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나 조선처럼 왕이 통치하던 때가 시대적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가끔 본다. 전제 군주제에서의 왕은 지금의 대통령과는 위상이 달랐다. 선거가 아닌 혈통을 이어 최고 권력자가 된 왕은 그 자체가 곧 국가였으니.
왕의 뜻에 반한다거나 칙령을 거부하며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반드시 ‘바른 말’을 하며 왕에게 저항하는 신하가 한둘은 있기 마련. 대체로 보아 그런 자가 충신인 경우가 흔하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왕은 세상 모든 걸 다 알고, 인간사 전체를 매번 합리적으로 꿰뚫는 존재가 아니다. 그도 때론 실수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이성이 아닌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왕에겐 간언(諫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신하가 필요한 법.
현대사회로의 변화는 지난날 왕이 가졌던 힘의 대부분을 대통령이나 내각책임제의 총리에게 이양시켰다. 대통령 역시 왕처럼 실수와 오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 오판과 실수를 재고하거나 고치라고 충언할 수 있는 장관과 차관이 필요하다.
최근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전 국방장관 김용현과 전 행안부장관 이상민은 구속됐고, 또 다른 전 국방장관 이종섭은 ‘호주로 도망친 사람’이란 오명 속에 있다. 전 법무장관 박성재와 전 외교장관 조태열 역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딱한 처지다.
그들의 오늘이 이 지경인 건 권력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기만 했을 뿐, 한 번도 간언하지 않았던 게 이유가 아닐지.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용기가 없다면 장관직은 사양했어야 옳다. 허니, 장관들의 수난시대는 자업자득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