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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탄, 파 드 되

등록일 2025-03-30 19:49 게재일 2025-03-3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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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은행나무의 관세음보살  고목.
여주 신륵사 은행나무의 관세음보살 고목.

봄이 더딘 발걸음을 옮기던 3월 초순의 주말, 경기도 여주에 바람 쐬러 다녀왔다. 논문 쓰고 새학기 강의노트 준비하는 동안 방학이 끝나버린 아쉬움을 개강 첫주의 나들이로 달래볼 심산이었다. 목덜미로 내려앉는 따스한 햇살이 꽤나 살갑게 굴었다. 그래서 코트를 벗고 가벼이 걸었다. 투명하기만 한 대기도 그 두께가 확실히 한겨울보다 얇아진 듯 보였다.

여주 산북면의 ‘수연목서’는 사진과 건축 전문 책방 겸 카페다. 문학, 철학, 미술 등 인문예술에 관한 책들도 사진집, 건축서적과 함께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수잔 손택이나 발터 벤야민의 두꺼운 벽돌책들, 전집이라고 해도 될 만한 한강 작가의 콜렉션을 그저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 속에 숭고한 빛의 탑이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2층 전시공간에 사진작가 필립 퍼킨스의 ‘노탄’전이 마련돼 있어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둔 채 전시장 문을 열었다. 사진에 문외한인 내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다. ‘노탄(notan)’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일본 미술양식으로 우리말 ‘농담(濃淡)’과 같은 개념이다. 1935년생인 필립 퍼킨스가 생애 마지막 사진 작업으로 이 노탄에 천착한 것은 기나긴 도정의 끝에서 비로소 한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 위에 쌓인 눈과 녹은 눈의 대비, 숲 그늘과 양지의 대립 혹은 공존, 낙엽을 한 데 모아 밀어놓음으로 생겨난 정원의 오솔길과 그림자의 퇴적, 달빛의 농(濃)과 담(淡) 등을 보는 사이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절반이 구름에 가렸다. 그 순간 벽면의 한 작품 설명문에 눈길이 멈췄다. 필립 퍼키스가 지향하는 노탄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었다.

“노탄은 음양의 원리처럼 주제와 배경 중 어느 것도 우세하지 않은 일본의 디자인 개념이다. 검은색이 흰색보다 중요하지 않고 흰색은 검은색보다 중요하지 않다. 교토에 있는 갈퀴 모양의 정원에 대해서도 생각했는데, 정원의 무언가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면 그 정원은 실패한 것이다. 발레를 볼 때, 특히 파 드 되에서, 두 무용수의 몸과 몸 사이의 모양은 각자의 몸 자체의 모양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화와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검은색과 흰색은 서로 중요하고 또 서로 중요하지 않다. 정원의 나무와 돌과 물통과 널브러진 빗자루와 웃자란 풀 중 홀로 돋보이는 것은 없다. 없어야 한다. 정원은 오직 정원이지 분수대나 꽃나무를 위한 배경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정원에는 빛과 어둠, 바람과 고요, 상승과 하강, 움직임과 멈춤, 삶과 죽음이 있고 그 모든 대비 사이엔 이름 붙일 수 없는 또 다른 국면들이 있다. 마침 겨울과 봄 사이의 이 계절을 나는 언젠가 ‘겨우봄’이라고 부른 적 있다.

‘파 드 되(pas de deux)’는 발레에서 여성과 남성 무용수가 함께 추는 춤이다. 두 무용수의 몸과 몸 사이의 모양은 각자의 몸 자체의 모양만큼 중요하다는 말은 얼마나 뭉클한가. 그러고 보니 몸과 몸의 사이를 들여다본 기억이 없다. 왼손과 오른손을 어찌 잘 맞대면 하트 모양의 작은 허공이 생기고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면서도 우리는 왜 사이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걸까. 세상엔 옳고 그름, 선과 악, 미와 추, 본질과 비본질, 남자와 여자, 냉정과 열정, 왼손과 오른손, 나와 너만 있지 않다. 이항대립은 단조로우면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불확실과 우연, 망설임과 은유, 모호한 고백과 불투명한 사랑, 이쪽이나 저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마음 들의 파 드 되는 공허나 허무가 아니다. 탄생과 죽음 두 사건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단 1초도 무의미하지 않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주 신륵사에 가니 아직 잎이 하나도 돋지 않은 풀과 나무의 침묵 덕분에 남한강 윤슬이 발밑까지 흘러오는 듯 금빛 밀물의 생생한 카페트를 일주문 안에 펼쳤다. 6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는데 커다란 두 목본경 사이에 관세음보살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두 굵은 나무줄기가 만드는 파 드 되의 빈곳에 썩은 고목이 보살이 되어 은행나무를 소원나무로 바꿔 놓았다.

구름과 새가 이따금 지나가는 나무 사이, 600년 동안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을 그 사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남한강 윤슬도 거기 이따금 반짝이길래 나는 강변으로 내려가 물과 빛이 만드는 노탄인지 파 드 되인지 물과 물 사이의 빛, 빛과 빛 사이의 물 앞에 섰다. 그런데 물과 빛에게는 사이가 없고 무엇이 물이고 빛인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흘러감과 밀려옴이 구별되지 않았다. 문득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가 어떻게인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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