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계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고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남동을 떠나던 날, 많은 언론에서는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법을 어겼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면 그만이지 왜 사과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회 고위층의 잘못은 매우 계획적인 데다 자기가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찬 경우가 많아서 사과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SNS에 올리니, 그들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 거라는 답글이 달렸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SNS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논지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종교학을 전공하고 스테디셀러를 많이 낸 문화 셀럽이다. 그 교수는 앞뒤 아무 맥락 없이 맹자의 사단의 마음을 소개하며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라고 강조하더니 뒤이어 역시 맹자의 ‘방벌 사상’도 소개했다. 방벌 사상이란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임금이 아니니 그를 죽이는 것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잘못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다 알 수 있었다. 두 게시글에는 ‘좋아요’가 수백 개 달렸다.
고전을 연구하는 많은 인문 지식인들은 현실 비판의 근거로 고전을 곧잘 인용한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고전에 조예가 있는 교양인들도 개인적인 공부를 넘어 고전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 때로는 어느 수강생의 말처럼, 고전을 현실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무력하고 공허한 점도 있다. SNS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임금답지 못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다.’, 이런 말은 지식인의 탁상공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될 때는 고전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상당히 우회적이어서 삶의 지침을 직접 제시해주거나 현실의 문제를 바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생각의 원천인 것은 틀림없다. 중국의 인문학자 양자오도 ‘시경을 읽다’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현대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인식이 얼마나 실천으로 이어질지는 각자 사정에 따라 다를 뿐이다.
‘대학’과 ‘중용’에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충서’가 표현을 바꾸어 거듭 나온다. 군주가 실천해야 할 최우선의 임무가 ‘충서’라는 뜻이다. 국민에게 총을 겨누면 안 되고 자연 재해나 사회적 재난을 당한 국민에게 진심 어린 보호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을 향한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충서’의 마음이 없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은 전도된 인식이다.
‘중용’의 다른 구절에서는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과 무왕의 통치 철학이 서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다’며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모두 정치인이다. 지도자에게 충서의 마음이 없을 때라도 바른 인식을 가진 시민 정치인이 많아지면 바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