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성실과 농담

등록일 2025-03-09 19:37 게재일 2025-03-10 18면
스크랩버튼
유영희 작가
유영희 작가

몇 년 전 작고한 고려대 황현산 교수가 ‘푸른 양’의 해를 맞아 쓴 에세이 ‘변화 없다면 푸른 양이 무슨 소용인가’를 읽었다. 이 에세이에서 황현산은, 양이 푸를 수는 없으니 ‘푸른’이라는 수식어는 농담이라고 하면서도 새로운 농담은 변화를 위한 상상력이므로 푸른 양의 해에 변화를 꼭 이루자고 다짐하고 있다. 새로운 농담은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기적을 일으킨다는 대목에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에세이에 눈길이 간 것은 올해가 마침 푸른 뱀의 해이기 때문이다. 10간은 다섯 가지 색으로 분류되고 각각의 색은 2년씩 계속되어 작년에는 푸른 용이었던 데다 새해가 시작한 지 두어 달이 지난 터라 새삼스럽다고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푸른 양은 존재하지 않아도 푸른 뱀은 세상에 실재하니, ‘푸른 뱀’을 들먹이는 것은 의미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푸른 뱀과 육십갑자의 푸른 뱀은 같은 것이 아니고, ‘푸른’이 가지고 있는 변화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는 푸른 양보다 허물을 벗는 푸른 뱀이 ‘푸른’의 이미지에 더 적절하다.

최근 2, 3년 간 우리 사회 중요 지표는 연속 하락하고 있다. 민생과 직결된 경제 지표를 보면 특수한 상황 세 번을 제외하고 1961년 이래 우리 경제 성장률은 세계 경제성장률보다 항상 높았다. 그러나 2023년에는 우리가 1.4% 성장하고 세계는 2.8% 성장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2024년에는 조금 올라 2% 성장했지만 세계 경제는 3% 이상 성장했으리라고 하니 나아진 것은 아니다. 2024년 폐업한 자영업자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소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사는 곳은 지난 30년간 상가 공실이 전혀 없었는데 작년부터 새 주인을 찾지 못해 셔터문이 내려진 상가가 여럿 보인다.

정치는 더 심각하다. 3월 3일 한국기자협회 신문에 의하면, 지난 2월 27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4’(Democracy index 2024)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총점 순위가 작년보다 10단계 하락하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 지표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지금은 황현산이 저 에세이를 썼던 2015년보다 더 절실하게 새로운 농담이 필요한 때다. 마침 코미디언 이경규가 최근 발간한 책 제목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다. 그가 45년 동안 활동하는 비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발맞추어 시청자를 위해 새로운 농담을 꾸준히 계발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덕목으로 성실을 꼽는 인터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폭력배와 손잡는 정치인들, 부자만을 위한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더 이상 새로운 농담을 기대하기 어렵다. 푸른 뱀처럼 우리 사회가 성장과 변화를 이루려렴 지도층의 성실이 필수다.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다.

유영희의 마주침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