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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맛에 대하여

등록일 2025-09-08 17:04 게재일 2025-09-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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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학 변호사

순수한 물(H2O)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맛이 없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물은 다양한 무기질과 철 망간 등의 미량 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맛이 달라진다. 여기에 물의 온도, 지역, 마실 때의 상황에 따라 물의 맛이 더 다양해진다. 오래전 어떤 드라마 장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맛을 아느냐’라고 물었던 장면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물맛이 그 맛이지 따로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지배했던 30대쯤이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서 시골 산자락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원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정원에서 하루가 마감된다.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노동량이다. 전원생활의 절반은 풀과의 전쟁이다. 깨끗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풀을 뽑아야 한다. 잔디를 깎는 것도 사실은 풀을 뽑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꽃과 나뭇가지들도 적당하게 정리하여 주지 않으면 금방 볼썽사나워진다. 마당은 나의 헬스클럽인 셈이다. 시골에 집을 지을 때 뒤뜰 황토방을 지어주신 어르신께서, ‘공 변호사는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겠구먼’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던 한마디가 아직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마당 일을 마치고 생수병을 들이킬 때면 문득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운동이나 육체노동 이후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몸에서 열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노동 후에는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름의 마당 일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생수 몇 통을 들이킨 적도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갈증 날 때 마시는 시원한 물이었지 싶다. 같은 이유로 밥맛은 배고플 때가 최고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 뜻이리라.

현대는 물맛과 밥맛을 잊은 시대이다.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갈증 나기 전에 물을 섭취하여야 하며, 위장에 부담을 주는 폭식을 피하기 위해 때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신다. 갈증 나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니 최고의 맛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밥상의 요리도 웬만해서는 맛나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시원한 물맛은 필요와 충족, 결핍과 해소의 원초적인 합일이다. 갈증이라는 결핍이 땀 흘린 노동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물은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다.

바야흐로 땀을 흘리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벌써 왔을지 모른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물맛까지 빼앗고 있지 않은가. “노동은 최고의 사랑.” 노동으로 흘린 땀방울이 일으킨 갈증을 추구하자. 최고의 물맛을 즐기고 싶은가, 그러면 갈증을 일으켜 보라. 최고의 식사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굶어 보라. 땀을 흘리지 않고 시원한 물맛을 기대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갈증이 나질 않고,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자. 최고의 물맛을 보기 위하여 시원한 생수 한 통 들고 운동장으로!!

/공봉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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