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 푸르른 보리밭길 / 맑은 하늘에 /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수복 시인은 ‘봄비’에서 비 그친 자연의 짙어가는 푸르름을 ‘서러운 풀빛’으로 묘사하였다. 만물이 잠을 깨는 이른 봄을 지나면 식물들은 활발한 생장을 위해 영양분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물을 요구한다. 이러한 수분 요구의 시기에 내리는 비가 얼마나 반갑고 고맙겠는가.

풀도 나무도 봄비를 온몸에 받아들이면 서러울 정도로 짙고 깊은 풀빛 나무빛을 세상에 뿜어내고, 이에 화답하여 비 그친 하늘을 나는 종달새는 맑게 소리로 봄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그 봄을 흠뻑 만끽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이 비 그치면 /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라며 봄빛같은 젊은이를 시에 끼워 넣었으리라.

4월 20일 어제는 24절기 중의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였다. 한자 뜻 그대로 곡우 무렵에는 봄비가 자주 내려 곡식뿐 아니라 모든 나무와 풀들이 물이 오르고 윤택해진다. 이 때를 기회 삼아 사람들은 나무가 흠뻑 빨아올린 물과 생기를 훔치고자 한다. 나무에 상처를 내어 수액(樹液)을 마시는 풍속이 그것이다. 경상북도에서는 이를 ‘약물마시기’라고 하고, 전라북도에서는 ‘가자수물마시기’, 전라남도에서는 ‘다래물마시기’라고 한다.

봄은 만물이 생동하고 부활하는 때이다. 기독교의 부활절도 봄의 절기이고 그리스 신화 속 포도주와 축제의 신이자 광기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제전 또한 봄에 열렸다. 만물의 생동하는 시기에 다 함께 모여 앞날의 풍년을 기원하며 포도주를 마시고 즐기면서 욕구를 발산하였던 것이다. 이 제전은 평소에는 숨죽여 지냈던 여성들에게도 활짝 열린 축제가 되고 광기까지 허용되었다 하니 지금의 봄 산행, 벚꽃놀이를 뭐라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또 코로나가 문제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봄을 즐기려는 인간의 욕구를 코로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앗아가 버렸다. 하기야 코로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다마는….

절기상 곡우인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 1981년 4월 20일에 장애인의 날이 선포되었으니 올해로 꼭 40년이 되었다. 기록을 찾아보아도 왜 이 날이 장애인의 날이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1981년이 유엔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이었고,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당시 정권의 정당성과 국민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표방한다는 구색 맞추기에 장애인의 날 선포는 나름 시의적절한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 선동)이자 정책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어떠한 탄생 비화를 가지고 있건, 장애인의 날은 오랜 풍속인 곡우만큼이나 우리 시대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아니, 잠재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우리는 육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물오르는 곡우 무렵을 내 속의 장애를 걷어내고 장애로 고통받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보는, 생기 도는 봄날로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