 이시명이다.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이 어머니다. 상추에 대해서 시를 남겼다. 제목부터 ‘상추쌈 먹는 걸 희롱하는 글’이다. 근엄한 유학자가 한낱 상추쌈을 소재로 시를 남겼다.“(전략) 푸른 광주리를 통째로 삼켜 뱃속에 넣고 싶지만, 목구멍은 밴댕이 구운 걸 좋아한다네. 더불어 먹을 좋은 장이 없음은 한스럽지만(후략)”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평생 세 번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첫 번째가 짧았던 서산 해미의 유배, 세 번째가 전남 강진으로 떠났던 17년간의 유배다. 두 번째는, 1801년 신유사옥으로 시작된 포항 구룡포(영일현 장기)의 220일간 유배다. 이때 다산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그중 하나가 ‘다산시문집 제4권_시(詩)_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章)’이다.“(전략) 일찍 자는 첨지를 발로 차 일으키며/풍로에 불 지피고 물레도 고치라네/상추[萵葉]쌈에 보리밥을 둘둘 싸서 삼키고는/고추장[椒醬]에 파 뿌리를 곁들여서 먹는다/금년에는 넙치[比目]마저 구하기가 어려운데/잡는 족족 말려서 관가에다 바친다네 (후략)”‘첨지’는 벼슬을 하든 않든, 남편을 부르는 ‘애칭’이라고 적었다. 당시에도 상추쌈과 보리밥, 고추장, 파 뿌리 등을 더불어 먹었다.‘넙치[比目, 비목)’는 광어인지 가자미인지 불분명하다. 눈이 한쪽에 붙어 있는 생선들은 모두 ‘비목’이라고 했다. 광어, 가자미를, 옥담 이응희처럼, ‘밴댕이+상추쌈’의 형태로 먹었는지도 불분명하다.조선 말기 양명학자 경재 이건승(1858∼1924)도 상추쌈을 이야기한다.“상춧잎은 손바닥 같고,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 이것은 입을 속이는 법. 부른 배를 만지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라고 했다.‘입을 속인다’는 표현은 ‘고기를 먹고 싶으나 채소로 입을 속여 맛있다고 여긴다’라는 뜻이다. 점잖은 유학자가 현미밥 상추쌈을 ‘열 몇 쌈’이나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정겹다.옥담과 갈암, 다산, 경재 사이에는 약 300년쯤의 시차가 있다. 긴 세월 동안 상추쌈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상추쌈이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다. 상추도 우리 고유의 품종은 아니다. 외래종이다.조선 말기, 운양 김윤식(1835∼1922)은 ‘운양집’에서 “중국에서는 4월에 상추로 밥을 싸 먹는 것을 타채포(打菜包)라고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도 상추쌈을 싸 먹는 일이 있다”고 했다.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현재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다양하게 상추쌈을 먹지 않는다. 먹는 이가 재료를 선택하고, 모든 재료를 섞어서 싸 먹는 상추쌈은 이제 우리만의 음식, 한식이 되었다.상추는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한반도에 전해진 상추는 고구려 시대 빛을 발한다.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 상추의 역사가 등장한다.“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추다. 살펴보건대, 와거(萵苣)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한치윤은 청나라 문신 고사기(高士奇, 1645∼1704년)가 쓴 ‘천록지여(天祿識餘)’를 인용하여 상추를 설명한다. 수나라와 거래를 한 나라는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다. ‘와거’는 상추의 옛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부로’ 혹은 ‘부루’라 불렀다. ‘부루’라는 이름은 지금도 사용한다.송나라 팽승(彭乘, 985∼1049년)은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 “와채(萵菜)는 와국(萵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했다. ‘상추 와(萵)’는 ‘높을 고(高)’와 비슷하다. ‘와국’은 없다. 북송 때 사람인 도곡(?∼970)이 쓴 ‘청이록(淸異錄)’에는 상추를 두고, “고국(高國)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적었다. ‘와국’은 ‘고국’이고 바로 고구려다.‘이우근 학도병의 상추쌈’은 우연이 아니다. 상추, 상추쌈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상추, 상추쌈의 뿌리는 깊고 넓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7-03

철립 테두리에 구워먹다 어느 순간 섞어 넣고 끓였다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강했다. ‘벌’도 무거웠지만 ‘열망’이 벌을 넘었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사형, 전 재산을 몰수한다”라고 해도 소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숙종 시대를 지나며, 소를 도축하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백정’으로 굳어진다. 그 이전에 사용했던 ‘화척’ ‘양수척’ ‘재우적(宰牛賊, 소 도축하는 도둑)’은 서서히 사라진다. 이민족으로 지냈던 이들이 조선 사회에 동화된다. 원래는 ‘도둑’이라고 불렀다. 우리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은 하층민이지만 조선사람이다. ‘산속에서 모여 살면서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동냥질, 도둑질하던 이민족’이 조선사람이 된 것이다.소나 짐승을 도축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바뀌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말기까지도 민간의 사사로운 소 도축은 금지 사항이었다. 여전히 쇠고기의 이름은 ‘금육(禁肉)’, 먹지 말라고, 법적으로 금하는 고기였다. 법은 있되, 단속이 느슨해졌다. 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은 것이다.조선 초기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농사용 소를 도축하여 쇠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단속이 엄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1418년)5월의 기록이다.“(전략) 소경공(昭頃公)이 평소에 쇠고기[牛肉]을 좋아하였으니, 삭망제(朔望祭)에 내가 이를 천신(薦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물건이 심히 크니 가볍게 쓸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혹은 연빈(燕賓)이 있거나 혹은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 이를 천신하는 것이 어떠할까 한다.(후략)”연빈은 중국 사신이다. 종묘 제사는 왕실의 어른을 모시는 것이다. 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집권 18년. 태종은 힘이 강한 군주였다. 막내아들이 소경공, 성녕대군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성녕은 열네 살에 죽었다. 삭망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다. 귀한 아들의 삭망제에 쇠고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소를 도축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중국 사신, 종묘 제사에 소를 도축한다. 그때 조금 남겨서 소경공의 제사에 쓰자고 말한다. 소, 쇠고기는 이렇게 귀했다.조선의 1차 성장기는 태조 이성계(1335~1408년)로부터 성종(1457~1494년)까지의 100년간이다. 연산군, 중종 조를 지나면서 불과 100년 후에 임진왜란을 겪는다. 조선의 쇠퇴기다. 임진왜란 후 숙종 조까지 조선은 두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는 전쟁 피해고 나머지는 지구 전체가 겪었던 소빙하기의 대기근이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치료하기도 전에 병자호란 등 모두 네 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년) 등 4대 기근을 이 시기에 겪는다. 숙종 조를 지나며 정조대왕이 돌아가시던 1800년까지 조선은 제2의 르네상스를 맞는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의 ‘제2 르네상스’ 시기 쇠고기 문화가 서서히 나타난다.무명자 윤기(1741~1826년)의 ‘무명자집_시고 제3책_시_시월 초하루의 고사’의 한 구절이다. 무명자는 영조 시절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정조, 순조 등 세 임금을 모셨다. 18세기 중반에 태어나 19세기 초반에 죽었다.시월 초하루는 길한 날이니/옛 풍속이 또한 볼만했지/예법 있는 가문에선 묘사에 정성 쏟고/부유한 집안에선 난로회 단란하네(富戶煖爐團)‘난로단(煖爐團)’은 난로를 피워두고 모여 앉는 자리를 말한다. ‘난로회(煖爐會)’ 혹은 ‘난란회(煖暖會)’라고도 한다. 난로회는, “불판을 피우고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다”는 게 뼈대다. 당시로는 퍽 호화로운 풍습이었다. ‘무명자 윤기의 난로회’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의 풍습이다.난로회는 우리 풍습이 아니다. 송나라에서 시작된 풍습이다. 18세기, 한반도에 새롭게 등장했다. 난로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홍석모(1781∼1857년)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에 나타난다.18세기 서울, 경기 지역에도 난로회의 풍속이 유행하여 10월 1일이 되면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번철(燔鐵)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 계란, 파, 마늘,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화롯가에 둘러앉아 구워 먹었다. 또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 오이, 채소 나물 등의 야채와 계란을 섞어 전골을 만들어 먹는데 이것을 열구자탕(悅口子湯) 또는 신선로(神仙爐)라고 부른다고 하였다.시기적으로 18세기라고 못 박았다. 기록은 19세기 중반이지만 난로회의 시기는 18세기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가 집권기다. ‘난로회’의 날짜는 10월 1일이다. 음력이니 늦가을, 초겨울이다. 숯불을 피워 놓고 번철(燔鐵)에 고기를 굽는다. 오늘날 같이 가는 석쇠는 드물었다. 번철은 무쇠 솥뚜껑 같은 것이다. 전을 굽는 그릇이라고 전철(煎鐵)이라고도 한다. 기름, 달걀과 여러 가지 양념으로 간을 한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다.“소의 숫자는 유한하니, 화수척, 백정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도축을 하면 언젠가 소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절박하게 상소했던 조선 초기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보았다면 기겁할 풍경이다.난로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국 사행(使行)이 빈번해지면서 새로운 소육(燒肉) 조리법인 난로회가 조선에서 유행하였다”는 내용도 남아 있다. 18-19세기 청나라에서 보았다고 했다. 만주족의 청나라 풍습이라는 뜻이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난로회가 ‘송나라 풍습’이라고 못 박았다. 근거도 뚜렷하다. “여원명(呂原明)의 ‘세시잡기(歲時雜記)’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세시잡기(歲時雜記)”에 “연경 사람들은 10월 초하룻날에 술을 준비해 놓고 저민 고깃점을 화로 안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마시며 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들이 난로에 피울 숯을 대궐에 올리고 민간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갖는다”라고 하였다.여원명은 여희철(Lü Xizhe, 呂希哲, 1039~1116)로 송나라 관료다. ‘원명(原明)’은 호다. ‘세시잡기’는 송나라의 풍습을 적은 것이다. ‘동경몽화록’의 저자 맹원로(孟元老) 역시 송나라 사람이다. 송(宋) 휘종(徽宗) 2년(1103년) 아버지를 따라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로 왔다. 동경(東京)은 개봉이다. 그 후 금(金)나라의 침입으로 남쪽 지방으로 피난 가서 산다. 여원명이, 자신이 살던 동경, 개봉의 번화함을 추억하며 기록한 것이 ‘동경몽화록’이다.구운 고기, 불고기로 짐작할 수 있는 ‘소육(燒肉)’은 이전 우리 기록에도 있지만, 18세기를 지나며 난로회와 연관되어 수시로 나타난다. 민간, 궁중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풍습이 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의 ‘연암집_제3권_공작관문고_만휴당기’의 일부다.“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燒肉作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후략)”연암이 대단한 부호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로회는 가능했다. 민간에 널리 퍼졌다는 뜻이다. 난로회는 ‘난란회’ ‘난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소육(燒肉)’은 고기를 굽는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야키니쿠’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의 불고기가 일본 야키니쿠에서 시작되었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조선 시대 여러 기록에 ‘소육’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부르는 이름이야 어떻든, 고기를 굽는 것, 불고기는 일제강점기 훨씬 전에 있었다. 특히 파, 마늘, 기름, 후춧가루 등을 양념으로 사용한, 오늘날의 불고기와 비슷한 것들도 유행했다.‘철립위(鐵笠圍)’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철립’은 쇠로 만든 군사들의 모자다. 모직 등 천으로 만들면 ‘벙거지모자(氈笠, 전립)’다. 철립위는 철립의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전립투(氈笠套)’는 쇠로 만든 전골냄비다.철립위는 아래로 움푹한 그릇이다. 마치 전립, 벙거지모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 둥근 테두리에 고기 놓고 굽는다. 움푹한 곳에는 각종 채소, 양념 등을 넣고 끓인다. 테두리의 고기가 익으면, 움푹한 곳의 국물에 찍어 먹는다. 석쇠나 번철이 아니라 벙거지모자 뒤집은 것 같다. 어느 순간, 고기와 채소, 양념을 벙거지모자 같이 생긴 ‘전립투(전골냄비)’에 섞어 넣고 끓였다. 섞는 것은 ‘골(骨)’이다. 비빔밥을 ‘골동반(骨董飯)’이라 부른다. ‘전립투+골’이다. 전립투골을 줄여서 전골(氈骨)이라 부른다. ‘전립투골’은 ‘전립골’ 혹은 ‘벙거짓골’이라고도 불렀다. 역시 전골이다. 불고기[燒肉, 소육]는 철립의 테두리에 고기를 구워서 중간 움푹한 곳의 장물에 찍어 먹는 구조다. 전골은 움푹한 곳에 모든 식재료를 다 넣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입을 즐겁게 한다고 열구자탕(悅口子湯) 혹은 신선로라고 부른다고 했다. 불고기와 전골은 다른 음식이지만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6-19

소 도살은 엄벌…조선 정조대왕 때에야 고기 문화 시작

이른 새벽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목소리. “쟈, 오늘 먼 길 가는데 콩대도 좀 넣고. 여물 잘 끓여서 멕여라.” 아버지의 대답. “예, 그러잖아도, 콩대 마이 넣고, 보리쌀도 쫌 넉넉하게 넣니더.”1960년대 후반 어느 겨울 새벽, 외양간에는 누렁이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우시장에 팔려나간 누렁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오백 원 지폐 한 뭉치와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소는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경(牛耕). 농사의 주요 도구였다. 겨울철, 송아지는 열심히 먹고 몸을 불린다. 봄철, 얼마쯤 자란 송아지는 코뚜레를 꿴다. 일할 준비를 한다. 한 해 동안 일하고 몸을 불리며 송아지는 점점 자라 슬슬 소의 모습을 갖춘다. 더러는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에도 우리 논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겨울날의 어느 이른 새벽, 다 자란 소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시장으로 향했다.한반도 소의 역사는 길다.소는, 농가의 ‘가족’이었다. 황소는 20인분의 일을 해낸다. 장정 몇이 파내지 못하는 큰 돌을 소는 쟁기질 한 번으로 뽑아낸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를 농사의 도구로 이용했다. 이밥에 고깃국은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다. 남쪽은 1970년대에 이루었고, 북쪽은 아직도 ‘소망’으로 남았다.농경민족이다. 부여, 고구려 등 기마, 수렵민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한반도로 들어온 우리 선조들은 농경(農耕)을 업으로 삼았다. 고기를 도축하고, 먹는 북방 수렵민족의 피는 희미해졌다. 10세기 말, 북방의 기마, 수렵민족이 한반도에 나타난다.눌재 양성지(1415~1482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고, 많은 서적,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 도살’을 금하자는 양성지의 상소문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1456년(세조 2년), 1467년(세조 13년), 1469년(예종 1년)이다.소 도살은 심각한 문제였다.더 큰 문제는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는 점이다. 양성지는 십수 년 동안 여러 차례 ‘소 불법 도살 문제’를 엄중하게 제기한다. 그동안 양성지는 집현전 직제학, 대사헌, 공조판서 등으로 관직도 달라진다.1456년 3월, 양성지의 상소문이다. 제목은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 오경, 문묘 종사, 과거, 기인 등에 관한 상소’다. 긴 내용을 인용한다.“(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韃靼)’ (중략)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중략)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중략)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중략)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중략)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 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중략)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백정,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이름이 여럿이다. 화척, 재인, 달단, 백정 등이다. 하는 일은 무엇인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소를 도축한다. 일거리가 없으면 동냥질, 도적질에 나선다. 언제 한반도에 왔는가? 이미 내륙 혹은 국경 언저리에 있었다. 거란이 침입하니 앞잡이가 되어 거란의 고려 침공을 돕는다. ‘전조(前朝)’는 고려다. 거란의 1차 고려 침략은 993년이다. 양성지의 상소문과 비교하면 460여 년 전이 일이다. ‘오래된 자는 5백 년’이란 표현이 맞다. 지금으로 치자면 1,100년 전이다. 한반도에도 북방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고기 문화를 한반도에 전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이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고기 다루는 솜씨가 허술하다”라고 한 것은 1123년 무렵이다. 거란의 고려 침입 130년 후다. 여전히 한반도의 우리 선조들은 고기 다루는 솜씨가 늘지 않았다. 생활 습속이 다른 이민족은 고기를 도살하고 먹었지만 고려, 조선은 이단시한다.양성지가 상소문을 올린 조선 초기에는 이들이 사회 문제였다. 화척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산다. 결혼도 자기들끼리 한다. ‘강원도, 경상도’에 산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맥 산악지대이기 때문이다. 산에는 짐승이 있다. 할 일이 있다. 외부에서 관군이 오더라도 버티기 쉽다. 거꾸로 관군들은 이들을 쫓기 힘들다. 차라리 깊은 산속에 사는 것이 낫다. 한양이나 대도시에 나타나면 불법 도축하고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킨다.조선 정부는 이들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고 농사에 편입되기를 기대한다. ‘농상’은 농사짓고, 뽕나무 기르며 누에 치는 삶을 뜻한다. 화척들은 호락호락 조선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다.‘달단(韃靼)’은 ‘가죽을 잘 다루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달단은 ‘타타르(tatar)’ 혹은 ‘타르타르(tartar)’ 족이다. ‘타타르 스테이크’는 날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다. 우리의 육회와 닮았다. 타타르 족은 터키, 동유럽 등으로 이주한다. 유목, 기마, 수렵민족이다.1467년(세조 13년) 1월, ‘대사헌 양성지’가 또 상소문을 올린다. 제목은 ‘농우 도살 금지에 관한 상소문’이다.(전략) 남산의 소나무는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설혹 없다손 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외(中外)의 소[牛畜]는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데 자산(資産)이 되니,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곡식을 생산하는 소가 없다면, 곡식을 들여다 저장하는 창고가 있더라도 이를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옛날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경외(京外)의 양민(良民)들도 모두 이를 잡으며, 옛날에는 흔히 잔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 안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이를 잡고, 옛날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이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에서 사서 이를 잡습니다. 백정은 일정한 수(數)가 있으나 양민은 그 수가 무한(無限)하며, 잔치는 일정한 수가 있으나 판매하는 것은 끝이 없으며, 남의 것을 훔쳐서 잡는 것은 일정한 숫자가 있으나 소를 사서 잡는 것은 무궁(無窮)하니, 일정한 수효가 있는 소를 무궁한 날에 끝없이 잡는다면, 반드시 남산의 소나무와 같이 다 벤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소를 잡는 도적[宰牛賊]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거골장(去骨匠)’이라 칭하고, 여염(閭閻)의 곳곳에 잡거(雜居)하면서 소를 잡아도 대소(大小) 인리(隣里)에서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략) 무릇 소를 잡은 사람은 (중략) 수종(首從)을 가리지 말고 모두 다 즉시 사형에 처하되, 그 처자(妻子)와 전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소를 잡는 것을 고(告)한 자는 재산(財産)으로써 상(賞)을 주되( 후략)살벌하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주범이든 종범(從犯)이든 사형이다.신고하면 범인의 재산을 신고자에게 준다. 남산의 소나무가 없어지듯이 조만간 소가 씨가 마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전히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 잡는 도둑, ‘재우적’이라고 하더니, 드디어 소 잡는 장인, ‘거골장’이라고 한다. 민간인까지 소 불법 도축에 나선다.1469년(예종 1년) 6월, 다시 양성지의 상소다. 더 절박하다.우선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楊水尺)이라는 것은 전조(前朝)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江都) 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충렬왕(忠烈王)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絃歌)의 풍습과 재살(宰殺)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후략)양수척은 고려 초기에 이미 있었다. 후삼국 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강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조를 이른다.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화척이었다. ‘현가의 풍습’이라고 못 박았다. ‘현가’는 거문고 타고, 노래 부른다는 뜻이다. 광대, 재인, 기생 등이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농사짓는 소를 도살하며, 무리 지어 노래 부르고 논다. 일은 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한반도의 쇠고기 문화는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인 정조대왕 시절에야 고기 먹는 문화가 서서히 정착된다. 무려 300여 년 후다.그동안 소의 불법 도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살은 늘어났다. 거꾸로 법 적용이 느슨해졌다. 양성지는 “소가 어느 날 남산의 소나무같이 없어지리라”고 경고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국왕 정조대왕부터 신하들과 고기 굽는 불판 앞에 앉는다. 난란회(煖暖會) 혹은 난로회(煖爐會)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6-12

막걸리 중 으뜸은 투료다, 강물에 풀어 모두 함께 마시는…

봄날이었다. “병아리 손도 빌린다”라고 할 정도로 바쁜 모내기 철이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병아리 대신 들일에 ‘동원’되었다. 새참으로 내놓을 막걸리 배달. 대단한 양은 아니고 작은 양은 주전자 둘이었다. 양은 주전자 주둥이에 젓가락 네댓 벌을 꽂고 제법 먼 논둑길을 따라 우리 논으로 막걸리 배달을 갔다.저 멀리 모내기를 하는 우리 논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찰랑 막걸리가 움직였다. 주전자 주둥이로, 뚜껑 사이로, 막걸리가 조금씩 흘렀다. 아깝다. 귀한 술이 쏟아지다니. 논둑 언저리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다. 의외로 달싹했다. 몇 모금을 더 마셨다. 그 순간이 기억의 끝이었다. 막 모내기가 끝난 어느 논의 어린 벼들이 비스듬히 보였다.버드나무 그늘이었다. 겨우 실눈을 뜨다가 동네 아재와 눈이 마주쳤다. “쟈, 이제 술 깼는가 보다. 조선 천지 술은 니가 다 마셨제? 잘 잤나? 머리 안 아프나?”완패. ‘막걸리와의 첫 만남’은 처참했다.세상의 모든 술은 두 종류다. 발효주(醱酵酒)와 증류주(蒸溜酒)다. 발효주는 곡물이나 과일 등을 삭혀서 만든 술이다. 증류주는 발효주를 가열 처리하여 한차례 혹은 두어 차례 증류하여 얻는다.막걸리는 발효주다. 재료는 쌀이나 밀, 좁쌀 등이다. 굳이 곡물을 고집하지 않고 과일로 빚어도 된다. 도수는 대략 18~19도 정도다. 탁주, 청주, 막걸리, 전통주 등등은 세금을 매기는 표준이 된다.어느 칼럼에 “막걸리는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시는 술”이라고 했더니 반론이 있었다. “우리 술인 막걸리를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시는, 저질의 술로 깎아내리지 말라”는 반박이었다.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신다”라는 표현이 술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발효 과정을 거친 후, 반드시 숙성시킬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숙성을 시키든 않든 모두 막걸리다.막걸리는 열린 술이다. 불확실성을 가진 술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막걸리는 늘 ‘불확실’하다.누룩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서 고두밥과 섞는다. 옹기 등에 술을 담근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술이 괴기 시작한다. 뽀글뽀글 술이 숨을 쉰다. 발효 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 거품이다. 막걸리는 불확실하다. 같은 날, 한 사람이,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담근 술도 맛이 다르다. 이전에 담갔던 술과 오늘 담근 술의 맛, 색깔 등이 다른 경우도 흔하다. 술을 대량으로 담고, 유통, 판매하는 경우엔 견디기 힘들다. 일본식 입국(入麴)방식을 택한다. 정제된 효모(酵母)를 고두밥과 섞는다. 밑술이다. 밑술을 다시 고두밥과 섞는다. 일본 방식은 일정한 맛을 지닌 술을 보장한다. ‘과학적’이라고 부른다. 일본 유학한 사람들이 ‘과학적 방식’을 널리 퍼뜨렸다. 늘 같은 술을 대량생산하는 일본식 ‘닫힌 방식’이다.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5년)의 시조다.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 온다.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 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박주’는 막걸리다. 그중에서도 품질이 떨어지는 하급품이다.인위적으로 만든 짚방석 대신 낙엽이다. 인위적인 솔 불 대신 어제 진 달이다. 낙엽은 짚방석보다 불편하다. 달빛이 솔 불보다 밝을 리 없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자연’이다. 가지런히 줄을 맞춘 ‘과학적인 인위’가 아니다. 한석봉은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지만,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다. 유달리 가난하지는 않았다. ‘짚방석과 솔 불’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주’ ‘낙엽’ ‘솔 불’은 자연스러운 자연이다. 마치 막걸리같이 자연스러운 ‘불확실함’이다.발효주를 만든 다음, 곱게 거른 것은 청주다. 오늘날 ‘일본 사케’는 대부분 청주(淸酒), 맑은 술이다. 곱게 걸렀을 뿐 물을 타지 않았으니 도수는 16~17도 정도다.‘전통주’의 이름을 달고 시판되는 우리 술 중에는 12도 언저리의 술도 있다. 발효 과정에서 발효를 멈춘다. 당화(糖化)된 부분들을 더는 알코올로 변하지 않게 한다. 흔히 발효를 ‘끊는다’라고 표현한다. 단맛이 그대로 술에 남는다. 도수는 낮지만, 단맛이 강하다. 술의 단맛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단맛 때문에 이런 술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우리 선조들은 ‘좋은 막걸리’와 질이 낮은 막걸리를 굳이 가르지 않았다.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다.배송지(裴松之, 372~451년)가 주석을 단 ‘삼국지 오서 주유전(三國志 吳書 周瑜傳)’에 순료가 나타난다. 오나라 주유의 인간성을, 좋은 막걸리, 순료에 비유한다. 오(吳)나라 정보(程普)가 주유(周瑜)를 평한다. “주유와 사귀다 보면 마치 순료를 마신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절로 훈훈하게 취해 온다”고 했다. “마치 순료를 마신 것처럼 저절로 술에 취한다[若飮醇醪不覺自醉]”를 줄여서 ‘음순자취(飮醇自醉)’라고도 한다.순료는 ‘진땡이 술’ ‘전국 술’ ‘물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양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술의 신맛을 막기 위하여 풀을 태운 재 등을 술에 넣었다. 시중 유통 막걸리는 6도다. 쌀로 빚은 원주(原酒)는 18도 전후다. 찹쌀을 사용하면 19도 술도 가능하다. 물을 섞어서 술의 알코올 농도를 6도 정도로 낮춘다. 시중에 유통되는 막걸리는 물 섞은 막걸리다. 오래전에는 재 등을 넣었고, 지금은 농도를 낮출 요량으로 물을 섞는다. 물이나 재를 넣지 않은 술이 무회주다. 순료, 전국 술이다. ‘순(醇)’은 ‘농주(濃酒)’ 즉, 엷지 않고, 짙은 술이다.한석봉은 박주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굳이 순료를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순료, 좋은 술을 알았고 또 마셨다.조선 성종 2년(1471년) 6월, 대사헌 한치형이 17개 항의 상소를 올린다. 그중 환관[宦者, 환자]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있다(조선왕조실록).“대개 환자(宦者)는 무리가 모두 견식이나 성품이 영리하고, 말솜씨가 유창하여 밝혀주고,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엿보아 지취(志趣)를 받들고 비위를 낮추어 명을 받으면 어기고 거슬리는 근심이 없고, 일을 시키면 뜻에 맞고 만족스럽게 하는 능함이 있어, (중략) 누구인들 술수 속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중략) 순료(醇醪)를 마시면서 그 취(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서(후략)”순료, 좋은 막걸리의 폐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시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1433년) 10월의 기록이다. 제목은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이다.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순료와 다른 술은 촌료(村醪), 박주(薄酒), 산료(山醪) 등으로 표기했다.시골의 막걸리, 엷고 가벼운 술, 산촌의 막걸리 등이다. 순료가 좋은 술이지만 촌료, 박주, 산료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갈암 이현일(1627~1704년)은 조선 후기 대유(大儒)다. 그의 시 ‘봄날 안국화 명하(命夏)와 시냇가에 노닐며’에 산료가 나타난다(갈암집 속집).한낮이라 들판엔 안개와 이슬 걷혀/벗들과 천천히 거닐며 한가히 노닌다/산촌 막걸리 기울이매 호기가 일어나/내 삶이 이미 백발인 줄도 몰라라큰 유학자도 막걸리를 한 잔 마시니 젊은 호기가 되살아난다. 산책을 하고, 산촌 막걸리를 나눠 마신 ‘벗’ 안명하(安命夏, 1682∼1752년)는 호가 송와, 갈암의 문인이다. 스승과 제자가 들길을 거닐며 거친 막걸리를 나눠 마신 것이다. 갈암 이현일은 고향이 영일(지금의 영덕)이다. 말년에 유배에서 돌아와 안동 임하, 영덕 등에서 지냈으니 막걸리를 나눠 먹은 장소도 이 부근일 가능성이 크다. 1700년, 안명하는 19세다. 술을 마셔도 될 나이였을 것이다.조선 후기 문신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의 막걸리는 애틋하다. ‘농암집’ 제5권에, 헤어지며 마시는 시골 막걸리가 나온다. 제목은 ‘이별을 앞두고 즉흥으로 짓다’이다.촌 막걸리[村醪] 사오니 병마개는 풀 뭉치/이별 술 따르는데 해 저문 산은 푸르네/그대도 봄 강 경치 좋아함을 알겠으니/미수(渼水) 정자에서 우리 다시 만나세막걸리는 가리지 않는 술이다. 그중 으뜸은 막걸리를 던지다, ‘투료(投醪)’다.‘여씨춘추 순민(呂氏春秋 順民)’에 전하는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장수가 막걸리를 한 병 선사 받았다. 차마 혼자서 먹기는 미안하다. 막걸리를 강물에 풀어서 병사들과 같이 마셨다. 막걸리는 ‘더불어 먹는’ 술이다. 하물며, 좋은 술, 나쁜 술로 가를 것도 아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29

물회, 단맛과의 싸움

병아리는 태어나서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알고 따른다. 외지인에게 포항물회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포항물회’가 ‘진짜 포항물회’가 된다. 불행히도 처음 먹어본 포항물회가 수준 이하면? 포항물회는 맛없는 음식, 엉터리가 되고 만다.포항물회 사이에 맹물과 고추장, 물엿 덩어리 초고추장, 육수 슬러시를 둘러싸고 ‘다툼’이 진행 중이다. 외지 관광객들은 알 리가 없다. 포항 토박이들은 알면서 짐짓 모른 체한다. 몇 차례 물어보면 “나는 이 집 간다”라고 말한다.회(膾)와 물회 이야기다. 물회도 회의 한 종류다. 회의 역사는 길지만, 물회의 역사는 짧다. 물회의 역사도 길 테지만, 상업화의 역사는 짧다. 조선 시대 회 이야기로 글을 연다.◇ 금제작회(金虀斫膾)를 아시나요?두어 해 전, 어느 지면에 ‘금제작회’를 소개했다.“우리 생선회는 일본식, 일본에서 받아들인 문화”라는 말이 틀렸다고 이야기했다. 조선 시대에도 여러 종류의 회나 회 문화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금제작회’라고 했다.멀리서 보낸 햇생강 어찌나 고마운지/시냇가 별장 채마밭에서 금방 캐낸 것이리라/홀연히 생각나는 금강의 그 별미/불그스름 여린 싹들 금제작회(金虀斫膾) 맛이라니계곡 장유(1588∼1638년)의 ‘계곡선생집_제33권’ 칠언 절구 중 ‘차운하여 나응서에게 수답하면서 생강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다’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 금제작회가 나온다.햇생강을 보낸, 남간 나응서(1584∼1638년)는 문신으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했던 의병장이었다. 몇 차례 벼슬살이를 했지만, 생애 대부분을 향리에서 검약한 선비로 살았다.계곡 장유와 남간 나응서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이들이 아니었다. 선물로 보낸 ‘시냇가 별장 채마밭에서 캐낸 햇생강’이 대단한 물건이 아니듯이 ‘금제작회’ 역시 대단한 음식은 아니다.‘금제작회’는 ‘금제’와 ‘작회’다. 금제는 금빛이 나는 푸성귀 정도다. 시의 한 구절인 ‘불그스름한 여린 새싹’이 바로 ‘금제’다. 여뀌로 추정한다. ‘작회’는 잘게 썬 회다. 금제작회는 금제옥회(金虀玉膾)라고도 부른다. 금제옥회는 ‘좋은 채소를 곁들인, 뽀얀 회’다.문제는 금제작회에 덧붙인 설명이다. “서리 내린 뒤 석 자 미만의 농어[鱸魚]를 잡아 회를 뜬 뒤 향기롭고 부드러운 화엽(花葉)을 잘게 썰어서 묻혀 먹는 것”이라는, 덧붙인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서리 내린 후의 부드러운 꽃잎은 국화일 것이다. “국화, 국화 꽃잎도 먹느냐?”는 질문은 어리석다. 교산 허균(1569∼1618년)은 ‘도문대작’에서 서울(한양)의 계절 음식으로 ‘국화 화전(菊花 花煎)인 국화병(菊花餠)’을 손꼽았다.주변에 호사가, 호기심이 많은 이들이 있다. ‘금제작회’를 읽고, 죄다 연락이 왔다. 내용은 뻔하다. “빨리 농어를 구해서 국화 화엽에 찍어 먹어보자”는 것이었다.금제작회, 금제옥회는 특정한 회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좋았던 회를 일반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예나 지금이나 시(詩)는 얼마쯤의 ‘과장’을 더하기도 한다. 내용은 단순하다. ‘채소와 더불어 먹었던, 가늘게 썬 뽀얀 회’다. 이게 국화 꽃잎 운운하는 통에 대단한 회로 부풀려진 것이다.회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목재 홍여하(1620∼1674년)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향리의 큰 유학자였다. 벼슬도 높았지만, 안동, 예천, 상주 등 지금의 경북 북부 지방에 은거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목재집 제2권_시’에 나오는 ‘죽파헌(竹坡軒)의 여덟 경치를 노래하다’ 중 한 부분이다(시탄의 가을 낚시).푸른 마름 물가에서 고깃배를 저으니/하룻밤에 가을 물이 삿대 반쯤 줄었네/낚시 마치고 등해(橙薤) 가져오라 재촉하는데/석양에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번뜩이네예나 지금이나 낚시꾼들 혹은 낚시꾼 주변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다. 낚싯대도 챙기기 전에 회부터 찾는다. ‘등해(橙薤)’의 ‘등(橙)’은 귤, 등자 나무, 등자 나무 열매 등을 이른다. 귤은 제주 특산으로 구하기 힘들었으니 탱자 등 신맛이 나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해(薤)’는 염교다. 조선 시대 기록 여기저기에 귤이나 탱자 종류를 짓이겨 회와 더불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귤, 탱자와 더불어 염교도 회와 더불어 먹는 것이다. 더러 ‘등해’를 회와 채소를 모은 ‘생선회 모둠 세트’로 여기기도 한다. 역시 금제작회의 다른 버전이다.조선 시대에는 ‘가늘게 썬 회’를 최고로 쳤다. 시작은 중국 공자다.공자의 ‘논어_10편_향당_8장’에 ‘食不厭精 膾不厭細(사불염정 회불염세)’라는 표현이 나온다. “(공자께서는) 밥[食, 사]은 정히 지은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셨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셨다”는 표현이다.조선 시대 내내 이 문장은 두루 인용된다. 고종 시대, 경연에서도 이 표현은 나온다. 어린 국왕을 두고 노대신들이 묻고 설명한다. “‘공자께서 잘 지은 밥과 잘게 썬 회를 좋아하셨다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싫어하지 아니하셨다’라고 표현했을까요?”가 질문이다.답은 “굳이 구복(口腹)을 위하여 좋은 음식을 찾지 아니한다”이다. 잘게 썬 회가 좋지만, 맛있게 먹기 위하여 굳이 힘들여 찾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밥상에 앉아 반찬 평하거나 타박하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싫어하지 않다[不厭]’는 군왕과 유학자의 도리다.금제작회, 금제옥회도 마찬가지다. 잘게 썬, 채소 곁들인 회가 좋지만, 굳이 구복을 위하여 찾지 않는 것이 옳다.◇ 문제는 ‘단맛’이다포항물회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핵심은 단맛이다.어느 물회나 마찬가지다. 시작은 어부, 바닷가의 일상 음식이다. 물회의 대상은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흔하게 잡히는 생선’이다. 그중에서도 상품성이 떨어지는 잡어다. 포항물회는 가자미다. 가자미는 종류를 바꿔가며 1년 내내 잡힌다.포항에서 널리 먹었다는 ‘등 푸른 생선 물회’도 마찬가지다. 진귀한 생선이 아니라, 흔하게 잡히는 생선이다. 겨울철의 고등어, 청어, 방어 등이다.이른 아침 바다로 나간다. 바쁘다. 제대로 밥 먹을 틈이 없다. 논밭은 농부를 기다려 주지만, 바다는 어부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일을 마치고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더 바빠진다. 여자들도 한가하지 않다. 마땅히 밥상을 차리기 힘들다. 잡어 몇 마리를 뼈째 썬다. 고추장은 맛도 있지만, 생선 비린내를 가린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무 등을 썬다. 거칠게 썬 회와 고추장, 무 썬 것이 뒤섞인다. 비벼서, 밥 한술, 비빔 회 한 젓가락을 입에 넣는다.문제는 ‘국물’이다. 국물 없는 밥은 맨밥이다. 맨밥은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 멀리 타지로 떠나는 아들, 딸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먹이지 못한 ‘엄마’는 가슴에 못이 박힌다. 한민족에게 국물 없는 밥상은 없다. 회와 밥이 조금 남았다. 회에 맹물을 붓는다. 드디어 국물이 있는 밥상이 된다. 물회다.‘보이지 않는 싸움’의 시작은 ‘단맛’이다. 원형 포항물회는 달지 않다. 불행히도 외지 관광객은 단맛에 길들어 있다. 대부분 가게가 상당히 단 물회를 내놓는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단맛이 물회의 맛을 넘어선다는 점이다.단맛 물회와 전통 물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다. ‘액상과당 잔뜩 넣은 육수 물회’와 전통 고추장을 사용한 물회 사이의 경쟁이다. 외지 관광객은 알 리가 없다. 단맛을 좋아하는데 전통 고추장, 맹물을 만나면 “아무 맛이 없다”고 타박한다. 생선 고유의 맛을 즐기는 이가 단맛이 강한 물회를 만나면 “너무 달아서 입에 넣기 힘들다”고 불평한다.너무 달지 않은, 전통 방식 ‘고추장 비빔 회, 맹물’을 내놓는 몇 집을 소개한다.죽도시장 안의 ‘승리회식당’은 고추장으로 비비는 전통 물회가 가능하다. ‘포항물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북부시장의 ‘오대양물회’는 ‘고집’이 세다. 여전히 비빔 회를 고집하고, 손님이 육수를 찾으면 ‘얼음 몇 조각 넣어서 먹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 북구 여남동의 ‘태화횟집(태화회식당)’도 고추장, 맹물 물회가 가능한 집이다.북부시장 안의 ‘경아횟집’. 공간이 좁다는 점 빼고는 흠잡을 데 없다. 비빔 회를 고집하고, 가게 앞에서 회 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생선의 싱싱함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도구리 ‘세영자연산활어회’은 포항에서도 외진 곳에 있다. 형제가 생선 공급, 횟집 운영을 나눠서 한다고 들었다. 횟감이 아주 좋다. 구룡포까지 나갔다면 ‘해궁회타운’도 권할 만하다. 경치가 좋고 반찬도 정갈하다. 전통적인 고추장 물회가 가능하다.오래전부터 유명한 ‘새포항물회’ ‘포항특미물회’도 전통적인 고추장, 맹물 물회가 가능하다. 북부시장 부근, ‘명천식당’과 ‘울릉천부식당’은 ‘등 푸른 생선 물회’가 아주 좋다. ‘명천식당’은 물회에 생미역을 내놓고, ‘울릉천부식당’은 미역과 쪽파 혹은 썬 대파를 내놓는다. 두 집 모두 추천한다.회 맛을 넘어서는 단맛이나 참깻가루 대신 ‘금제작회의 국화잎’ 혹은 귤을 짓이겨 넣었던 상큼한 물회를 기대한다. 음식은 상상력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22

오이전과 참외 장아찌… 입맛 당기는 생소한 음식들

조금은 지저분한(?) 풍경으로 오이, 참외 이야기를 시작한다.1960년대 농촌, 초가집 마당 한 귀퉁이에 거름더미가 있었다. 열 살이 되지 않았던 나는, ‘통시’에 가지 않고 거름더미에 바로 ‘응가’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어린아이니까. 무더운 한여름의 어느 저녁. 거름더미에 응가를 했다. 며칠 후 거름더미에 싹이 돋았다. 아, 그 무렵 먹었던 참외의 씨앗. 아름다운 참외 넝쿨은 여름 내내 죽죽 뻗었다. 뿌듯한 심정으로 거름더미에서 아름답게 자라는 참외 넝쿨과 꽃을 바라봤다. 이제 곧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샛노란 참외가 달릴 것이다. 이른 가을, 서리가 내렸다. 비실비실, 참외 넝쿨은 시들어갔다. 조그맣게 열렸던 참외는 쪼그라들었다. 내 생애 첫 참외 농사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오이는 친척이 많다참외는 진과(眞瓜)다. ‘과(瓜)’는 오이다. 진과는 참 오이, 참외다. 맛이 달다고 ‘첨과(甛瓜)’라고도 한다. 참외도 오이 종류다. 수박도 오이 종류다. 서과(西瓜)다.‘서쪽에서 온 오이’가 수박이다. 우루무치 지방은 중국의 서쪽이다. 건조하고 덥다. 포도, 수박, 참외, 살구가 모두 맛있다. 서과(西瓜)는 서과(西果)로도 표기한다.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는 뜻이다. 서남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등의 문물이 우루무치를 통하여 들어온다. 실크로드 상의 도시다. 오이, 참외도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호과(瓠瓜)는 박이다. ‘박 오이’다. 역시 오이 중의 한 종류로 여겼다. 남과(南瓜)는 호박이다. 우리는 오키나와, 규슈 등을 ‘남(南)’ 혹은 남방(南方)으로 여겼다. 선조들은 호박이 오키나와나 규슈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여겼다.모과도 오이와 연관이 있다. 모과는 ‘목과(木瓜)’에서 유래했다. ‘나무에서 자라는 오이’쯤 된다. ‘과갈(瓜葛)’이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과(瓜)’는 오이, ‘갈(葛)’은 칡이다. 과갈은 오이나 칡넝쿨같이, 이리저리 무수히 얽힌 일가친척들을 이르는 표현이다.오이는 참외와 늘 헛갈린다. 예전 기록에도 참외와 오이는 혼란스럽다.“참외밭에서 신 끈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서 관을 바르게 하지 않는다.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라는 말은 “군자는 오해받을 짓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위나라 조식(曹植, 192∼232년)의 ‘군자행(君子行)’의 문구다. 참외밭이 아니라 오이밭이다. ‘오얏나무’도 혼란스럽다. 오얏은 자두[紫桃, 자도]다.오이는 채소, 참외는 과일로 여기지만 참외도 채소의 한 종류다. 정확하게는 과채류(果菜類)다. 옥담 이응희(1579~1651년)의 ‘옥담사집’ 만물편_소채류에서는 참외를 여러 가지로 가르고, 참외와 오이도 분간했다.참외[眞瓜] 당종과 수통은 방언이다. [唐種水筒用方言]참외란 그 이름 뜻이 있으니/그 이치를 내가 궁구할 수 있네/몸통이 짧으면 당종(唐種)이라 일컫고/몸통이 길면 수통(水筒)이라 부르지/속을 가르면 금빛 씨 흩어지고/쪼개서 먹으면 꿀처럼 달아라/품격이 온통 이와 같으니/서과(西瓜)란 말과 뜻이 같으리.당시 참외 품종 중 ‘당종’과 ‘수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몸통이 짧으면 당종, 길면 수통이다. 옥담은, 오이에 대해서도 정확히 표기한다. 잘 익은 오이는 누런색이다. 그래서 황과(黃瓜)다.오이[黃瓜]빈 땅에 새로 채마밭을 만들어/오이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어라/몇 촌 길이 푸른 옥이 주렁주렁/일 척 크기로 황금빛이 빛나누나/총총 썰면 전 부쳐 먹기 좋고/통째로는 김치 담그기 좋아라/무엇보다 좋은 건 더운 여름철/씹어 먹으면 답답한 가슴 시원해져.오이는, 열매를 갓 맺었을 때는 몇 촌 길이의 옥같이 푸른색이고, 다 자라고 나면 30㎝ 정도 되는 누런색이다. 언젠가 꼭 한번 보고 싶은 것이 ‘오이 전’이다. 별맛이 있을까 싶지만, 옥담이 “총총 썰어 전 부쳐 먹었다”고 하니 호기심이 든다. 옥담 시절에는 오이 전도 있었다.◇ 오이의 역사, 뿌리가 깊다.흔히 김치 이야기를 할 때 중국의 ‘오이 김치’를 이야기한다. ‘저(菹)’는 넓은 의미로 김치다. 공자(BC 551~BC 479년)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시경 소아(詩經 小雅)’ 편에 오이지가 등장한다.“밭 속에 작은 원두막[廬]이 있고, 밭두둑에 오이[瓜]가 열려 있다. 이 오이를 깎아 저(菹)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자손이 오래 살고 복을 받는다.”원두막이라고 표기한 ‘여(廬)’는 농막(農幕)이다. 농막과 원두막은 다르다. 농막은 농사를 짓기 위하여 현장에 새운 가건물이다. 원두막은 농작물을 지키기 위하여 논밭에 세운 것이다. 원두막이든 농막이든, 오이밭에 가건물을 세웠음은 이 시대에 이미 오이 농사가 널리 퍼졌음을 뜻한다. 오이의 역사는 깊고 길다. 무려 2천500년 전이다.중국 진(秦)나라 소평(邵平, 생몰년 미상)은 진나라에서 ‘동릉후(東陵侯)’의 벼슬을 지냈다. 진나라가 망하자 소평은 평민을 자처, 장안성(지금의 서안) 동쪽에 오이를 심고 생계로 삼았다. 그가 심은 오이가 오색(五色)을 띠고 맛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동릉후의 오이’ 즉, ‘동릉과(東陵瓜)’라고 불렀다(사기 소상국세가). 오이는 가장 널리 재배, 사용한 작물이다. 오이는 일상사 가까이에 늘 있었다.벼슬아치들의 임기를 이를 때, ‘과년(瓜年)’ ‘과한(瓜限)’ ‘과만(瓜滿)’이라 한다.모두 ‘오이 과(瓜)’로 표기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4년(1738년) 7월 15일의 기사 중 일부다.형조 판서 김시형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 방백으로 있었을 때 이진환이 진주 영장(晋州營將)에서 과만(瓜滿)하여 체직되었으므로, 신이 그의 재질을 애석하게 여겨 전관에게 서신을 보냈었는데, 이어 칠곡(漆谷)에 제배되었습니다.” 하였다.‘과만(瓜滿)’은 벼슬살이 임기가 다한 것을 말한다. 당시 경상관찰사로 일하던(1732년) 형조 판서 김시형(1681∼1750년)이 이진환을 천거, 칠곡으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벼슬아치의 임기를 ‘과=오이’로 표기했다.‘오이=벼슬아치의 임기’는 중국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대 제나라 양공(미상~BC 686년)이 부하들을 힘든 근무지인 변방(葵丘, 규구)으로 보냈다. 불만이 가득한 이들에게 “이듬해 오이가 익을 때 후임자를 보내 교체시켜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사달이 났다. 이때부터 ‘오이=관리들의 임기’가 시작되었다.‘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12월의 기사 중에는 오이가 등장하는 서글픈 내용이 있다. 명나라는 사대의 나라다. 명나라 사신들의 폐해는 심각했다. 뇌물을 요구하고, 받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오이를 심어서 그 오이가 익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은 일’도 있었다.창덕궁 선정전 어전회의.도승지 김승경(1430∼1493년)이 말한다. “만약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된다면 반드시 3, 4월 무렵일 것입니다. 그들은 여름을 지나고 돌아갈 것입니다.” 성종이 대답한다. “어찌 그 정도이겠는가? 지난번에도 오이[瓜]를 심었다가 익기를 기다려 돌아간 일이 있었다.”일본인들은 오이를 좋아하지만, 참외는 모른다. 일본은 1960년대 무렵 ‘프린스 멜론’을 개발한다. 기존의 참외 품종과 서양의 멜론을 교잡한 것이다. 프린스 멜론이 참외를 대체하면서 참외는 사라졌다. ‘참외’ 발음이 힘드니 ‘차메’다.경북 성주가 2000년대 초반부터 ‘참외’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성주 차메’는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경북 성주의 참외는 세계적이다. 홍콩, 싱가포르, 동남아, 러시아, 유럽으로 수출한다. 오이가 동북아 3국에 널리 유행하더니, 드디어 오이와 닮은 참외가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가히 성주 참외의 ‘과갈(瓜葛)’이다. 아래는 경북매일 기사다.이병환 성주군수는 (중략) “수준 높은 문화행사로 자리 잡은 성주생명문화, 참외축제를 세계적 수준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2019 성주생명문화축제, 제6회 성주참외페스티벌’은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성밖숲 일원을 비롯한 성주 시가지 일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전병휴 기자장계향(1598∼1680년)의 ‘음식디미방’에는 생치딤채법(生雉沈菜法)이 있다. 오이지에 생 꿩을 더한 김치다.“오이지의 껍질을 벗겨 속은 도려내고 가늘게 한 치 길이만큼 도독도독 썰어 물에 우려 둔다. 꿩은 삶아, 오이지와 같이 썰어 따뜻한 물에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침채같이 담가 삭혀서 먹는다.”농촌에서는, 풋내 나는 작은 참외는 장아찌로 담갔다. 마치 오이지 같았다. 언젠가 성주의 지인이 참외를 보내주었다. 달고 맛있는 성주 참외를 먹으면서, 문득 어린 시절 거름더미의 참외 넝쿨을 떠올렸다. 그때 그 거름더미의 참외도 장아찌로 만들었더라면?/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15

유럽에선 ‘악마’로, 조선에선 ‘뇌물’로… 팔자 센 여덟다리 어류

동양에서는 문어를 즐겨 먹는다. 일본 ‘다코야키(takoyaki)’는 문어가 들어간 풀빵이다. 중국도 오래전부터 문어를 먹었다. 우리는 문어를 귀하게 여겼다. 제사상에도 오른다. 귀한 선물로도 쓰였다. 고려 시대,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동해안 영일만에서 잡은 문어를 선물로 받았다.◇ 목은, 영일만의 문어를 선물로 받다‘목은고_시’의 일부다. 제목은 ‘동경(東京)의 윤공(尹公)이 전운(前韻)에 화답하면서 문어(文魚)를 보내왔기에 붓을 달려 답하다’이다. ‘윤공’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경’은 경북 경주다. 경주에서 보낸 선물이 문어다.(전략) 적을 소탕할 땐 맹호가 양 떼를 습격하듯/(중략) 삼한이 모두 그 공적에 고개를 숙인다오/(중략)전쟁을 종식할 계기가 이제 마련됐는지라/보내오신 고기 이름도 바로 문이로구려‘윤공’에 대한 찬사다. 목은은 벼슬살이 중 큰 내란을 겪은 적이 없다. ‘윤공’은, 왜구(倭寇) 소탕 차 파견된 군대의 장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말기 ‘삼한’은 극성스러운 왜구의 노략질로 고통을 당한다. 얼마나 왜구가 많았으면 가짜 왜구, 가왜(假倭)도 등장한다. ‘동경(경주) 윤공’의 ‘적’은 경상도 동남 해안가를 침략한 왜구였음을 짐작케 한다.문어(文魚)는 머리가 크다. 머리가 크니 공부를 잘한다? 그래서 문어라고 부른다는 속설이 있다. 머릿속에 먹물이 들어 있어서 문어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의 포항, 감포 등 영일만 일대는 영일현이었다. 경주권이다. 경주에서 보내온 문어는 이 지역 것이었으리라. 목은은 동해 남부 지역과 인연이 깊다. 태어난 곳이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이다.중국 ‘괴시(槐市)’의 이름을 따서 고향 이름을 괴시마을로 바꾼 이도 목은이다. 일찍이 떠났지만, 목은은 태어난 곳, 어머니의 고향을 평생 잊지 않았다. 고향 가까운 곳에서 문어를 보내왔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유럽인들은 문어를 즐겨 먹지 않는다. 스페인 요리 중에 문어를 이용한 ‘뽈보 아벨라(pulpo a feira)’가 있지만, 유럽인들에게 문어는 ‘악마의 물고기(devil fish’)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도 문어의 모습이다. 대왕 문어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외계인은 흔히 문어의 모습이다. 민대가리에 다리가 여럿으로 괴기스럽다. 성경에 나오는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지 말라”는 경구도 유럽인들이 문어를 피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중국인들이다. 먹는 이도 있고, 먹지 않는 이도 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왔던 이여송(李如松, 1549∼1598년)은 ‘먹지 않는 이’였다. ‘성호사설_제5권_만물문’에 나오는 ‘이여송의 문어 이야기’다.조금 후에 문어갱(文魚羹)을 올렸는데, 문어란 것은 바로 팔초어(八梢魚)다. 그런데 천장도 역시 난처한 빛을 보이고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이 문어는 우리나라에만 생산되는 까닭에 천장이 처음 보게 된 것이다”고 한다./ 내가 천사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를 보니, 그의 자주(自註)에, “문에는 바로 중국 절강(浙江)에서 나는 망조어(望潮魚)이다.”라고 하였다./그렇다면 임진년 난리 때 이여송(李如松) 무리들은 대부분 중국 북쪽 지방의 사람인지라, 남북 거리가 동떨어지게 멀기 때문에 강회(江淮)의 어물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중략) ‘장거(章擧)와 석거(石距)라는 두 종류가 있다’ 하였다./(중략) 이 장거와 석거란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문어와 낙제(絡蹄) 따위처럼 생긴 것인 듯한데, 중국서도 역시 진귀(珍貴)하게 여긴다. 낙제는 속명 소팔초어(小八梢魚)라는 것이다.이여송은 요동성 철령위 출신이다. 바다와 멀다. 생선도 귀하다. 서해안 북쪽 지역은 문어가 생산되지 않는다. 이여송은 평소 문어, 문어국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입맛은 보수적이다. 어린 시절 먹지 않았던 음식을 나이가 들어서 먹는 것은 힘들다.“(문어가) 우리나라에서만 생산된다”는 표현은 틀렸다. 중국인들도 문어를 좋아하고 귀하게 여겼다. 윗글에 나타나듯이, 중국 절강성의 망조어는 곧 문어다. ‘장거’는 문어, 석거는 낙지(낙제)다. 문어는 다리가 8개다. 이름이 팔초어인 이유다. 팔초어 중 작은 것, 즉 소팔초어는 낙지다.교산 허균도 ‘성소부부고_도문대작’에서 ‘문어[八帶魚]: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라고 했다. 이여송과 달리, 중국인들 특히 남방의 바닷가 지역에서는 문어를 먹었다. 팔초어(八梢魚), 팔대어(八帶魚) 등으로 혼란스럽게 표기한 것도 재미있다.◇ 뇌물로 받은 문어 두 마리세종 14년(1432년)에는 ‘문어 선물’이 문제를 일으킨다. 시작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의 탐학, 뇌물수수, 거짓 수사였다. 최치를 수사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번진다. 드디어 대사헌 신개(1374∼1446년)에게 불똥이 튄다. 대사헌은 종 2품, 차관급이다. 죄목은 ‘문어 두 마리 뇌물수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4년(1432년) 6월 25일의 기록이다. 제목은 ‘세 의정 등과 허조 등을 불러 논의하다’이다.(전략) 치(値, 최치)의 말이 ‘문어(文魚) 두 마리를 대사헌 신개에게 주었다.’ 하고 신개는 받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의심할 만한 일이다. (중략) 개(신개)는 풍헌관(風憲官,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세상의 여론에 어떻겠는가. 천관(遷官)시킬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하니, 정초·신상 등은 아뢰기를, “(중략) 개가 〈남의 과실을〉 규찰(糾察)하는 직임에 있으니(중략) 벼슬을 옮기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안순·허조·권진·맹사성 등은 아뢰기를, “권세 있는 사람이면 온 집안의 하인들까지가 다 세가(勢家)의 종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혹은 남이 증여(贈與)하는 물품을 함부로 받아서 제가 사사로이 써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허다하게 많습니다. 개는 용렬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남몰래 그의 뇌물을 받고는 겉으로 안 받았다고야 하겠습니까” (중략)하매, 사성 등의 의논에 따랐다.사건을 수사하는 중에 ‘피의자 고성 수령 최치’로부터 “대사헌 신개에게 문어 두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대사헌 신개는 “절대 받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그 사이 이 사건에 얽혀든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모두 용서받는다. 문제는 신개다. 대사헌이다. 남들 잘못을 들추고, 탄핵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비록 문어 두 마리지만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신하 중 일부는 ‘대사헌 신개’의 죄를 묻자고 주장한다. 맹사성 등은 반대한다. 논리가 재미있다. ‘배달 사고’다. 권력자 집안의 종이 권력자를 대신하여 뇌물을 받는 일이 흔하다고 이야기한다. 신개의 경우도 마찬가지. 최치는 신개에게 문어를 줬다고 하고, 신개는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문어 두 마리는? 배달부인 신개 집 하인의 배달 사고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혼란스러운 돌문어와 피문어냉동, 냉장이 없던 시절이다. 공물로 올라오는 문어는 대부분 말린 문어였다. 중국으로 보내는 문어도 대부분 건문어였다. 세조 6년(1460년) 8월, 중국에 갔던 사은사 김예몽이 칙서를 가지고 온다. 칙서 내용 중에 “문어(文魚)는 다만 모든 사신이 올 때 혹은 4, 5백 마리씩 혹은 7, 8백 마리씩 바쳐 오도록 하라”는 부분이 있다. 한양 도성에서 중국까지는 최소 3개월의 거리다. 말린 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희한한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연산군은 문어에 대해서도 특이한 집착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5년(1499년) 11월 7일의 기록에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생 문어(文魚)를 잡고 그 먹일 물건을 많이 구하여 들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희한한 식재료를 탐하는 것은 폭군의 길이다.문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피문어와 돌문어다. 피문어는 붉은 색깔의 문어다. 돌문어는 남해안 돌 틈에서 잡은 문어다. 삶아도 질긴 문어라서 딱딱한 돌문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진 않다. 피문어는 동해안 깊은 바다에서 잡는다. 크기가 크다. 대문어라고도 한다. 서, 남해안의 돌문어는 작다. 피문어, 돌문어의 맛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다. 이제 피문어, 돌문어의 구분도 혼란스럽다. 동해안인 경북 포항 호미곶의 명산품 문어는 돌문어다. 이른바 ‘호미곶 돌문어’다. 해안가 얕은 곳에서 잡는 문어다.‘경북매일’ 2017년 9월 21일 기사다. 제목은 ‘관광객 미각 사로잡는 호미곶의 돌문어’.(전략) 연 500t만 잡히는 귀한 특산물… 육질 쫄깃하고 단단/ 호미곶돌문어홍보판매센터 개장, 다양한 수산물 판매/ 포항시는 국내 최대 문어 생산지다. 특히 육질이 쫄깃하고 단단해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호미곶의 특산품 ‘돌문어’는 어획량 연간 500여t으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고 품질이 우수하다. 이에 포항시는 최근 호미곶면 대보리에 ‘호미곶 돌문어 홍보판매센터’의 문을 열고 호미곶 특산품의 전국적인 홍보에 나섰다. (후략)-고세리 기자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08

이젠 귀한 음식, 유슬짜장과 유니짜장 ‘청요릿집’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잊어버린 단어가 있다. ‘청요릿[淸料理]집’ ‘유니짜장’ ‘유슬짜장’ 등이다. 이 단어를 기억한다면 50대 이상 나이다. 청요릿집은 중식당의 옛 이름. 청나라, 중국 음식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유니짜장[肉泥炸醬]은 고기 혹은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서 고명, 양념으로 쓴다. 고기는 돼지고기다. 유슬짜장[肉絲炸醬]은 고기, 채소를 길게 썰어 실처럼 만든 후 고명으로 쓴다. 이제 청요릿집, 유니짜장, 유슬짜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화상(華商)이 아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식당이 훨씬 많아졌다.◇ 짜장면은 한식인가, 중식인가?이제는 사라진 중식당이다. 2014년 문을 닫은 경북 경주 ‘산동반점’. 화교(華僑) 장충선 씨가 운영하던 화상노포. 장씨가 70세를 넘겼다. 나이가 들면 중식당의 웍(WOK, 중화요리용 팬)을 잡는 일이 힘들어진다. 조용히 50여 년의 역사를 접었다.이제 따님 장수화 씨가 서울 은평구에서 중식당을 운영한다. 몇 해 전 따님을 통해 이 집안의 청요릿집 역사를 들었다. 여느 중식당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짜장면은 한식인가, 중식인가?” 대부분 잠깐 망설이다가 “중식”이라고 답한다. 북경에는 한때 ‘한쳥짜장면[漢城炸醬, 한성작장]’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한성은 서울이다. 서울 짜장면, 한국식 짜장면이란 뜻이다.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얼핏 보면 중국식 짜장면과 흡사한데 전혀 다르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짜장면은 중식이라기보다 한식이다.짜장면의 짜장[炸醬, 작장]은 “장을 터뜨리면서 볶는다”는 뜻. 장은 발효식품이다. 발효식품에는 탄산가스가 있다. 장을 볶으면 작은 기포(氣泡)들이 생긴다. 기포는 장을 볶는 과정에서 생기고, 터진다. ‘터뜨리면서 볶는다’고 표현한다. 짜장면은 ‘볶은 중국 장(醬)을 얹은 국수 요리’다.‘중국식 장’은 첨면장(甛麵醬)이다. 첨면장은 우리의 된장과 닮았다. 콩, 혹은 콩과 밀, 콩과 다른 곡물들을 섞고 소금과 종국(種麴)을 넣어서 발효시킨다. ‘종국’은 ‘씨 누룩’ ‘누룩의 씨’다. 정제한 효모(酵母)다. 우리가 흔히 ‘춘장’이라고 부르는 ‘중국 된장’이 첨면장이다. 첨장(甛醬)이라고도 부른다.‘첨면장’의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합쳐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甛)’은 한편으로는 낮잠을 뜻한다. 세상에 낮잠만큼 단 것도 없다. 첨면장은 “면을 맛있게(달게) 하는 장”이다.‘춘장’은 애매모호 하다. 첨장이 춘장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봄에 만든다고 춘장(春醬)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억지스럽다. 대부분 장이 봄에 만든다. 우리의 된장도 한겨울에 장을 담고, 봄에 장 가르기를 한다. 굳이 중국 첨면장만 봄에 만든다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파는 한자로 총(蔥)이다. 파를 찍어 먹는다고 ‘총장(蔥醬)’이고, 발음이 바뀌어 춘장이라 부른다는 주장이다. 정설도 다수설도 없다.중국 짜장면은 한국인의 된장찌개 비빔밥이다. 우리가 “된장찌개를 밥에 얹은 다음 쓱 쓱 비벼 먹듯이” 중국인들은 볶은 첨면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 먹는다.◇ 이제 원형 첨면장은 사라졌다흔히, “인천 ‘공화춘’에서 짜장면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는 않다. 인천시도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공화춘’은 ‘짜장면을 메뉴로 내놓았던 집 중 하나’다. 짜장면을 처음 들여온 것도 아니고, 처음 메뉴로 내놓았던 것도 아니다. 중국 짜장면의 역사는 수천 년을 헤아린다.‘공화춘(共和春)’은 ‘공화국의 봄’이다. 공화국은 1911년 건국한 중화민국, 현재의 타이완이다.젊은 화상 우희광(于希光, 1886~1949년)은 ‘산동회관’을 경영하다가, 중화민국 건국과 더불어 이름을 ‘공화춘’으로 바꿨다. 1912년 무렵이다. 후손들이 운영하던 ‘공화춘’은 1983년 폐업했다. 현재의 ‘공화춘’은 원래 ‘공화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름만 남았고, 국내 대기업이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짜장면 마니아들은 인근의 ‘신승반점’을 ‘짜장면 원조집’으로 여긴다. ‘신승반점’의 주인 왕애주 씨는 우희광 씨의 외손녀다. 우희광 씨는 1남 5녀를 두었고 그중 막내딸 우란영 씨가 화교 왕입영 씨와 결혼, 1남 2녀를 낳았다. 그중 맏딸이 왕애주 씨. 왕입영·우란영 부부는 ‘공화춘’에서 일하다가, 1980년 독립, ‘신승반점’을 열었다.짜장면은 중국 서민들의 일상적인 음식이다. 제대로 형식을 차린 음식도 아니고 길거리 손수레, 작은 가게에서 내놓던 서민 음식이었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병사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중국인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1894년 청일전쟁. 청나라 병사들이 들어왔고 민간인들도 따라왔다. 대부분 산둥성과 가까운 인천을 통해 들어왔고 그중 일부가 한반도에 정착했다.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한반도로 연결되는 중국 만주지역은 일본군인 천지였다. 인천-산둥반도의 뱃길이 편했다. 인천이 중국인들 조차지가 되고 인천에서 중식이 시작된 까닭이다.부두 노동자들, 서민 화교들은 길거리 수레, 작은 구멍가게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에는 ‘중화루’ 등 ‘5대 청요릿집’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산동반점, 공화춘’이었다. 길거리 음식이 ‘공화춘’ 등 정식 가게로 들어왔다.일제강점기에 개항한 군산 언저리로 중국인들은 모여들었다. 한 사람이 건너와서 자리를 잡는다. 가족들이 통째로 들어온다. 친척, 지인도 불러들인다. 한국에 사는 화교, 한화(韓華)사회는 이렇게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한반도 여기저기로 옮겼다. 강원도 깊은 산골 탄광촌에도 50년을 넘긴 화상노포가 남은 이유다.경주에서 ‘산동반점’을 하던 장충선 씨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1940년대 언저리 한반도로 건너왔다. 대구에 중식당을 운영하는 형이 있었다. 형네 가게에서 중식 만드는 일을 돕다가 경주로 간다. “밀가루 부댓자루를 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 걸어 갔다”. 아들 장충선 씨는 1938년생. 열 살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중국에서 살았다. 한국전쟁 직전 장충선 씨는 아버지가 사는 한반도로 건너온다. 1960년대, 장충선 씨 부자는 경주에서 ‘산동반점’의 문을 열었다.◇ ‘미공법 480조’가 짜장면의 역사를 바꾸다짜장면 역사를 바꾼 것은 미국 법령 ‘미공법 480조(Public Law 480)’다. 한국전쟁이 끝났을 무렵, 미국은 밀을 대규모 잉여생산한다. 남아도는 밀을 일본, 한국 등에 거의 무상으로 원조한다.귀하던 밀가루가 흔해졌다. 주재료인 밀가루가 흔해지니 중식당은 호경기를 만났다. 미공법 480조에 의한 원조는 1965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이후에도 밀가루 값은 쉬 오르지 않았다. 짜장면 전성시대. 이 시기, 짜장면은 중식에서 한식으로 변화한다.1960년 언저리 오늘날의 춘장, ‘한국식 첨면장’이 개발된다. 콩, 곡물가루, 물, 소금으로 만들던 천연식품 첨면장은 수급이 불안정했다. 중식당 주변의 화교 가정이 ‘수제 첨면장’을 만들었다. 화교 상인은 이 첨면장을 모아서 식당으로 배달했다. 문제는 공급 물량 부족. 수요는 늘어나는데 수제 첨면장은 부족하다.공장에서 첨면장을 만들기로 한다. 콩, 밀가루 등을 비빈 후, 짧은 시간 발효시킨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짧은 시간 발효시키면 색깔은 누렇거나 붉은색이다. 황장(黃醬)이다. 1년 묵은 첨면장도 붉은 색깔이다. 식당 주인들은 오래 묵은, 검은색의 첨면장을 원한다. 캐러멜색소를 넣는 이유다. 원형 캐러멜색소는 설탕을 태운 것. 달고 윤기가 난다. 여기에 조미료를 넣는다.19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중식당 조리사, 혹은 주인이 된다. 화상들은 대부분 은퇴한다. 경주 ‘산동반점’ 장충선 씨도 마찬가지. 1960년대, 20대의 나이로 아버지와 식당을 열었던 그는 이제 일흔이 됐다. 은퇴한 이유다.많은 화상노포가 문을 닫는다. 첨면장은 화상노포들과 더불어 사라진다. 전북 익산의 ‘국빈반점’도 문을 닫았다. 주인 유비홍 씨는 화교 2세. 아버지는 금강 유역으로 한반도에 들어왔고,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유비홍 씨는 1960년대 아버지 가게였던 ‘국빈반점’을 물려받았다.‘원형 작장면’은 장을 볶아야 한다. 웍으로 장을 볶는 일이 힘드니 물과 전분을 넣고 걸쭉하게 끓인다. 여기에 당근, 양파, 감자 등을 넣는다. 한국식 짜장면, ‘한쳥짜장미엔’이다.누구나 자기만의 ‘짜장면 맛집’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 잡고 갔던 청요릿집 혹은 중식당이다. ‘추억’을 이기는 ‘맛’은 없다. 추억 속의 음식은 늘 최고의 음식이다. 짜장면 맛집의 순위를 따지기 힘든 이유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01

임금님 수라상에서도 귀한 대접… 뽀얀 쌀밥 한 그릇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이. 당연히 좁쌀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중국에서 샤오미[小米, 소미]라는 회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쌀을 먹은 역사? 그리 오래지 않았다이밥에 고깃국?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내걸었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호다. 쌀밥 한번 마음껏 먹어보자. 만만치 않다.우리 ‘쌀밥 역사’도 그리 길진 않다. 수탈의 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힘들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의 상처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1970년대 혼식과 분식의 시대를 지났다. 힘들었던 시절, 정부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했다. ‘식량 자급자족’은 쌀밥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밥 마음껏’을 이루었고 북한은 실패했다.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다.‘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년) 6월26일의 기사다. 제목은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제향 외에는 갱미를 쓰도록 명하다’이다.임금이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스스로 검약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넉넉하고 유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조금도 검찰하지 않으니, 반미(飯米)는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희게 할 필요가 없다. 금후로는 제향(祭享)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쓰지 말게 하고, 대개 중미(中米)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석문이 대답하기를, “중미는 지극히 거칠으니 진공(進供)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갱미(粳米)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세갱미〉갱미〉중미’ 순서다. 중미보다 더 거친 쌀은 ‘조미(7CD9米)’다. 말 그대로 아주 거친 쌀이다. 조선 건국 후 6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절대군주다. ‘반미(飯米)’는 밥쌀이다. 절대군주가 먹는 밥상의 쌀을 반쯤 쓿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지금의 현미보다 덜 쓿은, 거친 쌀이었을 것이다. 세갱미는 완전히 쓿은 쌀이다. 오늘날의 백미(白米)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한다.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향(祭享)’은 제사와 잔치다.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 잔치 이외에는 귀한 백미를 쓰지 말라는 지시다. 임금도 일상적으로 백미를 먹기 힘들었다.조선 시대, ‘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쌀[米]과는 다르다. 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대미(大米)다. ‘소미(小米)’도 있다. 좁쌀이다. 좁쌀도 쌀이다.쌀만 일용하는 곡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메밀도 일상적인 ‘밥의 재료’ 곡물이었다.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메밀은 흉년에 먹는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으로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던, 중요한 곡식 중의 하나였다. ‘메밀 쌀’도 있었다.곡식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정곡(正穀)과 잡곡(雜穀)이다. 사전에는 “쌀, 찹쌀 이외에는 모두 잡곡”이라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경세유표_제12권_지관수제_창름지저3’의 일부다. 정곡과 잡곡의 종류, 곡식의 종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정곡 여섯 가지는, 첫째 대미(大米: 즉, 볍쌀), 둘째 소미(小米: 즉, 좁쌀), 셋째 벼(租: 즉, 稻), 넷째 조(粟: 즉, 稷), 다섯째 대맥(大麥), 여섯째 대두(大豆)이다(벼 중에는 혹 산도(山稻)라는 것이 있고, 조 중에는 혹 늦차조가 있음).잡곡 여섯 가지는, 첫째 패자(稗子: 吏文에는 잘못 稷이라 함), 둘째 수수(85A5黍: 이문에는 그릇 唐이라 함), 셋째 귀밀[雀麥: 이문은 그릇 耳牟라 함], 넷째 메밀[蕎麥: 이문에는 잘못 木麥이라 함], 다섯째 소맥(小麥: 이문에는 그릇 眞麥이라 함), 여섯째 소두(小豆: 녹두는 진제(賑濟)와 군량 양쪽에 마땅한 데가 없으니 그 이름을 열두 가지 중에서 없앰이 마땅함)이다.정곡은 대미(쌀), 소미(좁쌀), 벼(예전 멥쌀), 조[粟, 속, 기장으로 추정], 대맥(보리), 대두(콩) 등이다.잡곡은, 패자(피), 촉서(수수). 귀밀(귀보리), 교맥(메밀), 소맥(밀), 소두(팥) 등이다. 녹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진제(구휼 정책)와 군량 양쪽에 모두 큰 쓰임이 없다.쌀과 더불어 좁쌀, 메밀 쌀, 기장, 보리 등을 널리 ‘쌀’로 사용했다.다산 정약용의 시대, 즉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넉넉하던 시절이다. 이 시대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여전히 힘들었다. 쌀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잡곡으로 여기는, 보리, 좁쌀, 기장, 콩 등을 밥 짓는 곡물로 사용했다. 쌀만 쌀이 아니라, 여러 잡곡도 쌀로 여겼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우리 선조들이 한반도에 산 것은 5천 년이다. 역사를 글로 기록한, ‘유사시대’는 2천 년에 미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쌀보다는 잡곡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잡곡 대신 쌀’의 역사다. 남쪽과 달리, 추운 날씨의 한반도 북쪽은 쌀 생산이 불가능했다.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8권_지관수제_전제(田制) 10’의 내용이다.촌감(村監) 한 자리는 곧 옛날 전준(田畯)의 직(職)이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수고하는데, 녹(祿)이 없을 수 없으니 1년에 곡식 24곡(斛, 240두)을 받아서 양식으로 하며, (중략) 남방에는 벼, 북방에는 메기장을 준다촌감, 전준 모두 현장에서 농사를 관리하는 권농관이다. 급료를 준다. “남쪽에서는 벼(?), 북쪽에서는 메기장”이다. 원문에는 “南方以稻 北方以稷(남방이도 북방이직)”으로 표기했다. 남과 북에서 지급하는 급료의 내용물이 다르다.‘도(稻)’는 탈곡하지 않은 벼, ‘직(稷)’은 탈곡하지 않은 기장이다. ‘도’는 지금은 잡초로 여기는 ‘피’, 예전 멥쌀이나 볏과의 식물로 여기기도 한다. ‘직’도 마찬가지. 기장 혹은 볏과의 어떤 식물로 추정한다.‘도’와 ‘직’ 모두, 우리가 먹는, 쌀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급료의 내용물은 다르지만, 양은 같다. 240말이다. 도와 직을 나누지 않았다.우리만 곡물, 잡곡을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1628~1692년)은 효종 6년(1655년),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문견별록’을 남겼다.“(전략) 음식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으며,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하루 두 끼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는 자라야 세 끼를 먹음. 가난한 사람으로서 역사(役事, 힘든 일)를 하는 자는 밥을 두서너 숟갈을 뭉쳐 한 덩이로 만들어 불에 쬐어 말려서 먹되 하루 두 덩이를 먹었으면 다시는 더 밥을 먹지 않으며, 심한 자는 더러 찐 떡만 먹거나 군고구마만 먹기도 하여, 아무리 큰 도성이나 큰 읍(邑)이라 하여도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 (후략)”이 글의 ‘밥’은 우리가 생각하는 쌀로 지은 ‘밥’이 아니다. 정확지는 않지만 ‘어떤 곡물’을 찐 것이다.원문에는 ‘반(飯)’이라고 표기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밥’이 반드시 쌀은 아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곡물이다. 글의 끝부분에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라고 했다. 솥밥은, 오늘날과 같이 쌀 혹은 보리 등으로 지은 밥을 의미한다.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는 것은 곧 쌀밥 혹은 보리밥을 먹는 이가 드물다는 뜻이다.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고 농법이 발달하면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불행히도 여전히 서민들은 쌀로부터 멀었다. 수탈도 심했던 시기다. 조선 말기에도 대부분 서민은 잡곡이 주식이었다.우리는 쌀에 관한 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쌀은 두 종류다. 자포니카종(japonica, 日本種)과 인디카 종(indica, 印度種)이다. 자포니카종은 단립종(短粒種)이다. 쌀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인디카종은 장립종(長粒種)이다. 길고 날씬하다.‘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안남미(安南米)다. 한반도에 소개될 때 ‘베트남 쌀’로 불리면서 얻은 이름이다.우리는 단립종, 자포니카종을 주로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이니 대부분 나라가 우리와 같은 쌀을 먹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는 않다.전 세계를 통틀어, 단립종의 생산은 10%에 불과하다. 대부분 나라가 안남미, 장립종 쌀을 먹는다. 단립종 쌀을 먹는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북부 등이다. 동남아와 유럽, 미주 지역은 모두 장립종을 먹는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장립종 쌀로 만든다. 우리가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의 대부분은 태국산이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재미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24

대기근을 함께 넘어온 동반자… 사람이 살아야 돼지도 산다

병자호란(丙子胡亂·Qing invasion of Joseon)은 1636년 12월28일(양력)부터 1637년 2월24일 사이에 있었다. 두 달간의 짧은 전쟁. 상처는 깊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넘어서는 참혹한 피해. 멀쩡한 조선사람 50만 명(추정)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부분 노예로 팔리고,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전쟁이 끝난 불과 예닐곱 달 후, 원수의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던 국왕 인조다. 청나라 사신에게 잘 대할 수도, 소홀할 수도 없는 처지. 돼지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1637년) 8월28일(음력),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대답이다. 그 전날인 8월27일, 인조가 “왜 돼지고기(저육) 대신 쇠고기(우육)를 마련했느냐?”고 물었다.“(전략) 청나라 사람들이 우육(牛肉) 먹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번 칙사의 행차가 추운 계절을 당하였으므로 생선 따위의 물종을 구해 올 길이 없습니다. 매일 연향(宴享)에 저육(猪肉)을 쓰는 곳이 매우 많아 부족할까 걱정되어 전날 반선에 우육을 마련하였는데 저육 두 근이 너무 소략한 것 같아서 우육을 한 근 더 마련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련하고 나서 때가 되어 혹 저육을 먹자고 청하거든 저육으로 바꾸어 주겠습니다. (후략)”승자의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홀할 수도 없다. 사신을 잘 대접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청나라, 중국 사람들이 쇠고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의논하는 내용이 쇠고기 한 근, 돼지고기 두 근, 이런 식이다. 이날의 서글픈 대화 끝에는 인조의 최종적인 평가가 남아 있다.“이러한 때에 기르는 소를 허다하게 도살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고, 음식물을 더 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한결같이 예전 사신을 대했던 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쇠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귀했다. 농사의 도구이니 국가에서도 함부로 도축하는 일을 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인조의 모습이 슬프다.◇ ‘음식디미방’의 야제육과 가제육‘음식디미방’은 1670년 무렵 출간되었다. 이 책에 여러 요리법이 있다. 그중 돼지고기 요리법은 단 두 꼭지. 야제육[野猪肉]과 가제육[家猪肉] 요리법 즉, 멧돼지 요리법과 집돼지(사육 돼지) 요리법이다. 개고기[狗肉] 요리법이 11가지나 있는 것에 비하면 돼지고기 요리법은 초라하다. 인조가 청나라 사신을 맞았던 시기에서 겨우 30년이 지났다. 왕실이나 반가 모두 돼지를 널리 사용하지 않았다.돼지는 17세기 후반부터 비교적 널리 나타나고, 사용된다. 15세기 중반, 세종대왕 때에도 돼지 기르는 법을 명나라에서 배웠다고 했다. 문종, 세조 때도 여전히 돼지사육법은 거칠다. 그로부터 불과 200년 후. 돼지가 흔해지고 친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추정이다. 지구 전체가 겪었던 ‘소 빙하기(Little Ice Age·小氷河期)’ 탓이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지구는 대부분 13~17세기 후반, 빙하기를 겪는다. 한반도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숙종 시대까지다.빙하기에는 지구 전체의 기온이 떨어진다. 가뭄, 홍수, 장마, 한파, 한여름의 우박, 이상한 달무리 등이 지구 여기저기서 나타난다.조선의 17세기, 100년도 바로 대기근(大饑饉)의 시기다. 경신대기근에 인구의 10%인 100만 명이 기아 혹은 역병으로 죽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을 겪은 사람 중에는 “기근이 왜란보다 더 무섭다”라는 이도 있었다.‘병정대기근(인조 4~5년, 1626~1627년)’ ‘계갑대기근(효종 4~5년, 1653~1654년)’ ‘경자-신축년의 대기근(현종 1~2년, 1660~1661년)’ ‘경신대기근(현종 11~12년, 1670~1671년)’ ‘을병대기근(숙종 21~22년, 1695~1696년)’이 줄을 이었다. 모두 17세기에 몰려 있다. 이중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특히 참혹했다.17세기를 지나면서 곡물 생산이 늘어난다. 돼지사육도 비교적 편해졌을 것이다. 숙종-경종-영조-정조의 시대는 18세기다. 빙하기도 끝나고 생산성이 올라간다. 100년을 넘기면서 병자호란의 상처도 얼마쯤 아문다.‘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에 태어나서 1680년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서 정유재란(1597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의 고통과 생채기를 모두 겪었다. ‘음식디미방’을 저술할 무렵인 1670년대는 경신대기근이 진행되었다. 돼지는, 인간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자란다. 인간이 굶주리면 돼지사육은 불가능하다. ‘음식디미방’에 돼지고기가 귀한 이유다.◇ 순조의 달구경과 숨겨둔 돼지고기순조. 아버지 정조(1752~1800년)가 일찍 서거하지 않았다면, 이복형 문효세자(1782~1786년)가 어린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국왕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정조는 마흔아홉 살에, 이복형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증조모인 정순왕후가 살아 있었다. 수렴청정. 열한 살짜리 국왕은 할 일이 없었다. 즉위 원년의 어느 늦은 밤, 어린 국왕은 궁궐 안에서 달구경을 나선다.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_춘명일사(林下筆記_春明逸史)’ 편에 실린 이야기다.순묘(純廟)가 초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상(上)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 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후략)‘순묘’는 순조다. 늦은 밤, 배가 출출하다. 궁궐 밖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 하기로 한다. 냉면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돼지고기를 사 온다. 아마도 수육[熟肉]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순조의 냉면과 돼지고기 이야기’다.이유원은 어린 시절 들은 순조의 돼지고기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국왕 곁에 시립한 이가 돼지고기 수육을 사 왔다. 원문에도 ‘貿猪肉(무저육)’이라고 했다. 늦은 밤에도 돼지고기를 살 수 있었다. 돼지고기가 어느 정도 일상적인 식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 순조도 역시 준비한 음식이 수육임을 알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상적이었다는 뜻이다.정조대왕 시절,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檢書)’라고 불렸던 영재 유득공(1748~1807년)도 ‘영재집_서경잡절(泠齋集_西京雜絶)’에서 “냉면과 찐 돼지고깃값이 오른다(冷麪蒸豚價始騰·냉면증돈가시등)”라고 했다. 서경은 평양이다. 18세기 후반에는 평양에서도 돼지고기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 수 있었다. 순조의 초년과 영재의 말년은 비슷한 시기다. 대도시 평양과 한양에 모두 돼지고기가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돼지의 ‘정체성’이다.‘규합총서’는 1809년(순조 9년)에 발간된 책이다. 필자는 빙허각 이씨(1759~1824년). ‘임원십육지’를 쓴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다. 순조 초년과 닿아 있고,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과도 비슷한 시기다. 이 책에서는 돼지고기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을 일으키며 회충의 해를 끼치니, 풍병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못 쓴다”라고 했다.비슷한 시기인데 왜 순조, 영재 유득공, 빙허각 이씨의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를까?이유는, 돼지의 ‘정체성’의 문제다. 돼지의 뜻을 지닌 한자는 여러 종류다. 저(猪), 저(豬), 돈(豚), 시(豕), 해(亥) 등이다.야생의 멧돼지가 있다. 야생의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돼지가 있다.흔히 ‘가저(家猪)’라고 표현한다. ‘저(猪)’를 멧돼지로도 표기한다. 품종개량이 없었던 시절이다.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후,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집에서 기른 돼지’가 된다. 그렇다고 돼지의 DNA가 달라질 리는 없다. 여전히 야생의 성질이 남아 있다. 이 모든 돼지에 대한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비슷한 시대지만, 영재 유득공, 순조, 빙허각 이씨의 돼지,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유다. 어떤 돼지인지 알 수 없다. 뒤섞여 있다.실험(?) 삼아 돼지를 길러본 적이 있다. 흑돼지 새끼를 분양받아 쌀뜨물과 음식물 찌꺼기만 먹이고 11개월을 길렀다. 60㎏을 넘기지 않았다. 지금 도축하는 돼지는 120~125㎏이다. 두 배 이상이다. 종자, 사육법, 먹이가 모두 다르다. 돼지고기 이야기는, 그래서, 조심스럽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17

고려시대에도 ‘돼지고기 국’ ‘돼지국밥’이 있었다

서울 토박이가 물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여자애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너 대구에서 올라왔지? 너 시골 출신 맞지?”서울 토박이들의 특징 하나. 서울을 제외하면 죄다 ‘시골’이다. 이런! 광주도, 부산도 죄다 ‘시골’이다. 당연히 대구도 시골이다. 그래 인정하자. “응, 나 대구 출신이야!”또 묻는다. “그런데, 진짜 대구에서는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니?” 한참을 못 알아들었다.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지. 그럼, 끓이고말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래 돼지고기 국 맛있다”라고 하자 못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묘한 표정이다. 조심스럽게 내뱉는다. “진짜 시골에서는 돼지고기로도 국을 끓이는구나!”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알아차렸다. 서울 사람들은 국물에 빠진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이 먹는 ‘국물에 빠진 돼지고기 음식’은 김치찌개뿐이다.◇ 불교를 믿어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년)은 1123년 고려에 온다. 왕복 3개월, 고려 체재는 한 달 정도였다. 고려 수도 개성에 머물면서 대여섯 번 바깥나들이도 한다. 비교적 상세히 고려를 본 셈이다. 돌아가서 송나라 궁중에 고려에 대해서 보고한다. ‘고려 출장 보고서’가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 高麗圖經)’이다. 이 책 제23권_잡속(雜俗)2_도재(屠宰) 편에 ‘돼지고기’가 등장한다.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중략)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첫째, 불교를 믿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엉터리다. 만약 불교 때문이라면 지배층 즉, 국왕과 대신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불교 때문이 아니다. 불교는 핑계일 뿐, 고기가 귀했기 때문에 금육을 한 것이다. 특히 소는 농사 도구였으니 피했고, 사신이 오더라도 미리 길러둔 양과 돼지를 내놓은 것이다. 둘째, 도축하는 방법은 서툴다. 오랫동안 도축을 하지 않으면 솜씨가 녹슨다. 게다가 원래 도축을 능숙하게 했던 나라가 아니다. 고기 만지는 모습이 아주 엉성하다.재미있는 것은 고기를 먹는 방법이다. ‘국과 구이[羹43D1, 갱자]’다. 고기를 자주 먹지 않았던 고려에서도 ‘돼지고기 국’ ‘돼지국밥’이 있었다는 뜻이다.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1037년 태어나서 1101년 죽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동파육(東坡肉)’은 소동파가 시작한 음식이다. 소동파는 ‘고려도경’의 시대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다. 소동파의 시대에 이미 중국에는 장에 고기를 넣고 졸인 음식이 있었다. 동파육은 선진적인 음식이다. 동파육을 먹다가 고려에서 불에 막 구운 돼지고기 국, 구이를 먹으며 얼굴을 찡그렸을 서긍의 얼굴이 떠오른다.◇ 기마민족인가, 농경민족인가고기는 유목, 기마민족의 먹을거리다. 깊은 산속 혹은 북방의 너른 터를 떠돌며 살았던 북방 기마, 유목민족들은 고기를 손질하거나 먹는 일이 익숙하다. 기후 때문에 어차피 농사는 힘들다. 곡물이 자랄 수 없다. 먹어야 산다. 사냥이 주업이다. 사냥을 통하여 얻은 고기는 유목민족의 식량이다. 지금도 몽골인들은 유목 생활로 짐승을 기른다. 고기가 주식이다.우리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다. 우리도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고구려, 부여 등은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의 피가 백제를 통하여 한반도에 스며들었다. 한반도 태백산맥 언저리에 살았던 동예, 옥저도 마찬가지. 부여, 고구려, 북방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석학 이어령 선생은 “한민족은 모순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고 농경민족화 되었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특질이 뒤섞여 있다. 활을 잘 쏜다. ‘빨리빨리’를 외치면서도 된장, 간장 등은 오랫동안 묵힌다. ‘빨리’와 ‘느리게’가 뒤섞인, 모순된 민족이다. 오래전에는 우리도 고기를 잘 다루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1712~1791년)이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나오는 부여의 돼지 이야기다.“(전략) (부여는) 육축(六畜)으로 관직의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가 있다. 읍락(邑落)에는 토호[豪]가 있어, 백성을 하호(下戶)라 하여 (후략)”부여의 연맹체를 구성하는 중심세력 중 하나는 저가(猪加)였다. ‘저(猪)’는 돼지다. 때로는 ‘시(豕)라고도 한다. ‘가(加)’는 윗글에 나타나는 대로 지역을 다스리는 이, 즉 족장(族長)이다. 돼지 토템을 지닌 부족의 족장이 바로 ‘저가’다. 부여인들의 돼지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아니라 산속 멧돼지일 가능성이 크다. 멧돼지든, 기른 돼지든 돼지는 부여사람들 곁에 있었다.고구려 시대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제사상에 돼지를 사용하고, 결혼 예물로도 등장한다.중국 ‘북사(北史)_고구려(高句麗)’ 편이 전하는 고구려의 결혼 풍습이다.“혼인에 있어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 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낭만적이다. 서로 사랑하면 결혼시킨다. 재물을 받지 않고 돼지고기와 술 정도가 예물(?)이다. 고기는 귀하지만 아주 드문 식재료는 아니었다. 돼지고기와 술은 재물은 아닌 예물이다. 고급 음식이었지, 귀한 물품은 아니었다는 뜻이다.부여, 고구려는 기마민족의 나라다. 기마민족의 풍습은 따뜻한 곡창지대로 넘어오면서 변한다. 고려 역시 백제, 태백산맥 지역을 통하여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마민족의 특성은 사라졌다. 고려인들의 돼지 다루는 솜씨는 서툴렀다.◇ 거란과 몽골의 고려 침략과 고기 문화 전래고려 시대 고기 문화는 두 차례 한반도에 전래한다. 한번은 거란 침략기고 또 한번은 몽골 침략기다. 거란 역시 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북방 기마민족인 거란과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고기 문화도 자연스럽게 한반도로 들어온다.삼국시대 무렵 큰 도시였던 경주와 가야에는 난생설화가 전해진다. 경주는 계림(鷄林)이다. 닭의 도시다. 가야의 김수로왕도 마찬가지. 알에서 태어났다. 닭이나 새다. 돼지, 소, 개 등과는 거리가 있다. 호남지역은 백제, 고구려, 부여의 피를 받았다. 기마민족의 피다.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남쪽은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피가 뒤섞인다. 끊어졌던 기마민족의 고기 문화는 기마민족의 침략으로 다시 이어진다.조선 초기 기록이다.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다. 북방 기마민족의 고기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97C3977C)’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중략)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후략)”화척은 양수척이라고도 불렀다. 천민이다. 재인은 묘한 단어다. 이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재주도 부렸다. 광대 패의 시작이 백정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달단은 더 묘한 단어다. 달단은 타타르 혹은 타르타르다. 터키, 동유럽의 북방 기마민족과 연관이 있는 민족이다. 생고기 스테이크를 타타르 스테이크(tartar steak)라고 부른다. 우리 육회와 닮았다. 이들은 모두 소를 도축하거나 동냥질, 도둑질한다.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다. 굶주리는 이들이 늘어나면 도둑이 된다.뿌리는 거란 혹은 거란 주변의 기마 민족들이다. 이들은 거란의 고려 침략 시기, 한반도로 들어왔다. 침략군 혹은 침략군의 앞잡이로 고려에 들어온 이들이 전쟁 후 그대로 고려에 눌러앉는다. 할 줄 아는 것은 사냥과 도축.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도축하고, 그걸 먹거나 내다 판다. 부족하면 도둑질이다.몽골인들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에 목장을 만들어 말을 키우고 고기 문화를 전한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먹던 고기다. 고려 사람들도 이들을 따른다. 사람, 문화가 같이 들어온다.돼지고기 이야기는 다음 회로 이어진다. 그 전에 돼지 이야기를 조금 더 잇는다. 내 추억 속의 돼지고기는 축구공이다. 시골에서 돼지를 도축하면(불법으로) 오줌보가 나온다.오줌보에 물을 채워서 축구공 대신 찼다. 물이 찰랑찰랑한 ‘가죽 축구공’으로 한나절씩 놀았다. 오줌보 축구공을 자주 찼으면 오늘날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불행히도 시골 마을의 돼지 도축은 일 년에 네댓 번이었다. 축구공이 없었으니 실력이 늘 수 없었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10

人頭 대신 만두? 제갈공명 전설은 거짓… 몽골 유목민족에서 시작됐다

개인적이고 엉뚱한 ‘추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두와 ‘50환짜리 백동전’ 이야기다. 50환짜리 백동전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통용됐다. ‘5원’짜리 동전으로 썼다.1970년 무렵. 대구 시내버스 차비가 4원에서 6원으로 올랐다. 50% 인상. 왕복 차비가 8원에서 12원으로 올랐다. 통학하던 중학생들은 끔찍해졌다. 10원 지폐 한 장 받아서 8원 쓰고, 나머지 2원으로 군것질을 했는데 그게 불가능해졌다. 군것질은 학교 앞에서 팔던 ‘납작만두’였다. 이제 납작만두를 먹으려면, 1시간 거리 하굣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납작만두를 포기할 수도 없고.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누구 발상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인상 충격’을 줄이는 방안이 나왔다. 버스 차비 6원을 내는데, 10원 지폐를 내면 비닐봉지에 든 4원을 거스름으로 준다. ‘50환 백동전’을 내면 그대로 인정해준다.지금 생각하면 엉뚱했지만, 제법 긴 기간 동안 ‘50환 백동전=6원’ 셈법이 통용됐다. 이런 ‘훌륭한 제도’는 빨리 퍼진다. 대구 시내 모든 중학생들이 50환 백동전으로 버스비를 냈다. 방과 후에는 죄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1원에 5개쯤 주는 납작만두를 베어 물었다.◇ 만두를 제갈공명이 만들었다고?납작만두도 만두다. 만두라 부르긴 잔망스럽지만, 만두는 만두다. 만두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어디서 와서 대구에서 ‘납작하게’ 됐을까?‘성호사설_제4권_만물문’에 나오는 만두 이야기다.“(전략) 만두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노수(瀘水)에서 제사 지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이다. 다만 뇌환은 작고 만두는 크며, 뇌환은 밀가루로 뭉쳐서 만들고 만두는 떡으로 만드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후략)”‘성호사설’은 성호 이익(1681~1763년)이 쓴 책이다. 1740년 무렵 편집되었다. 위 내용에 만두와 만두보다 작은 ‘뇌환(牢丸)’이라는 음식도 등장한다. 만두와 뇌환 모두 겉은 떡, 속은 고기다. 만두는, ‘곡물로 만든 피+고기로 만든 소’다.“(만두는) 노수에서 제사 지낼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문구가 나온다. ‘제갈공명 노수대제(瀘水大祭) 만두 기원설’이다. 엉터리다. 후한 촉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181년 출생해서 234년에 죽었다. 6세기에 나온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곡물 가루음식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지만, 아직 만두라는 이름도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제갈공명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이는 노수를 만났다. 노인들이 “사람 머리 49두를 강물에 던지고 제사 지내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한다. 제갈량은 “전쟁터에서 이미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또 죽일 수는 없다”며 양고기로 속을 만들고, 겉에는 밀가루 반죽을 더해서 사람 머리 모양의 ‘蠻頭(만두)’로 제사를 모셨다. ‘만두(蠻頭)’, 남만 인의 머리에서 음식 만두(饅頭)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제갈공명을 신격화하기 위해 후대 민중들이 만든 이야기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연의’는 소설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노수를 간 흔적도, 노수대제도 없다. 가지도 않은 곳에서 무슨 만두를 빚었으랴? 만두도 없었던 시절에.◇ 만둣집 주인이 내 손목을 잡았다?고려 시대 가요 ‘쌍화점’의 시작 부분이다.“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댄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이 말사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후략).”“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말이 가게 밖에 들고 나면/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쌍화’는 한반도식 만두다. 쌍화는 ‘상화(霜花)’에서 비롯됐다. 상화는 만두 등을 찔 때 생기는 뽀얀 수증기, 서리꽃이다. 곡물 덩어리를 찐 음식을 상화, 쌍화로 부르는 이유다. ‘쌍화점’에 대한 이론도 있다. 쌍화점이 만둣가게가 아니라 세공 유리제품 등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였다는 주장.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쌍화가 만두가 아니라 단 것으로 속을 채운 찐빵, 호빵류였다는 것이다. 아직은 ‘만둣가게’가 다수설이다.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년) 시기의 작품이다.만둣가게의 주인은 회회아비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아라비아 사람 등 외국인이 많았다. 몽골의 원나라는 기술력이 뛰어난 아라비아 사람, 색목인(色目人)을 중용했다. 수도 개성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만둣가게가 있었다.만두는 유목민족의 음식이었다는 주장이 다수설이다. 거란의 요나라(大遼, 916~1125년) 벽화에도 만두 찌는 그림이 있다. 원나라 시절 유목민족에 의해 한반도에 전래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려사 충혜왕 4년(1343년)의 기록에는 ‘만두 도둑’이 등장한다. 궁궐 주방에 들어와 만두를 훔쳐먹은 도둑이 있었고, 왕이 도둑을 죽이라고 명했다는 내용. “그까짓 만두를 훔쳐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냐?”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만두는 귀한 물건이었다.고려 말, 조선 초기를 살았던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만두에 대해서 시를 남겼다. ‘목은집’의 ‘금주음(衿州吟)’이다.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산승(山僧)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자빠질 일/흰 눈처럼 쌓은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기름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당시 만두 겉껍질 재료는 메밀이었다. 목은의 만두는 메밀 겉껍질을 벗긴 녹쌀 정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_세종 4년(1422년) 5월17일’의 기록에도 만두가 나타난다.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를 앞두고, “(행사 참석인원 들의 밥상에) 만두(饅頭), 면(麵),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후략)”라고 신하들이 말한다.‘쌍화점’과 궁궐 주방의 만두 도둑, 목은이 스님에게 대접받은 만두, 세종대왕의 수륙재 만두는 약 100년 남짓의 차이가 난다. 만두는 귀한 음식이었다.◇ 만두는, 곡물 껍질 속에 고기, 채소, 생선 등을 넣고 만든 음식곡물로 만든 껍질에 속을 채운 것이 바로 만두. 만두 속은 고기, 채소, 생선 등이 주류를 이룬다. 단맛을 내는 소도 있다. 찐빵, 호빵 같은 만두다. 고려, 조선 시대 내내 만두, 쌍화, 상화는 혼란스럽다. 한반도 자체 개발품 만두, 상화와 외래 만두가 뒤섞인다. 단맛이 나는 것과 짭조름한 것, 빵과 떡의 차이 등이 혼란을 부른다.만두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 깔조네, 남미대륙의 또르띠야도 만두다. ‘남미식 만두’는 곡물이 옥수수다. 몽골에도 만두가 있다. 보츠, 호쇼르 등이다. 문명권 국가에는 대부분 만두가 있다.겉껍질인 피도 밀, 메밀, 서양의 경질 밀(硬質, durum wheat),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 전분 등 여러 종류를 사용한다. 속은 지역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조선시대, 한반도 만두의 껍질은 메밀이었다. 추사 김정희 ‘완당전집_10권_시’에도 “메밀꽃 희끗희끗 은속은 눈부시니/온 산에 뒤덮인 게 다 만두의 재료로세”라고 했다. ‘은속(銀粟)’은 조, 좁쌀로 추정한다. 쌀과 밀가루는 귀했고, 만두는 주로 메밀, 좁쌀로 만들었다. 메밀로 만든 건 만두, 옥수숫가루로 만들면 만두가 아니다? 이것도 어색하다.우리는 ‘만두’를 섬세하게 가르지 않았다. 곡물 피로 겉을, 각종 고기, 생선, 채소 등을 속으로 만든 건 모두 ‘만두’라고 부른다. 그렇지는 않다.중국인들은 만두, 교자, 포자를 섬세하게 나눈다. 만두(饅頭, mantou)는 반드시 발효한 밀가루 등 곡물가루로 만든 ‘중국식 밀가루 빵’이다. 속이 없는 찐빵이나 중식당에서 내놓는 꽃빵이 만두다. 한, 중, 일이 일치하는 음식은 교자(餃子)다. 발효시키지 않은, 생피로 만든 겉껍질에 채소, 고기, 생선 등으로 속을 채운 것이다. 찌거나 삶으면 증교자(蒸餃子), 수교자(水餃子)다. 오늘날 우리가 ‘군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튀김만두’다.포자(包子)는, 발효한 밀가루 반죽으로 겉껍질을 만들고 속에는 생선, 고기, 채소 등을 넣은 것이다. 윗부분을 마치 보자기 묶듯이 틀어 올린다. 뜨거운 육즙으로 유명한 ‘소룡포(小籠包)’는 ‘소룡포자(小籠包子)’의 준말이다. 포자의 일종이다.우리는 음식을 잘 섞는다. 중국인들은 상상도 못할 ‘교자 만두’도 만들었다. 교자면 교자고, 만두면 만두다. 한반도에는 교자 만두도 있다.사족. 나이가 든 후, 어머니께 납작만두 사 먹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 일이니 기억이 아물아물. 한참 설명했다. 어머님 왈 “아, 만두 찌지미 말하는구나!”온 세계를 떠돌았던 만두가 한반도에서 ‘만두+전(煎)’이 되었다. 만두, 교자, 포자, 상화, 쌍화가 뒤섞였다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한반도에서는 만두가 부침개가 되기도 한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03

‘정구지’는 먹을 것 없는 경상도 산골사람만 먹는 희한한 풀?

아마도 늦봄 무렵이었을 터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 장충동 하숙집.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 예닐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비 오는 늦은 오후. 하품을 댓 발이나 길게 하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가 ‘먹고 싶은 고향 음식’으로 튀었다.경상도 출신 하숙생이 불쑥 내뱉었다. “오늘 같은 날, ‘정구지 찌지미’나 ‘부치 무쓰모’ 좋겠다.”서울 태생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 ‘부치 무쓰모’가 ‘부쳐 먹었으면’이라는 정도는 알아들었다. ‘정구지’는 요령부득, ‘찌지미’는 낯설다. 경상도 출신들은, 불행히도, ‘정구지’가 부추임을 몰랐고 ‘찌지미’가 부침개라는 세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을 줄도 몰랐다. 또 다른, 혼란스러운 일도 있었다. ‘찌지미’가 뭐냐는 질문에 “찌지미요? ‘적’도 몰라요? ‘적’요, ‘정구지 찌지미’는 ‘정구지 적’을 말하는 거래요” 이번에는 ‘적’이 뭐냐는 말로 더 시끄러워졌다. 다행히, ‘적’은 부침개이며 ‘전(煎)’을 말한다는 사실은 곧 알아차렸다. “서울 사람들은 ‘정구지’를 반드시 부추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아주아주 오래 뒤에야 알았다.그날 ‘정구지 찌지미’는 결국 먹지 못했다. 정구지가 뭔지 알아야 정구지 찌지민지 뭔지를 만들 것이다. 그날의 슬픈 결론. “서울에는 ‘정구지’라는 채소가 없으며, 그건 먹을 것 없는 불쌍한 경상도 산골 사람들만 먹는 아주 희한한 풀.”부추는 동북아시아 세 나라가 널리 먹었다. 중국, 일본도 부추 나물은 즐겨 먹는다.부추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부추는 에로틱(erotic)하다. 부추를 ‘기양초(起陽草)’라고 부른다. 양기를 북돋우는 채소라는 뜻이다. ‘정구지’를 ‘精久持’라고도 주장한다. 남자의 정기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뜻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른다. 별다른 근거도 없다. “이른 봄 첫 부추는 아들에게 주지 않고 사위를 준다”라는 얄궂은 표현도 있다. “아들이 양기를 세우면 며느리가 좋고, 사위가 양기를 세우면 딸이 좋다”는 희한한 표현이다. 어디서,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오리무중이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그저 ‘카더라’ 혹은 ‘아니면 말고’ 정도다.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부추가 ‘게으름뱅이 풀’이라는 것이다. 부추가 남자의 정력에 좋으므로 부추를 많이 먹은 부부는 들에서 일하지 않고 늘 방 안에서만 지낸다고 붙인 이름이다. 한편으로 부추는 생명력이 강해서 특별히 손을 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 하여, 게으름뱅이도 쉽게 키울 수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근거 없고 터무니없다. 우리보다 의학, 과학 지식이 뒤떨어졌던 조선 시대에도 이런 식의 설명은 없었다.‘산림경제’ ‘의림촬요’ 등 조선 시대 의학서, 백과사전에는 부추를 약으로 사용한 여러 가지 실례가 있다. 부추, 잎, 대궁, 뿌리, 씨앗 등을 모두 약용으로 사용했다. 오늘날의 위암 같은 반위(反胃)를 다스리고 종기, 여성 질환에도 부추 잎 혹은 부추의 여러 부분을 사용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다. 당시의 처방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부추는 환자의 건강식, 치유식으로 널리 사용했다. ‘승정원일기’ 인조 24년(1646년) 5월 19일의 기록에는 중환인 중전에 대한 음식, 약물 처방 내용이 실려 있다. “술시(戌時)에 저녁 수라를 조금 올렸는데 연근채(蓮根菜)와 구채(韭菜)도 약간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연뿌리 나물과 부추 나물이다. 이틀 후인 5월 21일의 기록에도 “오늘 이른 아침에 구채죽(韭菜粥) 한 종지를 다시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부추는 궁중에서 제사에 사용하거나 죽, 반찬 등으로도 널리 사용했다. 애당초 부추를 이용한 ‘전통적인 비법 처방’이나 정력제로 사용한 흔적은 없다. 부추를 이용한 특효약(?)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치료법, 약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우리가 따를 만한 ‘비법’은 ‘특효약’이 아니라 음식이다. 모든 식재료를 고귀하게 사용한 그 정신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나오는 ‘부추 꽃 김치’ 담그는 법이다.부추 꽂지[淹韭花, 엄구화]는, 꽃과 열매가 반반인 것을 따서 억센 줄기는 버리고, 1근당 소금 3냥을 넣고 짓찧어 자기 그릇에 담아둔다. 혹 부추 꽃 속에 애오이, 애가지를 따로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빼고 한 이틀 지난 뒤에 부추 꽃에 고루 버무려 넣되, 병 바닥에 동전을 넣으면 더욱 좋다. ‘신은지’ ‘거가필용’‘淹(엄)’은 ‘담글 엄’이다. 애오이, 애가지는 어린 오이, 가지를 말한다. 부추 꽂지는 부추 꽃을 소금에 절여서 만든 음식이다. 오늘날의 장아찌 혹은 서양 피클과 비슷하다. 이 레시피의 원전은 ‘신은지’(神隱志, 1400~1450년경)와 ‘거가필용’(居家必用, 초판은 원나라, 개정판 1560년 출간)이다. 조선과 중국에서 부추김치뿐만 아니라 부추 꽂지도 먹었음을 알 수 있다.부추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중국에 있다. 부추로 만드는 ‘스물일곱 가지 반찬’ 이야기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전남 강진 유배 시절 남긴 시에 ‘스물일곱 가지 반찬’이 남아 있다(‘다산시문집 5권 시’).“(전략) 봄 산에 가랑비 지나가면/채소 싹이 맑은 기운 머금는데/누가 알리 ‘유랑의 부엌[廋郞廚]’에서/날마다 ‘삼구(三九) 반찬’ 장만하는 것을! (후략)”부추라는 표현은 없지만, 조선 시대에 늘 인용되던 부추 이야기다.‘유랑’은 유 씨 사내, 유 씨 성의 남정네를 이르는 존칭이다. 유랑은 남제(南齊) 시대를 살았던 청렴한 벼슬아치 유고지(庾杲之, 441~491년)다. 벼슬살이를 해도 청렴하니 늘 밥상이 부실했다. 반찬이라곤 흔하디흔한 부추뿐이었다.“누가 유랑이 청빈하다 하던가? 반찬이 늘 스물일곱 가지나 되는 것을”이란 문구는 “남제서 유고지 열전(南齊書 庾杲之列傳)”에 나오는 내용이다.청빈한 유고지는 평소 날부추, 삶은 부추, 부추김치 등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만 밥상에 놓았다. 부추는 ‘구채(韭菜 혹은 韮菜)’다. ‘韭(구)’는 ‘九(구)’와 음이 같다. 3*9=27이다. 부추(구) 반찬 세 가지는, 곧 27가지 반찬이 된다는 표현이다.유고지가 살았던 5세기에는 중국에서도 부추김치, 부추지를 일상적으로 먹었다.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 부추 기르는 법에 대해서 상세히 연구했다.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다산이 농사짓는 법을 꼼꼼히 살펴보고, 실제로 부추 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지적한 내용은 ’부추 베는 법‘이다.“(전략) (부추 등 채소를) ‘뜯는다’라는 것은 줄기를 절단하는 것을 이른다. (부추를 한낮에 베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한낮에 부추를 자르면 칼날이 닿은 곳이 마른다. 부추를 기르는 데 해로우니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꺼릴 따름이지 먹는 사람에게 해가 있어서가 아니다. ( 후략)”_‘다산시문집’‘먹보 영감’으로 불리는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부추 이야기를 놓쳤을 리 없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목은은 시집 ‘목은시고’에서 “부추 나물은 푸르고 또 푸르며, 떡은 색깔이 노란데/조석으로 잘게 씹어 먹으니 맛이 좋다”고 했다. 목은은 ‘시경’을 인용해 “이월 초하루 이른 아침엔, 양 잡고 부추 나물로 제사한다”고 했다. 떡은 귀한 음식이었다. 귀한 떡을 부추와 더불어 먹었고 한편으로는 제사에도 사용한다고 적었다. 목은뿐만 아니라, 조선의 궁중에서도 부추를 소중하게 사용했다.조선 초기, 국가의 제사, 민간의 각종 행사 등 절차에 대해서 기록한 서적이 ‘세종오례의’(世宗五禮儀)다. 이 기록에서도 “(제사상의) 첫째 줄에 부추김치를 놓고 무김치가 그다음이며, 둘째 줄에 미나리 김치를 놓는다”고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장생(1548~1631년)이 엮은 ‘사계전서’도 제사 등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봄에는 부추를 천신(薦新)하고 여름에는 보리, 가을에는 기장, 겨울에는 벼를 천신한다”. ‘천신’은 계절 별 생산물을 가장 먼저 종묘나 민간의 사당에 올리는 제사다. 봄철에는 부추가 가장 의미 있는 것이었다.‘비 오는 날 하숙집의 정구지’ 뒷이야기를 전한다. 몇 달 후, 우연히 주인아주머니, 하숙생 몇몇과 시장을 갔다가 ‘정구지’를 만났다. “저게 정구지래요!”라고 했더니, “아! 부추” “아, 솔!”이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정구지’는 호남 사투리로 ‘솔’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래는 ‘경북매일’의 기사다.(전략) 과메기·대게·문어·시금치 등/오늘부터 사흘간 잠실 롯데百(중략) 포항특산품홍보 판매관은 오징어와 대게, 문어 등 동해안 수산물과 부추빵, 시금치, 부추, 젓갈, 사과, 쌀 등 포항지역 대표 농산품이 전시 판매된다. (후략)_ 2017.12.13.‘부추’ ‘부추빵’이 눈에 띈다. 서울 생활하면서 알아차린 부분이 있다. ‘정구지 적’은 ‘정구지 90%+밀가루 쬐끔’이다. 부추전은 ‘부추 50% 이하+밀가루 50% 이상’이다. 이게 ‘정구지 찌지미’인지 밀가루 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부추빵에는 부추가 얼마나 들어 있었을까? ‘정구지’에 대한 상상력을 기대한다. 부추빵을 넘어서는, 유고지의 스물일곱 가지 반찬 같은 ‘정구지’ 음식을 기대한다. 음식 역시 상상력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3-27

이른 새벽 장터, 땔감 팔던 장사치들의 탁배기 한사발과 술국

해장, 해장국은 없었다.술꾼들의 ‘뜨악’할 얼굴이 눈에 선하다. 무슨 소리? 어제도 과음을 했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지금도 속이 쓰리다. 점심에는 뭘 먹고 속을 풀까라고 벼르고 있다. 뭐? 해장, 해장국이 없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런 표정들이 눈에 선하다.방송 ‘먹방’ 프로그램에서도 ‘해장국’은 단골 메뉴다. 비타민이 많고, 미네랄이 많다고 야단법석이다. 멀쩡한 한의사, 의사들까지 해장국 예찬에 한몫 거든다. 신문, 잡지, 개인의 블로그,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비법이 있다. 대한민국은 ‘해장천국’이다.◇ 대갱과 화갱우선 검색부터 해보시길. ‘해장’이라는 한자 검색을 해보면 원하는 ‘解腸’은 나타나지 않는다. ‘解腸’ 즉, ‘속을 푼다’는 뜻의 한자어는 없다. ‘解’는 맺힌 것을 푼다는 뜻이다. ‘腸’은 말 그대로 장기, 창자를 뜻한다. 해장, 속을 푼다. 그럴 듯하지만 이런 단어는 없었다. ‘解腸’은 우리 시대가 만들어 사용하는 급조어다. 뜻도 불분명하고 억지 느낌이 든다.‘해장(解腸)’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없었다. 미디어마다 “예전에는 이런 방식으로 해장을 했다”고 말한다. 엉터리다. ‘전통 해장국’은 코미디다. 조선시대 어떤 문헌에도 ‘해장(解腸)’은 없다. 드디어는 외국의 ‘해장음식’까지 등장한다. 우유 해장, 바나나 해장이다. 억지 코미디다. ‘해장’은 일제강점기 신문에 처음 나타난다.술을 마시면 속이 쓰리다. 간이 미처 알코올을 해독하지 못해서다. 알코올 처리 용량을 넘어서니 장기가 아우성을 친다. 알코올 분해물질에도 독성이 있다. 속을 아프게 한다. 술을 마신다고 속이 꼬이지는 않는다. 장이 꼬여서 아픈 게 아니다. 진짜 장이 꼬이면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푼다는 것인지?‘해장’을 원한다면 ‘해장(解醬)’이 맞다. 속을 푸는 장국이다. 장국은 된장, 간장 등 ‘醬(장)’을 뜻한다. 제대로 만든 전통 된장, 간장 등은 속을 풀어준다. 소화효소도 풍부하다. 장기들이 원활하게 움직이게 한다. 장국의 힘이다.우리 음식의 바탕은 국물이다. 국물은 ‘국[羹, 갱]’이다. 갱은 두 종류다. ‘대갱(大羹)’과 ‘화갱(和羹)’이다. 대갱과 화갱 모두 한자 검색을 하면 자동으로 단어가 나타난다. 원래부터 널리 사용했던 단어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모르고,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대갱은 국물의 으뜸이다, 쇠고기는 귀했다. 쇠고기 수육을 만들면 국물이 나온다.수육은 ‘숙육(熟肉)’이다. 삶은 것이다. 고기를 물로 삶으면 국물이 나온다. 서양음식은 고기 삶은 국물을 취하지 않는다. 일부 사용하지만 대부분 버린다. 우리처럼 돼지 뼈까지 고아서 국물로 취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귀한 쇠고기 국물을 버렸을까? 버리지 않았다. 이 국물을 그대로 내면 바로 대갱이다.소금이나 매실 양념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제사상에도 마찬가지. 밥과 국이 있고 탕(湯)이 있다. 어린 시절, 제사를 모실 때 국이 있는데 또 탕이 있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밥에는 국이 있어야 하고, 귀한 제사상에는 고기 국물인 탕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탕은 귀한 고기를 곤 국물이었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귀하니 제사상에 올렸다. 예전에는 소금과 조미 매실이 최고의 기본양념이었다. 이마저도 넣지 않은 국물을 으뜸으로 쳤다. 바로 대갱이다. 국물의 으뜸이다. 오늘날 곰탕의 시작이다. 경북지방에서 ‘사골곰탕’이란 표현을 널리 쓰는 것은 이유가 있다.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쇠고기를 구해서 쓸 수는 없다. 뼈라도 넣고 귀한 ‘곰국’ ‘곰탕’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사골이 들어간 곰국, 곰탕이다. 화갱은 소금, 매실 등을 넣고 양념한 것이다. 채소도 넣는다. 소금 대신 간장, 된장, 매실 대신에 각종 양념을 넣으면 화갱이다. 장이 들어가면 장국이다. ‘된장 푼 국물’이다. 여기에 시래기를 넣으면 시래기 국이고 간장과 무를 넣으면 무국이며, 선지를 넣으면 선지해장국이다. 칼칼한 고춧가루 넣으면 주당들이 좋아하는 수백 수천 가지의 해장국이 탄생한다.◇ 해장(解腸)인가 해정(解9172)인가?오늘날 우리가 먹는 해장국은 화갱이다. 양념, 채소 등이 들어간 장국이다. 시작은 역시 개장국[狗醬, 구장]이다. ‘된장 푼 물+개고기’다. ‘창자를 풀어주는 국물’이 아니라 ‘된장(간장) 푼 물’이 해장국의 기본이다.‘해정’은 일찍부터 있었다. ‘노걸대(老乞大)’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든 통역사 교재다. 몽골어, 만주어, 중국어 교본이 있다. 여러 종류의 통역교재를 통틀어 ‘노걸대’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노걸대’에 ‘解9172(해정)’이 나타난다. 모 방송국에서 ‘해장’이 ‘해정’에서 시작된 것 아니냐고 해서 꼼꼼히 살펴본 적이 있다. ‘9172(정)’은 숙취다. 해정은 “숙취를 푼다”는 뜻이다. 해장과 음이 비슷하다. 해정에서 해장이 비롯되었다. 제법 그럴 듯하다.조선 초기인 1478년(성종 9년) 문신 서거정 등이 엮은 ‘동문선’ 제3권에 여말선초의 유학자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설매헌부(雪梅軒賦)’가 있다. 여기에 ‘해정’이 나타난다.“(전략) 대방을 열고 바람 난간에서 굽어보며/방석 깔고 가부좌하여/노아 차를 끓여 해정하면서/주시의 재도(載塗)를 읊고 (후략)”‘해정’은 ‘정신을 맑게 하고’라는 뜻이다.문을 열었다고 했다. 바람을 쏘인다는 뜻이다. 가부좌는 바른 자세다. 차를 마신다고 했다. 향기롭고 따뜻한 찻물로 몸을 적신다. 따뜻한 국물은 몸속 장기를 원활하게 돌게 한다. 재도(載塗)는 시경에 나오는 문구다. ‘우설재도(雨雪載塗)’는 ‘비와 눈이 와서 질척거리는 길’이다. 바른 자세로 앉아서 바람을 쏘이면서 차를 마시고, 시경을 읽는 것이 바로 해정이다. 술을 진탕 퍼마시고 다음날 해장국을 들이킨다는 뜻이 아니었다.숙취를 푼답시고 뜨거운 사우나탕에 앉아 있거나 뜨거운 국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해정과 해장은 다르다. 여말선초부터 해정은 있었으나 해장은 없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성주석(醒酒石)’이 자주 나타난다. ‘술 깨우는 돌’이다.성주석의 시작은 당나라의 이덕유다. 그는 평천장이라는 대저택을 짓고 각종 나무, 꽃, 돌 등을 옮겨 두었다. 성주석은 이 정원에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하면 늘 이 돌에 앉아서 술을 깨우곤 했다고 전해진다. ‘성주(醒酒)’는 술을 깨운다는 뜻이다. 설마 돌이 해장을 시켰을 리는 없다. 바람이었다. 정원, 돌 주변의 바람이 술기운을 날렸으리라. 다산 정약용도 ‘바람’을 해장국 대용으로 썼다.다산은 “찰랑찰랑 물결은 뱃전을 치고, 스치는 바람이 술을 깨운다”고 했다(다산시문선).가벼운 과일로 술기운을 깨운 이들도 있었다.조선 전기 문신 삼탄 이승소(1422~1484년)는 ‘삼탄집’에서 “포도의 효능은 여럿 있지만 술을 깨우는 공로가 가장 크다”고 했다. 고려 문신 이규보도 과일로 해장을 했다. “서왕모에게서 훔쳐온 복숭아로 입맛을 돌게 하거나 술을 깨게 한다”고 했다(동국이상국전집).1499년 발간된 의서 ‘구급이해방’에는 술병[酒病] 치료법이 있다. 과음으로 구토, 손발 떨림, 정신 어지러움, 소변 불편이 나타나면 갈화해정탕을 권한다.‘갈화(葛花)’는 칡꽃이다. 칡꽃, 인삼, 귤껍질 등 여러 약재를 넣고 달인 물을 먹으면 술병이 낫는다고 했다. 이 치료법의 끝부분은 술꾼들이 새길 만한 내용이다.“갈화해정탕은 다 부득이해서 쓰는 것이지, 어찌 이것만을 믿고서 매일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우리 선조들은 해장국을 먹어야 할 정도의 음주는 ‘병’이라 여겼다. 병은 탕(약)으로 다스렸다.◇ 술국이 해장국으로 바뀌다경북 안동 중앙신시장에는 유명한 선지해장국 집이 있다. ‘옥야식당’. 메뉴는 딸랑 선지해장국 하나다. 전국적인 맛집이다. 대구는 육개장의 도시로 이름을 얻었다. 50년 이상 80년 된 식당도 있다. 경주 팔우정거리에는 해장국 골목이 있다. ‘팔우정해장국’에서 시작한 묵해장국은 메밀묵과 머리를 뗀 콩나물을 넣는다. 조미료 없이 모자반으로 시원한 맛을 낸다. 모두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었다.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이문설렁탕’은 종로 피맛골 뒷골목에서 시작했다. 나무꾼들이 이른 새벽 한양도성 부근 남양주 등에서 나무를 지고 온다. 지게를 내려놓은 다음, 한숨 돌리고 요기를 했다.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인 ‘천황식당’도 마찬가지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이곳의 이름은 ‘나무전’이었다. 땔감을 내려놓고 팔던 곳이다. 식당의 주 고객은 나무꾼과 땔감을 사러온 성내 사람들, 시장 보러 온 이들이었다. 모두 시장 통이거나 도심의 번화가다. 해장국은 ‘술국’에서 시작되었다.이른 새벽 장터에 땔감을 팔러 온 이들의 요기다.간단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 마실 술국이 필요하다. 술을 깨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술을 마실 때 더불어 마실 술국이다. ‘탁배기 한 잔’에 김치 한 쪼가리. 그리고 더불어 입을 헹굴 뜨듯한 술국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희석식 소주가 전국을 휩쓴다. 감미료, 조미료가 가득한 소주 아닌 소주. 조미료, 감미료가 과한 음식은 과식을 부른다. 조미료, 감미료 가득한 술은 과음이다. 과음에는 해장국이 필수다. 다산의 ‘바람’이나 복숭아, 포도, 성주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술국이 그립다. 목젖이 꼴딱꼴딱 할 때, 술국 한 모금을 넘긴다. 불콰한 얼굴과 더불어 입술을 훔치던 거친 손매가 그립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3-20

동양과 서양, 테크놀로지와 인간성, 과거·현재·미래가 맛깔나게 뒤범벅

비빔밥을 적확하게 표현한 이는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이다. “비빔밥은 2개 이상의 문화가 같은 공간에서 충돌,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중략) 실제로 나는 서로 섞일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것들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걸 즐겼지. 쉬운 예로 서울 아시안게임을 위해 만든 ‘바이 바이 키플링’을 볼까. 서양 연주가가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일본 마라톤 선수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장면, 서양의 타악기 연주와 한국의 사물놀이 연주가 함께 울려 퍼지는 장면. 그야말로 동양과 서양, 테크놀로지와 인간성,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온갖 요소를 뒤범벅으로 섞은 ‘비빔밥 정신’이 담겨 있지. 자네 작업도 보니 영락없이 비빔밥 같더군. (후략)”우리는 비빔밥을 모른다. 어느 항공사 고객들이 첫째로 손꼽는 기내식. 혹은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왔을 때 몇 차례나 주문해서 먹었던 음식 정도로 기억한다.쌀을 먹는 나라는 많다. 비빔밥을 먹는 나라는 없다. 비빔밥은 한반도 고유의 것이다. 일본에는 여러 종류의 덮밥과 가마메시[釜飯, 부반]가 있다. 비슷하지만 우리 비빔밥과 다르다.덮밥은 말 그대로 밥 위에 여러 가지 고명을 얹어서 먹는다. 고명을 덮은 음식이지 비빔밥처럼 ‘비비다’에 방점이 있지 않다.가마메시는 솥밥이다. 비벼 먹는 것이 아니라 양념을 얹어서 떠먹는다. 가마메시를 비비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일본인들도 비빔밥을 모른다. 그들 눈에는 비빔밥이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음식이다. 양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뉴욕에 비빔밥 광고 사진이 걸렸을 때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9ED2田勝弘, 1941년~ ]는 말했다.“아름답게 준비한 다음 왜 모든 걸 뒤섞어서 엉망을 만들까?” 구로다 씨의 한국 인연은 약 40년이다. 일본 우익이지만 ‘한국을 아는’ 지한파다. 그도 비빔밥은 모른다.비빔밥은 밥, 고명, 장(醬)이 한 그릇에 뒤섞여 새로운 제3의 맛을 창조해내는 음식이다. 백남준 선생이 비빔밥, 멀티미디어를 이야기한 것은 1993년이었다. 25년 전에 비빔밥 정신을 말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통합’이 비빔밥의 ‘섞임’과 같다고 표현했다.백남준은 동서양 문화의 충돌, 융합을 나타내는 자신의 예술 세계가 “비빔밥의 원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파리 8대학에서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했던 평론가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도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비빔밥처럼 충돌, 융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각각 다른 문화들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힘은 ‘예술적 상상력’이다. 새로운 맛을 만드는 힘은 비빔밥의 ‘장(醬)’이다. 비빔밥의 ‘섞임’과 ‘비빔’은 “두 가지 이상의 식재료가 융합하여 제3의 맛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시의전서(是議全書)’의 비빔밥‘골동반(骨董飯)’이 곧 ‘부븸밥’ 즉, 비빔밥이라고 처음 표기한 책이 ‘시의전서’다. 몇몇 조건이 붙는다.“지금까지 발견된 책 중에는”이란 전제가 있다. ‘시의전서’는 19세기 말에 간행되었다고 추정한다. 필자, 연대가 모두 불확실하다. 20세기 초반에 경북 상주에서 발견되었다. 내용 등을 볼 때 1900년 가까운 시점에 간행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이다. 조선왕조의 끝자락에 발간된 책이다. 오래된 ‘고조리서(古調理書)’라고 부르기엔 어색하다. ‘부븸밥’으로 표기한 책이 ‘시의전서’이지 ‘시의전서’가 비빔밥의 존재를 처음 알린 것은 아니다. 비빔밥 레시피도 지나치게 화려하다.“밥을 정성들여 짓는다. 고기는 재워서 볶고 간납[간전肝煎]을 부쳐서 썬다. 각색(여러 종류)나물을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놓는다. 밥에 만든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계란지단을 붙여서 골패 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고기완자는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 국을 쓴다.”고기, 간납, 구슬처럼 빚은 고기완자와 달걀도 여러 번 등장한다. 아무리 봐도 한식과는 거리가 있다. 나물을 볶는 부분이나 지나친 고기, 달걀 사용 등은 한식이 아니라 서양식 혹은 일본식이다. 재료나 조리법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복잡하다.비빔밥은 ‘시의전서’ 이전에도 있었다.‘오주연문장전산고’는 19세기 중반에 나왔다. 여러 종류의 비빔밥이 등장한다.“비빔밥, 채소비빔밥, 평양 것을 으뜸으로 친다. 다른 비빔밥으로는 갈치, 준치, 숭어 등에 겨자 장을 넣은 비빔밥, 구운 전어새끼를 넣은 비빔밥, 큰새우 말린 것, 작은 새우, 쌀새우를 넣은 비빔밥, 황주(황해도)의 작은 새우 젓갈 비빔밥, 새우 알 비빔밥, 게장비빔밥, 달래비빔밥, 생 호과비빔밥, 기름 발라 구운 김 가루 비빔밥, 미초장비빔밥, 볶은 콩 비빔밥 등이 있다. 사람들 모두 좋아하고 진미로 여긴다.”50년 후에 나온 ‘시의전서’보다 간결하다.비빔밥 종류도 다양하다. 조리 과정이 복잡하거나 식재료가 화려한 것은 없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비빔밥이 살갑게 다가온다. 그 훨씬 전에도 비빔밥은 있었다. 조선중기 문신 박동량(1569~1635년)이 쓴 ‘기재잡기’의 내용이다.“(전략)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비빔밥[混沌飯, 혼돈반]과 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후략)”엄청난 양의 ‘밥=혼돈반’을 먹어 치운 주인공은 조선 전기의 무관 전임(田霖 ?~1509년)이다.전임은 밥에 생선과 채소를 섞어 만든 것을 먹었다. ‘混沌飯(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과도 비슷하다.‘혼돈반’이란 표현은 박동량과 ‘기재잡기’의 시대인 17세기 초반에 사용했다. 전임의 시대는 그보다 앞선 세조 시절이다. ‘기재잡기’의 기록이 맞는다면, 비빔밥은 15세기에도 있었다. ‘시의전서’의 기록보다 400년이 앞선다. 비빔밥은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 헛제사밥과 비빔밥오밤중이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잠을 참고 또 참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당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안 제사에 다녀오셨다. 손에는 신문지와 한지로 싼 제사음식이 들려 있었다.염불보다 잿밥. 제사음식이 궁금했다. 지금도 어느 집, 누구 제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한 달에 한두 차례 있었던 일이다.참 미안하게도 어느 집 제사인지 알아볼 염량도 없었다. 비빔용 큰 그릇과 간장 종지가 마련되었다. 집에 있던 식은 밥에 나물을 넣고 간장을 얹은 다음 비볐다. 여러 가지 전 쪼가리와 생선 등은 좋은 반찬이 되었다. 주전자에 담아온 탕(곰국)은 국물이다. 어린 동생들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제사 나물 비빔밥을 먹었다. 그게 비빔밥이자 ‘헛제사밥’임을 그때는 몰랐다.헛제사밥은, 공부하던 유생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음식은 법도다.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헛제사를 핑계로 상을 차렸다? 유교, 선비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민간에 ‘헛제사밥’이 있었다면 1670년 무렵 발간된 ‘음식디미방’에 헛제사밥이 있어야 한다. 없다. 조선후기 ‘오주연문장전산고’ ‘동국세시기’ ‘시의전서’에도 없다.‘헛제사밥’은 일제강점기, 해방 후에 나타난 음식이다. 유교, 오래 전 향교문화, 선비가 모두 사라진 후에 나타났다. 제사도 없는데 화려하게 차려서 슬쩍 먹었다? 그게 헛제사밥이다? 비루하고 천박하다.제사 모시는 일은 당시에도 버거웠다. 제사 닮은 음식을 일상에서 만들어 먹는다? 불가능하다.필자 기억에는 모든 제사 음식은 비벼먹는, 비빔밥이었다. 지금의 헛제사밥은 식당, 고객들이 합작한 이름이다.‘음식디미방’의 ‘잡채’ 중 몇 가지를 추려서 밥을 더하고 간장으로 비비면 비빔밥이다. 제사상의 오색 나물은 잡채의 부분집합이다. 잡채, 비빔밥, 헛제사밥은 맞물려 있다.“(전략) 허기가 들면 탕과 숙채(熟菜, 익힌 채소), 배추전과 간 고등어, 상어 ‘돔베기’ 산적으로 상을 차려낸 헛제사밥과 안동식혜를 먹으며 우리 조상의 지혜가 깃든 안동의 맛에 감탄한다. 한 도시, 한 나라의 문화를 말할 때 음식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후략)”-경북매일 2017년 2월27일, 윤희정 기자헛제사밥은 우리 시대의 음식이다. 특징이 있다. 육회, 고추장이 없다. 전통 간장을 사용한다. 조미료, 감미료 사용을 절제한다. 건강식이다. 생채 대신 숙채다. 음식의 뿌리는 ‘고조리서’다. 홍보, 마케팅은 특장점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지자체의 분발을 기대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3-13

세조 “미나리 관리 소홀은 곧 윗사람 업신여김”… ‘충성의 상징’ 미나리

오래 전, 미나리는 ‘각별’했다.2019년 봄, 청도 한재의 미나리는 어수선하다.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1465년) 5월10일의 기사다. 제목은 ‘침장고(沈藏庫)와 사옹방(司饔房)의 관리를 추국케 하다’다. 미나리 때문에 왕의 부마와 친족, 고위 관리 여러 명이 벌을 받는다. 큰 사단이다. 550년 전, 각별했던 미나리 이야기다.“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침장고의 관리가 바친 채소는 지극히 거칠고 나쁜데다 또 몸소 친히 바치지 않았으며, 사옹방의 관리와 환관들도 또한 검거하지 아니하여 모두 마땅하지 못하니, 추국하여 아뢰라’ 했다. 세자궁 앞에 미나리[芹]가 아름다워서 바치게 했는데, (나중엔) 억세고 나쁜 것이었다. (중략) ‘근래 침장고의 관리가 서리(胥吏)만 보내고 스스로 감독해 올리지 않아서 특히 사체(事體)를 잃었다’면서 (중략) 그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조짐이 있는 것이니, 그들을 국문해 아뢰어라.’(후략)”사단의 실마리는 세자궁에 심었던 미나리. 이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세자궁의 미나리가 좋았다. 중간에 관리가 잘못되었다. 침장고는 채소, 곡물 등을 보관·관리한다.사옹방(사옹원)은 궁궐, 왕실의 식재료, 음식을 관리한다. 고위 관리가 미나리를 직접 챙기지 않고 하급 서리만 보냈다. ‘관리 소홀’이다. 결론이 엉뚱하다. 미나리로 시작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튄다. 억지다.처벌도 대단했다. 사옹제조 청성위 심안의, 영가군 권경, 침장고 제조 이서 등이 승정원의 ‘책문’을 받았다.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제조는, 궁궐의 기술직 부서를 관리하는 고문으로 고위직 문관들이 맡았다. 청성위는 세종대왕의 차녀 정안옹주의 남편이다. 세조와는 처남, 매부 사이. 영가군 권경도 명문세가 출신의 고위직이었다. 이서는 효령대군의 사위다. 세조와는 사촌지간 처남, 매부 관계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책문’을 받았다. 명예에 흠이 가는 일이다.그 아래 실무자들은 엄하게 당한다. 침장고 별좌(別坐) 오형, 권선은 장 70대, 김종직은 장 100대, 침장고 별좌 김회보, 사옹별좌 이중련, 조금 등은 파직, 환관 김눌은 군대에 끌려갔다. ‘별좌(別坐)’는 정, 종5품직이다. 낮은 벼슬이 아니다. 부서 실무책임자 급. 이들이 장을 맞거나 파직당했다. 환관(내시)은 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미나리 관리 소홀은 이토록 대단한 죄였다.◇ ‘미나리 궁전’ 근궁(芹宮)과 헌근록(獻芹錄)‘근훤(芹暄)’은 ‘미나리’(芹, 근)와 ‘따뜻한 햇볕’(暄, 훤)이다. 중국 고대 이야기다. “가난한 농부가 미나리 맛이 일품이라 생각해 토호에게 먹어보라고 권한 일과 춘추시대 송나라의 한 농부가 이른 봄 햇볕을 쬐면서 ‘이 좋은 햇빛을 임금께 드렸으면 한다’는 말에서 시작됐다(列子 楊朱, 열자 양주). 미나리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을 윗사람에게 정성으로 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헌근(獻芹)’ 혹은 ‘헌근지성(獻芹至誠)’이다. ‘열자’는 전한(前漢)시대에 편집됐다. 기원전부터 중국엔 ‘헌근’ 이야기가 있었다.우리도 미나리를 오래 전부터 먹었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계원필경’에도 등장하고 고려시대 ‘헌근지성’의 고사는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설명할 때 ‘헌근’의 고사가 사용된다. 세조 시절 ‘미나리 사단’ 이유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세조는 어렵게(?) 왕이 됐다. ‘아버지(세종)-형(문종)-조카(단종)-세조’로 이어진 왕통이다. 조카를 귀양 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세자를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자궁 연못에서 자라고 있던 미나리다. 채소에 불과한 미나리지만 의미가 깊다. 미나리 관리 소홀이 곧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강변한 것은 바로 ‘미나리=충성’이기 때문.미나리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대학 혹은 태학(太學)은 중국 최고의 교육기관. 대학, 태학의 학생들은 관리가 된다. 이들의 충성심으로 나라는 유지된다. 주(周)나라 때는 대학 담장을 따라 물길을 만들었다.반수(泮水)다. 대학은 ‘반궁(泮宮)’이라 불렀다. 반수엔 미나리를 심었다. 이런 대학 건물은 근궁(芹宮), 즉, ‘미나리를 심은 궁전’이다. 기원 전 479년에 편찬된 ‘시경’에는 “즐거워라. 반궁의 물가에서 미나리를 캐노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반궁에서 미나리 캐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헌근록(獻芹錄)’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 별 볼 것 없이 글이지만 올바른 국가 경영을 위해 임금에게 올린다는 의미다. 미암 유희춘은 ‘미암집’ 1576년(선조 9년) 1월의 내용에서 “다시 살펴보니, 임금께서 내린 것은 내가 경오년(1570년, 선조 3년)에 올렸던 ‘헌근록(獻芹錄)’이요, ‘유합’이 아니었다”고 했다.‘헌근록’과 ‘유합’은 모두 미암이 저술한 책 이름. ‘헌근록’은 국왕께 올린 “사소하고 미미한 글, 읽을 필요가 없는 중요치 않은 글”이라는 겸양의 의미를 담았다. 내용은 국왕 선조가 정사를 펼칠 때 필요한 것을 담은 것이었다. 선조의 경연(經筵) 스승이기도 했던 미암은 국가 경영 참고서인 ‘헌근록’을 선조에게 바쳤다.◇ 국가와 국가 사이 ‘미나리를 바치는 정성’‘헌근’은 나라와 나라 사이 문서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6월 22일의 기록이다. 제목은 ‘유구 국왕(琉球 國王) 상덕(尙德)이 사신을 보내 서계를 올리다’다. 유구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오키나와 국왕이 조선 조정에 편지와 함께 물건을 올렸다.“(전략) 삼가 드리는 토산물은 별폭(別幅)에 갖춥니다. (중략) 호초(胡椒) 1백근, 납자 50근, 울금(鬱金) 1백근, 백단향(白檀香) 50근, 향(香) 50근을 진정(進呈)하니, 삼가 바라건대 헌근(獻芹)의 정성으로 받아주시고 수납(收納)하여 주시면 다행스럽겠습니다.”이때 조선사람 9명이 표류하다가, 일부가 오키나와의 도움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오키나와 측에서는 후추 등 선물을 마련해 조선 조정을 방문, 조선 출신 표류인의 동정을 전하고 대가로 대장경 등을 요구한다. 편지 중에 ‘헌근지성’이 나타난다. ‘일본(규슈, 오키나와)-조선-중국 명나라’를 잇는 ‘조공’ 혹은 ‘조공무역’은 상업적인 거래였다. 국가 간의 무역이었지만 ‘헌근’ ‘헌근지성’이라는 글귀는 사용했다.세종 29년(1447년) 6월 20일의 기록에도 ‘헌근지성’이 나타난다. 한해 전인 1446년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 일기주(一岐州, 이키시마)의 병부소보 원영(兵部少輔 源永)이 편지와 토산물을 전한다. 내용 중에, 원영 역시 한해 전에 상사(喪事)를 당해서 예의를 올리지 못했고, 지금에야 ‘경박한 물건을 올린다(헌근지성)’고 말한다.우리도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늘 ‘헌근’ ‘헌근지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상거래지만 편지에는 ‘미미하고 볼품없는 물건을 바친다’는 겸양의 단어를 넣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미나리는 궁중, 민간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종묘 제사에도 생 미나리[水芹生菜, 수근생채]를 사용했다. 생 미나리와 더불어 ‘근저(芹菹)’도 올렸다. 근저는 미나리 김치인데 미나리 초절임인지 미나리를 삭힌 김치인지는 정확치 않다. 드라마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숙종 조 인현왕후의 폐위를 두고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불쌍하게 쫓겨난’ 인현왕후를 가리키고 장다리는 성 씨가 장 씨인 장희빈을 가리킨다. 성종 19년(1488년)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았던 동월(董越)은 ‘조선부’에서 “조선인은 왕도(한양)와 개성 민가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었다”고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널리 미나리를 심고 먹었다.조선 중·후기에는 환금작물로 길렀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_제5권_다산화사(茶山花史)’에서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성 안에 가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라고 했다. ‘다산화사’는 다산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시. 이때 ‘성 안’은 한양이 아니라 강진 언저리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에는 시골에서도 미나리를 환금작물로 길렀다.사족. 최근 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경북 청도 각남면에 다녀왔다. 분위기는 죄다 “싸고, 맛있고, 양이 많은 삼겹살을 미나리와 함께”였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의 식탁에 삼겹살은 없어졌지만 군데군데 미나리는 남았다. 종묘의 제사에 사용하고, 성균관, 근궁에서 충성을 뽐내던 미나리다. 미나리 김치, 미나리강회, 초봄의 향을 전하던 미나리 솥밥도 보기 힘들다. ‘삼겹살과 미나리 구이 통일’이다. 상상력의 한계다. 우리는 맛, 양, 싼값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은유, 직유는 사라지고 ‘돌직구’만 남았다. 미나리는 풍년인데 미나리 음식 문화는 없다. 씁쓸하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3-06

‘꿩 대신 닭’… 닭이 꿩보다 못하다고? 닭은 억울하다

닭은 억울하다.‘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이 있다. 꿩이 좋다, 꿩이 닭보다 맛있다는 뜻이다. 꿩이 ‘갑’이다. 의문스럽다. 과연 꿩이 닭보다 나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오해다. 꿩보다 못하다니, 닭으로선 억울할 노릇이다.왜 꿩이 먼저일까? 간단하다. 꿩은 공짜다. 요즘은 꿩이 없다? 그렇지 않다. 꿩은 지금도 있다. 꿩을 잡는데 품이 많이 드니 기른다. 예전에는 ‘인건비’ 개념이 없었다. 꿩은 공짜고 닭은 집에서 기르던 것을 잡아야 하니 ‘재산’이 줄어든다.주변 지인 중에 북한 출신의 80대 노인이 있다. 가끔 식사를 같이 한다. 늘 하는 이야기가 “내레 피양에서 중학교 다닐 때 말이야”로 시작하는 꿩 잡았던 이야기다. 월남 직전까지 이분의 집안 어른이 평양에서 냉면 집을 운영했다. 겨울철이면 형들을 따라서 눈 덮인 산에서 꿩을 잡았노라고 했다. 그걸로 국물 내고, 살코기는 냉면 고명으로 썼다. 이른바 ‘꿩고기 냉면’이다.꿩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꿩 대신 닭이다. 아깝지만, 닭을 사용해야 한다. 꿩 대신 닭은 ‘공짜 대신 아깝고 귀한 것’의 개념이다. 닭이 꿩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꿩은 개체가 무척 작다. 비경제적이다.야생 꿩은 특유의 누린내와 신맛이 있다. 꿩은 새다. 새의 뼈는 가볍다. 꿩의 뼈는 가늘고 속이 텅텅 비어 있다. 발라내기 번거롭다. 칼로 다진다. 꿩고기 만두를 먹다보면 작은 뼈 조각이 씹힐 때도 있다. 꿩고기를 몇 번만 먹어보면 “닭이 억울하다”는 확신이 든다.닭의 억울함을 입증할 근거(?)도 있다. 찜닭을 올리는 제사는 있어도 꿩을 사용하는 제사는 드물다.‘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 하는 주요 도구다.귀한 음식은 제사상과 손님상에 오른다. 닭고기는 제사에 사용할 정도로 귀한 식재료였다. 태종18년(1418년) 5월 9일의 어전회의에서 엉뚱하게도 닭고기 이야기가 나온다.“‘소경공(昭頃公)이 평소에 쇠고기를 좋아하였으니, 삭망제에 내가 이를 천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물건이 심히 크니 가볍게 쓸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혹은 연빈(燕賓)이 있거나 혹은 종묘에 제사할 때 이를 천신하는 것이 어떠할까 한다.’ 여러 대언(代言)이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니, 또 명하였다. ‘희생(犧牲)으로 계를 쓰는 것이 예(禮)에 있느냐?’ 여러 대언이, 계는 ‘닭’을 말하는데, 희생에 계를 쓰는 것이 고례(古禮)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경공이 또 닭고기를 좋아하였다’ 하고, 즉시 본궁의 사람에게 명하여 닭을 길러서 5일에 한 마리를 삶아서 천신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게 하였다.”태종에게는 양녕, 효녕, 충녕 이외에 4번째 왕자가 있었다. 늦둥이 성녕대군(소경공)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가 이해 3월에 죽었다. 14살. 아버지 태종은, 쇠고기를 아들의 제사상에 놓고 싶으나 소는 너무 크다. 중국사신(연빈)이 오거나 종묘 제사 때 소를 도축한다[‘봉제사접빈객’이다]. 그때 쓰자. 소 대신 닭이다. 평소에는 닭을 올리자.어색한 부분도 있다. 태종은 고려 말기 과거에 급제한 문관이다.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공부한 사람이 제사에 닭을 쓴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유교의 육축, 즉 인간이 먹을 수 있는 6가지 가축은 소, 말, 개, 돼지, 양, 닭이다. 문관 출신 국왕이 닭이 육축의 하나임을 몰랐을까? 굳이 신하들에게 묻는 절차를 거친 것은 이미지를 위한 ‘쇼’가 아니었을까, 라고 믿는다.“귀한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표현에도 오해가 있다. 씨암탉은 귀한, 맛있는 닭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씨암탉은 이듬해 병아리를 생산을 위해 아껴둔 닭이다. 아깝지만 반드시 맛있지는 않다.이른 봄철, 닭이 알을 낳는다. 스무 개쯤의 달걀을 모아서 암탉이 품는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대략 15~20마리의 병아리가 태어난다. 여름이 된다. 자라고 있는 닭을 한두 마리씩 먹는다. 이때의 닭이 살이 부드럽고 연한 닭, 연계(軟鷄)다. 달걀도 낳고 여름, 가을을 지나며 한두 마리씩 줄어든다. 크기도 제법 크다. 달걀을 낳지 않는 수컷을 먼저 해치운다.늦가을 암컷 몇 마리와 수컷 한두 마리가 남는다. 추수도 끝나고 날씨도 춥다. 문제는 먹이다. 한겨울에는 오롯이 곡물로 닭을 키워야 한다. 들판은 곧 얼 것이다. 잡초, 씨앗도 귀하고 벌레들도 귀하다. 한두 마리 정도의 암탉만 남긴다. 씨암탉, 내년의 병아리를 위한 것이다. 겨울철 귀한 사위가 왔다. 귀한 손님이니 고기를 내놓아야 한다. 농촌에 고기가 있을 리 없다. 마지막 남은 것이 씨암탉이다. 고기가 맛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년을 위해서 아껴둔 닭이다. ‘그것까지’ 내놓는 것이다.‘음식디미방’에는 ‘수증계(水蒸鷄)’라는 음식이 있다. 물에 찐, 끓인 닭찜이다.암탉은 손질하여 기름을 넣고 볶는다. 맹물을 부어 토란, 순무 등을 넣고 삶는다. 고기와 나물을 건져내고 국물에 장으로 간을 잡는다. 고기와 나물을 다시 넣고 밀가루를 푼다. 파, 염교, 동아, 오이 등 채소를 넣고 끓인다. 다 익으면 마치 잡채 쟁반 같이 나물, 고기를 펼치고 국물을 붓는다. 그 위에 계란지단을 얹고 후추, 생강 등을 뿌린다. 지금의 ‘안동찜닭’과 흡사하다.국수를 좋아하는 안동 지역 사람들이 국수와 비슷한 당면을 쉽게 받아들였다. 당면과 각종 채소를 넣고 손질한 닭고기를 넣은 다음, 간장 양념으로 졸인다. 채소가 당근 등으로 변했을 뿐 안동찜닭은 수증계와 흡사하다.대척점에는 백숙(白熟), 삼계탕이 있다. 백숙은 흰 닭찜이 아니다. 백숙은 별다른 양념없이 닭을 찌거나 삶았다는 뜻이다. 백수(白手)는 흰 손이 아니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손이다. 백숙은 수증계처럼 양념을 하거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닭을 찌거나 삶은 것이다.삼계탕(蔘鷄湯)은 우리 시대의 음식이다. ‘인삼이 들어간 백숙’이다. ‘안동찜닭’이나 ‘수증계’처럼 찌고, 삶고, 졸이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별다른 양념 없이 한번 끓일 뿐이다. 삼계탕에는 수삼(水蔘)을 사용한다. 수삼은 건삼, 홍삼과 달리 냉장 유통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냉장유통은 1960년대 무렵에 시작되었다. 도로 사정도 나아졌다. 수삼을 멀리 보내는 일도 가능해졌다. 닭고기에 수삼을 얹은 음식, 계삼탕(鷄蔘湯)이 삼계탕으로 이름을 바꾼다.수증계가 안동찜닭과 비슷하다면 삼계탕은 백숙과 닮았다. 문제는 음식에 사용하는 닭의 크기다. 삼계탕의 닭은 대략 550~600g 정도다. 닭이 아니라 병아리다. 20여 일 ‘닭 공장’에서 ‘찍어낸’ 닭들이다. 닭고기의 맛이 있을 리 없다. 삼계탕에 들깨를 비롯한 견과류를 많이 얹는 이유다.‘영계백숙’도 엉터리다. ‘영계’라는 닭은 없다. 영계는 ‘YOUNG(영)+鷄(계)’다. ‘영계(英鷄)’는 광물질인 석영(石英)을 먹여서 기른 닭이다. 중국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시작된 표현이다. ‘본초강목’에 “석영을 먹여서 기른 닭(석영)이 낳은 알이 약효가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뿐이다. ‘영계백숙’은 ‘연계백숙(軟鷄白熟)’에서 파생된 단어일 것이다. 연계는 어린 닭이다. 대략 100일 정도 지나면 닭은 중간 크기의 몸집을 지닌다. 부드럽고 연하다. 사육기간 20여 일은 잔망스럽다.‘일성록’ 정조 24년(1800년) 5월 22일의 기록에 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전략) 대체로 진배(進排)하는 생계(生鷄)에는 모두 세 가지 명색(名色)이 있습니다. 여러 해 자란 닭을 진계(陳鷄)라고 하고 부화된 지 얼마 안 되는 것을 연계(軟鷄)라고 하며 진계도 아니고 연계도 아닌 것을 활계(活鷄)라고 합니다. 무신년(1788) 이후로 여름철에 대신 바칠 때에는 연계를 진배하고 겨울철에 대신 봉진할 때에는 활계를 진배하며 혹 아래에서 대신 사용하는 경우에는 진계를 진배한 전례도 있습니다. (중략) 지금부터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막론하고 대신 봉진할 때에는 모두 활계로 봉진하고 (중략) 또 부득이 진계를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으면 진계 1마리를 활계 2마리로 쳐서 계산해 줄여 주라는 내용으로 정식을 정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략)”닭에 대해서 상세히 규정한다. 여름철 무렵의 닭은 연계, 1년이 되지 않은 산 닭은 활계, 1년을 넘긴 묵은 닭은 진계다. 여름에는 연계, 겨울에는 활계를 세금으로 바친다. 가끔 실무자 급 하급관리들이 활계 대신 비싼 진계를 요구한다. 만약 공식적으로 진계가 필요하면 진계 한 마리에 활계 두 마리로 셈하자고 청한다. 묵은 닭, 해를 넘긴 큰 것은 일반적인 닭 값의 두 배다.우리는, 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20여 일 기른 어린 병아리를 몸보신하겠다고 먹는다. 우리 시대의 천박함이다. 아무 맛이 없으니 조미료와 각종 양념, 견과류를 뒤섞는다. ‘영계’를 먹는 것은 ‘음식의 성희롱’이다.사족으로 개인적인 바람을 적는다.안동 구 시장에는 찜닭골목이 있다. 40년 정도의 업력을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다. 오래 전에 전국적으로 ‘봉추찜닭’을 유행시킨 것도 안동, 안동찜닭의 힘이다. 업력 40년이 아니다. 350년 전의 ‘음식디미방’에 수증계가 있다. 안동찜닭과 흡사하다. 왜 스토리텔링으로 이용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저자 장계향이 바로 안동 출신이다.더 답답한 것은 경주다. 경주는 계림(鷄林)이다. 신라의 왕도를 이은 것은 알에서 태어난 김알지의 후손들이다. 계림은 경주 일대, 신라 더 나아가서 한반도 전체를 이르는 표현이었다. 외국 자료에도 계림은 남아 있다.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이름에 걸맞은 ‘계림 스타일의 닭고기 요리’ 한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2-27

붕당과 편파가 없는 왕도를 걷고자 했던 뜻이 이 한 접시에 담겼을까

◇ “그라마 다른 데 사람들은 뭘 먹는교?”네댓 해 전 겨울 저녁이었다. 늦은 시간 배가 제법 출출했다. 경북 예천 읍내. 식당들도 고만고만하다. 자영업자 한 명, 농사짓고 소 키우는 이 등 토박이 셋에 예천 출신 출향인과 필자 등 5명 일행이었다. 가까운 분식집(?)으로 갔다. ‘태평초’나 먹을 겸. 난로 위에 먹음직한 태평초가 놓였다.태평초는 신 김치가 주인이다. 더러는 메밀묵이 더 중하다 하지만 역시 듬성듬성 썰어 넣은 신 김치가 태평초 맛을 좌우한다. 신 김치, 기름진 돼지고기, 메밀묵. 여기에 두부를 썰어 넣어도 좋다. 고명이라야 고춧가루와 김 부스러기 정도다. 채소를 좀 썰어 얹어도 탓할 이는 없다. 막걸리가 두어 순배 돌았을 때 필자가 문득 말했다.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태평초 무지 좋아하네요. 저녁마다 태평초네요.”출향인이 거들었다. “그렇죠. 태평초 좋아하지요.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외지 가면 겨울에는 가끔 태평초 생각이 납니더. 서울에도 태평초 내놓는 집이 없으니.” 토박이가 한참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태평초가 없다고예? 그라마 외지 사람들은 겨울에 태평초 말고 뭘 먹니껴?”경북북부 사람들은 겨울이면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태평초를 끓이고 밥과 술을 먹고 마신다. 일상적이다. 토박이들 상당수는 “겨울에는 전국 어디나 다들 태평초를 먹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태평초가 경북북부의 특이한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탕평채가 영조대왕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태평초는 도무지 뿌리를 알 수 없는 음식이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음식’이라고 억지 해석을 해도 마찬가지. 태평성대와 이 지역만의 특별한 연관은 없다.굳이 이 지역에서만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태평초라는 음식을 만들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탕평채의 서민 버전이 태평초가 아닐까?”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탕평채는 태평초와 달리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탕평채가 나타난다. 서울 등 대도시의 한식집에서도 그럴 듯한 요리로 탕평채를 내놓는다.“탕평채는 영조대왕의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 영조대왕이 여러 가지 채소를 모둠으로 내놓으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골고루 채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탕평채는 탕평책을 드러내는 음식이다.”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더러는 채소가 가진 색깔이 각각의 붕당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틀렸다.‘탕평’은 ‘서경(書經)’에서 시작된 표현이 다. ‘탕탕평평’이다.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하다는 뜻이다. ‘탕탕평평’은 왕도, 왕의 행동거지에 대한 표현이다. 통치자가 평소 매사에 부끄럼이 없으면 하는 일이 거리낌 없다는 뜻이다. ‘탕(蕩)’은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탕평’은 ‘거침없이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탕탕평평, 탕평을 고른 인재 등용과 연관한 탕평책으로 바꾼 이는 영조다.‘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2년(1496년) 3월18일의 기사다. 제목은 ‘대간이 봉보부인 · 정문형의 일을 서계하다’이다.지금 유온(乳媼)은 은혜를 믿고서 전횡하여, 노비(奴婢)를 사급(賜給)하고 족친(族親)을 종량(從良)하는 등의 일을 제멋대로 아뢰어 욕망을 채우니, (중략) 단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본디 탕탕평평(蕩蕩平平)하여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써 자처하셔야 하는데, 지금 우상(右相)에 대하여 의논한 것을 신들에게 보이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탕탕평평하지 않고 우상과의 논의를 숨겼다는 것이다. ‘유온’은 여기서 연산군의 유모다. 연산군 즉위 2년차, 유모가 각종 특혜를 받았다고 대신들이 따진다. “국왕이 탕탕평평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우상과 속닥속닥 나눈 이야기를 숨기지 마라’고 말한다. 그래야 탕탕평평이다. 탕평은 인재를 고르게 쓴다는 뜻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영조가 탕탕평평을 위해 인재를 고르게 쓰겠다고 밝혔고 그걸 탕평책이라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탕평책은 정조대왕 시절 도드라진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 여러 차례 탕평책을 이야기하고 실행한다. 영조든 정조든 탕평책과 탕평채의 관계를 보여주는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과 탕평채는 아직은 근거가 없는 야사일 뿐이다.◇ 영조와 영남의 관계? 탕평채는 엉터리다영조대왕과 오늘날 경북 지역의 ‘인연’을 되짚어 보면 ‘영조대왕 탕평책’과 경북 북부 탕평채는 근거가 없는 억지다.영조대왕을 평생 괴롭힌 트라우마는 ‘이복형 경종 살해설’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이복형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올렸고 이걸 먹고 경종이 죽었다는 이야기다.역적으로 잡혀온 죄수가 영조 앞에서 “그날 이후로 저는 게를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내뱉었다.‘그날’은 경종이 죽은 날이다. ‘신(臣)’이라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영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복형 독살설의 정점은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주모자는 이인좌, 정희량 등. 난을 일으킨 명분이 문제다. “연잉군(영조)이 게장과 감으로 이복형 경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다.” 대역죄다. 여기에 “연잉군은 숙종의 자식이 아니니 밀풍군 탄(坦)을 추대한다”고 내세웠다. 이인좌의 난은 한편으로는 ‘영남란’이라고도 부른다. 시작은 충청도였지만 안동, 상주를 기점으로 영남 남쪽에서 넓은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이다. 영조는 난을 평정한 후 대구부(大邱府)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 박았다. 반역의 고장인 영남을 ‘탕탕평평’했다는 뜻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을 제외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과거에도 제한을 두었고, 벼슬길에도 제약이 따랐다. 겉으로는 영조 통치 기간인 ‘50년 동안’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말기까지 남인, 소론은 중앙정계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순조부터 고종까지 중앙정계의 벌열(閥閱) 비율이 노론 77%, 남인 1%라는 통계도 있다(차장섭, 조선후기벌열연구, 일조각, 1997). 이 시기 소론도 불과 14%. 노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조선후기는 당쟁이 심했던 시기가 아니다. 사색당파, 당쟁이 끝나고 일당독재 세도정치의 시대다. 영조를 옹립했고 이인좌의 난을 해결한 노론은 이때부터 힘의 우위를 갖추고 정조 시대를 넘긴다. 순조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수렴청정.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 씨와 더불어 장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조선은 사색당파로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사색당파가 끝나고 노론 일당독재 세도정치 100년에 무너졌다. 당파가 살아 있고 탕평책을 썼으면 오히려 허무한 망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영조와 경북북부 지역은 대척점에 있다. 이 지역 선비들은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은 이 지역을 반역의 땅으로 몰아세웠다. 영조의 탕평책과 경북 북부의 탕평채?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탕평채는 영조의 음식이 아니다일제강점기인 1940년, 홍선표가 출판한 ‘조선요리학’에서 “영조 때 노소론을 폐지하자는 잔치에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고 하였던 것이 초나물의 시작”이라고 했다. 믿을 수는 없다. 영조가 탕평채를 거론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초(酢)나물은 맛이 신 식초 등을 넣어서 버무린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나물 모둠 쟁반인 잡채와 닮았다. 잡채를 버무릴 때 식초를 넣으면 바로 홍선표가 말하는 초나물이다. 다른 점은 묵을 넣는다는 점이다.조선후기 학자 조재삼(1808-1866년)은 1855년(철종 6년)에 완성한 책 ‘송남잡지’에서 탕평채의 연유를 다른 곳에 두었다. “탕평채: 청포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곧 나물의 골동(骨董)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탕평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진다.”-‘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음식 100년’ 탕평채, 경향신문 2011. 07.19‘송남잡지’는 조재삼이 기록한 백과사전이다. 단어의 어원 등을 상세히 밝힌 책이다. 이 책에서 탕평채를 설명한다. 젊은 시절 송인명이 이미 저자거리에서 팔고 있던 탕평채를 보고 탕평사업,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장밀헌 송인명(1689~1746년)이 젊은 시절 이미 탕평채를 보았다는 기록이 설득력이 있다. 탕평책을 펼치며 탕평채를 만든 것이 아니다.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떠올렸다. 탕평채가 민간에서 널리 팔릴 때 이 광경을 보고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뜻이다.장밀헌은 숙종 45년(1719년) 급제한 후, 영조 시절 무거운 직책을 모두 맡았다. 동부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등의 벼슬은 국왕에게 인사 문제를 건의할 수 있는 자리다.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으로는 송인명이 저자거리의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생각해서 영조에게 건의했다는 설이 믿을 만하다.태평초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탕평채는 영조의 탕평책 이전에 있었다. 영조의 탕평채 자체가 엉터리다. 경북북부 탕평채의 뿌리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다. 경북북부의 태평초와 탕평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2-20

19가지 채소와 꿩고기의 조화, 산나물 들나물의 향기가 입안 가득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폭군으로 몰려 제주로 유배 갔던 광해군(1575~1641년 7월1일, 재위 1608~1623년). 설마 “음식을 얻어먹고 벼슬을 팔았다”는 지청구를 들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는 더덕, 김치, 잡채 등을 얻어먹고 국왕이 벼슬을 팔았다는 오명이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반정(反正)’에 성공한 이들 혹은 광해군에게 해를 입었던 이들이 ‘광해군일기’를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 문집에도 기록을 남겼다. 그 내용들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전략) 계집종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영감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 잡채참판(雜菜參判)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후략)”-‘연려실기술 , 인조 조 고사본말’광해군의 제주도 귀양살이 중 있었던 이야기다. 광해군을 따라서 제주도 유배지로 온 계집종이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부르며 패악질을 부렸다. 내용 중 ‘잡채참판’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잡채를 얻어먹고 참판 벼슬을 주었다는 뜻이다.‘연려실기술’은 연려실 이긍익(1736~1806년)이 정조대왕 시절 남긴 기록이다.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연려실기술’의 ‘잡채참판’은 상촌 신흠(1566~1628년)의 ‘상촌집’에서 따온 내용이다. ‘상촌집’은 ‘연려실기술’에 비하여 약 200년 앞선다.상촌 신흠은,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의 목숨을 부탁한 일곱 대신 중 한 사람[遺敎七臣, 유교칠신]이다. 계축옥사(1613년) 때 실각했고 영창대군은 결국 광해군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상촌의 기록이 정확한 지도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잡채참판’이라는 표현이 당시 시중에 널리 나돌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9년(1617년) 4월의 기록도 재미있다. 제목은 “이충이 병에 걸려 이명으로 하여금 구완하도록 하다”이다. 본문은 짧고, 끝부분 사관의 덧글이 꽤 길다.“이충은 간신(奸臣)인 이량(李樑)의 손자이며 이정빈(李廷賓)의 아들이다. 천성이 흉악하고 험살궂은데다가 조상들의 허물이 있어서 선조(先祖)에서 비록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하였다. (중략) 조석으로 맛진 반찬을 올려 왕이 반드시 그가 올리는 반찬이 도착한 뒤에야 식사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시를 지어서 그것을 조롱하였는데, 그 시에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수 없다.[雜菜尙書勢莫當]’고 하였다.”본문의 몇 배에 달하는 ‘덧글’이다. 여기에서는 ‘잡채상서’라고 표현했다. 참판, 상서 모두 당상관이다. 높은 벼슬이다. 이 무렵에는 사삼각노(沙蔘閣老), 김치정승, 잡채상서, 국수감사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모두 보기 드물게 ‘음식+벼슬’이다. 각각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 관직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 사삼은 더덕이다. 사삼각노는 광해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한효순(1543~1621년)이다. 잡채상서는 우찬성 이충, 국수감사는 함경도 감사 최관(1563 ~ ?)이다.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사관이 토를 단 내용이다. ‘최관의 국수’다.“(전략) 최관은 광해의 총애하던 신하이다. 최관이 별미로 폐군(廢君)에게 아첨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충(李冲)의 잡채(雜菜), 최관의 국수라고 말을 하면서 비난하였다.”이 기록은 인조 2년(1624년) 4월의 것이다. 최관은 광해군 시대를 거쳐 인조 때도 벼슬을 했다. 이 글에도 ‘이충의 잡채’가 나타난다. 광해군의 ‘잡채 뇌물 수수’는 마치 동네북 같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도대체 잡채는 어떤 음식이었을까?◇ 궁중잡채는 허구적 코미디다‘궁중잡채(宮中雜菜)’라는 표현이 있다. 길거리 음식점 혹은 고급 한식집에서도 버젓이 ‘궁중잡채’를 판다. ‘궁중+잡채’는 완벽한 엉터리다. 있지도 않은 ‘궁중잡채’가 잡채를 망쳤다.당면(唐麵)이 들어간, 우리가 흔히 보는 잡채를 두고 ‘궁중잡채’로 포장했다면 완전 엉터리다. 당면은 1919~1920년 언저리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당면, 당면 잡채의 시작이다. 나라는 공식적으로 1910년에 망했다. 10년이 지난 다음 한반도에 당면이 등장한다. 당면은 녹말, 전분으로 만든 국수다.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소개했다. 황해도 사리원 등에 당면 공장이 생기기 시작한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는 북관(北關)이다.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루트였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북관은 중국 문물을 들여오는 길목 노릇을 했다. 이 길로 당면이 들어왔다.1910년대, 당면은 신문물이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의 기사에는 “한반도 당면 생산량이 60만근인데 대부분 일본 도쿄, 오사카 등으로 수출한다. 우리 당면이 중국산 보다 질이 좋다”는 내용이 있다. 해방 후에도 “서울풍국제면소의 당면이 대용식량으로 공급된다”는 내용도 있다(1946년 3월18일, 동아일보). 가히 당면 전성시대다. ‘唐麵(당면)’은 당나라 면 즉, 중국인들이 전해 준 면이다. 나라가 1910년에 망했는데 궁중에서 먹었던 당면 잡채라니, 터무니없는 표현이다.녹말로 만든 국수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국수를 만드는 가장 흔한 재료는 메밀이었다. 메밀은 점도가 약해서 국수 만들기 어렵다. 메밀가루에 밀가루 혹은 전분 등을 섞는다. 아예 전분으로 만드는 국수도 있었다.당면의 등장은 전분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가능해졌다. 대량 생산된 전분이 있으니 국수로 만들었다. 당면이 잡채에 들어간다. 잡채의 주인인 채소를 밀어내고 주인 노릇을 한다. 엉뚱한 ‘궁중잡채’ ‘당면잡채’, 우리가 지금 만나는 잡채는 대량 생산 전분 때문에 가능했다. 원형 잡채와는 거리가 멀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 드는 격이다.◇ ‘음식디미방’의 잡채는 아름다웠다‘음식디미방’의 잡채는 ‘채소 모둠 쟁반’이다. ‘잡채(雜菜)’는 표현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라는 뜻이다. 당면은 어디에도 없다. ‘음식디미방’의 잡채는 10여 종류의 채소와 꿩고기를 한 쟁반에 내놓는 음식이다. 여러 가지 채소를 모은 것이 잡채인데 지금 만나는 잡채는 엉뚱하게도 단맛이 강한 ‘양념 당면’이 주인이다. 비틀어진 음식이다. 산나물, 들나물의 향기가 아니라 짝퉁 간장과 조미료, 감미료 범벅의 비틀어진 맛을 취한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잡채 만드는 방법 중 일부다.오이채,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버섯, 숙주나물 등은 생으로,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와 꿩고기는 삶아서 찢는다.꿩고기를 제외하고 모두 채소 종류다. 한 쟁반에 채소 종류만 무려 19가지다. 여기에 채소를 붉게 물들인 맨드라미와 양념으로 쓴 생강, 천초(산초), 후추, 참기름 등등을 합하면 족히 20여 종의 나물, 채소, 식물의 씨앗 등이 들어간다. 가히 ‘여러 가지 채소 모둠 쟁반’ ‘잡채’라 부를 만하다. 짝퉁 잡채가 유행하면서 ‘음식디미방’의 아름다운 잡채는 사라졌다.한식의 특질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그리고 다양함이다.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것도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잡채는 한반도의 아름다운 ‘나물’ 문화가 바탕이다. ‘음식디미방’보다 270년 쯤 전인 조선 초기의 기록이다.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모락모락 아지랑이 아른거리네지난밤 장단(長湍)에 비 내렸는지/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송당집 제1권 ‘장단 유 선생이 시와 산채를 보내와 운을 빌려 감사하다’의 일부아름다운 이른 봄날이다. 시의 제목에 나타나는 ‘장단 유선생(長湍 兪先生)’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를 남긴 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송당 조준(1346~1405년)이다. ‘장단 유 선생’이 조준에게 산나물과 시를 선물로 보냈다. 여말선초의 문신이었던 조준은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의 경제 틀을 짠 고위직 경제 관료였다. 벼슬도 좌정승(左政丞)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높았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날에 당대의 실세 관료에게 시와 산나물을 선물로 보냈다.조선시대 반가에서는 오신반(五辛盤), 오신채(五辛菜) 선물이 유행했다. 이른 봄 겨울을 헤치고 나온 햇나물을 옆집과 나눠 먹는 풍속이다. 오신채는 ‘매운 맛의 다섯 가지 나물’이다. 움파, 산갓, 당귀싹, 미나리싹, 무싹 등이다. ‘다섯 가지 잡채’다. 향이 강하고 맵다고 오훈채(五葷菜) 혹은 오신반(五辛盤)이라 불렀다.아래는 ‘음식디미방’보다 약 350년 뒤인 2018년 5월의 경북매일 기사다.관광객 ‘오감만족’ 평가영양군의 대표 축제인 ‘영양산나물축제’에 10만 관광객이 찾아 ‘대박’을 터뜨렸다.(중략) 영양군과 영양축제관광재단은 ‘봄의 기운을 쌈싸 먹어’의 주제로 열린 ‘제14회 영양산나물축제’ 기간 동안(중략) 지역행사를 연계해 산나물을 중심으로 먹거리장터를 만들어 방문한 관광객의 체류시간을 평균 5시간 이상 늘려 영양군의 매력을 듬뿍 안겨주었다.(후략)-영양/장유수 기자1400년 무렵 ‘송당 조준의 나물 선물’ 1670년 무렵 ‘음식디미방’의 잡채, 2018년 5월 경북 영양의 ‘산나물축제’는 모두 ‘여러 가지 나물’로 연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산나물, 들나물 모둠 잡채’다. 산나물, 들나물, 잡채는 반가에서 귀히 여겼다.우리는 향기로운 여러 가지 나물, 잡채가 빠진, 들척지근한 당면이 주인 노릇을 하는 ‘궁중잡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