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가사문학회 내방가사 발표회 ‘효행가’ 등 세월 속에 묻혀있던 여성 목소리 불러내
초여름의 녹음이 짙어가던 5월 31일, 내방가사문학회(회장 권숙희)는 경북 경산에 자리한 초계정씨 옥곡파 문중의 유서 깊은 공간 삼의정(三宜亭)을 찾아 뜻깊은 내방가사 발표회를 열었다.
감룡문을 지나 삼의정에 들어서는 순간, 정자에 걸린 ‘삼의정’ 현판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문처럼 다가왔으며, 그 안에는 조선시대 선비 문화와 여성 문학의 숨결이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디지털 문명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전통 기록문화의 가치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이날 행사는 내방가사 낭독을 넘어 우리 정신문화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자리였다.
식전 행사로 펼쳐진 오카리나와 에어로폰 연주는 행사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
이어 정원엽 경산근대문화유산보존회장은 경산의 근대문화유산과 내방가사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심도 있는 해설을 들려주었다. 그는 내방가사가 단순한 규방 문학이 아니라 여성들의 삶과 감정, 시대정신이 담긴 생활 기록문학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한글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를 기록하고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우리 기록문화사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이날 소개된 ‘습례국(習禮局)’ 체험은 참석자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정선 이사의 설명 아래 진행된 AI 활용 체험학습은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의 새로운 만남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 깊었다. 습례국은 20세기 초 유학자 탁와(卓窩) 정기연 선생이 고안한 한글 놀이판으로, 제사상 차리는 법과 유교 예절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든 생활 교육 자료이다.
본행사는 권숙희 회장의 작품 풀이 및 해설이 있었다. 초계정씨 경산 옥곡파 문중이 소장한 가사집은 ‘효행가’, ‘백발가’, ‘노부인가’, ‘노부인답가’ 네 편 모두 작자 미상으로 경주 최씨, 최이현의 뛰어난 필체로 필사한 작품이다. 경산지역 방언이 많은 게 특징이며 2022년 11월 세계기록문화유산아시아태평양지역 목록에 등재된 작품이다.
그는 1918년 16세에 정도만(鄭道萬)과 혼인하였으며 유작으로는 세계기록문화유산 아태목록에 등재된 내방가사 ‘사향가’, ‘효행가’ 외 서신 목록을 남겼다. 이차환은 1956년 정장열과 결혼하여 유작으로는 세계기록문화유산 아태목록에 등재된 ‘일여가’를 남겼다. ‘사향가’, ‘효행가’, ‘일여가’ 원본은 국립한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낭독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세월 속에 묻혀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오늘의 공간으로 다시 불러내는 생생한 문화 계승의 현장이었다. 이날 회원들은 각 작품을 나누어 맡아 정성스럽게 낭독을 이어갔다. 가사 중 ‘효행가’는 최옥분·곽남숙·안자숙 회원이, ‘백발가’는 김복숙·심수영 회원이 낭독했다. 이어 ‘노부인가’는 이순오·조애숙 회원, ‘노부인 답가’는 유정자·오인경·김윤숙 회원이 맡았으며, ‘사향가’ 중 ‘사향곡’은 권영숙·이윤지·권숙희 회원이 깊이를 더했다. 또한 ‘계여사’는 최순자·김영옥·허순남 회원, ‘규희가’는 김경옥·이선화·김영이 회원이 각각 맡아 무대를 가득 채웠다.
삼의정 정원에 세워진 탁와 정기연 선생의 시비 또한 이날 행사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였다. ‘문안의사중근살이등박문(聞安義士重根殺伊藤博文)’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지은 한시로, 나라를 잃어가던 시대 지식인의 비분강개와 민족정신을 담고 있다. 문화와 문학은 단지 아름다운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시대의 정의를 지키고 민족의 혼을 이어가는 정신의 기록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어 일행은 성암칠절비와 우경제를 둘러본 뒤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제석사를 찾아 경산이 배출한 원효, 설총, 일연의 정신세계를 되새겼다.
이는 단순한 답사를 넘어 우리 역사와 사상의 뿌리를 체험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문화유산은 오래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지키는 권숙희 회장을 중심으로 한 내방가사문학회의 활동은 매우 뜻깊다.
이들의 노력은 단순한 문학 활동을 넘어, 사라져가는 여성 기록문화를 되살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문화적 사명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후세에 전하려는 사람들의 헌신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김윤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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