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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세기 초반 대구·경북에서 대중화된, 개장국을 대체한 손님맞이 음식

대구, 경북은 육개장으로 유명하다. 흔히 ‘대구 육개장’이라고 말한다.육개장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경부철도가 뚫린 후 사람들이 대구의 여러 시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대구의 시장터에서 육개장을 팔기 시작했다.” 이게 다수설이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질문을 더한다. “그런데 왜 육개장에는 벌건 고추기름을 사용할까?”답은 “붉은 색은 벽사(8F9F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삿된 귀신을 쫓기 위하여 붉은 고추기름을 사용한다”이다. 식당에 느닷없는 삿된 귀신? 이상하다. 이 표현은 틀렸다. 가정도 마찬가지. 요즘 초상집에서 가장 편하게 내놓는 것이 육개장이다.‘초상’은 돌아가신 조상의 혼백을 모시는 행사다.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잘 모셨다가 잘 보내드리는 행사다. “붉은 색으로 삿된 귀신을 쫓는다?” 아무리 재 봐도 엉터리다.제사를 모실 때 지방(紙榜)을 쓴다. 벼슬을 하지 않은 경우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다.‘현고’는 돌아가신 아버지다. ‘신위(神位)’는 신(神), 곧 돌아가신 조상이 앉아 있는 자리다. 조상을 모신 자리다. 지방을 써서 조상을 모시고 절을 하는 판에 육개장의 붉은 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이상하지 않은가?대구는 분지(盆地)라서 춥다. 그래서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육개장이 붉은 색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말도 우습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장화’한 것이지 대구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구 바깥 지역에도 육개장은 있었다. 육개장은 경상좌도, 오늘날의 경북에서 널리 유행했다. 그중에는 분지가 아닌 곳도 많다.추운 곳이라서 매운 것을 먹는다면, 평양냉면은 고춧가루 범벅을 할 판이다. 따뜻한 호남의 매운 양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귀신 쫓기, 분지=맵고 붉은 육개장’은 엉터리다.◇ 육개장, 초상집의 손님맞이 음식이다초상집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서양의 경우, 종교의식을 치르고 묘지에 간다. 적절하게 조의를 표하고 끝이다. 밤을 새며 고스톱을 치며 음식, 술을 먹는 나라는 거의 없다. 상가 음식도 천편일률적이다. 육개장과 전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장례를 보며 참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지금은 굶주림의 시대가 아니다. 여전히 초상이 나면 ‘병원상가’에서라도 육개장 등 음식을 내놓는다.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전도 나온다. 희한하지 않는가? 왜 전과 육개장일까? ‘봉제사접빈객’의 손님맞이다. 관혼상제의 손님맞이 상차림이 지금도 남은 것이다.국수가 불가능하고 육개장이 없던 시절에는 어떤 음식을 내놓았을까? 개장국[狗醬羹, 구장갱]이었다.‘개장국’은 ‘개[狗]’+‘장(醬)’+‘국[羹]’이다. ‘된장 푼 물에 개고기 넣고 끓인 국’이다.육개장에 고춧가루, 억센 대파, 마늘 등을 많이 넣는 것도 개장국의 흔적이다. 개장국은 고기 비린내가 심하다. 도축기술도 좋지 않았다. 고기 냄새를 지우려고 고춧가루, 마늘, 대파 등을 많이 넣었다. 개장국의 대타인 육개장에 매운 양념을 많이 넣는 이유다.관혼상제의 손님맞이에 많은 공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손님맞이의 주요 품목은 음식이다. 20세기 초반, 육개장은 이미 대구와 경북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개장국의 대체 음식으로.◇ 사람은 육축(六畜)을 먹는다유교에서는 사람이 6가지 가축, 육축(六畜)을 먹도록 규정했다. 육축은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소는 금육(禁肉)이다. 소는 농사의 주요 도구였다. 식용으로 소를 불법 도축하는 것은 중대범죄였다. 왕족이 불법 도축으로 귀양을 갔다. ‘불법도살 초범’도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냈다. 몰수한 죄인의 재산을 신고자에게 넘겨줬다.농사도구인 소를 잡는 것은 식량 생산에 차질을 주는 주요범죄였다. 18세기 이후 농작물 생산량이 늘어나고 소의 생산도 늘어났다. 쇠고기 식용은 비교적 흔해진다. 영조대왕 무렵에는 엄격했던 ‘금육’이 정조대왕 시절에는 얼마간 느슨해진다. 그래도 쇠고기 식육은 쉽지 않았다.말은 교통, 통신의 주요 도구다. 귀하게 여기고 먹지는 않았다. 돼지는 먹이를 두고 인간과 다툰다. 사람이 먹는 식재료를 먹는다. 사시사철 먹이 준비가 어렵다. 식용 이외에는 사용처도 없다. 그저 먹고 살만 찐다.한반도는 돼지 키우기에 적합한 풍토도 아니다. 돼지는 덥고 습기가 높은 곳에서 잘 자란다. 한반도는 비교적 춥고 건조하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대관령목장의 양은 관광용이다.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족들이 먹기 적절한 양이지 행사나 주막에서 다루기는 너무 작다.만만한 게 개다. 인간과 먹이를 다투지도 않는다. 평소에는 집 지킴이로 적절하다. 산에서 늑대가 출몰하던 시기다. 외진 산길을 가려면 넉넉한 동반자가 된다. 복날 개를 먹는 것은 오랜 풍습이었다. 크기도 적절하다. 주막에서 다루기 좋은 크기다.정조대왕 즉위 1년(1777년) 7월28일(음력), ‘정조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영화 ‘역린’은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범인들의 공초문(供招文, 수사기록) 중 일부다.“7월 28일 밤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강용휘가 전흥문에게 3문(文)의 돈을 주어 ‘개장국(狗醬)’을 함께 사 먹고 대궐 안으로 숨어들어가 별감 강계창과 나인[內人]월혜를 불러,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속삭였다.”이야기는 이어진다. “암살시도가 실패한 후, 범인 전흥문은 흥원문(경희궁)으로 빠져나와 달아났고, 강용휘는 금천교 방향(창덕궁)으로 달아난 후, 이튿날 공범 홍상범 등과 ‘개 잡는 집’에 다시 모였다.”앞의 ‘대궐 밖 개 잡는 집’과 이튿날 모인 ‘개 잡는 집’은 다른 곳이다.18세기 후반 한양에는 군데군데 ‘개 잡는 집’과 밤늦게 문을 여는 ‘개장국’ 파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는 일상적으로 먹는 상식(尙食)이었다.18세기 후반까지도 개장국 파는 주막들은 흔했다. 왜 일제강점기 대구의 시장에서는 개장국이 아니라 육개장을 팔았을까?◇ 중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더라육개장은 ‘육(肉)+개장국’이다. ‘육’은 쇠고기다. 쇠고기로 개장국 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대구가 경부선의 주요 기차역이 되었다. 교통요지다. 시장이 선다. 많은 사람들이 대구 시장에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이면 식당이 필요하다. 시장 상인이나 시장 손님 모두 끼니는 이어야 한다. 식당 손님들 중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도 있다.주막의 주요 메뉴는 개장국이었다. 개장국이 1910년대 대구의 시장에서 육개장으로 바뀐다. 왜 갑자기 개고기를 피하는 사람들이 생겼을까?‘개고기’에 대한 다른 내용, 시각의 기록이다. 하나는 ‘개고기 식용’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개고기 식용은 야만’이라 여기는 내용이다.“연경(북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년)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버렸다. (황해도)장단의 이종성(1692~1759년)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필자 이유원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들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것들이다.심상규는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정조대왕의 초계문신이었고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이다. 심상규가 성절사로 북경에 간 것은 1812년이다.이종성은 이유원,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이항복의 5세손으로 영조대왕 시절 영의정을 지냈다.이종성과 심상규의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입장은 정반대다. 흥미롭다.17세기 중반 조선은 청나라에 처절하게 당한다.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숱한 이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노예가 되었다. 삼전도의 비와 ‘환향녀(還鄕女)’도 이때 생겼다. 원한이 깊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내심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시간이 흘렀다. 중국으로 간 조선사신단들은 발전한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중국,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호감이 생긴다.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한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동반자, 동료를 먹을 수는 없다.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achi, 努爾哈赤, 1559~1626년)다. 개는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고 전해진다. 건국 태조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개를 식용할 수는 없다. 통치자 만주족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한족들도 따른다.중국을 드나들던 조선의 사대부 중에는 ‘문명개화된 중국’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본다. 이를 따른다. ‘개고기 비식용 파’가 생긴다. 1910년대 한반도에는 ‘개고기 식용vs비식용’이 나뉘어 있었다.1712년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화가 노가재 김창업(1658~1721년)은 ‘연행일기’에서 “평안도 가산의 가평관에서 이민족(오랑캐)에게 개고기와 소주를 대접받았다”고 했다. 1791년 사은사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김정중(1742~?)은 ‘연행록’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 오리, 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조선 후기 이미 개고기 식용, 비식용은 뒤섞였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대구의 시장에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가 있었다. 쇠고기도 비교적 흔해지고 금육도 풀렸다.육개장은 개장국 대용품이다. 주막에서 팔던 개장국을 닮은, 쇠고기 국이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1-30

변화·발전하는 음식… 복원해야 하는 것은 그 음식에 대한 정성과 정신

‘전통’은 좋은 것이다.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전통일까? 전통의 실체를 알아야 계승, 발전이 가능하다. 전통적인 국수는 무엇일까?‘음식디미방’에는 두어 종류의 국수가 등장한다. 난면(卵麵)과 메밀국수 등이다. 전분(녹말)으로 만든 국수도 있다. 난면, 메밀국수, 전분국수를 재현하여 선보이는 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난면은 계란으로 반죽한 국수다. 오늘날 이탈리아 파스타와 닮았다. 메밀국수는 오늘날의 막국수다. 우리가 먹는 막국수는 전통적인 메밀국수를 전승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재료, 주방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숱한 식재료가 종자 개량 등을 통하여 변화, 발전했다. 없던 식재료가 나타나고, 흔했던 식재료가 사라진다. 각종 그릇, 주방용기도 달라졌다. 냉동, 냉장기술이 발달하고 도정(搗精) 방식도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 임금이 먹던 쌀보다 더 희고 고운 것을 일상적으로 먹는다.전통 계승?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들었던 정성과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음식은 고분(古墳)에서 찾아낸 유물이 아니다. 전통음식을 복원하자? 우습다. 고분의 토기를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하지 않는다. 음식은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복원해도 쓸모가 없다.음식은 변화, 발전한다. ‘음식디미방’의 국수는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복원해도 소용없다. 맛없다. 이제는 먹기 힘들다. 차라리 오늘날의 국수가 낫다. 복원은 ‘음식디미방’ 기념관에서나 할 일이다.‘음식디미방’에서 찾아야 할 ‘전통’은 국수를 귀하게 여겼던, 그래서 ‘봉제사접빈객’에 늘 등장하는 그 국수를 만든 정성과 정신이다. 장계향의 국수가 전하는 의미와 원리다.‘음식디미방’에서는 밀가루를 ‘진(眞)가루’라고 불렀다. 한반도에서는 밀 경작이 어려웠다. 소량 생산된 밀은 대부분 누룩의 재료로 쓰였다. 극히 일부만이 식재료로 쓰였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밀도 귀했다. ‘음식디미방’의 밀가루는 ‘진짜 가루’였다.가장 흔한 국수의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메밀이었다.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뭄, 홍수 등으로 작물이 망가지면 메밀을 대파(代播)했다. 60~90일 정도 자라면 수확이 가능하니 고마운 식물이었다. 한편으로 메밀은 일상적이었다. 국수, 묵으로 만들었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인 식재료였다.◇ 메밀은 일상의 식재료였다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왕족의 후예로 경기도 안산 수리산 언저리에서 전원생활을 했다. 옥담은 자신이 본 당시의 식재료, 음식, 전원생활을 ‘옥담사집’에 남겼다. 메밀에 대한 시다.‘옥담사집’_만물편_곡물류/메밀[木麥]칠월 초순에 밭 갈고 파종해/곡물 중 가장 늦게 수확하지/옥 같은 꽃은 이슬 머금고 피어나/검은 열매는 서리 맞고 단단해라/국수를 만들려면 희게 빻아야 하고/만두를 삶으려면 천 번을 두드린다/그 껍질은 어디에 쓰이는가/잘 갈무리해 두어 흉년에 대비해야지음력 칠월 초순이면 양력 8월이다. 이때 파종을 하더라도 서리 맞고 늦게까지 자란다. 농가에서는 고마운 작물이다. 메밀로 국수도 만들고 만두도 만든다. 옥담은 16-17세기를 살았던 이다. 이때도 여전히 만두, 국수의 주 재료는 메밀이었다. 메밀껍질까지 갈무리했던 고단한 시절의 국수다.김창업(1658~1721년)은 숙종 38년(1712년) 중국사신단으로 북경에 갔다. 그는 ‘노가재연행록’을 남겼다. ‘연행일기_노가재연행록’ 중 12월12일의 기사다.시장에서 파는 국수가 좋다기에 주방을 시켜 사 오게 하였더니, 가늘고 길게 이어진 것이다. 이곳 국수는 모두 밀가루[小麥粉]로 만들며 그 맛이 메밀[蕎麥]국수보다 훨씬 좋았다.중국에서는 이미 밀가루 국수를 먹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메밀국수다. 밀가루 국수가 얼마나 맛있으면 점잖은 선비가 “훨씬 좋았다[殊勝·수승]”라고 했을까? 그것도 대단한 곳에서 접대 받은 것도 아니고 시장에서 널리 파는 것이다. 국수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메밀로 만든 국수는 두텁고 툭툭 끊어지며 짧다.메밀은 국수 만들기 힘든 작물이다. 지금도 메밀 100% 국수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이가 많다. 기계가 발전하고 고운 가루를 얻었다. 메밀 100% 국수도 가능하다. 시중의 상당수 국수는 예전 방식을 따른다. 메밀가루에 강력분 밀가루를 섞거나 전분을 섞는다.전분 섞어서 만든 메밀국수는 ‘음식디미방’의 국수와 비슷하다. 메밀에 강력분이나 전분을 섞은 국수. ‘음식디미방’ 국수와 비슷하다고 해서 전통적인 국수일까? 그렇지는 않다.메밀, 전분이 모두 귀하고 한편으로 만드는 공력이 많이 들던 시절이다. 국수는 여전히 귀했다. 만들기 힘들었으니 더더욱 귀했다.여성위 송인(礪城尉 宋寅·1517~1584년)은 중종의 부마(사위)다. 송인의 아버지 송지한은 철원부사였다. 송인이 결혼 10년 차쯤 되었을 때다. 중종 34년(1539년) 10월8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제목은 “유지를 내릴 때 국수와 떡 같은 음식을 내지 못하게 하다”이다. ‘유지(有旨)’는 임금의 명령이다.“여성위 송인이 근친(覲親)을 하기 위해 강원도로 내려갔는데, 감사 정순붕이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할 때 국수와 떡은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니, 유지(有旨)를 내릴 때 이런 식물은 지급하지 말라는 일도 아울러 하유하라”여성위 송인은 국왕의 사위로, 학문도 깊었고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여성위가 장인 중종에게 밉보인 일도 없었다. 그런데 기사의 내용과 같은 ‘국왕 명령’이 있었다. 사위가 아버지, 국왕의 사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사돈의 벼슬도 제법 높다. 철원부사다.국왕이 철원부사의 상급자인 강원도 감사에게 내린 명령이 “음식물을 내놓을 때 국수와 떡은 주지마라”는 것이다. 이유도 설명했다. 이런 음식들은 백성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기 힘드니 민폐 끼치지 마라는 것이다.‘지응(支應)’ 공식적이며 합법적인 일이다. 관리들이 타 지역에 가면 현지 관청에서 음식, 필요한 물품을 조달했다. 부마의 공식적인 행사임에도 ‘민폐 끼칠까 두려워’ 국수와 떡은 제한했다. 그것도 국왕의 명령으로. 메밀국수는 귀했고, 공력이 많이 드는 음식이었다.◇ 미공법 480조가 한반도의 국수를 바꿨다이병철의 ‘삼성상회’ 국수는 내수용이었다.상당수는 안동, 봉화 등의 도매상을 통하여 경북 북부로 팔려나갔다. 1930년대 후반의 기계로 국수를 만들었다. 밀가루다. 일제는 만주에서 중국산 밀을 가져왔다. 경부선 철도로 구포항까지 옮긴 후 일본으로 가져갔다. ‘삼성상회’도 만주 등에서 밀을 가져온 다음 대구에서 제분, 제면했다. 이 국수가 안동, 봉화 등지로 팔려나간 것이다.‘삼성상회’의 국수가 경북 지역에서 환영받은 이유가 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건진국시’가 가능하다. 메밀은 쉬 풀어지니 ‘건진국시’가 불가능하지만 밀가루 국수는 가능하다. 국수 만드는 품도 과하지 않다.오늘날 ‘안동국시’는 ‘건진국시’를 뜻하지만 역사는 불과 100년 정도다. ‘음식디미방’의 국수는 대부분 메밀국수다. 밀가루, 전분 국수도 있지만 메밀국수가 대세다. 건진국시는 불가능하다. 건진국시는, 전통이나 전통이 아니다.한반도의 국수 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의 법률이다. 미공법 480조(PL 480=Public Law 480).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에서는 밀이 대량, 잉여 생산되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대를 막는 것은 무기와 더불어 풍부한 식량”이라고 믿었다.1950년대 중반, 미국 산 밀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박정희 정권은 흔해진 밀가루를 전후 재건사업에 사용했다. 산비탈을 개간하면 밀가루를 줬다. 도시 정비사업에도 밀가루가 동원되었다. 가정의 칼국수와 영세공장의 기계국수 모두 흔해졌다. 김창업이 1712년 북경에서 만났던 ‘가늘고 긴 국수’가 지천으로 나타났다.YS는 국수 마니아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서울 성북과 압구정동의 안동 ‘국시집’을 다녔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YS의 국수 사랑은 여전했다.YS는 ‘국시’와 국수를 혼동했다. 안동 스타일의 ‘국시’를 먹으면서 국수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마찬가지. ‘국시’와 칼국수를 가르지 않았다. YS 덕분에 국수는 유명해졌지만, ‘콩가루를 쪼매 넣은 안동국시’의 정체성은 애매해졌다. 어느 게 전통적인지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야 가려질 것이다.목포에서는 ‘홍어 없는 제사 없다’고 한다. 영남에서는 ‘국수 없는 잔치 없다’다.국수 만드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갓 수확한 메밀에는 돌이 섞여 있다. 돌을 일일이 가려낸 후, 메밀을 깨끗하게 씻는다. 흙이 묻어 있다.통 메밀을 맷돌에 넣고 부순다. 깨진 메밀을 절구나 디딜방아에 넣고 찧는다. 체로 치면 고운 가루는 아래로 빠진다. 거친 메밀과 무거리(나머지 찌꺼기)를 다시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는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고운체를 통과한 가루만 모아서 국수를 빚는다.병풍을 친 방 안에서 맷돌, 절구로 갈아낸 것을 부채로 부친다. 가벼운 가루는 멀리 날아가고 무거운 것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 것을 모아서 다시 맷돌, 절구에 넣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고운 가루를 얻었다.1960년대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메밀국수는 사라졌다. 칼국수를 만들거나 공장에서 생산된 고운 국수를 구했다.‘봉제사접빈객’. 제사 국수는 사라졌지만 손님맞이 국수는 여전히 남았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잔치국수’, 시장의 ‘장터국수’ 등이다. 누구 잔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사먹는다. 시장에는 상인과 손님들이 많다. 모두 식당에 가서 장터국수를 사먹는다. ‘접빈객’의 ‘객’은 시장 상인들, 시장 손님들이다.전통. 되살려야 한다. 국수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무엇이 전통인가? 무엇을 살릴 것인가?/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1-23

안동 ‘경당종택’ 종부인생 60년, 국수 반죽을 밀고 썰고 손님을 맞이하다

시집오는 신부가 소복을 입었다. 시댁에 상이 있었다. 혼사를 앞두고 시어머니 되실 분이 돌아가셨다. 소복으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경북 안동 ‘경당종택’ 종부 권순 씨 이야기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 하는 일. 그 중심은 음식이다. 그로부터 60년. 온전히 종부 권순 씨가 도맡았다.◇ 스물다섯에 시집와서 60년, 국수를 썰다집안에 여자가 없었다. 시고모가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소복을 입은 채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신랑은 군인이었다. 결혼을 위한 휴가 며칠이 지나고 신랑은 군대로 돌아갔다.스물다섯 살 신부는 이제 여든을 넘겼다. 경당 장흥효(1564~1633년)의 ‘경당종택’에서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안살림을 챙겼다. 제사와 손님맞이는 일상사였다. 끊임없이 이어진 제사, 손님맞이를 치러냈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줄 알고 해냈다.시집오기 전, 친정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그 집안에 여자라곤 아무도 없다. 시집가면 이제 부엌일이나 집안일을 네가 도맡아야 한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며느리가 시집 살림살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정 어른들은 권순 씨의 대답을 ‘결혼에 대한 응낙’으로 받아들였다.줄이고 줄인 제사가 열 번을 넘긴다. ‘경당종택’의 안살림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는 몰랐다. 60년간, 한 달에도 몇 번씩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국시’를 썰었다. 손님맞이에는 늘 국시가 뒤따랐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니 함부로 내놓지 마라세종4년(1422년) 5월17일(음력), ‘조선왕조실록’ 기록. 국왕 세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의 대화 내용이다. 논의 주제는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에 관한 것이다. 제목은 ‘수륙재의 인원을 정하다’이다. 7일 전인 5월10일 태종이 승하했다. 예조에서 세종에게 고한다. 내용은 간단하다.“예조에서 계하기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종친과 본조의 관원은 모두 전일에 정한 숫자에 의하고, (중략)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초재(初齋)를 올릴 때에 거의 수백 명이나 모였으므로, 이러한 계가 있는 것이었다.”태상왕 태종의 수륙재 참석자와 음식의 규모를 줄이자는 것이다. ‘진전’은 태상왕의 제단이다. 면은 국수, 병은 떡이다. 만두, 국수, 떡 등은 귀한 음식이었다. 태상왕의 제단, 불상, 승려들에게만 국수를 내놓고 고급 관리들에게도 국수를 내놓지 말자고 말한다. 세종은 예조의 의견을 따른다.세종에게 태종은 아버지이자 멘토다. 삼남이었던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다.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는 세종으로서는 무엇보다 귀하게 받들어야 할 제사다. ‘밥상을 받는 이의 음식도 다섯 그릇이고’ 그나마 국수 등 귀한 음식은 뺐다. 국수는 돌아가신 태종, 부처님 앞, 수륙재 주관 승려의 상에만 놓자는 것이다.귀한 제사에는 반드시 국수가 있었다. 국수가 없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번거롭고 귀찮기 때문이다. 국수가 하찮은 음식이 되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 “별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만들기 번거롭다”고 여기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경북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국수 제사는 국수를 밥 대신 내놓는 제사가 아니다. ‘밥과 더불어 국수도’ 차리는 제사다. 국수는 밥 대신이 아니다. 밥이 있지만 별도로 귀한 국수를 내놓는다. 국수를 밥 대신의 식사로 여기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생각일 뿐이다.“내가 차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정성을 모아서 음식을 차린다”는 것이 바로 제사상을 차리는 원칙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다. 빠트릴 수 없다. 태종의 수륙재도 마찬가지다. ‘형편상’ 몇몇 밥상을 제외하고는 빼자는 것이다.◇ 음식, 반가에서 반가로 이어지다‘경당종택’의 종부 권순 씨는 영양 입암 출신이다. 친정이 산택재(山澤齋) 권태시(1635~1719년) 집안이다. 종가(宗家)는 운명이다. 종가에 태어나서 종가로 시집을 왔다. 음식 장만은 시집살이의 주요 덕목이다. 그 살림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무도 모른다.산택재는 아버지 번곡 권창업(1600~1663년)에게 수학했다. 번곡은 경당 장흥효의 문인이다. 기록에는 8세에 번곡이 경당의 문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권순 씨의 인연은 이미 윗대 산택재, 번곡, 경당으로 이어져 있었다.경당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1538~1593년)의 문하다. 퇴계 이황(1501~1570년)~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로 학통은 이어진다.석계 이시명(1590~1674년)은 경당의 문인이자 사위다. 경당은 무남독녀 외동딸 장계향을 제자 석계에게 시집보냈다.장계향(1598~1680년)은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1670년 무렵 쓴 책이다. 권순 씨의 음식은 멀리 장계향의 음식, ‘음식디미방’과 맞닿아 있다.‘경당종택’은 장계향의 친정이다. 장계향의 친정어머니 권 씨는 경북 봉화 출신이다. ‘음식디미방’에는 ‘맛질방문’이 있다. ‘맛질’은 봉화의 지명이다. ‘맛질방문’은 ‘맛질, 봉화의 음식 만드는 법’이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는 친정어머니의 봉화 음식(맛질방문), 친정인 경북 예안(안동)의 음식 그리고 시댁인 석계 이시명 집안의 음식이 고루 녹아 있다.석계는 경북 영해(영덕)에서 태어났다. 장계향이 혼례를 치르고 시집살이를 시작한 곳도 영해였다. 석계 집안은 영양으로 세거지를 옮긴 후에도 영해로 돌아와서 긴 시간을 보냈다.‘음식디미방’에는 봉화, 안동, 영덕, 영양의 반가음식들이 골고루 녹아 있다.장계향과 권순 씨는 친정과 시댁이 묘하게 엇갈린다. 장계향은 안동이 친정이고 시가가 영양 석보면이다. 12대 종부 권순 씨의 친정은 영양 입암이고 시댁은 안동 ‘경당종택’이다. 영양 석보면과 입암면은 나란히 붙어 있다.11대를 지나서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권순 씨는 시집 온 후 쭉 국수를 밀고 썰었다. 국수가 주식은 아니다. 때로는 마치 주식인양 국수를 내놓았다. 종손 장성진 씨도 국수를 좋아한다. 하루 세끼 국수를 내놓아도 싫다하지 않는다. 집안의 대소사가 적지 않다. 경당의 종손이다. 제사라도 있을라치면 수십, 수백 명이 모여든다. 이들에게 ‘안동국시’를 내놓는다.한때는 안동 장 씨 문중뿐만 아니라 안동, 안동 인근의 크고 작은 집안에서 죄다 경당의 불천위 제사에 모여들었다. 모든 행사에 국수는 필수다. 종부는 매번 수십, 수백 그릇의 국수를 마련했다. 2016년 초, 국수를 접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 국수를 만들 수 없었다.‘음식디미방’에는 몇 가지 국수가 등장한다. 계란으로 반죽하는 난면과 메밀국수, 녹말국수 등이 등장한다. 국수는 ‘음식디미방’의 주요 내용이다.◇ 삼성, 국수로 시작하다별표국수? 새로운 국수 브랜든가?, 라고 되물을 법하다. 그렇지 않다. 80년 전에 있었던 국수 브랜드다.‘별표국수’는 모르더라도 ‘삼성상회’는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 삼성 그룹의 모체다.‘삼성상회’는 1938년 대구에서 시작했다. 삼성그룹의 시작이 대구 ‘삼성상회’였고 ‘삼성상회’의 주요 ‘계열사’가 바로 ‘별표국수’, 국수 공장이다.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 출신이다. 김해평야 생산 쌀을 바탕으로 미곡업도 오래 운영했다. 기반은 고향 의령과 가까운 진주였다. 대구와는 거리가 멀다. 왜 삼성을 대구에서 시작한 기업으로 여길까?‘삼성상회’ 때문이다.삼성상회는 대구 근처에서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사들여 만주와 북경에 내다 팔았다. 여기에 하나 더 새로운 사업이 추가됐다. 바로 국수사업이었다. 이병철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 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첫 출발은 과일과 국수 사업이었던 셈이다.국수 브랜드는 ‘별표’였다. 3개의 별이 선명하게 새겨진 ‘삼성별표 국수’ 상표다. 이병철은 당시 3개의 별을 의미하는 삼성을 ‘三星’이란 한자로 쓴 로고를 썼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널리 사용됐다.그가 국수사업에 나선 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심해지면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국수는 히트를 쳤다. 한 다발에 10전짜리 국수를 60다발씩 포장한 상자가 하루에만 100개 이상 팔려 나갔다. 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삼성상회’는 수출이 주력이었다. 대구 인근의 사과와 포항의 건어물을 만주, 북경으로 팔았다. 국수사업은 ‘내수용’이었다. 제분기, 제면기만 이야기했지만 아마도 밀은 대부분 만주 등에서 수입한 것이었으리라.국내의 밀 생산은 한정적이었고 만주 일대 등 중국산 밀이 부산 언저리 구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출되던 시기다. 대구는 만주와 구포를 잇는 철도의 중간에 있는 도시다. 과일, 건어물을 수출, 수입하기에 모두 편했다.재미있는 것은 기사의 마지막 부분이다.‘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이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없다. 위 기사는 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다. 이병철 회장의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콕 집어서 ‘안동’ ‘봉화’의 도매상이라고 했다.대구에서 내수용으로 시작한 사업이 국수 사업이고, 소비처 중 주요 거점이 바로 안동, 봉화 등이었다.안동은 장계향의 친정이자 지금 경당종택이 있는 곳이다. 종부 권순 씨가 살고 있다. 봉화는 장계향의 외가다. ‘음식디미방’의 ‘맛질방문’이 바로 ‘어머니 고향 봉화의 음식 만드는 법’이다.국수는 얽히고설킨다. 달라진다. 국수는 변하고 발전한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1-16

음식 맛없기로 소문난 경북서 남자가 쓴 最古 요리책… 의문이 시작되다

물어보았다. 주변 지인들에게.“영남의 음식을 주제로, 특히 경북 지역 음식과 문화에 대해 연재를 할까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상당수의 사람들이 대답 없이 씩 웃는다. 한참동안 가타부타 말이 없다. 더러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본다. 재차 “어떨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그제야 마지못해 한마디 던진다.“영남에 음식이랄 게 있나요? 특히 경상북도에.” 경북의 음식과 그에 얽힌 문화에 관해 글을 이어가겠다니 마주 앉은 대화 상대는 입을 벌린다.◇ ‘남자, 유학자’가 음식조리서를?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책으로 엮을만한 분량의 글을 경북의 음식에 관해 쓴다는 것이. 우리나라 전역도 아니고 경북에 한정해서라니 더욱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이런 견해를 만났으니 낯간지러운 고백을 한다. 주변의 반응을 보면서 “음, 이거 재미있는 일이겠군”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지인 중 누구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작업에 도전해보는 건 새로운 경험이다.우리는 영남 음식, 경북 음식에 관해 잘 모른다. 영남, 특히 경북은 음식의 볼모지라고 여긴다. 아래는 몇 해 전 ‘경북매일’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광산김씨 탁청정공파 종택’ 중요민속문화재 지정-도지정 문화재였던 안동 탁청정 종택이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문화재청은 ‘안동 광산김씨 탁청정공파 종택(安東 光山金氏 濯淸亭公派 宗宅·사진)’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제272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중략) 또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1481~1552)가 쓴 조선 전기 전통 음식의 조리·가공법이 기록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요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비롯해 종가의 고문서 등 다양한 민속자료가 보존과 당시의 생활상, 사회·경제사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와 의미가 크다...(후략)‘수운잡방’은 1540년 무렵 쓴 책이다. 필자는 경북 예안 지방(안동 와룡면)의 선비 김유. 500년 전이다. 음식 맛없기로 소문난 경북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 나왔다? 필자는 남자다?탁청정 김유의 ‘수운잡방’은 개인적으로, 음식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기록물이다.이숙인 연구교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수운잡방’에 대해서 글을 썼다. 제목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요리책, ‘수운잡방’이다. 최고(最古)의 요리책이라고 했다. 내용도 상당히 풍부하다. 장, 술, 식초 담그는 법부터 국물 끓이는 레시피까지 상세하다.수운(需雲)의 ‘수(需)’는 주역의 다섯 번째 괘인 ‘수괘(需卦)’에서 따온 말이다. ‘음식의 도’를 이른다. 수운(需雲)은 ‘잔치, 연회 등 행사를 준비하는 음식’ 혹은 ‘앞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음식’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수운잡방’은 잔치, 연회 음식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당시 탁청정이 접했던 음식, 의미가 있는 음식들의 레시피를 상세히 기록했다.음식을 공부하는 이들이 자주 보는 자료는 ‘목은집’ ‘향약집성방’ ‘산가요록’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다산시문선’ ‘규합총서’ ‘오주연문장전산고’ ‘서경잡절’ ‘동국세시기’ ‘시의전서’ 등이다. 여기에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역사서를 더한다.‘수운잡방’은 각별하다. ‘목은집’ ‘다산시문선’ ‘서경잡절’ 등은 개인의 문집이다. 시, 편지 등에 간간히 음식이 등장한다. ‘향약집성방’은 의약서적이다. 산가는 산촌, 한적한 시골을 뜻한다. ‘산가요록’은 시골에서 사는 법, 즉 농서(農書)다. ‘규합총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백과사전 격이다.음식과 더불어 의식주 전반에 관한 내용과 시대상 등을 기록했다. ‘동국세시기’는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의 각 절기의 풍습, 풍속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음식전문서적, 음식조리서는 아니다.‘수운잡방(안동)’ ‘음식디미방(영양)’ ‘시의전서(상주에서 발견)’ 등은 음식조리서다. 모두 경북이다. 내놓을 음식도, 맛있는 음식도 없는 경북에서 왜 음식 조리서가 이렇게 많이 나왔을까?의문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였다. 음식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수운잡방’의 필자는 유학자, 남자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거나 음식 타박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던 경북에서 남자가 음식조리서를 만들었다니! 그것도 된장, 간장 등 장(醬)과 각종 김치류, 식초, 술 등을 빚는 세세한 과정을 고스란히 기록한 책이라니.◇ 음식은 ‘봉제사접빈객’의 도구음식은 유교, 유학이 추구하는 세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도구였다.경주 법주의 ‘법(法)’은 법도다. 법도대로 만든 술이 법주다. 기준이자 표준이다. 원칙대로, 제대로 만든 술이라야 제사상, 손님상에 올릴 수 있었다. 사람은 유학을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하고, 음식은 법도대로 만들어야 제사상, 손님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탁청정 김유는 유학자다. 선비다. ‘사대부(士大夫)’는 선비, 공경대부를 널리 이르는 표현이다. 벼슬을 하던, 하지 않던 모두 유학의 세례를 받은 유학자들이다. 탁청정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선비로 살았다.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유학적 세계관으로 볼 때 위로는 궁중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까지, 유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것이었다.궁중 제사는 종묘 제사가 대표적이고, 민간은 조상 제사다. 국가 손님은 중국 대륙과 남방의 왜, 유구 열도 등의 사신단이었다. 민간의 손님은 집안 대소사에 모이는 손님들이다.지금도 “언제 결혼하느냐?”는 말 대신에 “언제 국수 먹여줄래?”라고 묻는다. 흔히 “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국수를 마련한다”고 말한다. 틀렸다. 장수를 기원하려면 환갑날에 국수를 내놓아야 한다. 왜 하필이면 결혼식인가? “국수로 장수를 기원한다”면 안동의 국수 제사는 설명할 길이 없다.돌아가신 분에게 장수 기원? 터무니없다. 경북 지역의 일상적이고 뿌리 깊은 국수 문화를 설명할 방법도 없다. 음식 맛없기로 유명한 경북 안동의 ‘안동국시’가 수십 년간 서울에서 성업 중인 이유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4가지 주요한 ‘행사’를 겪는다. 관혼상제(冠婚喪祭)다. 어른이 되고, 혼례를 올린다. 죽으면 초상을 치르고 제사를 모신다. 주요한 행사니 ‘손님들’이 모인다. 봉제사접빈객이다. 당사자를 위한 상도 차리지만 손님맞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을 맞는 주요 도구다. 제대로 차려야 한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말은 수치다. “며느리 잘 못 들여 장맛이 무너졌다”는 말도 수치다.국수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밀은 귀했다.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 품도 많이 들고 준비기간도 길다. 몇 달 전부터 국수 준비를 한다.성인이 되는 관례(冠禮)는 대부분 사라졌다. 상투가 사라지니 관례도 없어졌다. 어른이 되면 머리에 관을 쓴다. 예전에는 이날에도 손님들을 위하여 국수 등 잔치 음식을 내놓았다.초상은 언제 닥칠는지 모른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상을 위하여 미리 ‘초상 용 국수’를 마련할 수는 없다. 불효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돌아가시게 할 수 없다”고 힘을 짜내서 잘 모셔야 한다.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불효자가 된다.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다. 죄인의 심정으로 묘를 지킨다. 하물며 아파서 누워계신 어른을 위하여 미리 국수를 준비할까? 개장국, 육개장으로 손님을 모신다.남는 것은 혼례와 제례다. 결혼식과 제사상에는 반드시 국수가 등장한다. 주인공을 위한 상에도 등장하지만 손님맞이 상에도 국수가 오른다.안동의 ‘건진국시’는 대표적인 ‘행사용 음식’이다. 수십 년 전까지도 안동의 혼례, 문중 제례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당연히 국수를 준비한다. 문제는 준비하는 시간이다. 마치 식당의 피크타임 같다. 순식간에 수백 명이 모인다.웬만큼 솥을 많이 준비해도 늘 시간에 쫓긴다. 국수 삶는데 10분씩 걸리기도 한다. 국수는 조금만 두면 붓는다. 건진국시는 미리 삶아서 냉수 처리한 다음 준비해둔 국수다. 손님이 오시면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어서 내면 된다. 간단하고 빠르다.‘제물국시’는 건진국시의 대척점에 있다. 건져내서 냉수 처리하는 건진국시와는 달리 물에 국수를 넣고 삶은 후, 국수 삶은 물과 삶은 국수를 같은 그릇에 담아낸다. ‘여름엔 건진국시, 겨울엔 제물국시’는 우리 시대의 풍습일 뿐이다. 행사 때는 건진국시, 일상에서는 제물국시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는 ‘고려삼은(高麗三隱)’이다. 모두 경북과 연관이 있다. 목은은 외가가 영덕이다. 문하생인 포은은 포항, 영천, 길재는 현재의 구미(선산군)가 고향이다. 도은 이숭인은 성주, 조선을 건국한 삼봉 정도전은 영주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 말에 태어났으나 유학자들이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조선 중기, 안동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한반도 유교 성리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경북은 100년 전 경상좌도(慶尙左道)다. 유학의 나라다. 유학자, 사대부의 나라다. 음식은 유교적 세계를 구축하는 ‘봉제사접빈객’의 주요도구다.경북은 ‘법도대로 만든 음식’을 낳았다. 500년 전 탁청정 김유가 ‘수운잡방’을 쓴 이유다. ‘맛없는 음식’을 내놓는 경상좌도에서 음식조리서가 집중적으로 나온 이유다. 경상좌도의 음식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법도에 맞는 음식이다. 바로 이것이 ‘경북의 음식과 문화’에 관해 쓰고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연재를 통해 경북의 음식, 음식 문화, 법도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보는 식당의 음식 등을 살펴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칼럼니스트 황광해는 195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서울문화사 등에서 편집장을 지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식과 문화에 관한 글을 꾸준히 써왔다.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 등의 책을 펴낸 음식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2019-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