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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표 이야기 (2)

한 남자가 겨울 산에서 조난을 당합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탈진하기 직전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기어갑니다. 눈을 떠 보니 따스한 방안. 약초 캐는 할머니가 말합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시우? 이 지독한 눈보라는 3∼4일은 걸릴게요. 그 사이 몸을 잘 회복하시구려.”할머니는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내놓습니다. 눈보라가 잦아들고 체력을 회복한 남자는 봉투에 정성껏 편지를 써서 감사를 표시하고 수표 한 장을 담아 할머니 방 한쪽 구석에 놓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수표는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지요. 남자는 거부(巨富)였습니다.1년 후 다시 겨울. 남자는 할머니가 새집을 짓고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 산골을 다시 찾아갑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본 남자는 숨이 막힙니다. 할머니가 숨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방을 둘러보다 깜짝 놀랍니다. 창호지 구멍 난 곳을 때우는 문풍지로 수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어제와 오늘 소개한 이야기는 ‘할머니와 수표’라는 이야기가 약간 다른 버전으로 퍼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 이야기는 아닐까요? 고전에 숨겨 있는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논어 페이지마다 1억 원 수표가 끼워져 있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플라톤 대화편 한 페이지마다 5천만 원짜리 수표가 보인다면 허황된 말일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전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는 수표를 어떻게 하면 현찰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능력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고전을 읽어 유능하고 돈 잘 벌고 높은 자리를 꿰차는 것이면 곤란합니다. 그들이 일구어 가는 사회는 향기롭지 않습니다. 뉴스만 봐도 악취가 진동합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석학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들이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진해 참전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집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지성을 갖고 있기에 존경을 받는 것이지요.고전에 가득 넘치는 수표 다발을 현찰로 바꾸는 비밀번호는 두 글자입니다. ‘사랑’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 약자를 보살피는 사랑. 나와 내 가족을 챙기는 이기적인 울타리를 부수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사랑’을 몸소 행하는 용기를 보일 때 비로소 고전의 지혜는 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그 힘을 나눠 주고 우리를 저 먹구름 너머의 눈부신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01

수표 이야기 (1)

한 남자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아 늙은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자 했지만, 어머님은 한사코 거부합니다. 아들 내외에게 짐이 될까 염려한 거지요. 어쩔 수 없이 아들 가족만 미국으로 건너가고 할머니는 혼자 살아갑니다. 할머니는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고 표정도 어둡습니다. 동네에서 폐지를 주워 겨우 생계를 유지합니다. 미국에 잘 사는 아들이 있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 모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아들한테서는 소식 없어요?”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의 궁핍한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아들의 불효막심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할머니는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동네 사람들의 심사가 뒤틀린 것을 알고 변호하지요.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꼭 편지를 보내온다우. 가끔 그림도 보내줘서 아들이 그리울 적마다 편지와 그림을 보면서 지내요.”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안 보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집에 찾아갑니다. 이상한 예감에 방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할머니는 단정한 모습으로 잠을 자듯 숨져 있었습니다. 미국 아들의 연락처를 찾느라 방을 뒤지던 동네 사람들은 벽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몇 장의 작은 그림을 발견합니다. “저것 좀 보세요!”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거기에는 1만 달러 수표 몇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할머니는 수표가 지닌 가치를 모른 채 아들이 자신에게 보낸 그림인 줄로만 생각했던 겁니다. 소중한 것을 전해주어도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 주는 우화입니다. 고전은 산삼과 같다고 말합니다. 길게는 2천500년, 짧게는 100년 이상 생명을 유지한 고전이 클래식 북스 서가마다 즐비합니다. 책 한 권에는 평균 3억~4억 원 정도 지적 자산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들이 삶에서 배운 지식을 책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나름 환산한 것이지요. 3억 원 정도 되는 지적 자본을 불과 1만5천원 정도로 살 수 있으니, 책을 사서 읽는 행위는 남는 장사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고전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3억에 0을 몇 개 더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의 열혈 팬이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것밖에는 없었겠지요. 오늘날의 애플을 있게 한 것은 플라톤의 저작물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바칠 용의가 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31

특이점이 오고 있다

소리 없이 발전하고 있어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폭발적인 속도로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기술력의 임계점. 그것이 싱귤레러티(singularity)의 특이점입니다.특이점에 거의 도달해 세상을 뒤흔들 몇 가지가 있습니다. AI의 비약적인 발전과 로봇의 결합입니다. 중국에서는 6만 명 이상 모인 대형 콘서트홀에 설치한 CCTV 화면을 AI가 분석해 범죄 용의자를 체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카메라가 수강생들의 표정 변화를 포착합니다. 졸린 눈, 하품 횟수, 반짝이는 눈빛, 대화와 토론의 빈도, 질문 횟수 등 수업 참여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실시간 계량화합니다.알리바바 마윈 회장은 중국에 수십만 개 무인 레스토랑을 오픈한다고 발표했습니다. AI와 로봇 시스템의 결합이 우리 사회에 던질 충격을 예고하는 대목이죠. 신선한 채소와 야채, 음식재료의 공급과 관리부터 조리 전 과정, 서빙과 계산까지 사람 한 명 필요 없는 무인 식당은 사업화를 기다리는 중입니다.생명공학의 특이점은 큰 충격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합니다. 유전자 가위질 기술이 유전자 정보들을 편집해 복사, 붙이기를 하기 시작하면 불치병들을 상당수 원천 봉쇄할 겁니다. 앤젤리나 졸리는 유방암 확률 87%인 유전자 보유자입니다. 이 사실을 검사로 알아내고 암 발생 확률을 0.5%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누구든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이런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혁명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3D 프린팅 기술은 이제 인공 장기까지 인쇄해 내는 기술적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조만간 인체 장기들을 브랜드를 달고 병원마다 전시 판매하는 일들도 눈앞에 펼쳐질지 모릅니다.“심장은 LG 게 좋대, 역시 폐는 삼성이지, 간은 SK 아닐까?”이런 대화를 주고받을지도 모르지요. 공상만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놀라운 이야기들이 눈앞에 현실로 매일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빠르고 넓고 강력하게 삶을 뒤흔들 게 분명합니다. 기득권층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대중들의 고삐를 더 쥐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려 하겠지요.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하지요.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내가 나답게 바로 서고 풍요롭고 향기로운 인격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급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대책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30

괴로움이라는 언덕 너머

온종일 500℃의 뜨거운 아연 국물과 씨름하고 돌아온 청년은 다음 날 밤에도 글을 한 편 뚝딱 지어냅니다. 숱하게 보아온 밑바닥 인생들이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200자 원고지 20∼30매 정도 분량의 이야기 한 편을 지어내면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눈을 질끈 감고 게시판에 올리지요. 조금씩 댓글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아주 좋아요. 매일 올려주세요.”, “맞춤법이 틀리셨네요. ‘붇는다.’가 아니고 ‘붓는다.’라고 고쳐주세요.”,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는데, 띄어쓰기에 신경 써주세요.” 한 명, 두 명 팬이 늘어납니다. 청년은 댓글에 힘을 얻고 맞춤법에 대한 지식을 쌓아갑니다. 글을 쓰다 막히면 포털 사이트에서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자료를 찾아 연구합니다. 퇴근 이후 시작해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는 글쓰기는 이렇게 매일의 의식처럼 청년의 삶을 파고듭니다.나이 서른하나에 시작한 글쓰기. 그는 2∼3일에 한 편씩 꾸준히 글을 올립니다. 1년 6개월을 반복해 5천 자 분량 단편 소설 350편을 완성합니다. 원고지 1만 장 분량. 두꺼운 장편 소설 10권을 묶을 수 있는 탄탄한 콘텐츠가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는 노동자 청년의 손끝에서 탄생합니다. 온라인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게시물이 올라가면 순식간에 조회 수가 1만, 2만을 훌쩍 넘습니다. 글을 올린 후 자고 일어나면 폭풍 댓글들이 올라옵니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일자무식 청년이 빚어내는 굴곡진 우리 사회의 모습에 사람들은 빠져듭니다.2018년. 청년의 온라인 게시물은 책으로 묶여 서점에 등장합니다. 반응은 뜨겁습니다. 학벌도, 지식도, 세련된 문장력도 없는 무명 청년이 3권의 책을 동시에 세상에 내놓습니다. 두 달 만에 5쇄를 찍습니다. 2만 부가 순식간에 팔립니다. 연이어 4권, 5권도 책으로 묶어 나옵니다. 발간 두 달 만에 시리즈 합계 총 5만 부를 찍습니다. 괴력에 가깝습니다. 얼어붙은 한국 출판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이 청년, 이름은 김동식입니다.먹구름 아래 인생 태풍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 안개 자욱한 미래로 마음이 묵직한 분들. 자신감이 떨어진 분들.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한없이 우울하신 분들. 성수동 아연공장에서 뜨거운 아연 국물을 국자에 퍼 담으며 10년을 묵묵히 견딘 청년 김동식에게 인생을 함께 배우면 어떨까요?몽테뉴는 말합니다. “괴로움을 슬퍼하지 말라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움이라는 언덕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린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29

험난한 삶이라도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게 두려운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렵고 공부는 따분했습니다. 숙제를 하지 않아 혼나고, 지각했다고 혼나고, 별 볼 일 없는 이 학생에게 학교는 가혹합니다. 결국,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원단 공장에서 가위질도 해 보고,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꾼으로도 살아봅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를 몇 년째. 소년은 이십대 청년으로 자랍니다.고향 부산을 떠나 대구로 올라오면서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요. 온갖 밑바닥 인생의 굴곡진 모습을 여기에서 다 목격합니다. 사채업자, 노래방의 도우미로 일하는 여인들, 문신 가득한 조폭. 불법 온라인 게임 도박장 아저씨. 늘 야한 동영상을 보는 할아버지 등.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청년의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문장 한 줄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피시방의 월급은 60만원. 생계가 힘듭니다. 이때 외삼촌이 서울의 공장에 자리 하나를 만들어 소개해 줍니다. “특별한 기술은 없어도 돼.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야.” 서울 성수동에 있는 주물 공장이었습니다. 500℃ 뜨거운 화로에 아연을 넣어 녹이고 나서 지퍼나 단추 등을 만드는 회전 금형에 천천히 붓는 작업입니다. 월급은 130만 원으로 오릅니다. 첫 월급날, 피자 한 판을 시켜 먹은 청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뿌듯한 밤을 보냅니다.청년은 공장에서 벽을 바라보며 10년을 일합니다. 퇴근하고 자취방에 들어가면 고독이 엄습합니다. 어느새 나이 서른하나.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유머’ 커뮤니티에 들러 재밌는 이야기를 골라 읽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가끔 댓글로 사람들의 창작물에 응원을 던지던 일자무식 청년에게 용기가 생깁니다. “나도 한 번 글을 써 볼까?” 청년은 인터넷에 검색하지요. ‘글 잘 쓰는 법’용기를 내서 이야기 한 편을 써 올립니다. 누구나 올리는 곳이거든요. 맞춤법이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재미없다고 욕먹을까 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후다닥 컴퓨터를 끄고 이불을 덮고 눕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사이트에 접속해 봅니다. 글은 이미 게시물의 숲 속에 파묻혔습니다. 불과 몇 건의 조회 수.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집니다. 댓글이 달린 거지요. “재밌어요.” 비록 네 글자의 짧은 댓글 하나였지만,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내 글이 재미있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받아본 인정과 칭찬입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28

반응하는 능력이 책임감입니다

뱃사공이 노래를 부를 때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화답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뱃사공 두 사람이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괴테 일행을 즐겁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수로 사이 건물의 울림을 통해 감동을 선사했겠지만 무언가 부족합니다.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다음 멜로디와 가사를 추임새로 넣으며 멀리서 부르는 노랫소리의 감동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뱃사공의 노래는 누군가로 하여금 화답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던 거지요. 남편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응원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 들리는 사랑하는 이의 화답 노래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예술로 이 장면을 승화시킵니다.2013년의 일입니다. 캘리포니아 엘카미노크리크 초등학교에 다니는 열 살 소년 트래비스셀린카는 뇌종양 판정을 받고 7주간 방사선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를 마친 트래비스는 학교에 나갈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걱정 가득합니다. “모두 내 머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트래비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습니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릅니다. 친구 열다섯 명 모두가 삭발하고 등교한 것입니다. 친구 혼자 외롭지 않도록 모두 머리를 깎고 등교하기로 약속했고 한 아이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뇌종양이라는 끔찍한 지옥을 겪고 암과 싸워 이긴 트래비스. 다시 세상에 돌아온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영어 단어 Responsibility는 책임감이란 뜻이지요. 반응한다는 뜻의 response와 능력이라는 뜻의 ability가 합쳐진 것이지요. 반응하는 능력이 곧 책임감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예술 같은 삶은 책임감의 열매들입니다. 그 책임감은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가장 아름다운 반응을 선택하는 힘으로부터 오는 법입니다.멀리서 들려오는 뱃사공의 아름다운 노랫가락에 화답하는 익명의 노랫소리. 아내들의 응원하는 소리에 고단함을 잊고 자신들의 노래를 불러주는 배려. 친구로 하여금 외롭지 않도록 같이 머리를 깎는 용기 있는 선택. 뛰어난 반응 능력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순간도 내 곁 누군가는 세상과 싸우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귀를 열어 그 신음소리를 듣고 최선의 반응과 행동으로 화답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을 만들고 싶습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25

베네치아 뱃사공의 노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초간단 유머 심리검사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베네치아 여행 중입니다. 곤돌라 뱃사공이 노래를 시작합니다. 잘 아는 노래입니다. 이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1. 화음을 넣어 함께 부른다. 2. 멜로디를 따라 노래한다. 3.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4. 웃으며 손뼉친다.”화음을 선택했다면 서로 감사할 줄 아는 환상의 커플, 같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기를 선택한 경우는 자신의 욕심을 챙기기보다 상대에게 맞춰주는 커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면 관계에 확신이 낮은 커플이랍니다(이런). 손뼉만 치는 것은 서로 오해가 자주 발생할 수 있다지요. 그대 선택이 궁금합니다.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베네치아 사공의 노래를 언급합니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가운데 곤돌라에 올랐다. 두 명의 가수는 배의 앞뒤에 각각 앉았다. 이들은 노래를 시작했고 번갈아 한 소절씩 불렀다. 폐부를 뚫고 들어가는 노랫소리는 잔잔한 물 위를 퍼져 나간다. 그때였다. 마치 이 노래 가사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멀리서 듣고 이어지는 시구로 응답했다. 그의 노래가 멈추자 다시 사공이 응답한다. 이렇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메아리로 기능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슬픔이 증발한 가여운 탄식처럼 들렸지만, 눈물 나게 감동적인 경이로운 요소가 담겨 있다. 기분 탓으로 돌리는데 늙은 하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노랫소리가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을 흔드네요. 들을수록 감동적인데요.”늙은 하인은 내가 리도의 여인들, 특히 펠레스트리나 출신 여인들의 노래도 들어 보기를 바라며 말했다. “그 여인들은 남편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 바닷가에 앉아 폐부를 찌르는 목소리로 이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곤 합니다. 그러면 남편들도 멀리서 아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런 식으로 서로 노래로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하인의 말에 괴테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이 노래는 인간적이고 진실해서 어느 고독한 자가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응답하도록 저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노래이구려.”뱃사공이 노래를 부를 때 아련히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화답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뱃사공 두 사람이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괴테 일행을 즐겁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수로 사이 건물의 울림을 통해 감동을 선사했겠지만 무언가 부족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7-24

퀀텀 리프(quantum leap)

대나무는 외떡잎식물, 즉 풀에 속하지만, 그토록 곧고 푸르고 높게 성장하는 데는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보살펴도 대나무는 1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요. 인내심을 갖고 2년 차 또 일편단심 정성껏 돌보지만, 결과는 무(無). 아무런 변화가 없고 싹조차 트지 않습니다. 또 한 해를 반복합니다. 3년 차. 드디어 결과가 보입니다. 30㎝ 죽순이 삐죽 땅 위로 솟아오르지만 거기서 스톱. 더 자라지 않습니다. 4년 한 해 동안 30㎝에서 끄떡하질 않습니다.이게 전부 다 인가, 초조하게 바라봅니다. 다시 1년을 기다리며 투자합니다. 5년째 되는 해. 대나무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른바 퀀텀 리프(quantum leap). 마디마다 생장점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1m씩 자랍니다. 이 시기의 대나무는 1시간에 소나무가 30년 걸려 자라는 길이만큼 쭉쭉 위로 솟구칩니다. 필름을 고속으로 돌려 보면 마치 화살을 쏘아 올리는 것과 같은 속도일 테지요.비밀은 뿌리에 있습니다. 4년 동안 대나무 뿌리는 지반을 움켜쥐듯 서로 얽히며 보이지 않는 흙 속 깊은 곳으로 뻗어 내려갑니다. 이 뿌리가 4년 기초를 닦았기에 하루 1m의 폭풍 성장, 퀀텀 리프가 가능한 5년 차를 맞이하는 겁니다.기본을 죽어라 파고 포기하지 않았던 손정웅씨가 아들 손흥민을 교육한 방법이 대나무의 성장과 꼭 닮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뢰. 인내. 폭풍 성장. 마침내 손흥민은 대한민국 축구의 선봉장으로 우뚝 서지요. 2010년 이래 손정웅에게 아이들을 맡겼던 많은 학부모가 언제까지 기본기만 가르치고 있을 거냐고 따지고 항의하면서 등을 돌렸지만 손정웅은 고집을 꺾지 않고 아들 손흥민으로 자신의 방법이 옳았음을 증명해 냅니다.우리 교육을 돌아봅니다. 눈앞의 진로, 성적, 높은 자리를 추구하며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본기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기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교육이야말로 AI 시대에 흔들리지 않을 최고의 교육입니다. 교육의 기본은 ‘책’입니다. 손흥민이 ‘공’하나를 다루기 위해 8년을 투자한 것처럼, 진정한 배움의 길을 위해 ‘책’하나를 붙잡고 씨름하고 물고 뜯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퀀텀 리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먹구름 위 눈부신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본기를 충실하게 닦아야 합니다. 그대와 함께 일궈 나갈 울창한 대나무 숲을 상상합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3

기본기가 중요한 이유

손흥민은 독학으로 축구를 익힌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아버지의 혹독한 개인 지도가 그 배경에 있습니다. 여덟 살에 축구를 시작합니다. 키가 크지 않을까 봐 웨이트 트레이닝, 체력 훈련 부담을 지우지 않습니다. 강조하는 훈련 포인트는 딱 한 가지입니다. ‘기본기’.축구를 시작한 첫 6년 동안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을 다루는 연습만 합니다. 톡톡 공을 발로 차올려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술 ‘리프팅’을 하루에 4시간에서 6시간을 시킵니다. 패스도 슈팅도 연습하지 않습니다. 시합요? 꿈도 꾸지 못합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오로지 발끝에서 볼이 떨어지지 않는 기본만 죽어라 연습시킵니다. 주위에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합니다.손정웅 씨는 춘천FC 유소년팀을 가르치는데 10명이 배우겠다고 오면 절반은 6개월 이내에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기본기를 배우다가 지쳐 포기하고 학교 축구부로 돌아가는 거지요. 손흥민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한 가지 훈련을 추가합니다. 슈팅 연습. 냉장고 박스에 공을 90개 담아와서 운동장에 풀어 놓고 매일 천 번씩 슈팅을 연습합니다.손흥민은 이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흔들리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들었어요.” 중학교 3학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시합에 출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지독한 고집을 꺾을 사람이 없습니다. 16세가 되자 손흥민의 기본기와 가능성을 알아본 독일의 함부르크SV 유스팀에서 스카우트하지요. 독학에서 축구 유학으로 넘어갑니다.손정웅씨는 말합니다. “선수 시절 뼈아픈 경험을 통해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스피드는 빨랐지만 기본기가 약해 항상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아들에게 그 후회스러운 한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선수 시절, 저 스스로가 너무 싫었습니다. 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제 모습이 원망스러웠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큼은 나와 정반대의 시스템을 갖고 가르쳐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축구는 ‘공’이 전부입니다. 공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데 공을 못 다루고 어떻게 축구를 하겠어요? 공의 비밀을 아는 데는 기본기 연습밖에 없습니다.”손흥민은 고백합니다. 지겹도록 반복했던 기본기 훈련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8살 때 축구를 시작해, 첫 시합까지 8년 걸렸고 매일 볼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훈련을 거듭해 오던 어느 날, 날아드는 공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2

뒤통수만 바라봐도

체력이 천하장사로 강건하기 이를 데 없고, 곧은 성격과 날카로운 외모 때문에 별명이 ‘양칼’이던 교사가 있습니다. 가르쳤던 과목은 지리학. 양칼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선생님은 수업 중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따스한 분입니다. 일본 유학을 통해 지식을 쌓은 교양인이었고 대작가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에 깊이 감동을 받은 탁월한 영성(靈性)의 소유자였습니다. 유학 시절 교류하던 함석헌 등과 함께 박봉을 털어 민족을 깨우기 위한 잡지를 창간하고 제작과 보급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습니다.낮에는 민족 학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글로 시대정신과 투쟁하며 삶을 불태운 젊은이였습니다. 선생의 이름은 김교신.가르치던 학생 중에 체력이 강철같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장사를 하던 친구였죠. 참외 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 장수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 학생은 약간의 돈을 모으자 다시 학업에 뛰어듭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2㎞의 자갈밭을 매일 뛰어서 등·하교를 하죠.김교신 선생은 그를 발탁해 달리기 선수로 육성합니다. 예상대로 학생은 출전하는 마라톤 대회마다 우승을 따냅니다. 13번 출전해 10번을 우승하지요. 김교신 선생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소년은 성장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민족의 영웅 손기정입니다. 손기정 선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달리기 연습을 할 때면 김교신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한 발짝 앞서가면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치고 힘들어 그만 달리고 싶을 때 저는 항상 고개를 똑바로 들고 김교신 선생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분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헬렌 켈러는 당당한 삶의 비결을 두 문장으로 말합니다. “나는 폭풍이 두렵지 않다.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평생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앤 설리번의 수고가 있었기에 헬렌 켈러는 지구촌 사람들의 마음속 등불로 빛날 수 있었습니다.뒤통수만 보아도 힘이 날 수 있는 스승. 배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이끌어 줄 참 스승들이 그 안에 아직 살아 계시니까요. 세상의 폭풍과 한파에 얼어 버린 굳은 마음들을 도끼로 깨 주실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한 권의 책에 손을 뻗습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1

초등학교도 못 가본 남자가 만드는 세상

평생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기만의 세상에 감금당한 꼴이다. 그 사람이 접하고 사귀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으로 보고 듣는 것이 신변의 잡사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바로 별세계에 출입을 시작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좋은 책이면 독자는 세계 인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물리적으로 먼 별세계를 갈 수도 있고 사라진 그 옛날에도 갈 수 있다. 또 여태까지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되고 숱한 처지에서 상황에 패하지 않고 이겨가는 과정도 깨달을 수 있다.-린위탕생활의 발견 중린위탕의 문장을 만난 소년의 눈이 반짝입니다. 혼자서 1,000일 독서를 결단합니다. 도서관이나 친구, 하숙생들에게 빌린 책들을 미친 듯 읽기 시작하지요. 1958년 8월 7일. 그의 나이 마흔하나. 회사를 창업합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선언합니다. “저는 25년 이내에 세계적인 회사를 만들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에 가장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1980년. 비전을 선포한 지 꼭 23년째 되는 해, 종로구 광화문 1번지. 이곳에 지하 4층, 지상 23층의 사옥을 짓습니다. 금싸라기 땅에 사옥을 짓고 지하 1층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교보문고를 세울 때 극심한 반대에 부딪칩니다. “그 금싸라기 땅에다 서점이요? 상가를 지어 분양해야 합니다.” 임원들은 반대하지만 대산은 젊은 시절 책이 자신에게 베푼 혜택을 잊지 않습니다.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대산 신용호 선생이 남긴 위대한 문장입니다. 회의할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매사에 따뜻한, 땀내 나는 잔정을 베풀어라. 그러면 상대방이 오래 머물게 된다.” 대산의 이런 마음은 교보빌딩 주위를 지나는 서울 시민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겠다는 뜻으로 이어집니다. 빌딩 외벽에 펼쳐진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이지요. 오늘도 교보문고에는 4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종종걸음으로 찾아옵니다.학력(學歷)이라고는 없는 무학의 사나이는 책을 통한 진정한 학력(學力)으로 대한민국을 남부럽지 않은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2003년. 대산이라는 큰 별은 아름다운 궤적을 남긴 채 저물었지만 그의 유산은 오늘도 우리 가슴에 남아 두근거리고 있습니다.먹구름 위 눈부신 세상이 곧 린위탕이 말하는 별세계입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펼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먹구름 위로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8

글 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글의 배후에 흉악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권위와 거짓, 독점과 폭력이 스며 있습니다. 잘 짜인 글, 삶에서 우러나지 않고 포장한 미사여구들이 권위를 갖습니다. 신문의 사설, 서점에 진열된 책. 글이 활자가 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순간 힘을 갖는 거지요.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는 솔직하고 유창하던 아이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 발표를 시키면 이내 얼어붙습니다. 평소와 달라집니다. 말이 글에 지배를 당하는 순간입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아닌 딱딱한 발표가 되어 버리지요. 앞에 서는 순간 권위와 거짓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자연스럽지 않고 주눅드는 악순환입니다. 내 고유한 삶이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자꾸만 덮고 숨기고 멸시하고 싶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글보다 먼저다. 글을 쓸 때도 말하듯 쓰는 것이 좋다. 나는 ‘말이 글보다 먼저’라는 이오덕 선생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말과 글이 다르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책에서 본 것처럼 그럴듯한 멋진 문장으로 써야만 하는 것이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글을 짓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선생은 말합니다.“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로 그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을 털어놓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생명은 이렇게 해서 자기표현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잘것없다 생각해 숨기고 멸시해 온 내 것, 우리 것을 다시 찾아내 그 가난하고 조그마한 것들을 귀하게 아끼고 드러내 보이고 고이 키워가야 한다. 눈부신 황금으로 빛나는 글의 보물 창고는 먼 어느 나라의 화려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걸린 무지개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걱정과 한숨과 눈물과 고뇌로 얼룩진 우리들 나날의 삶, 나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로 흘러드는 진정한 쓰기를 그대와 함께 춤추듯 해 보고 싶습니다. 매일 새벽 두시부터 한 편씩 쓴 새벽 편지를 모아 이번에 엘리베이션 파워라는 책을 세상에 선보입니다. 부족한 제 편지를 읽어주신그대 덕분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 무엇을 쓸까 노심초사하던 날들도 있었지만 100일을 넘기면서부터 글로 그대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에 미리 대사를 외우고 나갈 필요가 없듯, 그대와 글로 만나는 새벽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귀 기울여 주시는 그대가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7

삶이 말(言)로 말에서 글(文)로

1960년대. 경북 시골 초등학교에 깡마른 선생님이 부임합니다. 어느 교실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국어 수업을 진행합니다.“어린이 여러분. 글짓기하지 마세요.”선생님은 시골 아이들에게 글은 짓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네 가지를 당부합니다.첫째, 자신이 평소에 하던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써도 괜찮아요. 둘째, 더러 서툰 말이 나와도 아무 상관없어요. 착한 어린이가 된 것처럼 꾸며서 쓰지 마세요. 칭찬을 받거나 잘 보이기 위해서 글을 꾸미지 마세요. 셋째, 슬프고 괴로운 일, 부끄러운 일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좋은 글이 될 수 있어요. 넷째, 잘 쓴 글이라고 해도 남의 글을 절대 흉내 내지 마세요. 단 그 글에서 정직함만 배우세요. 만들어 내는 ‘글짓기’는 하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를 쓰는 ‘글쓰기’를 하세요.옳은 가르침은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하얀 백지처럼 순수한 아이들에게 글 짓기가 아닌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쓱쓱, 삶을 놀랍도록 맑고 순수한 글로 풀어내기 시작합니다.내가 학원을 / 밤 일곱 시에서 아홉 시까지 해서/ 마치고 오는데 / 별이 있나 없나 / 하늘을 보면서 / 터벅터벅 걸어간다. / 집 가까이 가는데 / 현호가 있어 / 함께 한 바퀴 또 돌고 / 외로운 길을 두 번 간다.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 /외로운 길 전문이오덕(李五德) 선생 이야기입니다. 아동 문학계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때까지 동시 속 아이들은 곱디고운 천사같은 천편일률적인 모습이었는데 동심 천사주의를 여지없이 깨 버린 작품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선생은 힘주어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는 사람다운 감정과 생각을 갖고 사람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글쓰기는 그런 삶을 가꾸는 참으로 귀한 수단입니다. 글을 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릅니다.“이오덕 선생이 항상 강조한 것은 삶이 말이 되어야 하고 말이 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올바른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삶에서 말로, 말에서 글로.” 당연한 말씀입니다. 선생은 되묻습니다. 삶은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정반대라고 지적하지요. 글이 말을 지배하고 말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겠느냐고요.(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6

목숨 걸고 따를 지도자

‘단숨에 죽여버리겠어!’ 안회는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조용히 뽑아 듭니다. ‘음탕한 계집을 먼저 죽일 것인가? 사내를 먼저 죽일 것인가?’ 아내를 먼저 죽이기로 하고 칼끝을 겨누는 순간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승의 두 번째 문장입니다.‘명확히 하지 않고서 함부로 살인하지 말라.’ 눈물이 솟구칩니다. 칼을 내려 탁자에 올려놓고 촛불을 켭니다. 잠들어 있는 아내 옆에 누워있던 사람은 가끔 놀러와 아내를 위로하던 누이였습니다. 안회는 공자에게 달려갑니다.“스승님의 두 마디 문장 때문에 제가 살고, 아내가 살고, 누이동생이 살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별것 아닐세. 어제는 날씨가 너무 건조하고 더워서 천둥 번개가 칠 것을 예상했을 뿐일세. 고향으로 떠나는 자세 표정을 살펴보니 왠지 분한 마음이 가득해 보였네. 허리춤에 차고 있는 보검이 유독 눈에 들어오더군. 그뿐일세. ”흐느끼는 어깨를 토닥이며 스승은 말을 잇습니다. “자네가 집으로 돌아간 이유를 알고 있네. 집안 일은 핑계였을 뿐, 포목점 손님에게 터무니없는 대답을 한 것에 자네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보았지. 내가 너무 늙고 사리판단이 분명치 않아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 직감했네. 내가 23이 맞다고 하면 그저 관 하나 내주는 것뿐이지만 24가 맞다고 하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하지 않겠나? 관이 중요한지 사람이 중요한지는 어린 아이라도 분별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안회는 큰 절을 올리며 말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대의(大義)를 중시하고 보잘 것없는 작은 시비(是非)를 무시하는 그 도량과 지혜에 감탄할 따름입니다.”이후 안회는 가는 곳마다 스승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유교5성 중 공자 다음 위치에 있습니다. 공자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만 이들 무리가 역사에 끼친 영향은 그 어떤 자본보다 크고 강합니다. 2500년의 세월을 지나 더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지요. 1960년대 하버드 대학의 개혁을 주도했던 내이턴 M. 푸시(Nathan M. Pusey) 총장은 이렇게 외칩니다.“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마음껏 흔들 수 있는 깃발,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노래, 철저히 믿을 수 있는 신조, 목숨을 걸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 젊은이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땀과 눈물을 흘리는 그 누군가가 바로 그대라는 것을 믿습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5

천년 묵은 나무에 숨지 말라

안회(顔回)는 공자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입니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가보니 포목점 앞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3x8이 23전(錢)이라 주장하는 손님과 24전이라 말하는 주인간의 다툼입니다. 안회가 끼어들지만, 손님은 공자에게 가서 따지자며 내기를 걸어오지요. 손님은 내기에 지면 목숨을 내 놓기로 하고, 안회는 본인이 틀릴 리가 없다 생각해 머리에 쓴 관을 내 놓기로 합니다.공자는 이야기를 다 듣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안회야. 네가 졌으니 이 사람에게 관을 벗어 내주거라.”안회는 스승이 늙고 우매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다음 날 안회는 핑계를 대고 고향에 잠시 다녀와도 좋을지 묻습니다. 스승과의 결별을 생각하면서요. “급한 일을 처리하면 곧장 돌아오거라.” 공자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안회에게 건넵니다. 두 문장이 들어 있습니다. 千年古樹莫存身 殺人不明勿動手.안회는 스승의 문장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며 천둥 번개가 치더니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멀리 큰 고목나무를 보며 한 걸음에 달립니다. 몸을 숨긴 안회는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문득 스승의 쪽지가 생각납니다. 주머니에서 문장을 꺼내 읽습니다. 千年古樹莫存身(천년고수막존신) 천년 묵은 나무에 몸을 숨기지 말라.안회는 나무를 빠져나옵니다. 몇 걸음 옮기는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고목나무를 반으로 갈라버립니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안회는 공포에 휩싸이지요. 생전 처음 벼락이 코앞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전율은 스승의 문장입니다. 만약 공자가 써 준 이 문장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요.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걷는 내내 스승의 두 번째 문장이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殺人不明勿動手(살인부명물동수) 명확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살인하지 말라.‘내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안회는 벼락 맞은 충격과 살인에 관한 스승의 경고에 심란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 세상 모두 잠든 깊은 밤입니다. 조용히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요. 침대에는 아내 홀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아내는 딴 사내를 불러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안회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입니다.(내일 편지에 계속)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4

책임대표사원이 이끄는 회사

2018년. 일간지 기자가 구씨의 회사를 찾아갑니다. 68년에 아주머니 두 분과 세운 삼구가 5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묻습니다. “책임대표사원 만나러 오셨지요?” 멀리서 구씨가 달려나와 기자의 손을 맞잡습니다. “아이구. 뭐하러 이런 구멍가게까지 찾아오셨어요!” 구씨가 건네는 명함에도 책임대표사원 여섯 글자가 선명합니다. “수많은 회사를 취재하지만 이런 직함은 낯설어요. 무슨 의미가 있나요?” 구씨가 답하지요. “회사의 모든 것을, 사원들의 잘못까지 책임지겠다는 의미에요. 작은 회사에 회장이란 칭호는 어울리지도 않고요. 직원들은 호칭이 너무 길어 그냥 책임사원! 이라고 부릅니다.”구멍가게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삼구 Inc의 직원은 모두 2만 5천명에 이릅니다. 335개 회사, 1357개 사업장에 직원을 파견하는 아웃소싱 국내 최대업체의 회장입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매출은 1조원을 돌파할 예정입니다.사무실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노요지마력(路遙知馬力)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 명심보감 교우편에 나오는 귀절이에요.” 구자관(74세) 책임대표사원이 설명하지요. “말의 힘을 알려면 먼 길을 가 봐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보려면 오래 사귀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기자가 묻습니다. “자살 직전까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회사를 만드셨습니까?” “사람이지요. 남들이 꺼리는 일을 기꺼이 해 주시는 그분들 덕분입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청소하는 아줌마, 아저씨도 여사님, 선생님이라고 깎듯이 불러요. 모든 직원은 명함을 파 드립니다. 회사 주식의 47%를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제 가족은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이 회사에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임원들도 100% 공채 출신입니다.”눈물겹게 어렵던 시절, 한 달 차비를 아껴 책 한 권씩 사 모으며 고전의 한 문장을 가슴에 새긴 결과입니다. 사무실에 걸린 액자의 명심보감 글귀는 그의 평생을 견인했습니다.언어에는 3가지 힘이 있습니다. 각인력. 견인력. 창조력. 우리에게 스며든 언어가 결국 우리 인생을 이끌고 갈 것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거미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 거미줄로 집을 짓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언어로 존재의 집을 짓는다.” 아름답고 훌륭한 언어의 세계에 풍덩 빠져, 내 인생을 견인할 문장을 만나 전율하는 그대의 하루시기를!/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1

내게 스며드는 것

1940년대 대한민국.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소년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학비를 걷을 때였지요. 소년은 신문팔이, 아이스케키, 메밀묵 장수, 구두닦이, 숯배달 등 온갖 밑바닥 일을 두루 거칩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중학교 졸업장이 필요없는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갑니다. 낮에는 걸레와 빗자루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합니다.공장 주임이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시도 때도 없이 뺨을 때립니다. “없는 놈이 건방지게 공부라니!” 소년은 수업을 마치면 밤늦게 동대문에 있는 학교에서 미아리의 판잣집까지 1시간을 걸어서 하교합니다. 한 달 버스비를 아끼면 500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소년은 한 권, 한 권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셰익스피어. 단테.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명심보감. 논어. 맹자.늦은 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판잣집에 누워 책을 보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졸린 눈 비비며 공부하고, 다시 판잣집에 돌아와 책 읽는 고단한 시간이 흐릅니다.소년은 청년이 되어 야심을 갖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빗자루, 걸레, 솔을 만들어 파는 회사를 차립니다. 맨 주먹으로 시작한 사업이 잘 될리가 없습니다. 폭삭 망합니다. 100만원을 빌리면 매일 2만원을 이자로 내는 달러 빚더미에 올라섭니다. 당시 50만원이면 35평짜리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빈털터리로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청소였습니다. 양동이 하나, 염산, 세제 한 봉지 들고 거리로 나서지요.군대를 다녀온 청년 구씨. 1968년에 아줌마 두 명과 함께 청소 회사를 세웁니다. 매일 밤을 새워 새벽까지 건물을 닦고 또 닦습니다. 60년대 경제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서울에 빌딩들이 하나 둘 생길 때입니다.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지요. 8년 후 법인을 설립할 정도로 자리를 잡습니다.승승장구하던 회사는 삼구라는 이름을 얻은 지 6년 만에 폭삭 망합니다. 청소용 왁스를 직접 만들다 화재가 난 겁니다. 그는 몸에 전신 3도 화상을 입습니다. 공장도 불타 사라지고 빚더미에 다시 올라 앉습니다. 술을 잔뜩 마신 채 자동차를 몰고 잠수교 아래로 돌진합니다. 한강에 뛰어들 생각이었죠. 운명은 얄궂습니다. 운전 미숙으로 잠수교 돌출 기둥을 들이 받는 것으로 자살 시도는 실패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0

위대한 자연이 주는 ‘선물’

캐나다 로키산맥, 그 장엄함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동부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들의 초대로 일주일 동안 강연과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며칠의 여유가 있어 귀국길에는 캐나다 로키산맥을 한 번 구경해 보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알프스를 본 적도, 히말라야를 본 적도 없습니다.네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입니다. 커다란 지도를 사서 출발하기 전에 도로를 충분히 숙지하고 떠나야 합니다. 느릿 느릿, 차창을 다 열고 캐나다의 하늘과 공기, 물소리를 즐기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드라이브를 합니다. 얼마를 갔을까요? 밴프 국립공원까지 100마일 정도 남겨 놓은 어느 지점이었습니다. 커다란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내 평생에 처음 보는 거대한 산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차에서 내려 숨막히는 자연의 위대함을 구석 구석 느껴보려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도 없었던 시절이라 가져간 니콘 필름 카메라로 여기 저기 사진을 찍습니다.숨이 막힌다, 눈부시다, 장엄하다, 압도적이다, 소름 돋는다,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중학교 때 설악산으로 처음 수학여행을 가서 울산바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의 천 배쯤 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밴프로 넘어가는 고개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 그 장엄한 풍광, 압도적인 모습은 제 평생 처음 느껴본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에드윈 마크햄은 말합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더 큰 원을 그리는 것이 지혜로운 관계의 비결입니다. 캐나다 로키의 그 산을 만났을 때, 아마도 제 마음의 원은 지름이 쑥 늘어났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함을 만날 때 그 위대함을 닮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보고 자란 소년이 결국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는 것처럼.자연과 마주할 때보다 더 위대한 만남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제대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정수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 주는 지혜가 내 얼어붙은 삶에 도끼처럼 내리칠 때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우리의 원을 백배, 천배로 크게 넓혀줍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고전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가 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9

마음(heart)을 다 하는 일

다산은 소년에게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 하는데 있다.” 삼근계(三勤械)로 널리 알려진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은 소년은 부지런히 노력해 학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상.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입니다.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떻게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깊고 넓은 성찰과 연구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제대로 동기를 부여 받아 마음을 다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중략)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부자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네 /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관가의 수탈이 극에 달해 죽은 시아버지에게서 세금을 뜯어내는 백골징포, 입가에 젖이 마르지 않은 갓난 아기도 장정으로 취급해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의 실상을 고발하는 시입니다. “이것은 1803년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시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끌어안을 때 터져 나오는 비통함의 눈물이 심장을 적실 때 마음을 다하는 일은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heart)을 다하는 일은 하늘의 천명을 깨달았을 때, 내면에 천둥처럼 울리는 부름을 듣게 되었을 때 싹트기 시작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바꾸지 않을 진짜 나다운 삶을 마주했을 때 불붙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순간적인 호기심에 의해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얄팍한 동기부여로부터 움직여지는 삶이 아닙니다. 집어등의 환한 불빛처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기저기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에 휘둘리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비통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다산의 애절양 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응시할 때 비로소 내 안에 불붙는 마음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8

세가지 문제를 뛰어 넘은 소년

위대한 지혜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왕에게 미움을 받아 긴 유배 생활을 떠납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촌 동네에 틀어박혀 가끔씩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18년 동안 수십명 제자를 길러내지요. 그런데 그가 길러내는 제자들마다 마지막에는 스승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립니다.왜냐구요? 깐깐한 이 스승은 제자들이 쉽게 버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위해 제자들의 뒤를 돌봐주는 일도 없습니다. 심지어 창을 들고 스승의 방에 뛰어들어 욕하고 헐뜯으며 등을 돌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이야기입니다.유배지 전남 강진의 바닷가 마을에 정착, 다산이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까까머리 15세 소년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산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저 같은 아이도 과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네가 어때서 그런 말을 하느냐?”소년은 말합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둔한 것이요, 둘째는 앞 뒤가 꽉 막힌 것이며, 셋째는 분별력이 없어 답답한 것입니다. 이런 제가 과연 문사를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다산은 답합니다.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는데, 들어보니 너에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는데 민첩한 것이요, 둘째는 글짓기에 날렵한 것이요, 셋째는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하지만, 외우는데 민첩한 아이들은 금세 공부가 쉬워 보여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날렵하게 짓는 아이들은 자기 재주만 믿고 글이 가벼이 들 떠 허황한 데로 흐르지. 이해력이 빠른 아이들은 투철하게 알지 못한 고로 그 지식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머리가 둔하다고 했지? 너처럼 머리가 둔한 데도 공부를 파고 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진다. 앞 뒤가 막혔다고 했지? 그러나 그 막힌 것을 한 번 뚫게 되면 그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답답하여 분별력이 없다 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연마하는 사람은 결국 지혜의 빛이 반짝 반짝 빛나게 된다. 그러면,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방법은 무엇일까?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소년이 묻습니다. “스승님. 이 세가지를 부지런히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부지런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다산이 대답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