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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남

등록일 2025-09-01 18:20 게재일 2025-09-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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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학 변호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구절인가. 듣는 순간 따뜻한 사랑이 엄습해 온다. 이웃이 정겨워진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나와 이웃은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사이인 것 같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자. 내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의 이웃사랑이 진정한 헌신인지, 아니면 자기 위안 인지를. 이웃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숨겨진 동기와 욕망은 따로 있지나 않은지.

우리는 수시로 이웃(지인)을 찾는다. 우리가 이웃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서? 이웃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어쩌면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여 이웃에게 달려갈지 모른다. 고독이란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자기애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서 그 이웃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잘못을 핑계 삼아 나 자신을 합리화한다.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웃에게 나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웃사랑은 위장된 자기애일지 모른다. 자기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타인과 관계 맺고, 관계를 꾸며댄다. 이때의 이웃사랑은 진정한 베품이 아니라, 자기 결핍이다. 오늘도 우리들은 고독과 권태, 자기 상실감에 떠밀려 이웃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나를 속이고, 이웃을 속이지는 않은지. 진정한 이웃사랑은, 이웃의 인정이나 위로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견디고 그 힘으로 타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이웃을 내 결핍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가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나의 고독을 견딜 줄 알고 타인의 고독을 존중할 때, 비로소 이웃사랑은 실천된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인을 얽어매고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장치일지 모른다. 좋은 말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이웃사랑은 도덕적 미사여구로 소모된다, SNS의 ‘구독’과 ‘좋아요’처럼. 형식적 기부,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은 타인 속에서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이자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인을 끌어들이는 교묘한 위장 전술이다. 이런 것들이 이웃사랑이라면, 나는 이웃사랑을 거부한다.

이웃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이웃과 통화를 하고, 이웃의 SNS에 좋아요 누른다. 커피숍을 나설 때, 전화를 끊을 때, 좋아요를 누른 후에도 나의 이웃사랑은 그대로 인지 궁금하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라는 공자의 한마디가 이웃사랑의 시작일지 모른다. 이웃을 통해 나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없다. 말 안해도 다 안다. 나도 알고, 이웃도 안다. 내가. 그대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공봉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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