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콘 군상.

1506년 1월 14일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포도밭 주인 펠리체 데 프레디스는 땅을 파던 중 화려하게 장식된 궤짝 하나를 발견해 문화재 관리 당국에 알렸다. 이 소식을 보고 받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술가 미켈란젤로를 현장에 급파했다. 궤짝을 열자 그곳에는 대리석 조각의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미켈란젤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예술의 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로 전설처럼 얘기로만 전해지던 고대의 ‘라오콘’ 군상이었기 때문이다.

박학다식했던 고대 로마의 지식인 대(大) 플리니우스(23∼79)는 이 조각 작품을 티투스 황제의 궁전에서 직접 본 적이 있으며 최고의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천년 넘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바로 그 조각 작품의 파편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미켈란젤로의 흥분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사실 로마 포도밭에서 발견된 조각상은 ‘라오콘’군상의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기원전 200년 경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발굴된 대리석 작품은 이를 복제한 것으로 기원전 27년과 기원후 68년 사이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작품에서는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두 아들과 함께 거대한 뱀에 의해 잡아먹히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남성은 고대 그리스의 신관 라오콘으로 조각은 그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라오콘에 관한 이야기는 플리니우스가 쓴 문헌과 베르길리우스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기록돼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비극에서 라오콘의 운명을 다뤘지만 망실되고 말았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라오콘은 신들의 명을 거역하고 결혼을 했고 불경스럽게 제단에서 아이까지 낳으면서 벌을 받았다고 한다.

비록 청동 조각 원본은 아니지만 ‘라오콘’군상의 발굴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고,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미술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와 관련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술사 연구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라오콘’군상은 계몽주의 시대에 활동했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3)에게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미술과 문학을 비롯한 예술 여러 분야의 고유한 특성과 한계를 밝혀냈다. ‘라오콘’ 군상에서 고대 그리스미술의 양식적 특징을 찾아낸 인물은 요한 요이킴 빙켈만(1717∼1768)이다. 1755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에서 ‘라오콘’ 군상을 “미술의 완전한 규범”이라고 묘사하며, 그 안에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양식적 특징으로 발견했다. 빙켈만은 고대 조각 작품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저항하는 라오콘을 보았다. 마주한 고통의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남자의 모든 근육은 긴장돼 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극도의 고통을 절제를 통해 미학적으로 승화한 고대 조각상에 대한 빙켈만의 찬양은 당시 유행했던 장식적이고 현학적인 로코코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포도밭에 묻혀 있던 궤짝 속 조각 파편들은 바티칸으로 옮겨져 복원됐다. 망실된 오른팔은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졌다. 1515년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르네상스 군주 프랑수아 1세는 전리품으로 ‘라오콘’군상을 요구했고 교황 레오10세는 미술가 반디넬리에게 모작을 만들도록 해 이를 프랑스로 보냈다. 몇 세기가 지난 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배상금으로 다시 한 번 ‘라오콘’군상을 요구했다. 1797년 ‘라오콘’ 군상 원작을 전리품으로 챙겨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를 박물관에 전시했다. 조각은 1815년 나폴레옹 패망 이후에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06년 고고학자이자 고미술품 거래상이었던 루드비히 폴락(1868∼1943)이 나무 궤짝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대리석 조각 잔해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1957년 망실되어 미켈란젤로가 대체한 라오콘의 오른팔로 밝혀져 다시 한 번 복원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