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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로터리 한켠에 버티고 선 500년 노거수

등록일 2025-08-17 19:21 게재일 2025-08-1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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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흥망과 도시의 변화
모두 견뎌낸 대구 역사의 산증인
세 번의 이사에도 활력 잃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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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범어로터리 그랜드호텔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옛말에 “나무는 천 년을 살고, 사람은 백 년을 산다” 했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주목나무 같은 장수목은 여름이면 그늘을 내어주고, 비 오면 품을 벌려 사람을 안아준다. 마을의 당산목은 액운을 막고,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품은 산 기록이다.

대구 수성구 범어로터리 한복판, 그랜드호텔 부근에는 500년 넘게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조선 세조 14년(1468) 수성 들판 상동 마을에 심겨, 왕조의 흥망과 도시의 변화를 모두 견뎌왔다.

“내 뿌리가 뽑히면, 사람 마음도 뽑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대구를 휩쓸던 날, 연기와 비명 속에서도 이 나무는 잎 하나 떨지 않았다. 마치 “내 뿌리가 뽑히면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뽑히리라”는 기세였다.

일제강점기의 굴욕과 6·25 전쟁의 참상을 견디고, 2·28 민주운동과 5·16 군사정변까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보통 나무는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사는데, 이 나무는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 옛 속담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 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은행나무 팔자 뒤웅박 팔자’였다.

△첫 번째 이사

1972년 대구 직할시 보호수 18호로 지정되며 안심하는 듯 했으나, 1981년 도로 확장 공사가 닥쳤다. “베어야 한다”는 소문에 마을 어르신들은 지팡이를 짚고 시청 앞으로 갔고, 아이들은 나무를 껴안고 울었다. “이 나무는 우리 마을의 기둥이요. 베면 안 됩니다!”

그 간절함이 전해져, 나무는 200미터 떨어진 정화여고 교정으로 옮겨졌다.

△두 번째 이사

정화여고에서 10년을 보내며 여고생들의 웃음과 수다를 벗 삼았다. 봄이면 연둣빛 잎으로 “시험 잘 보거라, 떨어져도 인생 끝은 아니다” 격려했고, 가을이면 노란 잎을 흩날리며 “청춘아, 너무 서두르지 마라” 부드럽게 타일렀다.

△세 번째 이사 

1990년대 말, 정화여고 이전과 아파트 건설이 겹쳤다. ‘그냥 없애자’는 말이 돌자, 지역 유지들이 ‘은행나무 보존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나무는 대구 사람들의 역사요, 숨결이요, 그림자요!”라는 절절한 호소 끝에, 2001년 4월 1일 범어로터리로 이사했다.

이삿날, 크레인에 매달린 나무를 보며 사람들은 ‘이제 끝이구나’ 했지만, 이듬해 봄 싱싱한 잎을 피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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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고거수 앞에 보호수 지정을 알리는 비문이 서 있다.

“나 아직 살아 있소. 내 뿌리는 세월보다 깊소.”

△시대와 함께 숨 쉬는 나무

이 나무는 단순히 오래 산 나무가 아니다. 대구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한 ‘살아 있는 문화재’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시민들의 “대~한민국!” 함성에 황금빛 잎사귀를 흔들며 응원하는 듯했다. 밤이면 연인들의 속삭임을 들었고, 이별의 눈물엔 바람 한 줄기 내어주었다.

△황금빛 비 내리는 가을

가을이면 노란 잎이 거리를 환하게 물들이고, 바람이 불면 황금빛 비가 내린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속 시계를 잠시 늦춘다. “나도 이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오래 살자”는 다짐이 절로 나온다.

오늘도 서 있는 대구의 산증인, 이제는 대구를 지키는 수호목이다. 

/방종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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