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학자 회재 이언적 배향한 곳으로 선조 임금 사액 받은 유서 깊은 교육기관 미니폭포 아래서는 다이빙 즐길 수 있고 얕은 물 흐르는 바위는 아이들의 놀이터
문을 열고나서면 곧장 마주하게 되는 불볕더위. ‘연일 무더위 지속 중’이라는 안전안내문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고 사람들은 시원한 곳을 찾아 바다로 계곡으로 서둘러 피서를 떠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나는 여름 한낮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열대지방 사람들이 느긋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여름휴가라며 아들 품에 안긴 손자들이 온다. 영일대 해수욕장은 지난 산불피해 이후 폭우로 떠내려 온 나무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고, 포항 형산강 야외물놀이장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공간이긴 하나 그늘막이 있다지만 감당해야 할 볕이 너무 강하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 가까이 경주 옥산서원 계곡으로 향한다. 이곳은 손자를 안고 온 아들이 어릴 적 자주 찾았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안강 들녘을 지나 옥산서원으로 향하는 길. 내리쬐는 불볕더위를 온몸으로 즐기는 벼들이 들녘을 녹색으로 빼꼭히 채우며 넘실거린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그 풍경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시원하다.
옥산서원 계곡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실린 요란한 매미 소리조차 정겹다. 비 온 뒤라서인지 미니폭포 아래는 청장년들이 다이빙을 즐길 정도로 물이 깊고, 바위 위를 흐르는 얕은 물줄기는 볕에 데워져 아기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인 따뜻한 물놀이 공간이 절로 마련된다.
이 곳은 단순한 피서지를 넘어 선비의 정신이 깃든, 조선 중기 대학자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곳으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옥산서원 편액 ‘玉山書院’은 추사 김정희 글씨다. 유홍준 교수는 이를 “솜으로 감싼 쇠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이라 평한다. 석봉 한호가 쓴 ‘無邊樓(무변루)’와 ‘求仁堂(구인당)’ 외에도 당대 명필들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뒤편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를 위해 지은 곳이다. 그의 철학과 삶의 자세가 오롯이 담긴 이 공간에 그를 찾아 이곳을 다녀간 퇴계 선생의 기운도 서려있다.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옥산서원은 독락당,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독락당에 얽힌 이야기. 회재 선생의 서자였던 잠계 이전인(유일 혈손)은 부친의 유배지를 찾아가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학문을 계승한다. 유배지 평안도 강계에서 돌아가시자 엄동설한 혹한 속 대나무로 만든 운구죽을 지고 그 먼 길을 걸어 홀로 고향으로 시신을 운구한다. 사후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친의 복권(復權)도 이룬다.
그가 간직해온 부친의 유품들과 운구 죽은 험난한 세월에도 대를 이어 목숨처럼 지켜져 오늘날 옥산서원 유물관에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지만 적서(嫡庶)의 차별에 의해 회재 선생의 종택 무첨당은 양자의 후손인 17대 종손이, 옥산서원 독락당은 잠계공의 후손 종손이 각각 지키고 있다. 계보와 정신의 흐름까지도 살아있는 곳이다.
‘자옥산 깊은 곳에 초려 한 칸 지어두고// 반칸은 청풍주고 반칸은 명월주니// 청산은 들일 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회재 선생은 독락당에서 ‘靑山曲(청산곡)’을 지어 읊으며 그야말로 자연을 그대로 품었다. 선비가 풍류를 즐기던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한여름의 하루. 단순한 피서를 넘어 마음의 여백까지 마련한다.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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