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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손길이 빚어낸 예술작품이 전하는 ‘위로의 선율’

등록일 2025-03-05 19:49 게재일 2025-03-0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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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 향나무 노거수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 오래된 나무는 수백 년을 살아오며 그 자리에서 세월을 견디고, 바람을 맞고, 비를 머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어왔다. 그런 나무를 직접 찾아가 손으로 쓰다듬고, 나무와 마주하여 숨을 고르는 일은 단순한 여가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순간이며,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사돈지간인 월성 손씨·여강 이씨 가문

500여 년 넘게 협동하며 가꿔온 마을

조선 양반마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와

서백당 주인 손소가 심은 수령 600살

키 15m·몸 둘레 3.6m·수관 폭 14.7.로

전통종택 지킨 민속문화적 가치 볼때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라도 손색 없어

오늘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화려한 공연이나 값비싼 여행이 곧 여가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정한 여가는 꼭 돈을 들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노거수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숲속 자연에서 느끼는 감동의 물결은 비싼 티켓이나 화려한 무대 없이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나무는 마치 삶의 스승처럼 우리를 맞이한다. ‘너의 어려움과 슬픔도 인내하면 곧 지나가리라’고 하는 듯한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깊이 있는 내면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연이 주는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속도와 성취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눈에 보이는 성공이 우선시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느린 것의 아름다움,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위로를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인생의 전반부는 본문을 쓰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그것을 되새기며 주석을 다는 과정이다. 노거수와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인생의 주석을 달아가며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노거수는 시간을 품은 존재이며, 인간이 쌓아온 문화와 감정을 품고 있는 하나의 역사다.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여가를 즐길 수 있다. 값비싼 티켓을 손에 쥐지 않아도, 여행의 흔적을 인스타그램에 남기지 않아도, 노거수와 함께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진정한 여가는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길에서 우리는 자연의 품 안에서 한걸음 멈추어 서고, 바람과 대화하며,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펀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여가 활동을 소셜 미디어에 남기며 자신을 표현한다. 이제 여가 활동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명품 노거수와 숲을 탐방하면서 보고 느낀 감정을 글로 표현하여 신문에 연재하는 것 또한 일종의 여가 활동을 소셜 미디어에 남기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주는 신라문화의 본고장으로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문화재로 가득 찬 볼거리의 고장이다. 그래서 경주시는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이고 노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도 경주에는 살아있는 문화재인 많은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주 양동마을은 고택마다 집의 품격을 높여주고 집 지킴이로 향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등 노거수가 살고 있다.

특히 서백당 향나무 노거수는 그 오래됨과 아름다움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봄볕을 머리에 이고 오르막 내리막 마을 길을 걷다 보니 또 다른 관광객들을 만나 그들과 합류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은 내의를 적시었다. 삼삼오오 양산을 받쳐 들고 햇볕을 가렸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따뜻한 햇볕이 오늘따라 외면당하고 있으니 이 무슨 변고일까.

나이 드신 문화 해설가는 종갓집 고택으로 안내하여 조선시대 양반 집 구조와 살림살이, 생활의 애환 등을 재미나게 설명해 주었다. 입담 좋은 문화 해설가의 설명에 웃으면서 전통 마을의 고택을 둘러보는 재미는 또한 짭짤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 가문과 여강 이씨 가문이 정착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살아온 유서 깊은 조선시대의 양반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마을은 500여 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전통의 향기를 품은 채 150여 호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은 한옥, 서당, 정자, 영당 등 20여 채나 되었다. 두 가문은 사돈지간으로 협력과 보이지 않는 가문의 경쟁으로 조선시대 문신과 성리학자 등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였다고 했다. 역시 발전을 위해서는 선의의 경쟁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 위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 서백당 고택에 들어섰다. 고택 건축물의 아름다움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향나무 노거수였다.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고택은 그 옛날의 건물을 위한 담벼락이 아니었다. 바로 향나무를 품고 보호하는 담벼락으로 변신했다. 향나무로 다가가기보다 먼저 그 웅대한 자태에 놀라 한참을 톺아보다 카메라 렌즈에 고상한 품위를 담았다. 평지에 축담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처럼 축담 위에 앉아 있는 향나무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부터 향나무를 배려한 식재가 놀라웠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고즈넉한 뜰 한가운데, 수백 년을 살아온 향나무의 웅장한 자태는 성인의 모습을 연상했다. 굵고 뒤틀린 줄기마다 세월이 새겨져 있고, 마치 세상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온 듯한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백당의 주인인 손소(孫昭)가 심은 향나무는 나이 600살, 키 15m, 몸 둘레 3.6m, 수관 폭 14.7m로 민속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따스한 햇살이 나무의 거친 결을 따라 부드럽게 스치며 반짝인다. 비틀리고 꼬인 줄기는 마치 세월의 손길이 빚어낸 예술 작품처럼 신비롭고도 장엄하다. 짙푸른 가지들은 하늘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가고,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초록빛 물결을 만들어낸다.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향기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방문객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 나무를 바라본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맞이한 나무는, 마치 묵묵한 현자처럼 아무 말 없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치 세월을 지나온 나무가 전하는 오래된 이야기, 자연이 들려주는 위로의 선율 같다.

서백당 향나무 노거수는 그 오래됨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서백당 향나무 노거수는 그 오래됨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서백당(書百堂)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다. 경주손씨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때인 1459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손소는 청송부의 속현인 안덕현(安德縣)에서 태어나, 25세인 1457년에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양동마을에 정착하였다.

서백당 편액이 보이는 사랑채는 손소의 아들 문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손소 선생은 세조 5년(1459)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주부·병조좌랑을 역임했으며, ‘이시애의 난’ 때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안동부사·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양동마을 자택에서 별세했는데 조정에서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 ~1503) 선생을 치전관(致奠官)으로 양동마을 손소 빈소에 보내 조문하게 하였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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