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의 ‘뽕’이나 ‘물레방아’ 소설을 우리는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배웠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다. 인간들의 도덕의식 무너지고, 성 윤리가 없어지는 현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1925년에 발표된 글이니 그 당시 사람들의 성 풍속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지금의 성 풍속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달라진 성 풍속도를 반영하는 수필 작품은 나온 게 있을까? 아직 중세 암흑시대의 문학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타 문학적 장르에 비해 수필의 영역에선 여러 가지 제약이 걸려 있어 파격적인 수필을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이에 오직 결혼에만 불을 밝힌 기집애들이 쓸 만한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새벽 도서관에 한 번도 간 적도 없고, 독서는 패션 잡지 뒤적이는 걸로 대신하고, 자기 계발은 성형외과 드나드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여자애들이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이게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20년 전 드라마 대사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그 많던 싱아(괜찮은 남자)는 누가 다 먹었단 말인가? 라면서 여자 주인공들이 치고받던 대화이다. 20년 전만 해도 여자들은 여전히 ‘내숭’을 떨어야 하고 ‘얌전한 척’해야 했고 어떻게 하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0년 후 연애의 낭만성과 고상함, 우아함은 이미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 선을 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적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완전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것이 지금 젊은이들의 현주소이다. 기존 연애에서 보여주는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롯이 남녀의 심리와 육체를 가지고 게임을 벌이면서 서로를 탐하고 충돌하는 심리적 정치학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마치 그 옛날 ‘사랑과 전쟁’이라는 불륜 프로그램보다 더 진보한 폭로물이 여기저기서 방송되고 있음은 이미 안방에서 그런 정도의 남녀 관계물이 용인되는 시점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낡은 도덕적 사고방식을 아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성에 대한 고정관념, 결혼 이데올로기에서의 순결 의식과 배타적 소유욕, 청교도적 성 의식을 일순간에 비웃는다. 70년 전 피임방법이 개발되면서 혼전 성관계가 자유로워지고 섹스와 출산을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므로 해서 여자들의 성에 대한 개념은 급속히 바뀌고 만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여성들만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디에도 ‘책임’이란 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롯이 쾌락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겪고 상상하는 사랑의 패턴이 완전히 뭉개지고 이런 고루하고 진부한 사랑은 신파적 사랑으로 치부되면서 케케묵은 사랑 레퍼토리만 쌓여 있는 내 머리에 혼란이 온다. 생각은 ‘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고 나가기엔 주위의 싸늘한 시선으로 인해 아직 상당히 춥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애들에게 어른으로서 해줄 말도 생각이 안 난다. 어지간해야 말이 통하지.
/노병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