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텅 빈 둥지를 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다시 연둣빛 잎을 피워 올리는 3월이다. 올해는 무척 바쁜 겨울의 끝자락을 보냈다. 내 둥지를 비워내기 위해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분주한 봄을 맞는다.
아이들과 함께 나도 거실에 앉아 짐을 쌌다. 한 가득 꺼내놓은 아이들의 흔적들이 어느새 집 안 구석구석에서 옅어졌다. 한 달 전 잘 다니던 직장을 부모와 동의 한 마디 없이 사직서를 내고 온 아들이 이직의 기회를 얻어 다시 타지로 가게 되었고,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된 딸도 독립을 하여 같은 날 남매가 둥지를 떠났다.
평생 맞벌이를 하며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며 바삐 움직였던 나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느긋하게 커피를 내렸다. 식탁에 마주 앉아 친구들 이야기며 진로 이야기며 깔깔대며 나누던 자리도, 현관문을 다다다다 쫓아가던 발소리도 사라졌는데 습관처럼 그 쪽을 바라보며 아이들의 대화에 맞장구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이 날을 꿈꾸었던 것 같다. 알람소리에 잠을 깨지 않아도 되고 아침마다 서둘러 밥상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날, 숙제를 챙기고 학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느라 허둥대지 않아도 되는 날.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며 언젠가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조용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막상 그 시간이 오고 보니 익숙했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깊은 고요로 가득 찼다. 텅 빈 방엔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을 것 같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시간 맞춰 들릴 것만 같다. 매일매일 움직이며 아이들을 챙기던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묶어두고 있었던 줄 몰랐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이 시간이 어쩐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침묵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둥지가 빈다는 것은 새들이 이제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임을. 그토록 바라고 응원했던 순간이 아닌가. 어미새가 언제까지나 둥지에 머물며 새끼를 품을 수는 없다.
충분히 그 시간을 준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미흡한 어미새를 본다. 날아오를 준비를 시킨다고 했지만 정작 떠나보낼 준비는 내게 부족했나 보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날개짓을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아직도 둥지 근처를 맴돌고 있는 듯 하다.
시간이 지나면 어미새도 알려나. 둥지는 언제까지나 새를 붙잡아두는 곳이 아니라 떠날 수 있도록 힘을 길러 주는 곳이라는 걸. 아이들이 각자의 하늘을 날고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더이상 외로운 어미새가 아니라 따뜻한 미소로 맞이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 있겠지.
아이들에게 쏟아부었던 시간과 에너지를 이제 나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오랫동안 미뤄뒀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젊은 시절 묵혀 두었던 외국어도 배우며 나를 설레게 하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둥지를 만들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빈 둥지는 텅 비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채워질 순간을 기다리며 그 사이 나 자신을 채우는 시간이다. 이제는 나도 나의 날개짓을 연습하려 한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미뤄 두었던 일들, 마음 한구석에만 담아두었던 소망들을 하나씩 펼쳐본 것이다. 천천히, 꾸준히, 아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듯 나도 내 몫을 살아가야 한다.
빈 둥지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또 다른 쉼표일 뿐이다.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를 기다리는 대신 나를 채우며 하루를 살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도 각자의 하늘을 더 넓게 날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