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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사랑한 이들

등록일 2025-08-12 18:09 게재일 2025-08-1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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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은 동짓날 매화 81송이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하나씩 색칠
마침내 81개가 모두 칠해진 날 창문 활짝 열고 진짜 매화에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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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간송미술관 2전시실에 홀로 있는 매화서옥 그림이다.

조희룡 ‘매화서옥(梅花書屋)’​을 보았다. 대구 간송미술관 2전시실에 오롯이 홀로 자리한 그림이다. 전시실 입구에는 매화 한 송이가 하얀 꽃병에 꽂혔다. 선비의 서재를 몰래 들어가는 느낌이다. 매화 숲속의 서재라는 뜻의 그림을 만나러 들어갔다. 벽에 매화 한 그루가 가지가 생기고 꽃잎이 피어나 나무가 환해지는 순간이 천천히 그려진다. 영상을 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매화서옥’ 진품이 우릴 맞는다. 천천히 다가가 매화향에 스며들게 만든다.

그림 속 조희룡이 어떤 향기를 맡고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봄이면 경주 통일전에 매화를 보러 찾아간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문을 열면 매화향이 마중을 나와 있다. 아직 꽃은 보이지도 않는데 향기로 어서 오라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통일전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연못이 있고, 하얗게 꽃구름이 뭉싯한 매화가 한 그루 보인다. 그림에는 선비의 집 주위로 하얗게 둘러쌌으니 그 향이 숲 가득할 것이다.

매화서옥, 가파른 산기슭 아래 나지막이 자리한 서옥과 그 주변을 감싸는 매화, 그중 한 가지를 병에 꽂아 바라보는 모습이 화폭에 담겼다. 짧은 순간 피고 지는 꽃이 아쉬워 화폭에 담아두었을 매화, 화가는 매화를 좋아하는 병이 있어 스스로 매화 큰 병풍을 그려 자는 방에 이를 둘러놓고 벼루는 매화시경연을 쓰며, 먹은 매화서옥장연을 썼다. 바야흐로 매화백영을 본떠 시를 짓고, 시가 이루어지면 방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걸어 자신이 매화 좋아하는 뜻을 통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금방 이루어지지 않아 억지로 읊다가 목이 말라 매화편차로 목을 축이었다.

매일 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다가 입추에 접어드니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며칠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고 잠자리에 들었다. 용케도 알고 귀뚜라미가 창가에 와서 날개를 비빈다. 옛사람들이 만든 절기가 어쩜 이리 딱 맞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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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간송미술관 2전시실 입구. 

여름휴가에 24절기에 관한 책 ‘제철행복’을 읽었다.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24계절로 나눠 살았던 현명함에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절기마다 먹는 음식이 따로 있고, 절기마다 피는 꽃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즐기는지 알게 되었다. 12월에 있어 맨 끝의 절기인가 했더니 조선시대는 동지가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다. 궁궐에서는 천문과 지리를 담당하던 기관 ‘관상감’에서 새해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렸다. 책 형태로 만들어진 달력이라 하여 ‘동지책력’이라 불렀다. 신하들에게 절기가 적힌 달력을 선물로 내리면 신하들은 그것을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눠 삶의 지표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는 30만 부나 찍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선물이었다.

24절기 중에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조상들이 팥죽을 먹고 봄을 기다리며 즐긴 풍류가 놀라웠다. ‘구구소한도’라는 풍속인데 양수 9를 길하게 여긴 조상들은 동짓날로부터 아흐레가 아홉 번 반복된 날, 즉 81일째 되는 날에 봄이 온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짓날에 흰 종이에 매화 81송이를 그려 창문이나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하나씩 색칠해 나갔다. 흐린 날엔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은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했다. 마침내 81개가 모두 칠해진 날 창문을 활짝 열고 진짜 매화를 바라보았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낭만적인지, 올해 동지에는 친구들에게 구구소한도를 나누며 색칠 놀이를 권하고 싶다. 81일 동안 색칠하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 모임을 만들어야겠다. 더운 여름을 잊게 하는 옛 어른들에게 배우는 피서법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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