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문학촌에 터줏대감이신 전상국 작가를 만나러 간 적 있다. 그때 전상국 선생의 작품을 ‘문학의 오늘’에 싣고자 할 때였다. 참 섬세해 보이시는 전상국 선생께서 당신의 작가 수업 과정을 말씀하시는 중에 조선작이라는 작가가 당신 학창시절인가 사는 데서 만났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조선작을 문학사의 작가로서 인식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이 작가의 대표작은 아직은 설익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뭐니뭐니 해도 ‘영자의 전성시대’일 것이라 생각한다. 1973년에 ‘세대’ 잡지에 실린 것을 1975년에 김호선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서 상당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던 모양이다. 1975년이라면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인데, 선정적이라 여겨지던 영화 포스터를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다시 읽어 보는 ‘영자의 전성시대’는 영화로 된 것과는 스토리가 달라도 아주 다르다. 영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굳이 손을 들어 보자면 확실히 소설 쪽이 작품성이 좋다. 이는 영화감독을 폄하함이 아니라 조선작 소설의 우수성을 말함이다.

여기에는 ‘창수’라는 화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월남전 참전용사로 현 직업은 목욕탕 ‘때밀이’,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세신사’라 한다. 창수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지 돈이 생기면 젊은 욕망을 사창가를 찾아가 몸 파는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때우곤’ 한다. 이 창수의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경험이나 세계인식으로 곧장 환원하는 것은 작품 연구의 기본에서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 두고, 이렇게 해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게,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창녀로 ‘전락한’ 바로 영자다. 나는 지금 ‘전락’이라는 말에도 작은 따옴표를 쳐 놓았는데 함부로 ‘전락’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골에서 상경한 몸으로 식모가 되었다가 버스 차장이 되고 그때 버스에서 떨어져 삼륜차에 치이는 바람에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영자를 위해 창수가 나무 팔을 만들어 주는 장면, 그리고 청량리 588의 화재와 영자의 죽음 같은 극적인 스토리는 두고두고 이 작품을 시대의 문제작으로 만든다. 월남전 참전용사와 시골 상경 여성의 만남과 사랑, 그 비극적 결말은 이 작품이 얼마나 정교한 상징적 의도 아래 쓰여졌는지 말해준다.

조선작은 1940년 대전 출생으로 대전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밖에 이 작가에 대해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앞으로 내가 성장한 대전에서 나온 이 작가에 관해 한 번 이것저것 알아볼 생각이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