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영화
명절에 친척이 모여 조카나 손자에게 덕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질문을 한다. SNS에 인기 있는 잔소리 메뉴판이 있어 살펴보니 재밌다. 공부는 하니? 라고 물으면 5만 원, 담배는 언제 끊냐는 15만 원, 취업은 했냐고 물으려면 35만 원, 결혼은 언제 하니 40만 원, 여자가 이래서야 되겠니? 라고 잔소리하려면 10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줘야 한다니, 이번 설에는 잔소리는 줄이는 게 좋겠다. 왜 그런 불필요한 질문을 하느냐고 하니,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다고 했다. 잔소리 말고 서로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로 말문을 터보는 게 어떨까?
△'만약에 우리'(김도영 감독)
가장 초라했던 그때, 가장 눈부시던 우리, 영화의 시작은 비행기 안, 비즈니스석에 짐을 머리 위 선반에 올리려는 남자 주인공, 그 옆을 지나 이코노미석으로 가는 여주인공이 스친다. 흘깃 봐도 첫사랑은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자리에 앉은 둘은 서로 돌아보며 확인하고 웃는다.
영화를 본 사람들 후기가 손수건이 필요하다, 남편이나 남친과 보지 말아라, 첫사랑 생각나서 펑펑 울게 될 테니까 였다. 이상순의 라디오에 두 주인공이 나와서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 주인공 문가영의 선곡이 마음에 들어서('종로에서'/미유, 무슨 노래인가 했는데 첫 소절에서 아는 노래였다.) 영화를 보러 가야지하고 지인에게 전화하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들 만류하던 남편과 낮 2시에 영화관에 갔다. 낮이라 사람이 없겠지 했는데 연인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개봉하고 벌써 200만이 넘었다니.
고향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탄 은호(구교환)와 휴학 후 어디론가 떠날 결심을 한 정원(문가영),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은 뜻밖의 인연을 맺는다. 수줍어서 말도 못하는 은호에게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원은 함께 은호네 가게로 향한다. 정원은 돌아갈 집이 없는 여자,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의지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절친으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까지 오래 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둘이 인연이 끊겼다가 10년이 지난 후, 다시 마주한 순간 은호는 정원에게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한마디를 꺼낸다. ‘만약에 우리’ 원작 제목은 ‘먼 훗날 우리’이며, 중국 영화로, 2018년 4월 28일 개봉했고 주연은 정백연과 주동우이다. 두 남녀가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재회해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10년 전 춘절,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고, 한국판은 고속버스 귀경길 등 한국적 정서를 반영해 재해석했다. 한국 리메이크와의 차이는 한국판은 원작의 쓸쓸함보다 따뜻하고 몽글한 감성을 더했다는 평가다.
△'귀여운 여인'(게리 마샬 감독)
동탁의 손녀, 김유정, 선운사, 라 트라비아타, 귀여운 여인, 다섯 개의 힌트에서 떠오르는 낱말은 무엇일까? 정답은 동백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아가씨(La Dame aux Camlias)’를 원작으로 여주인공이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다녀 ‘동백꽃 여인’으로 불린다. 오페라 제목 ‘라 트라비아타’는 ‘바른길을 벗어난 여자’라는 뜻으로 매춘부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일본에서는 ‘춘희(椿姬)’로 번역해서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알려졌다. 귀여운 여인은 대놓고 ‘라 트라비아타’ 스토리를 따라 했고, 심지어 영화 속에 리차드 기어가 줄리아 로버츠를 데리고 이 오페라를 보러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다.
‘귀여운 여인’은 모든 걸 계획하는 남자 에드워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여자 비비안의 러브스토리다. 에드워드는 대단한 부자이다. 에드워드는 딴 여자 생겨 위자료 한 푼도 안 주고 엄마와 이혼해 버린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 회사를 사들여 조각 내 팔아버린다.
비비안은 빨강 머리 가발을 쓰고 일을 한다. 빨강 머리, 주근깨는 자주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를 나타낸다. 예수를 판 유다가 빨간 머리였다는 속설도 있다. 종교재판에서 빨간 머리는 마녀 화형당하기도 했다. 그와 다르게 금발은 성적 매력 신분을 상징(태양, 황금, 정숙)한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어릴 적부터 좋아한 게임이 벽돌쌓기였다. 무엇을 정성스럽게 쌓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로 나오는 변호사는 부루마블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어 아직도 팔리는 스테디셀러 게임이다. 이 게임은 도시를 사고파는 게 특징이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 인용문이 나오고, 에드워드와 비비안이 풀밭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 손에 든 책도 셰익스피어 책이다. 그들이 묵는 펜트하우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느낌이 난다. 비비안이 룸메이트 친구와 대화에서 에드워드와의 이런 관계로 잘 된 케이스가 있나 하고 할 때 신데렐라라고 대답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에드워드가 왕자처럼 흰말이 아니라 하얀 리무진을 타고 우산을 검처럼 들고 비비안 공주를 구하러 온다. 해피엔딩으로 영화와 동화는 끝나지만 과연 신분의 격차가 심한 신데렐라와 비비안은 결혼 후 행복했을까?
△'페르시아어 수업'(바딤 피얼먼 감독)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단편소설 ‘언어의 발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던 잔인한 시대적 배경, 죽음 직전에 샌드위치 반 조각과 바꾼 페르시아어 책 한 권이 주인공을 살린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말하며 책을 내민 덕에 죽음은 면했으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그가 매일 언어를 창조해야 하는 묵직한 짐이 억누른다.
하루 4개의 낱말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 날이 쌓일수록 늘어난 언어를 기억해야 하고 또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어느 날 그 중압감에 포기하고 도망치려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정리하던 수용자들의 장부를 보며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름의 한 부분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고 뜻은 이름 주인들의 특징을 연상하여 정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의 이름에는 ‘인내심’을,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이름은 ‘희망’이라는 말로 번역하니 외우기도 쉽다. 많은 수용자의 수만큼 끊임없이 가짜 페르시아어가 만들어졌다. 아울러 유대인 질은 뼛속까지 페르시아인 레자로 바뀌어 간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자신이 만든 페르시아어로 잠꼬대하는 장면은 사람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무의식까지 지배하는구나 싶어 감동과 서글픔이 교차한다.
완전히 묻혀버렸을 유대인 희생자 2840명의 이름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불리워진다. 조사하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주인공에게로 몰려온다.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 인형의 이름 비바는 이탈리아어로 만세라고 한다. 우리나라 3·1절이 생각난다.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던 일본군의 광기가 독일군과 다르지 않다. 낱말 2840개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2840명의 사람이면 세상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김순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