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시각장애인 유권자가 마주한 참정권의 높은 문턱
“교육감 투표용지입니다”, “경북도지사 투표용지입니다”
지방선거 당일인 3일 오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제2투표소 기표소 천막 안에서 투표관리관의 안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저히 비밀이 보장돼야 할 독립된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시각장애인 유권자 김영희 씨(78)와 그의 양팔을 붙잡은 투표소 직원 두 명이 함께 서 있었다.
김 씨의 투표길은 이날 오전 8시 30분 시작됐다. 권현숙·정미분 이동편의지원사가 포항시시각장애인생활지원센터에서 차량으로 출발해 오천읍 김 씨 자택으로 이동했고 집을 나선 김 씨는 김정희 장애인활동지원사와 함께 차량에 탑승해 투표소로 향했다.
투표소에 도착해 신분증을 확인하고 지장을 찍었으나 행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시각장애인용 점자 투표용지가 사전에 구비돼 있지 않아 투표관리관이 현장에서 부랴부랴 투표용지를 준비하는 소란을 겪은 뒤에야 기표소로 향할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기표소 장막을 들추는 순간부터 발생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은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투표소 측은 평소 김 씨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활동지원사의 동행을 제한했다. 대신 직원 두 명이 김 씨의 양팔을 붙잡고 기표소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헌법상 보장돼야 할 비밀투표의 권리는 완전히 무너졌다.
김 씨가 숫자 점자를 읽는 과정에서 낯선 직원들과 몇 번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 소리를 내어 서로 묻고 답하는 상황이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김 씨는 낯선 이들의 손길과 목소리에 의지해 간신히 투표를 마쳤다.
투표소를 나온 김 씨는 “포항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에 참여했다”면서도 “나를 잘 아는 활동지원사가 함께 들어갔다면 수월했을 텐데 낯선 사람들과 내 투표 내용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며 투표를 하려니 내 상태를 전혀 몰라 서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움을 쏟아냈다.
포항시남구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공정한 선거를 하려는 취지였으나 현장에서 장애인 투표 보조 규정 안내가 잘못됐음을 인정한다”고 해명했다.
보건복지부 장애인 등록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등록 장애인은 약 260만 명이며 이 가운데 선거권이 없는 미성년자를 제외한 장애인 유권자는 250만여 명에 달한다. 하지만 투표소 현장에서는 여전히 이들의 참정권을 온전히 보장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황장환 경북시각장애인연합회 포항지회장은 “현장 요원들의 보조 절차 숙지가 미숙해 혼선이 잦고 뒷사람이 기표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등 비밀투표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환경”이라며 “선거 행정 전반의 디테일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