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건이 내린 이름으로 알려져 먗번의 이름이 바뀌고 조선 태종때부터 지금의 경주로
신라의 수도 경주는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개최를 계기로 한 번 더 세계적인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돼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상고시대 신라는 진한 12국 중 사로국이라 하였다. BC 57년 신라를 건국한 이후 992년간 56 왕조를 이어오면서 나라를 서라벌 또는 계림으로 불렀다. 진한 땅에는 예로부터 여섯 마을 육부촌(六部村)이 있었다. 촌장은 모두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는데, 제3대 노례왕이 즉위한 9년(132)에 육부촌의 명칭을 부(部)로 고치면서 여섯 촌장에게 월성을 본관으로 하여 각기 다른 성(姓)을 내린다.
예컨대, 알천 양산촌의 촌장은 알평이라고 했는데, 알천 양산촌을 급량부로 고치고 촌장 알평에게 내린 성이 월성 이씨다. 표암봉에는 박(瓢) 바위가 있고 알천 탄강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게다가 광석대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평을 목욕시킨 자리라며 바위로 만든 욕조가 있다. 그럴듯하게 만들었는지 그럴듯한 이야기인지 어쨌든 그 유적이 유존한다.
신라의 역사가 56 왕대에 이르는 문화유적은 불교 유적이 대세를 이룬다.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공인하고 최초로 흥륜사를 세우면서 번성한 까닭이다. 제23대 법흥왕 14년에 터를 닦고 동 왕 22년에 천경(天鏡) 숲을 베고 공사를 시작한 흥륜사는 서까래와 들보에 쓸 나무는 모두 이 숲에서 취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 왕경을 습격하여 신라 제55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한 뒤 국보와 재물 등을 약탈하였다. 그리고는 왕의 이종 사촌 동생 김부(金傅)를 제56대 경순왕으로 세우고 물러갔다.
하지만 경순왕은 왕위에 오르고도 불행하게도 신라에선 마지막 왕이 되었다.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지방호족들의 할거로 나라 기능은 마비돼가고 민심이 고려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자 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를 고려에 귀부하기로 뜻을 밝히자 신하들과 큰아들 일(鎰)의 반대가 있었으나 이를 무릅쓰고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歸附)한 경순왕은 유화궁을 하사받고, 개경에 있으면서 경주를 식읍으로 하여 고향의 일에 관여하는 벼슬인 사심관으로 임명받았다. 지금의 경주라는 지명은 곧 고려 왕건이 처음 내린 지명이다.
개경에서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자녀 여럿을 두었다. 하지만 늘 고향 경주를 잊지 못해 그리워한 나머지 허약해지자 끝내 병을 얻어 귀부한 지 43년 후인 978년에 일생을 마감했다.
경주는 그 뒤로 승격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다가 성종 때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하게 되었다. 현종 때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고, 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다시 동경유수로 하였다. 뒤에 동경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주도·청주도·충주도·원주도에 격문을 전하고 낮추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하였으며, 관내의 주(州)·부(府)·군(郡)·현(縣)을 흡수시켜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 때 다시 유수로 고치고, 충렬왕 때 계림부로 고쳤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조에 이르러 경주라는 옛 지명을 다시 쓰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로써 신라는 경주·동경·안동·지경·계림 등 왕경이던 지명을 번갈아 쓰게 되었다.
이번 APEC 회의 개최를 계기로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찾은 경주, 그렇잖아도 이미 많은 세계인들이 찾은 그 경주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를 보며 다시 한번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길 기대한다.
/권영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