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노인은 침수된 박물관이다. 텔레비전 불빛이 둥둥 떠다니는
유물을 탐사등처럼 비춘다.
물속에 사는 지적 생명체는 익사에 관한 연구를 몽상이라고 부를 것이다.
추락사를 꿈꾸는 일에 대해서는
영원이라고 적을 것이다.
일상처럼, 몽상가의 나라에서 수탈해 간 이름이 적힌 빗소리가 한쪽 벽에 창문으로 걸려 있다.
유례없는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의 빗소리는 유례가 될 것이다. 유례가 되어
이야기만 남는 날, 이야기만 남는 꿈, 이야기만 남는
만남과 가끔은 이례적인 어긋남
이야기의 박물관을 위하여
비는 얼굴을 찾는다. 말하는 귀나 듣는 입을 찾아서 빗소리로
한 사람의 몸을 다 채우고
텔레비전 앞에 앉힌다. 영원을 닮은 푸른빛 속으로 끌고 간다.
갑자기 일일 연속극이 생각났다는 듯
노인은 리모컨을 찾지만
시간은 인간에게 준 것이 인생밖에 없어서 잠시 맡겨뒀던
마음을 재빨리 되찾아간다.
―신용목, ‘유례’ 전문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문학과지성사)
이제, 비의 몽타주가 시작된다. 이 세계는 둥둥 떠다니는 유물, 비의 세계이다. “텔레비전 불빛”을 “탐사등”처럼 비추고 소매를 걷어붙인 다음, 비의 역사와 비의 현재와 비의 미래를 세우고, 유례가 될 법한 것들을 죄다 끌어모을 것이다. 비에서 수탈해간 이름을, 비에서 소리를, 비에서 이야기를, 기실은 비에서 얼굴을 찾을 것이다.
“치매 노인은 침수된 박물관”이라고 했다. 지적 생명체는 이 연구를 몽상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이야기의 박물관”을 목표로 삼는다. 이때 익사와 추락사를 꿈꾸는 일은 “영원”으로 기입될 것이다.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 노인의 삶 어느 구간의 이 세계에서 화자는 비로 사람을 만드는 시인과 다름이 아니다. “유례없는 장마” 혹은 “빗소리”는 유례없는 박물관이 될 것이기에.
서둘러 말하자면, 하나의 범주로서 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 명제는 룰루 밀러(Lulu Miller)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의 독해를 불러온다. 말하자면 상실과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독법에 대입해 보자면, 어류의 범주로 묶을 수도 어떤 종으로 등급을 분류할 수도 없는 물고기가 무수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례없이” 수많은 얼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몸을 다 채운 “말하는 귀”“듣는 입” “빗소리”는 이야기의 몸으로써 비로 만든 박물관이 된다.
그간 일곱 권의 시집을 비롯해 다수의 산문과 소설을 출간한 신용목 시인에게 ‘비’는 어쩌면 물속 박물관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에게 비는 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무수한 얼굴들의 표상이며 그것은 현재의 자리에서 별자리를 만드는 정동이다. 요컨대 발터 벤야민의 변증법에 따르면 “과거가 현재를 밝힌다거나 현재가 과거를 밝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하나의 이미지는 ‘예전’이 ‘지금’과 번쩍이며 만나 하나의 성좌를 형성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하여, 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는 알았다가도 모르게 된, 몰랐다가도 알게 된 만남과 “가끔은 이례적인 어긋남”이 가득한 세계이다.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저를 아세요? 들이 넘쳐나는 세계말이다.
“텔레비전은 물속처럼 푸른 빛으로 가득”하고 “노인은 리모컨을 찾지만” 이 세계는, 시간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지적 생명체로 인식되는 우리가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마치 비로 만든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일 테니까. 그렇다 해도, 시인은 비로 사랑을 기억하고, 만드는 자와 다름이 아니다.
“빗소리가 한쪽 벽에 창문으로 걸려 있다”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