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갑질 논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린(배주현). 일각에선 아이돌 음악 산업의 문제점까지 동시에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갑질 논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린(배주현). 일각에선 아이돌 음악 산업의 문제점까지 동시에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의 멤버인 아이린(배주현)이 한 잡지사 에디터에게 폭언과 삿대질 등 ‘갑질’을 해 화제가 됐다. 갑질을 폭로한 에디터의 SNS 글이 삽시간에 퍼지며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글에 다른 에디터들과 스타일리스트, 백댄서 등 업계 종사자들이 ‘좋아요’를 눌러 공감을 표시했다. “나도 당했다”는 댓글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동안 업계에서 쉬쉬해온 게 이번에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아이린은 사실을 인정하고 “어리석은 태도와 경솔한 언행으로 마음의 상처를 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올렸다. 갑질 피해자인 에디터를 찾아가 직접 사과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린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티브이 화면에서는 청순하고 선한 이미지였는데 실제로는 인성이 나쁘다는 이유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는 실재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상품과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성, 즉 시뮬라시옹의 세계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현대인들은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벤츠를 타고 싶어 하는 것은 주행 성능과 승차감 때문이 아니라 ‘벤츠’라는 이미지를 갖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경기도 안양의 호화 아파트보다 서울 강남의 낡은 아파트에 살고자 한다. 집의 주거환경이라는 실체를 떠나 ‘강남’이라는 이미지가 ‘안양’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이 가상성의 세계에서 대중들은 그동안 ‘아이돌 걸그룹계의 얼굴천재 여신 아이린’이라는 이미지만을 볼 수 있었는데, 어쩌다 이미지 뒤편에 가려진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실망하고 분노했다. 반성하고 또 자숙하고,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면서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한 번 깨진 환상은 복원되기 힘들다.

연예인은 사진 속 인물이다. 사진이 구겨지면 아무리 펴도 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이미지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이린이 다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가상성, 아니 환상성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까?

아이린의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미성숙한 인격 문제가 오직 그녀 개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돌 업계라는 쇼윈도의 왕국에서 ‘걸그룹계 여신’이라는 이미지를 아이린에게 입히기 위해 ‘이미지 메이킹’을 해 온 연예기획사와 방송제작자들에게 따져 묻고 싶다. 아이돌 가수들에게 춤과 노래와 외국어와 예능감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이미지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스캔들에 의한 상품성 파손 주의’는 강조하면서 왜 ‘미성숙한 인격이 초래할 인생 파손 주의’는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화면에 비치는 ‘아이린’의 매력 발산보다 화면 뒤의 인간 ‘배주현’의 내적 성숙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왜 일러주지 않았느냐고.

대부분 아이돌 가수들은 10대 때 기획사에 캐스팅되어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다. 회사 내 숙소에서 엄격한 감시와 통제 아래 마치 군인처럼, 운동부 선수들처럼 합숙 훈련을 받는다. 그때부터 철저히 ‘상품’으로 준비된다. 춤, 노래, 랩, 화술, 패션, 외국어를 배우고, 인터뷰 요령과 스캔들 대처법, 팬서비스 등도 연습한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획사 안에서 보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나 사회보다 연습실이 더 익숙하고, 평범한 또래집단 친구들보다 ‘업계’ 관계자들과의 소통과 교류가 훨씬 잦다. 자아를 탐색하며 사회화 과정으로 나아가야할 청소년기에 아이돌 연습생들은 진짜 자기 대신 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나’, 이미지에 불과한 시뮬라크르 복제품을 자기존재로 받아들인다.

아이린도 그랬을 것이다. 무수한 유리들이 빛을 난반사하는 이미지의 궁전 속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진짜 자신인 줄 알았을 것이다. 기획사도, 방송국도 최고의 상품인 ‘걸그룹계 여신’을 계속 판매하기 위해 금지옥엽 다루듯 했을 게 뻔하다. 행여나 깨질까봐 조심조심, 방송을 앞두고 혹시라도 심기가 불편해보이면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면서. 그러니 매니저도, 코디네이터도, 백댄서도, 스타일리스트도, 에디터도 다 알아서 기었을 테고, 아이린은 그들의 굴종이 자신이 마땅히 누릴 권리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 현장 스태프들 사이에서 ‘인간’ 배주현이 어떤 평판을 얻고 있는지 모르는 채, 화면에 비친 ‘여신’ 아이린에 열광하는 팬들의 사랑이 자신을 대하는 타인들의 공통된 태도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가상 상황이라도 깊이 몰입하면 그것이 실제 상황인 줄 혼동한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나 스탠퍼드대학교 감옥 실험 등이 이를 증명한다. 역할극에 집중하다가 극 속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떤 아이돌 가수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채 ‘진짜 세상’으로 나오는 법을 잊어버린다. 도박, 탈세, 원정 성매매 의혹 등으로 얼룩진 빅뱅의 승리가 그렇다. 마약 투여 혐의를 받은 탑, 지드래곤, 비아이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처럼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연예인들도 있지만, 언론의 자극적 보도와 네티즌들의 악플로 인해 생을 저버린 설리, 구하라 같이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유리로 지은 궁전이 깨졌을 때, 날카로운 조각들이 마음을 찔러 얼마나 아팠을까. 부서진 유리의 성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방법을 정녕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그들을 키워낸 기획사와 방송국의 어른들은 ‘양육’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채 새로운 ‘상품’을 발굴해 대중을 매혹시킬 이미지를 입히는 데만 몰두했을 것이다.

하긴 누가 누구를 훈육하겠는가. 지금 기획사 대표와 임원들 중에는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2000년대 2세대 아이돌 출신들이 많은데, 그들 중 상당수가 과거 부끄러운 사건 및 사고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자들이다. 과거를 청산하고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면 좋으련만 여전히 범죄에 연루되거나 소속 가수와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는 등 그들만의 작은 왕국에 갇혀 철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쪽 업계에는 어째선지 제대로 된 어른이 없다.

방송제작자들도 마찬가지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를 조작해 연습생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다.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영상만 송출해 시청률을 올리고 어린 가수들이 받을 상처는 나 몰라라 한다. 오직 잘 팔리는 이미지만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 없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돌 가수들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기 소속사 대표 성대모사 하는 것 좀 그만 보고 싶다. 그게 자기들한테나 재밌지, 도무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그들이 모사할 만한 모델이라고 해봤자 기껏 소속사 대표인 것이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방송 진행자, 패널들이 웃어주니까 그 웃음이 정말 자신을 향해 지어주는 천사의 미소인 줄 안다. 그토록 순진하다. 하루가 영원인 줄 알고는 부지런히 날갯짓하다 가는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한철 춤추다 이미지가 다 소비되면 진짜 세상으로도, ‘이미지의 왕국’으로도 가지 못한 채 허깨비처럼 과거의 환상 언저리만을 배회한다.

공정함과 평등, 정치적 올바름, 공인의 성숙한 사회인식에 대한 기준이 높은 요즘 젊은 세대가 아이돌 가수의 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음악만 잘한다고, 연기만 잘한다고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팬들이 아이돌의 이미지를 소비하며 내는 비용 안에는 그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리라는 기댓값도 포함되어 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여신’ 아이린이 ‘조현아’와 연관 검색어로 묶일 줄이야. 한 번 망가진 이미지는 회복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녀가 진정성 있는 반성을 거쳐 다시 복귀를 희망할 때, 팬들이 너그러이 받아주는 것 역시 아이돌 음악 산업이라는 고립된 왕국이 현실 세계에서 괴리되지 않게 하는 소중한 노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