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입술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말을 삼키려는 듯 꼭 다물어져 있다. 그리고는 손에 든 휴지를 눈가로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녀는 마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빈 집에서 혼자 살아 보셨어요?”
며칠 전 출근 준비를 하며 틀어놓았던 TV에서 또 부모 없이 빈 집을 지키던 자매가 화마에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를 봤다. 비슷한 뉴스를 본 지 채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며 몇 년 전 내게 빈 집에서 혼자 살아봤느냐고 묻던,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를 입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파마머리로 햇빛을 못 봐 창백해진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쭈뼛쭈뼛 상담실로 들어왔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서른 초반의 그녀는 청소년기 이후 내내 혼자 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이른바 고립은둔 청년이었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적응을 못해 잘리기 일쑤였고 상담실에 내원할 당시에는 심한 우울과 언젠가부터 가지게 된 척추추간판탈출증 등 건강문제까지 겹치며 경제활동을 전혀 못 하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밤마다 돈 벌러 간다며 밥상 위에 엄마가 바가지에 부어놓고 간 쌀뻥튀기를 집어먹으며 TV를 보다 잠이 들곤 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의 찬모였던 엄마는 밤이 늦거나 아침이 되어야 휘청휘청 돌아와서는 한낮까지 코를 골며 잠을 자야만 했다. 엄마가 깨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동네 문구점 앞 오락기계 앞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거나 가끔은 엄마가 준 천 원짜리 지폐가 동전이 되어 다 없어질 때까지 오락을 하며 놀았다.
엄마의 일터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전히 혼자인 밤이 많았던 초등학교 4학년 가을쯤이었다고 했다. 라면을 끓이려는데 그날따라 가스렌지가 말을 잘 안 듣고 불이 잘 안 붙더란다. 불이 붙는지 보려고 가스 화구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가 머리카락과 입고 있던 셔츠에 불이 화르륵 붙으며 왼쪽 옆얼굴과 겨드랑이 쪽 피부를 데었다고 그녀는 무심히 말했다.
엄마는 다 큰 것이 조심성이 없다며 짜증을 냈고 병원에 두 번 다녀온 후에는 그냥 상처가 아물도록 기다렸다고, 그녀는 살기 퍽퍽했을 엄마가 그래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준 건 참 고마운 일이라고 일찍 세상을 뜬 엄마 얘기를 할 땐 흠뻑 젖은 목소리가 되고 눈이 빨갛게 붓도록 울었다.
아직도 우리는 돌봄에서 소외된 아이들, 아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내몰린 부모들을 외면하며 살아야 하나.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빈 집에서 혼자 살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그녀 앞에서 함께 눈시울만 붉힐 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담사로서의 무력감이 나를 짓누른다.
세상이 미래의 주인인 아이들을 지켜내는 걸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고서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상황이 해결되기는 어려울 거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은 두통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어른들 모두가 방법을 찾아 머리를 맞대고, 합의하고, 실천해 나가면 지킬 수 있지 않겠나, 꽃보다 더 귀한 어린 주인들을.
눈을 감고 가만히 두 손을 모은다.
/신현자 라온재심리상담연구소장·재활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