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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상처

등록일 2025-03-03 18:39 게재일 2025-03-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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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불식간에 생기는 몸의 상처만큼 마음도…. /챗gpt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몸의 상처만큼 마음도…. /챗gpt

외출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무릎에 새끼손톱만 한 핏자국이 굳어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다쳤는지 모른다. 어떤 날에는 손등에, 또 어떤 날에는 정강이에, 심지어는 뺨이나 콧등에도 원인미상의 상처가 생겨 있다. 살갗이 까지거나 패인 자국, 무언가에 할퀸 자국, 어디 찧었는지 멍 자국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때마다 ‘칠칠치 못하게 쯧쯧, 조심 좀 하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한다. 마치 자동차에 난 미세한 흠집처럼, 어쩌다 다쳤는지 모르는 작은 상처들도 하나 둘 자꾸 많아지니 신경이 쓰인다. 목욕탕에서 내 몸을 보며 골똘해졌다. 격투기 선수도 아니고 유격훈련 받는 군인도 아닌데 무슨 상처들이 이렇게 많을까. 문득 내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 미안함은 ‘차분하게 행동하자, 모서리를 조심하자, 자다가 함부로 몸을 긁지 말자’ 정도의 반성과 다짐이 됐지만 그때뿐이다. 집에 와 보니 양말 발뒤꿈치에 검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몸의 상처만큼 마음도 어쩌다 다친 줄 모르면서 벌써 패이고 깎이고 베인 곳들이 있다. 마음의 잔상처들은 어디서 오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찧거나 할퀴는 것처럼 마음도 무엇엔가 접촉하고 충돌했기에 다쳤을 텐데. 하루에도 여러 사람들과 관계하며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문자든 말이든 우리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다. 그러는 사이 칼이 칼인 줄 모르고, 가시가 가시인 줄 모르면서 다치거나 다치게 하는 일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밖에 나가 누구와 다툰 것도 아니고 혼난 것도 아니고 손가락질 받거나 모욕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극히 보통의 일상을 보냈을 뿐인데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날이 있다. 어느 순간에 어떤 지점에서 상처 받았는지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러려니 한다. 따져들면 서로 피곤해지기만 하고, 쓰라리긴 해도 심각한 건 아니니까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이런 일에 일일이 스트레스 받으면 험한 세상 못 산다고, 그러니 무던해지자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스스로에게 당부하면서.

하지만 무딘 사람이 되는 건 무서운 일이다. 상처가 아예 굳어져서 더는 상처 받지 않는 바위를 보면 굳고 정한 기상이 느껴지는 대신 안쓰럽기만 하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위의 패이고 벌어진 상처에 손을 넣고 암벽을 오른다. 상처는 손을 부른다. 상처로 모여드는 손들이라고 다 치료하는 손은 아니다. 익숙하니까, 편하니까, 나한테 필요하니까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고 손을 넣는다. 내가 매달려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나로 인해 바위처럼 패인 자국을 많이 지녔을 것이다. 바위를 안쓰러워 할 시간에 사람부터 챙기자.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안 그러는데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은 늘 그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일단 ‘아니야’라고 부정하는 버릇이 있다. 수년 째 같이 운동하는 사회인야구팀에서 선발투수인 나는 외야수가 실책을 하면 허리에 손을 얹고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노려보곤 한다. ‘설마 그런 사소한 걸로 상처 받겠어?’ 싶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죽을 것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린 게 패혈증이 되어 합병증을 앓다 죽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신기섭, ‘나무도마’)을 생각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나의 바위, 나의 나무도마인 엄마가 이제야 어른거린다. 짜증, 투정, 핀잔, 탓… 얼마나 오랜 세월 엄마는 자식의 감정 하치장이 되었나. 이제는 안 그럴 나이가 됐는데도 엄마 앞에선 여전히 ‘금쪽이’다. 엄마의 마음이야말로 시인이 말한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이 아닐까.

내 상처가 대수롭지 않으니 타인의 상처도 가볍게 여겼을까. 차를 범퍼카처럼 막 굴리면서 이 정도 스크래치쯤이야 하는 사람처럼, 접촉사고를 내고서도 다 나 같은 줄 알고 뭘 이런 걸로 보험을 부르냐며 적반하장이었을까. 이제 나는 내 상처를 똑바로 보려 한다. 어쩌다 다쳤는지,

누가 아프게 했는지 찾아내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아무리 작은 흠집이라도 내 상처를 심각하게 여겨야 타인의 상처에 대해서도 진지해진다. 안 다치는 법을 알아야 안 다치게 할 수 있다. 내 상처를 잘 관리해야 타인의 상처에도 새살을 돋게 할 수 있다고, 나는 지금 까진 무릎에 바를 연고를 찾아 서랍을 뒤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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