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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으로 살아가는 시대의 초상··· 연극 ‘그들의 기억법’

등록일 2025-12-11 15:22 게재일 2025-12-1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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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들의 기억법’ 출연자들. 

 

 

지난 12월 5일 밤, 오랜만에 공연 관람을 했다. 장소는 대구봉산문화회관. 3일부터 무대에 오른 극단 나무태랑의 포럼연극 ‘그들의 기억법’이었다. 갑작스레 지인의 연락을 받고 동행한 자리였지만, 불을 밝히는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객석 앞줄, 정확히 무대 한가운데와 마주한 자리였다. 솔직히 말하면, “혹여 공연 중 무대 위로 이끌려 가는 건 아닐까?”라는 우스운 상상을 했다. 하지만 막이 오른 뒤, 우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대 위 인물들과 숨소리, 눈빛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왔고, 그 긴장감은 첫 장면부터 끝까지 이어졌다.

연극은 병실 장면으로 시작된다. 엄마가 퇴원하고, 딸은 그 소식을 SNS에 올린다. 화면 너머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삶은 단순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로 할머니 손에 외롭고 사랑 없이 자란 딸. 그 딸은 성장 후 성공했고, 이후에는 엄마가 자신에게 의탁해 생활했다. 딸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원망을 엄마에게 마구 퍼붓는다. 하지만 엄마를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행동들이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펼쳐진 장면들 속에서, 극은 놀라운 반전을 연이어 드러낸다. 엄마가 술집에 나가 딸을 돌봤다는 과거. 그리고 엄마가 아니라 딸이 알츠하이머 환자였다는 사실. 더 충격적인 건, 딸이 말했던 직업, 남자친구, 삶으로 포장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딸은 엄마에 대한 원망과 상실감, 그리고 결핍을 스스로 지어낸 허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지만, 딸을 지켜주기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딸은 SNS에 이렇게 쓴다. “엄마가 자살했다. 나에게 더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엄마.” 그 글 아래로 ‘좋아요’ 수치는 점점 가파르게 치솟고, 딸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린다. 무대가 끝난 뒤에도, 그 웃음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 연극은 단순히 가족 드라마를 넘어, 이 시대의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잘 보이지 않는 외로움, 채워지지 않는 사랑,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며 쌓아 올린 허상. 어떤 이들은 허구를 진실로 믿고, 그 속에서 자기를 잃는다. 공연 중 관객 참여도 있었다. 객석의 누군가가 무대 위로 불려 나가는 장면에서, 나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 후기를 나누는 시간에는 나도 손들어 두서없는 말을 보탰다. 그만큼 반전에 반전을 더한 연극의 설정이 강렬하게 머리에 박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요즘 나도-그리고 내 주변도-얼마나 SNS에 매몰되어 있는지 생각했다. ‘좋아요’라는 숫자, 타인의 시선,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마치 존재의 증명인 양, 사람들을 허상의 세계로 몰아넣고 있다.

‘그들의 기억법’은 무대 위에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그 속에 숨은 진실과 고통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누구나 한 번쯤 가졌을 가족, 사랑, 상처 ‘그 보이지 않는 흔적’들이 무대 위에서,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공연이 끝난 후 열린 관객과의 포럼도 인상 깊었다. 무대 위에서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객석에서, 그리고 관람 후의 대화 속에서 복기 되고 공유되었다.

때로는, 이렇게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 연극 한 편, 전시 한 차례를 경험하는 일이 필요하다.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추어, 나의 상처와 기억을 마주하고, 누군가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오늘의 무대가 내게 준 건, 단순한 감동을 넘어 깊은 사유의 시간이었다.

/손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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